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의롭게 된다는 것은 법률적인 용어입니다. 죄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바라보고 붙잡았을 때 죄인은 법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됩니다. 그런데 죄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는 선언을 들을 때는 법률로만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심령 속에서도 그 경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지게 될까요? 지금부터 이 중요한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했습니다(롬 3:24). 구원은 하나님께서 값없는 선물로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의롭다 하심, 값없이 주셨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구원을 아무런 이유 없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값없이”라는 말은 “이유 없이”란 말과 같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저희가 아무런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요 15:25). 예수께서 누군가에게 미워할 만한 이유를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치료하시고 도와주시며 먹여 주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이유 없이”라는 단어의 원어는 “값없이”라는 단어와 같은 원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실 만한 어떤 “이유”(공로)도 드린 적이 없는데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을 만한 어떤 행위나 공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셨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7~28).

 

기독교회를 제외한 모든 종교의 구원

거의 모든 종교는 오직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 그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신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는가? 어떤 인간이 신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가?” 아프리카 토속신앙, 남미 원주민들의 신앙, 미국 인디언들이 행하는 피의 정결 의식과 인도의 힌두교 그리고 아시아의 불교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종교는 인간이 신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인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자신을 의롭게 할 만한 증거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로와 선한 행위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종교는 어떻게 구원받을까요?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 세 가지 종교가 있는데, 그것은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기독교입니다. 만일 유대교인에게 “당신은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지키며 선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천국에 가게 됩니다.” 만약 이슬람교도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면 어떻게 답할까요? 이슬람교도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코란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고 성지순례를 빠뜨리지 않고 행해야 하며 하루에 3번 기도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참된 중생의 경험을 한 그리스도인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나는 죄 가운데 태어났고 죄 가운데 자라났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범했습니다. 나는 철저하게 불의하고 구원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존재입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심판받고 멸망당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는 구원받을 만한 증거가 있다”는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완전히 다른 점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인들은 천국에 갈 만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천국에 갈 것을 기대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가치를 증명했고 천국에 갈 만한 자격을 갖추었으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천국으로 보내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결코 천국에 갈 만한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 자신의 자격과 행함과 공로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분의 선함과 희생 때문에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교인과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인 중에서 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으며, 누가 인간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제 참된 종교가 어떤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구원은 우리 자신의 도덕과 선행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죄에 대한 설교가 필요한 이유

교인들이 “목사님, 왜 자꾸 죄에 대한 설교를 하십니까?”라고 항의한다면, 목사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설교를 합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적게 사함 받은 자는 하나님을 적게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용서받았는지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교인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정확하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복음이 그들에게 복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의 죄를 지적해서 알려 주는 목회자야말로 양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목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과 설교를 하면 인기와 평판을 잃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부자, 빌 게이츠에게 아침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면 전혀 감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아침밥을 무료로 먹고도 자비를 베푸는 사람의 손에 입맞추거나 무릎 꿇고 감사를 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굶주린 아프리카의 아이에게 밥 한 그릇을 주면 그 아이는 무릎을 꿇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의 손에 키스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그 아이는 배고품의 고통과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었는데, 한 그릇의 밥이 그 아이가 갖고 있는 절실한 필요를 채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만이 구원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 형식적인 믿음 그리고 자기 사랑과 자기 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한 영광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구원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만이 바울이 기록한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성도 여러분, 지금 기독교회는 바울의 말씀을 싸구려 복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영혼들이 멸망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

어떤 아버지가 외아들을 잃어버리고 슬픔에 잠겨 있는데, 사람들이 그 아버지 앞에서 “예~ 당신의 외아들이 죽었군요!” 라고 하면서 흥에 겨워 손뼉을 치고 무릎을 친다면 그런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정신병자 취급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마땅히 머리를 숙히고 떨리는 입술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어떻게 유행가에 복음 가사를 얹혀서 드럼 치고 조명을 흔들어 대면서 탬버린과 헤드 뱅잉으로 피로 물든 십자가를 찬양할 수 있습니까? 어떤 마음,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일까요? 정말 알 수 없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참혹하게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 내주신 것입니다! 그 엄청난 사건을 우리가 어떤 마음과 태도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말하고 찬양할 때 우리의 목은 메어져야 하고 눈물이 고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 말할 때 잠시 멈춰서 그분의 사랑과 희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번은 히스토리 채널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다루었습니다. 많은 시청자들이 전쟁 영상을 재미있게 시청했지만, 그 전쟁에 실제로 참전했던 군인들은 침묵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습니다. 왜냐하면 총알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전우와 친구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죽음 때문에 자신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될까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너무나 쉽게 생각합니다. 너무나 쉽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피로 물든 은혜를 무료로 나눠 주는 홍보용 물건처럼 취급합니다. 현대 기독교회는 몸을 흔들고 드럼을 치고 탬버린을 두드리면서 “예~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네!’를 외칩니다. 무릎을 치고 흥에 겨워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찬양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나오는 정상적인 반응일까요?

몇 해 전에 미국 남침례교회 목회자가 현대 기독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생애를 묵상하고 찬양할 때 어떻게 아무런 생각 없이 세상 가수와 연주자의 흉내를 낼 수 있습니까? 어떻게 몸을 흔들고 베이스 기타를 치면서 한쪽 다리를 떨 수 있습니까? 입으로는 ‘나는 십자가를 찬양합니다.’라고 외치지만, 그들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성도들이시여, 하나님의 아들이 여러분을 위해서 죽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차라리 자신이 죽으면 죽었지 자식을 내어줄 수는 없습니다. 자식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심정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 아버지가 독생자 예수를 죽음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 하늘 아버지의 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세속적이고 진부하며 틀에 박힌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생각 없이 세상을 흉내 내면서 그리스도를 찬양할 수 없습니다.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설교하거나 찬양할 때 세상을 흉내 내고 판에 박힌 태도와 일상적인 표정으로 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감동과 메세지를 전달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감격하지 않는 십자가를 누구에게 전할 수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돌아가셨습니다! 왜 돌아가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신 유일한 이유는, 우리의 오물 같은 죄를 씻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시커멓고 더럽고 냄새나는 죄를 씻어 내기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오직 그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나무에 매달려 피를 흘리면서 죽도록 내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그분을 죽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굴복한 어떤 그리스도인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실까요? 십자가를 보십시오. 우리가 범한 죄가 얼마나 악하고 더러울까요? 십자가를 보십시오. 십자가가 모든 것을 말해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목회자가 복음과 구원에 대해서 설교했는데, 한 청년이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예수만 있으면 됩니다.” 그 청년의 말에 목회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청년이여, 예수께서 우리의 믿음과 신앙과 구원의 전부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아기로 태어나셨고 먼지나는 유대 땅을 걸어다녔으며 인간 제사장에게 무시당했고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제단 위에 태우셨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드렸습니까?” 그 청년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없이 돌아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기독교 신앙 안에 있거나 밖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거나 밖에 있는 것입니다. 사망에 속해 있거나 생명에 속해 있습니다. 육체에 속해 있거나 성령에 속해 있으며, 정죄를 받고 있거나 자유 속에 있습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여, 나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절규하면서 그리스도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은 순종, 그리스도와 분리된 선한 행위는 결코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를 열정적으로 선포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독생자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라는 표현으로 복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99.99%가 그리스도이고 0.01%가 “나”라면 그 사람은 멸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온 마음과 생애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고 천국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은혜 아래 거하는 성도들의 마음과 생애 속에는 거룩한 열매들이 맺히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의 경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성도의 경험을 설명하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14~22)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부터 6장까지 믿음과 행함의 관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문제를 설명한 후에 결론으로 남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심”과 “용서”와 “믿음”을 어떻게 설명한다고 할지라도 사도 바울의 결론과 상충되거나 어긋나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예수믿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죄를 범해도 정죄받지 않으며, 세속과 돈을 사랑해도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거듭난 경험을 하면 그 이후에 범하는 죄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대신 받고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어떤 형벌을 받았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죄를 몸서리치면서 버리게 될 것이며, 마음과 생애 속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 7:1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