선교 소식

마지막사명은 유튜브 선교를 통해 여러 영혼들을 이메일과 문자 그리고 전화로 만나고 있습니다. 또 여러 신자들이 앤드류 강 목사님을 직접 찾아와 그들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하고 조금은 버거움을 느끼던 터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말씀을 즐겨들으시는 여러분들의 후원과 성원을 통해 홍해가 갈라지는 듯한 기적이 우리 사역에도 이루어졌습니다. 

마지막 사명 유튜브는 몇 명이 일하고 있나요?

처음에 저희가 시작할 때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사명의 말씀을 좋아해 줄 것이라는 상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목사님은 이름 없는 설교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점점 많은 사람들이 구독하기 시작하고, 관심과 필요를 나타내면서 인력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여러 지역의 구독자들이 저희을 후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앤드류 강 목사님의 지도하에  영상디자이너, 잡지 편집자, 또 인터넷 소통의 창 블로거와 전화받는 분, 싸이트를 관리하는 분등… 목사님을 포함한 9명의 직원들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여러 부분에서 미약하고, 실수가 있고 더디게 일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일을 통해 심령의 갈급함을 느끼는 분들의 필요를 채우고자 하는 저희의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사명은 어떤 비전을 가지고 일하나요?

교회 안에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자신의 마음과 생애를 다해서 좁은 길을 걷기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쪽에는 넓은 길을 걷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길이 너무 좁고 협착하다고 불평합니다. 좁은 길을 걷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듣기 원합니다. 때때로 마음이 아프고 받아들이기 힘겹지만, 성경 그대로 전하는 말씀을 찾습니다. 말씀이 희생과 헌신을 요구해도 그것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넓은 길을 걷는 사람들은 쉽고 편리한 구원을 원합니다. 그들은 양심에 가책을 주고 희생을 요구하는 말씀을 거절합니다. 마지막사명은 넓은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돌아오라!”는 호소를 하고, 좁은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전진하라!”라고 외치며 말씀의 기근의 시대에 영혼들을 소생시키는 단비의 역활을 하려 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저희 미션레터는, 독자 여러분께서 보내주시는 헌금으로 출간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보내주신 귀한 헌금은, 허물어져 가는 가정과 답답한 신앙생활 속에 갈급한 성도, 또 진리를 올바르게 세우기 원하는 성도들을 위해 편찬됩니다. 마지막사명은 미션레터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게 하기 위하여 고민하며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또한 저희는 앞으로 31권의 파워북 성경연구 책자와 많은 사람의 궁금증을 해갈해주는 영상으로 제작하려고 합니다.  이에 따른 자금과 기도의 후원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도드립니다.

이달의 말씀 : 하나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신앙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믿음

많은 사람들이 좁은 길은 “고통을 참고 견디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전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더 나가야 합니다. 어떤 신앙으로 나가야 할까요?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신앙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신앙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신앙을 가져야만 죄와 세상으로 돌아서서 하늘을 향해 힘차게 됩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롬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육신을 따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삶을 살면, 죄와 세상에 끌려다니지 않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나는 자꾸 죄에 끌려다니게 됩니까? 내 마음은 선을 행하고 싶은데 왜 자꾸 악을 행하게 됩니까?”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런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수준의 신앙으로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 이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고 싶어서 물불가라지 않는 신앙을 향해서 가야 합니다. 그런 성도들이 죄와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 히브리서는 신앙의 중요한 본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약 2:23)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친구라) 칭함을 받았나니

하나님께서 보잘것없는 인간, 아브라함을 왜 “나의 친구”로 삼으셨을까요?

이 질문은 정말 중요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구로 삼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약 2:21-23)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절. 이에 성경에 이른바 …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 사도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의 친구”라는 칭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아들을 제단에 바쳐야 한다는 말인가요?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방법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창 22:2)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가슴이 미어졌을 것입니다. 청천벽력이었을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불시험을 받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놀랍게도 그는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신앙을 갖고 있었길래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창 22:3-4) “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제삼 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 말씀에 이상한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동네 조용한 곳에 가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3일 길을 걸어가서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치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브라함이 삼일 길을 걸어가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요? 얼마나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되었을까요?

아마 아브라함 마음속에 이런 의문들이 계속해서 떠올랐을 것입니다.

“하나님, 자식을 죽여서 제단에 놓고 태우는 것은 가나안족이 우상에게 바치는 의식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떻게 그런 명령을 할 수 있습니까? 이삭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주신 자식인데, 이제 와서 그 아들을 죽이라는 것입니까? 도대체 제 아들을 번제로 바쳐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중 누구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3일 동안 금식하면서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혹시, 제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닌가요? 아들을 죽이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세요.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죽여서 그 내장을 꺼내서 토막을 내라는 것인데, 정말 그렇게 하길 원하십니까? 하나님, 제가 당하는 이 시련의 의미와 이유를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놓고 드리는 아브라함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아무런 대답도 없었습니다.

혹시,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어떤 메시지를 주실까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3일 길을 걸어서 모리아산에 가서 제단을 쌓고 이삭을 향해서 칼을 내리치는 순간까지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인간은 가장 큰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 왜 제 아들이 깊은 병에 걸려서 누워있어야 합니까? 왜 제 딸이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왜 제가 직장을 잃어버리고 장사가 망해야 합니까?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 제가 당하는 이 고통을 거두어 주세요. 아니면, 고통의 이유라도설명해주세요.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간절한, 피를 토하는듯한 기도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침묵하실지라도, 너무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도 침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서 이삭을 죽이라는 명령을 번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여야 하는 이유와 목적도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마음속에 수많은 질문과 의문이 있었지만, 고통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나의 친구라고 부르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견디기 힘든 고난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데,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면, 바로 그때가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런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보실까요?

아브라함을 보듯이 우리를 보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고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질문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그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이기까지 순종하는 믿음을 요구하셨을까요?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허락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으면, 우리의 삶 속에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올 때 하나님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허락하실 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주실 때 거기엔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정죄하기 원하실 때 의인에게 말할 수 없이 큰 고통과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시련 속에서 나타나는 성도의 믿음과 충성을 통해서 세상을 정죄하십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사상입니다.

/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했지만, 수백 년이 지나면서 세상은 다시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믿는 성도들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 중에 유치함과 부족함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믿음까지 성장시키기 원했습니다.

왜 원하셨을까요?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서 그 당시 세상을 뒤덮고 있던 우상숭배와 죄악을 정죄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통해서 무엇이 진짜 믿음인가를 보여주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크게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을 바치는 가능하다는 사실을 온 하늘과 사탄 앞에서 보여주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단에 바치는 행함이 있었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약 2:20-23)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친구라) 칭함을 받았나니”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세상은 죄와 배도로 뒤덮여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이 너무나 적습니다.

지금 이 시대야말로 증인이 필요합니다. 진짜 믿음을 보여줄 하나님의 친구들이 필요합니다.

/ 오늘날 교회 안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고, 순종할 필요도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연약한 인간이 죄를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 뿐입니다.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 하는 입을 막아야 합니다. 죄와 불순종에 대한 핑계를 막아야 합니다. 거짓 복음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오직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부르셔서 그 사람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을 주시고, 극심한 고통을 허락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그 의인이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온 교회와 세상 앞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죄를 이길 수 없다.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고, 그들을 정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매 시대마다 증인을 부르시는 이유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증인, 친구들을 찾고 계십니다.

혹시, 지금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 계십니까? 받아들이기 어려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때문에 깊은 고민 가운데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의 친구가 될 기회를 받은 것입니다. 이 세상을 정죄해줄 증인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신앙, 하나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믿음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조상들이 나오는데, 그들 모두 하나님께서 세상을 정죄하기 위해서 부르신 증인이고 친구들입니다.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 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분명하죠?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믿음을 통해서 세상을 정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어떻게 세상을 정죄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정죄하신 과정과 순서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의 의인, 노아를 부르셨습니다.

(창 6:9)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내 말을 믿지 않았지만, 노아, 너는 내 말을 믿었고 순종했다. 너는 의인이고 완전한 자이고, 나와 동행하는 친구이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부르신 다음 어떻게 하셨습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태초부터 그때까지 한 번도 하늘에서 비가 내린 적이 없는데, 홍수가 나서 온 세상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홍수를 대비해서 높은 산 위에 방주를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정말 감당할 수 없는 명령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고, 큰 고통은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노아의 마음에 의문이 없었을까요?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수많은 질문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전 재산을 팔아야 하고, 하던 일 다 중단하고 산에 가서 방주를 만들어야 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노아를 비웃고 조롱할 것입니다.

노아가 수없이 기도하고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노아가 어떻게 했습니까?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바쳐서 순종했습니다. 

세상은 노아를 120년 동안 조롱했지만,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신앙이고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믿음입니다.

오늘 제 설교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 우리 삶에서 누구나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침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큰 고통 속에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침묵하는 모습을 보신 적이 없습니까?

암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는데, 온 가족과 교회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모습을 보신 적이 없습니까?

그, 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신앙,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믿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을 주실까요? 왜 우리에게 지키기 어려운 계명을 주셨을까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내 속에 있는 이기심과 교만으로부터 구원받고,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하라. 이것을 하지 말라”는 말씀과 계명을 주지 않으면,우리는 죄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고, 자기기만에 빠져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계명은 사망으로 인도하고, 오직 믿음만이 생명으로 인도한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롬 7: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계명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말씀이지만, 그것을 거절하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 19:17) “예수께서 이르시되 …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예수께서도 계명과 생명을 연결시켜서 말하고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를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믿기만 하면 된다면, 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삭을 제단에 바쳤으며,왜 노아는 방주를 지었습니까?

노아도 아브라함도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으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빛과 말씀을 거절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이것이 진리니 이 길로 가라”고 말씀하시는데 거절하면 구원의 길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 성도 여러분, 주님을 따라 좁은 길을 갈 때 어떤 때는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이런 유혹과 느낌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쉽게 살고 싶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신앙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도 가족과 친구들에게 인정받는 신앙을 하고 싶다. 나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살고 싶다.”

그러나 저는 좁은 길 신앙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왜 포기하지 못했을까요? 왜냐하면 진리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꿈을 꾼 적도 없고, 계시를 본적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용히 침묵하면서 내가 무슨 결정을 하는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커서 빛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인생을 인도하시는 손길이 너무나 분명해서 좁은 길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진리의 예리함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만드신 창조주의 사랑이 나를 밀어서 피할 수 없었습니다.

내 느낌과 감정은 주님의 뜻을 거절하라고 했지만, 진리에 묶여 있는 내 양심은 나를 꼼짝할 수 없게 붙잡았습니다.

상주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저기서 기다리고 계신대 가던 길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은 환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붙잡혀서 사는 것입니다.

/ 오늘날 교회 안에 하나님의 원수가 있는데 그것은 번영 신학입니다. 수많은 교회에서 기복신앙을 전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원에 들어가서 몇 달, 몇 년을 하늘에서 복이 내리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도하러 기도원에 가는 것은 좋은데,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복신앙, 번영신학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재물의 복을 받아야 하고, 자녀가 성공해야 하고, 건강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주려고 하는 그 복을 놓치면 절대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려면, 금식기도를 통해서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저주를 끊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 신앙은 미신이고 우상숭배입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노아와 아브라함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가족과 재산을 잃어버렸습니다. 악창이 생겼습니다. 아내가 집을 나갔습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저주를 받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인이었고 하나님의 친구였고 증인이었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떠났고, 선지자의 자녀 중 어떤 이들은 하나님 대적하다가 멸망당했습니다. 의인의 자녀일지라도 항상 성공하고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었는데 갑자기 암이 생겼습니다. 주님을 열심히 따라다녔는데 인생이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정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우환이 겹쳐서 생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저는 이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와 목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을 신뢰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완전하신 성품을 믿습니다. 이 시련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을까요? 내가 어떻게 해야 고통을 허락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주께서 가르쳐만 주시면 저는 순종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요? 환하게 웃으실 것입니다.

온 우주와 천사들 앞에서 “이 사람은 나의 친구다. 나는 이 사람을 증인으로 삼아서 세상을 정죄하겠다”라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선언을 듣기 원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이제 주님을 기쁘게 하는 신앙, 주님의 친구가 되는 신앙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야 사탄의 기만과 죄를 물리치고 깨뜨릴 수 있습니다.

/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떠났습니다. 하란에 머물렀다가 가나안으로 내려올 때도 믿음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살았습니다. 한곳에 정착해서 좋은 집을 짓지 못했습니다. 천막을 치면서 옮겨 다니면서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백 세가 되서 이삭을 얻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이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벗이 되었을 때는 언제입니까? 3일 길을 걸어서 모리아 산에 갔을 때입니다. 외아들 이삭을 번제단에 뉘어놓고 칼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눕혔을 때 그냥 흉내만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진짜 죽이라고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여서 번제로 바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삭을 제단에 눕힌 다음, 아들의 목을 향해서 칼을 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멈추게 했습니다.

(창 22:12-13)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성도 여러분, 이 장면이 무엇을 표상합니까? 우리가 아는 대로 모리아산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기 위해서 쌓았던 제단은 솔로몬 성전의 번제단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양이 수풀에 걸려 있던 장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진 골고다 언덕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삭이 번제로 바쳐졌던 장소가 하나님 아들의 희생 제단이 된 것입니다. 거기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친구는 친구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외아들 독자를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고통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기 위해서 제단을 쌓고 칼을 들었을 때 그는 장차 인류를 살리기 위해서 아들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고통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기까지의 긴 여정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생 전체를 통해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믿음으로 가야 합니다. 중단하면 안 됩니다. 포기하면 안 됩니다. 쓰러지고 넘어지더라도 끝까지 가야 합니다.

어디까지 가야 할까요?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죽이신 하나님의 고통을 이해하는 지점까지 가야 합니다.

우리가 깊은 고통 속에 있을 때 옆에서 조용히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할 때까지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고통과 침묵을 이해하면, 하나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친구가 되면 하나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누가 예수님의 친구인지 분명히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친구가 될 때까지 붙잡아 주시고 인도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