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와 2부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탄이 지구를 공격해서 죄가 들어오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즉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할 계획을 발표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하나님께서 이 구속의 계획을 선포하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에는 두 무리가 존재해 왔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여자의 후손”과 사탄을 따르는 “뱀의 후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과 진리를 전파하고 보존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담과 하와에게 가르쳐 주셨던 참된 신앙과 진리가 믿음의 조상들에게 계속해서 이어져 갔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대로 아벨과 에녹을 거쳐서 노아에게 이어져 갔으며, 그것이 다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모세를 거쳐서 여자의 후손들에게 계속 이어져 내려갔습니다. 성경에서는 여자의 후손이 “남은 자”로도 표현됩니다(여자의 후손=남은 자). 이스라엘이 깊이 타락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에 남은 자를 갖고 계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사 1:9).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사 10:22). “너희가 하늘의 별같이 많았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라”(신 28:62). 성경에서 “남은 자”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크게 배도하고 세속적이 되었을 때, 끝까지 참된 신앙을 지키면서 진리에 충성하는 성도들을 뜻합니다.
성경과 초기 그리스도 교회사와 중세기의 역사를 살펴보면, 항상 성경 말씀과 계명에 충성하는 남은 자(여자의 후손)들이 이어져 내려왔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남은 자(여자의 후손)들이 항상 존재해 왔으며,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들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는 여자의 후손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지를 3번이나 반복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세가지 말씀은 마지막 시대에 어둠 속을 비추는 등대와 같은 말씀이 될 것입니다.
① “용(사탄)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사도 요한은 여자의 후손의 특징을 두 가지로 요약했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탄과 싸우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는 “여자의 남은 자손”의 특징은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하나님 말씀에 충성하며 사단과 원수가 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②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짐승의 환난 장면에서도 “여자의 후손”의 특징인 “계명을 지키고 사탄과 싸우는” 모습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옵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 12).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 성도들이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투쟁하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록 12장에 나왔던 여자의 후손이 짐승의 표 환난에서도 승리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이 말씀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성도들은 길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③ 성경의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 22장에도 “여자의 후손”이 하늘에 입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루마리를 빠는 자들은(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한글 성경>에는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여자의 후손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마지막 시대의 주인공은 여자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여자의 후손의 특징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물론, 계명을 지키는 것은 바리새인들처럼 구원을 얻기 위한 공로와 방법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주의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십자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께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에 충성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여자의 후손이 갖고 있는 계명을 지키는 신앙이란 어떤 것일까요? 타락한 본성을 갖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어지는 늑대 이야기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늑대의 고민
어느 날 한 농부가 산속을 걷다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 늑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끼 늑대를 집으로 데려와 잘 길렀습니다. 이듬 해 봄이 되었을 때, 농부는 어린 늑대를 양 우리 안에 풀어 주어서 자유롭게 풀밭을 뛰어놀도록 했습니다. 어린 늑대는 우리 안으로 들어가자 곧장 풀밭에서 풀을 뜯는 양떼들에게 달려갔습니다. 한 번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어린 늑대는 자기가 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양들을 보면서 “아, 나도 저렇게 생겼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풀밭에 이리저리 뒹굴고 풀을 함께 먹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풀을 뜯어 먹었지만 정말 맛이 없었습니다. 양들이 노는 것처럼 놀아보았지만 정말 재미없고 지루했습니다. 새끼 늑대는 단지 “양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생각 때문에 양들을 따라다녔습니다. 얼마 후에 늙은 양이 다가와서 “너는 누구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린 늑대는 “나는 양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늙은 양은 놀라면서 “네가 양이라고? 너는 양이 아니라 늑대란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늑대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어린 늑대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래서 늙은 양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원을 말했습니다. “나는 정말 양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늑대가 되기 싫습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여 양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새끼 늑대와 같은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늑대의 본성을 갖고 있는데 양이 되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양을 따라다니고 흉내내면서 살다보면 언젠가는 자신도 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열심히 노력하면 늑대가 양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주말에 교회가고, 헌금을 잘 드리고, 찬양대 활동을 열심히 하고, 고아원과 양로원을 자주 방문하면, 늑대가 양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새끼 늑대는 자신이 양이 아니라 늑대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양이 되기 위해서 더 처절한 노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양이 먹는 음식을 먹고, 양처럼 소리내고 양처럼 뛰려고 열심히 애를 쓰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늑대의 모습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발톱은 여전히 날카로워지고, 이빨은 점점 더 뾰족하게 자라났습니다. 양은 자신을 지켜주는 울타리를 보면 마음에 평화와 안전을 느끼는데, 새끼 늑대는 울타리를 볼 때마다 왠지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습니다. 울타리에 갖혀서 사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래서 늘 울타리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은 양이 되고 싶었지만, 육신의 본능에서 올라오는 늑대의 기질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인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고 싶지만, 육신의 본능에 끌려다니기 때문에 깊은 좌절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미워하고 싶지만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악을 거부하고 싶지만 악에게 끌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낙담하게 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 7:14, 15). 모태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도 참된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하면 늑대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유모차에 실려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어머니 등에 업혀서 주일마다 교회에 나갔어도 양이 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면 양처럼 보이는 늑대로 성장하게 됩니다. 수십 년 동안 교회에 다닌 그리스도인도 양의 흉내를 내는 일에만 능숙해질 수 있습니다. 양의 모습으로 찬송을 부르고 양의 목소리로 기도하고 양처럼 행동하는 기술을 오래동안 터득했지만, 마음은 언제나 돈과 세상을 사랑하고 울타리 밖의 세상을 향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있어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으로 느껴집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1, 12, 14). 죄를 버리고 돌아서는 회개, 자신의 온 생애를 주 앞에 드리는 헌신, 이런 영적 경험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랜 세월 동안 늑대의 본성을 숨긴 채 양의 흉내를 내다보면, 스스로 외식과 위선에 지쳐서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거운 억압과 굴레가 됩니다. 매 주말 교회 다니고 예배드리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늑대의 본성을 만족시켜주는 쾌락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방황하는 동안 신앙은 뜨뜻미지근하게 되고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양은 목자가 쳐놓은 가시나무 울타리 속에서 거하기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자신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양은 자신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계명을 결코 무겁거나 귀찮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도 요한의 이 말씀을 경험적으로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성경이 요구하는 원칙에 대해서 불평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직 늑대의 본성에 끌려다니면서 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늑대는 자신의 본성을 즐겁게 하는 쾌락과 재미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진리를 위해서 어떤 것을 포기하는 것을 굉장한 손해와 희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