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교회 예언과 흰옷 이야기

성경은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전쟁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살펴보면 그 핵심 이슈가 흰옷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흰옷을 입히려고 하는데, 사탄은 흰옷을 벗기려고 합니다. 어떤 때는 우리에게 더러운 옷을 입히고, 어떤 때는 우리를 발가벗겨서 수치스럽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짜 흰옷을 입혀서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사탄은 가짜 흰옷을 주면서 “이것을 입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미혹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전체 줄거리이며, 일곱 교회 예언의 요점입니다.

에덴동산과 흰옷

에덴동산에서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어도 된다”고 유혹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해도 영생할 수 있다고 유혹했던 것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사탄이 무엇을 한 것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입고 있었던 의의 옷을 벗기려고 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법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가 입고 있던 의의 옷을 벗기는 데 성공했습니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창 3:6, 7). 의의 옷이 벗겨지자 더 이상 낙원에 남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에덴동산 밖으로 내보셔야만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죄는 즉시로 자연계에 무서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가시나무와 독초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동물들이 서로 물고 뜯고 죽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연계의 변화를 보면서 정말 두렵고 슬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변화가 인간에게도 생겼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세포와 유전자가 노화되기 시작했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포가 노화되면서 또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아담과 하와의 본성에도 치명적인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육체의 본성으로부터 올라오는 정욕과 이기심의 충동을 느끼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인 저와 여러분도 악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마자 곧바로 해결책을 내놓으셨는데, 어떤 해결책을 내놓으셨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다시 의의 옷을 입을 수 있는 방법을 내놓으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 방법에 의해서 구원받게 됩니다. “내(하나님)가 너로(뱀, 사탄)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창 3:15).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탄과 여자가 서로 원수가 되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자가 누구인가요? 성경에서 “여자”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탄과 여자가 원수가 되겠다고 하신 말씀은 사탄과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 원수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한글성경에는 “원수”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에는 “enmity”로 표현되어 있는데 “enmity”라는 말은 “적개심”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속에 사탄에 대한 적개심을 넣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이 흰옷을 입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사람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악해졌습니다. 그런 본성으로는 사탄의 유혹과 시험에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본성을 가진 사람의 마음속에 사탄에 대한 적개심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거듭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거듭남을 통해서 사탄에 대한 적개심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육체의 강력한 요구를 뿌리칠 수 있게 됩니다. 사탄과 죄를 거절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사탄을 향한 적개심 때문에 놀라운 변화가 생기게 된다. 전에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 되고,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을 나도 미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적하지 않고 화목하기 때문에 사탄과 원수가 됩니다. 그러나 사탄에 대한 적개심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싫어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속에 적개심을 갖는 방법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면, 예수께서 죄와 세상에 대해서 가지셨던 적개심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의의 옷을 입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흰옷을 입은 성도는 세상을 미워하게 되고 악하고 더러운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사도 베드로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그러나 한 번 거듭남을 경험했던 사람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경험한 사람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사탄에 대한 적개심은 원래부터 내 속에 있던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될 때, 예수님의 마음에 있던 사탄에 대한 적개심이 내 안에 들어와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이 사라지게 되면 사탄에 대한 적개심도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의의 흰옷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육체의 본성이 내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에 끌려 다니는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구원을 잃어버리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흰옷을 빼앗는 사탄의 전략

흰옷을 빼앗은 사탄의 전략은 두가지입니다. 첫 번째 전략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불순종하게 해서 흰옷을 못입게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 전략에 기만당했던 것입니다. 두번째 전략은 가짜 흰옷을 만들어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짜를 입고 있으면서도 진짜를 입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 두 가지 기만을 상황에 따라서 혼합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미혹을 당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사탄은 율법주의라는 가짜 흰옷을 만들어서 미혹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속 마음은 세상과 돈을 사랑하면서도 겉모습과 행위로 율법을 지키면 그것이 자신들에게 흰옷이 될 줄 알았습니다. 마음속에는”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가득한데, 성소에 가서 양을 잡아 죽이면 그것이 자신들에게 흰옷이 될 줄 알았습니다. 율법주의라는 가짜 흰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사탄에게 완전히 미혹당했던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어도 영생할 수 있다고 속였습니다. 그런데 구약 시대에는 유대인들에게 마음이 변화되지 않아도 행위만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속였습니다. 사탄은 오늘날에도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사탄의 전략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아도 흰옷을 입을 수 있다고 속삭이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일곱 교회 예언과 기독교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곱 교회를 공격하는 니골라당

일곱 교회 예언은 흰옷에 대한 전쟁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흰옷을 입히려고 하는데, 사탄은 벗기려고 하는 전쟁이 일곱 교회 예언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일곱 교회 예언 속에 새겨져 있는 흰옷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공격한 니골라당의 행위

초대교회인 에베소 교회에는 니골라당의 행위가 들어왔습니다. 사탄이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교회 안에 들여보낸 것입니다. 왜 사탄이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교회 안에 들여보냈을까요? 에베소 교인들의 흰옷을 벗기기 위해서 입니다. 니골라당 교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니골라당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육체가 이끄는대로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탄이 니골라당 교리를 통해서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인가요? 성도들의 흰옷을 벗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니골라당 행위”라는 가짜 흰옷을 만들어서 입히려고 했던 것입니다. 니골라당은 육체의 요구에 끌려다니면서 죄를 품고 살아도 흰옷을 입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예수님) 이것을 미워하노라”(계 2:6). 에베소 교회 시대에는 12제자들과 사도들이 있었고, 그들로부터 직접 복음을 받은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골라당의 교묘한 가르침이 뿌리를 내릴 수 없었습니다.

버가모 교회와 니골라당의 교리

에베소 교회가 거절했던 니골라당의 가르침이 버가모 교회에서는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버가모 교회 시대에는 니골라당의 행위가 점점 더 발전해서 니골라당의 교리로 체계가 잡혔습니다. “네(버가모 교회)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5). 니골라당의 교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과 말씀에 묶여 살지 않아도 된다.”로 진화되었습니다. 사탄이 무엇을 하는 것인가요? 다시 성도들의 흰옷을 벗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흰옷을 입히고 좁은 길로 인도해서 구원하려고 하시는데, 사탄은 니골라당의 교리를 사용해서 흰옷을 벗기고 넓은 길로 몰아가려고 합니다.

버가모 시대에는 태양신을 섬기던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가 갑자기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놀라운 사건이 생겼습니다. 수많은 태양신 교도들이 로마 황제를 따라서 기독교회로 개종했습니다. 그러자 기독교회 안으로 돈과 명예와 권력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가난과 핍박에 지쳐서 은근히 세상을 그리워했던 사람들은 버가모 교회의 지도자들이 니골라당의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자 그것을 크게 환영했습니다. 왜냐하면 니골라당 교리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불순종과 죄에 대한 좋은 핑곗거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버가모 교회에서 니골라당 교리가 세워지자, 사탄은 교회를 마음대로 끌고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태양신의 교리가 버가모 교회 안으로 깊숙히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들이 바울상, 요한상, 마리아 상이란 이름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태양신을 섬기던 예배일이 기독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십계명을 보면, 분명히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니골라당의 교리가 세워지자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계명에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니골라당의 교리가 들어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계명과 성경 말씀의 권위가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니골라당의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진리의 길을 떠나 넓은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니골라당의 교리는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일곱 교회의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 시대부터 니골라당을 미워한다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니골라당 교리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이 권위를 잃어버리자 버가모 교회 교인들은 마음대로 살아가게 되었고 돈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부터 서머나 교회까지 300년 이상 동안 가난과 핍박 속에서도 충성하던 성도들의 신앙이 버가모 교회 시대에 들어오면서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흰옷을 잃어버린 두아디라 교회

중세기 두아디라 교회도 니골라당 교리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암흑시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나 서머나 교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교리들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방 종교처럼 행함과 고행과 의식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설교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중세기에 이런 설교가 천 년 이상 계속되었는데, 그런 설교와 가르침 때문에 흰옷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유럽에 있던 거의 모든 교회들 속에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도가 사라지게 되었고 큰 영적 기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가르침은 크게 훼손되었고, 성도들은 흰옷(그리스도의 의)을 입는 방법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핍박을 피해서 깊은 산과 계곡에서 광야 교회를 세웠던 소수의 성도들을 통해서 진리가 전수되어 내려왔습니다.

사데 교회가 더러운 옷을 입게 된 이유

16세기가 되면서 사데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중세기의 어둠을 깨뜨리기 위해서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키셨는데, 그 운동을 통해서 개신교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왜 종교개혁운동을 시작하셨을까요? 중세기에 잃어버린 흰옷 입는 가르침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틴 루터를 사데 교회에 보내셔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께서 사데 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칭찬하신 말씀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종교개혁자들이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기 때문에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들이 제 각기 교파와 교단을 만들면서 교단주의로 전락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사데 교회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더 밝은 빛 가운데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사데 교회는 “죽은 자”가 되었다는 예수님의 선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데 교회 시대에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 흰옷을 입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계 3:4, 5).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사데 교인들이 입고 있는 의의 옷이 더렵혀졌다고 하셨습니다. 흰옷을 입지 않고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경고와 책망이 이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사데 교회 시대에 시작된 개신교회의 문제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강조하다가 믿음의 열매인 순종에 대한 강조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의의 흰옷을 입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삶이 위선과 세속과 돈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물들여지게 된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고 참된 경건의 능력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데교인들은 반드시 더러운 옷을 깨끗하게 희게 빠는 성서적 방법을 깨달아야 합니다. 깨끗하고 흰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베소 교회를 공격했고 버가모 교회를 쓰러뜨렸던 니골라당 교리가 사데 교회를 미혹해서 쓰러뜨렸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데 교인들이 니골라당이 주는 가짜 흰옷을 입게 된 것입니다.

벌거벗은 라오디게아 교회

사데 교회가 해결하지 못한 흰옷에 대한 교리가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는 더욱 더 심각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데 교회는 옷을 더럽혔다고 하셨는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옷을 벗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계 3:17). 사데 교인들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으면서 흰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벌거벗고 있으면서 흰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가? 사탄이 가짜 흰옷을 입혀놓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어서 자신이 벌거벗고 있는 것도 모르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흰옷을 입으라고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계 3:18). 예수께서는 일곱 교회 예언에 나오는 모든 교회들처럼,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도 흰옷을 입는 성도들이 이기는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흰옷에 대한 문제는 짐승의 환난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에게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이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계 14:11, 12).

흰옷 문제는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아마겟돈 전쟁에서도 흰옷을 입는 자들이 승리자로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계 16:15, 16). 사도 요한이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의 승리자를 말하면서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다고 말한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구원받아서 하늘 도성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묘사하면서도 그들이 계명을 지켰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Blessed are they that do his commandments,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호소

에베소 교회부터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사탄의 공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니골라당의 교리를 이용해서 성도들의 흰옷을 벗기는 것입니다. 현대판 니골라당원들은 오늘도 이렇게 흰옷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 어떻게 그것을 지키느냐?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으면 누구나 구원받게 된다. 한번 주어진 구원이 불순종 때문에 없어질 수 없다. 인간의 순종을 강조하는 것은 율법주의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따라서 심판받게 된다는 것도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 2:10~12). 대한민국 국민이 국가의 법에 따라서 재판받는 것처럼, 천국 시민이 된 성도들도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심판받게 됩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애 속에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속적이고 얄팍한 복음이 현대 기독교회들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교회의 부패와 부도덕을 보면서 손가락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흰옷을 입지 못하고 벌거벗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조롱과 놀림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물론, 성경은 죄인의 형편을 절망적으로 말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합니다. “다 치우쳐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죄인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복음의 능력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통하여 예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면,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기 원하는 거룩한 성도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성도들이 반드시 해야 할 경험입니다. 교회에서 가르친다고 해서 다 복음이 아닙니다.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복음이 진짜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회복시키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생애를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니골라당의 교리가 받아들여지는 곳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흰옷이 벗겨지게 됩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말하는 “흰옷”과 “니골라당 교리”의 차이가 무엇인지 깨닫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흰옷 입는 방법에 대한 교리는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진리입니다. 사탄은 온 힘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교리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참된 거듭남을 통해서 세상을 미워하고, 자아를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며,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고, 어린 양이 인도하는대로 따라가는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옷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경험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에베소교회부터 라오디게아교회

<마지막 사명>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