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어떤 분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지식적으로는 아는데, 그것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용서받고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나요?” 그분의 말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모태 교인입니다.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다녔습니다. 교회의 장로입니다. 그런데 용서 받은 경험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용서 받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서 용솟음치는 감사와 감격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고민을 갖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좌절감을 갖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정말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은혜를 붙잡고 싶은데, 그래서 살아있는 신앙을 갖고 살고 싶은데 그것이 안 되니까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그런 고민을 갖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이번 기사는 그런 분들에게 복음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생기는 거의 모든 영적 문제는 자신이 사형수라는 사실을 잊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형수인데, 사형수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안다고 해도 그 사실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절실하게 와 닿지 않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멋진 옷을 입고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사형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사형은 인간이 내린 선고가 아닙니다.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내린 사형 선고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구에 사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사형 선고로부터 빠져 나갈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의 사형 선고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근수근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1:29~31).
오래전에 사형수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는 사형수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법정에서 판사가 죄인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사형 선고가 내려질 때, 죄인이 그것을 어떤 모습으로 받아들이는지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많은 경우, 너무나 두려워서 실신하거나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서 온 몸을 부들부들 떤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형을 받은 죄인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사형수인 우리가 아주 평화롭고 행복한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둘 중 하나입니다. 자신이 사형수인지 모르거나, 아니면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입니다.
성경은 사형수의 입장에서 읽어야만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사형수만 깨닫고 느낄 수 있는 말씀들이 가득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데, 이기적이고 교만하며 탐욕적입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자신이 사형수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형수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을 읽어도 간절한 마음으로 읽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형수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인이지만 사형수는 아니다” 라고 생각하면, 결코 하나님의 용서를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절실하게 다가올 수 없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는 오직 사형수에게만 구세주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경범죄를 범한 입장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용서는 경범죄를 해결해주는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5년이나 10년 형 받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용서가 5년이나 10년 형을 해결해 주는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면 용서 받은 감사와 감격도 그 정도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뜨거운 신앙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마음속으로부터 감사와 감격이라는 폭발적인 에너지가 터져나와야만 우리의 기도와 믿음이 대기권 밖으로 날라 올라갈텐데 시동만 키다가 주저앉게 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5년이나 10년 형을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감옥소에 들어가 시간만 보내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면이 필요없는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그 마음이 맹숭맹숭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마땅히 꿈뜰거리면서 일어나야 하는 감사함과 죄송함과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용서받았고 심지어는 거듭났다고 말하면서 영적인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육적 경험에 맞춰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사면받아서 가슴 속에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가 새겨진 그리스도인은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것도 다르고 설교를 해도 다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순종과 충성을 강조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촉구하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너무나 값싸게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젖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마치 장터에서 팔리는 물건처럼 교회 안에서 함부로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초대 기독교회의 경건과 충성이 현대 기독교회 안에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왜 나에게는 뜨거운 신앙이 생기지 않을까요? 왜 나의 믿음은 성장하지 않을까요? 왜 내 마음속에는 구원받은 기쁨과 감사가 없을까요? 왜 내 영혼 속에는 용서 받은 기쁨이 이렇게 적을까요?”라는 고민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뜨거운 신앙은 사형수가 하나님의 용서를 만날 때 시작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서 독생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다셨는데, 우리가 그 용서를 누리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 세상을 외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집 떠났다 돌아온 탕자처럼, 죄를 용서받고 아버지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존재하는 진짜 경험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깊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늘 죄책감을 갖고 하나님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심판이 두려워서 교회에 나가고, 지옥이 두려워서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동기에 큰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어지는 2부 기사에서는 사형수의 경험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 스스로가 사형수가 되어서 형장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형장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가 무엇이고, 구원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