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16세기 초~18세기 말엽. 종교개혁과 분열되는 개신교회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자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517년, 마틴 루터가 카톨릭교회를 향해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함으로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되는데, 그때가 사데 교회의 시작입니다. 1798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서 나폴레옹 혁명군에 의해서 교황 피우스 6세가 체포되어 파리의 감옥에서 옥사함으로 중세기 로마 카톨릭교회의 천 년의 권세가 무너지게 되는데, 그때가 사데 교회의 끝입니다.
사데 교회 시대동안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성서적 믿음이 회복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종교개혁자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게 되었고, 그들의 후예들은 제각기 교파를 만들어서 현실에 안주하였으며, 종교개혁 운동은 교파와 교단에 의해서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피로써 시작한 종교개혁 운동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사데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름의 의미
“사데”라는 이름은 “남아있는 것들, 새로운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 년이라는 길고 긴 배도와 핍박의 세월을 지나면서 기독교회는 성서적 신앙을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자, 중세기 종교암흑기 동안 광야에 피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았던 성도들의 정신을 계승한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고, 개신교회 시대가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책망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계 3:1,2)
사데 교회는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이 터를 닦아 놓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께서 사데 교회에게 칭찬하시는 말씀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마틴 루터나 요한 칼빈 같은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이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기 때문에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들이 제 각기 교파와 교단을 만들면서 종교개혁 운동이 교단주의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사데 교회가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지난 5호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중세기 기독교회는 태양신교 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복음과 계명을 변질시켰고, 그 결과 깊은 영적 어둠에 빠졌습니다. 몇 년이 아니라, 몇십 년이 아니라 천 년 이상 동안 어둠의 길을 걸었습니다. 복음과 구원에 대한 말씀이 거의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키셔서 제자들과 사도들이 가르쳤던 원래의 복음과 가르침을 회복해 나가길 원하셨는데, 종교개혁의 후예인 개신교회가 그 일을 중단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백 년도 안되어 개신교회는 “오직 성경” 말씀만 순종하며 살겠다는 의지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형식주의와 교단 사이의 이단 논쟁에 빠지게 되면서 생명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몇몇 가르침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졌지만, 중세기 로마 카톨릭교회가 세워 놓은 잘못된 교리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개혁은 중단되었고 더 밝은 빛 가운데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으며, 사데 교회에게 주어진 하늘의 부르심과 기대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사데 교회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지 못하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이해해야 할 것이 있는데, 마틴 루터와 같은 개혁자들은 개혁을 시작한 것이지, 중세기에 무너졌던 복음과 계명을 모두 회복시키고 완성시킨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계 3:2). 전 유럽을 통하여 마틴 루터, 요한 칼빈, 파렐, 벌퀸과 같은 개혁자들이 일어나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인간에게 구원을 가지고 오는 것은 로마 카톨릭교회가 가르치는 것처럼 고행과 의식과 행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행함과 예식과 고행을 강조하는 카톨릭교회와 신학적 투쟁을 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복음을 설명할 때, 믿음을 특별히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믿음의 중요성을 밝혀낸 것이야말로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이룩한 가장 큰 공적입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그들이 믿음과 순종의 조화를 분명하게 밝혀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기독교회에 “믿기만 하면 죄를 붙잡고 살아도 괜찮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 돈과 세상을 사랑하면서 넓을 길을 걸어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라는 식의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데 교회를 책망하신 이유는, 사데 교회(개신교회)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더 밝은 빛 가운데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의 후예들은 루터교회를 세웠고, 칼빈의 후예들은 장로교회를 세웠습니다. 저마다 교파를 만들어서 그 자리에 안주하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종교개혁의 정신은 사라졌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교단이라는 높은 장벽에 막혀서 고립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각 교파마다 진리를 조금씩 나누어 갖고 있는데, 장로교인들은 감리교회가 갖고 있는 진리를 배울 수 없게 되었고, 감리교인들은 장로교회나 다른 교파가 가지고 있는 진리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중세기 천 년 동안 훼손된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한 빛으로 회복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진리가 사람들이 만든 벽에 막혀서 나누어지지 않는 상황을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말씀에 대한 지식의 열쇠)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눅 11:52). 말씀에 대한 지식이 백성들에게 나누어지는 것을 막았던 유대교회 지도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책망하셨던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호소
“그러므로 네(사데 교회)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3)
이 말씀은 종교개혁 운동의 선구자들이 어떤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구원의 도를 회복하려고 했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에게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책망하셨던 예수께서 사데 교회에게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난 때를 기억하고 회개하라고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인 개신교회가 정신차리지 않으면 예수께서 도적같이 임해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사데 교인들이 더러운 옷을 입은 이유
“그러나 사데(개신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a few,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예수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예수께서는 사데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옷을 더럽혔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단지 “몇 명만” 더럽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책망과 함께 예수께서는 옷을 더럽히지 않은 성도들은 장차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흰옷을 입고 다닐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물론,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흰옷을 입고 다니려면, 먼저 이 땅에서 흰옷을 입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장면에서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사데 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옷을 더럽혀서 “흰옷”을 입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흰옷”에 대한 교리가 크게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경에서 흰옷을 입는 경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흰옷이란?
* 첫째는 성도의 의로움입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깨끗하고 흰 세마포(linen, 옷)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로다 하더라”(계 19:8, 킹제임스 영어성경역)
이 말씀에서 우리는 흰옷이 성도들의 의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데 교인들이 흰옷을 입지 못했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생애 속에 의의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하며 그분께 기도드리고 예배드릴지라도, 그 마음과 삶 속에 의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는데 그것은 흰옷(그리스도의 의)을 입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흰옷이 갖고 있는 두 번째 의미는 계명을 지키는 신앙입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한글 성경에는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라고 했지만, 킹제임스 성경에는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루마기 옷을 빠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것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러운 옷을 희게 만드는 방법
사데 교회 교인들이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어떻게 해야 희게 만들 수 있을까요? 성경은 어린양 예수의 피에 씻으라고 말합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이 말씀에서 어린양의 피에 씻어 그 옷을 희게 하였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이며 어떤 경험일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매우 실제적인 경험으로 설명합니다. 히브리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양심을 깨끗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3, 14).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를 용서할 뿐 아니라, 현재의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 깨끗한 삶을 살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더러운 양심을 씻어서 깨끗하게 해주기 때문에 우리의 행실도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온 마음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의 피를 바라보고 받아들이면 양심이 정결케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바라보는 자는 그리스도께 큰 빚을 진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아버지께 돌아와 큰 죄를 용서받은 탕자의 심령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더러운 옷”을 그리스도의 피에 빨아 깨끗케 하는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을 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주님의 마음을 다시는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는 거룩한 소원이 샘솟게 됩니다.
마음을 씻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말씀으로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어”(엡 5:26). 우리 마음과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씻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흰옷입은 삶이 가능하게 됩니다. 성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왜 날마다 말씀을 읽어야 합니까? 날마다 양심을 씻어내기 위해서입니다. 흰옷을 입기 위해서 말씀을 읽어야 하고, 입고 있는 흰옷이 더렵혀 지지 않기 위해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심을 씻는 사람은 자아를 부인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과 죄에 대해서 죽는 삶을 살게 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전 15:31, 34).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똑같이 성경 말씀을 읽는데, 어떤 사람의 양심은 깨끗하게 씻겨지고, 어떤 사람의 양심은 그대로 더럽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을 눈으로 읽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심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말씀이 생명수가 되어 양심에 깨달음을 주고 회개해서 씻겨지게 됩니다. 말씀을 양심으로 읽어야 성령께서 “이것은 죄니 버리라”고 가르쳐 주시고, “이것을 회개하라 저것을 고치라”라고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마음과 삶이 깨끗이 씻겨지게 됩니다.
흰옷과 구원의 경험
흰옷 입는 경험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너희 가운데 이 마음을 품으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바울의 말씀으로 집약됩니다. 우리의 양심이 씻겨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셔서 그분의 마음이 우리 속에 새겨지면 자연스럽게 의의 열매가 맺히는데, 그것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행위가 아니며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열매는 내 의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육체의 음성을 거절하고 성령의 음성에 순복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이런 경험이 흰옷을 입는 경험입니다.
예수께서는 흰옷 입는 경험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멸망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었으며, 축복 받기 위해서 예배드렸던 것이 유대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런 동기와 의도로 계명을 지키면 예수께서 저주하신 율법주의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따르고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의의 열매입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가르친 중요한 복음입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1~5).
사데 교회의 문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여기에 사데 교회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로마서 말씀에 의지해서 믿음을 강조했습니다(롬 1:17). 사데 교회는 믿음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발견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흰옷을 입지 못하는 교회가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흰옷을 입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에 순종하는 열매가 없게 되었고, 교회가 부도덕과 세속과 위선으로 병들게 된 것입니다.
왜 사데 교회는 흰옷(그리스도의 의)을 입는데 실패했을까요? 그들이 가르치던 복음이 믿음만을 강조하다가 믿음의 열매인 순종에 대한 가르침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믿는다고 말할지라도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영혼이 정결케 되는 경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 1:22).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죄인의 마음속에는 가난하고 애통하는 심령이 생깁니다. 그래서 죄를 미워하고, 죄로부터 돌아서도록 이끄는 회개가 일어납니다. 그런 회개를 하는 사람의 심령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거하시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세속적이고 죗된 습관을 버리는 거룩한 열매가 맺힙니다. 말과 행동에 변화가 생기고, 위선과 거짓을 버리고 순결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정신과 말씀이 새겨져,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자를 진심으로 동정하고 도와줍니다. 이 모든 경험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흰옷을 입은 성도의 경험입니다.
예수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7:17). 오직 진리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진리가 올바로 세워져야 흰옷을 입는 구원의 경험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는 중세기 두아디라 교회 시대가 끝나자 마자 마틴 루터를 부르셔서 중세기에 무너진 “흰옷-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가르침을 회복시키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사데 교회의 문제는 오늘날 현대기독교회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기도하고 봉사하고 예배드리는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결과, 순종이라는 열매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도 동일한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날마다 여호와께 나와 제사 드리고, 예배 드리고, 헌물을 바치지만, 순종하지는 않으면 소용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는 사무엘 선지자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회의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사데 시대에 흰옷을 입었던 성도들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사데 교회가 교파로 나뉘어지고,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을 때에도 흰옷, 즉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서 더 밝은 빛으로 나가기 위해서 전진하던 몇 개의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모라비안교도(개혁자 후쓰의 후예들)와 퀘이커교도(영국 죠지 폭스 개혁자의 후예들)와 청교도들은 순수한 개혁의 정신을 유지해갔고, 믿음과 행함을 함께 강조하는 경건한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교회들이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순종의 중요성을 놓쳐버렸을 때, 믿음과 믿음의 열매인 행함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거룩한 생애를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3:5,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귀 있는 성도들은 예수께서 사데 교회에게 주신 기별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여러분의 믿음이 흰옷을 입기에 합당한 믿음인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