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3)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어떤 죽음을 당하셨을까요? <The cross of Chirst>(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하나님께서 로마군인과 군중들에 의해서 가해진 고통을 보시고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셨다.” 오늘날 이런 가르침이 거의 모든 교회를 뒤덮고 있는데, 이런 가르침은 이단적인 가르침입니다. 몇 년 전에 멜깁슨이라는 영화감독이 ‘The Passion of Christ’(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는 영화를 제작하기 전에 미국에 있는 유명한 목회자들의 자문을 구했다고 합니다. 멜깁슨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장면 전체를 육체적 고통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십자가의 고통을 그려 내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영화가 만들어지고 수많은 극장에서 상영되면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멜깁슨의 ‘The Passion of Christ’를 극찬했습니다. 한 유명한 목사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논평했습니다. “저는 멜깁슨이 만든 이 영화 덕분에 진정한 의미의 십자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영화를 본 다음부터 주일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저는 설교시간마다 로마군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가한 고통을 묘사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로마군인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로마군인이 그리스도께 가한 잔혹한 고통 때문에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는 인터뷰 시간 내내 예수께서 몽둥이질당하고 침 뱉음을 받으며 아홉 가닥의 갈고리가 붙어 있는 채찍에 의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튀기는 것을 적나라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상태에서 구덩이에 내동댕이쳐지는 고통을 말했습니다. 대못과 가시관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찌른 창에 대해서 말했고 십자가 형의 처참함을 묘사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그리스도의 육체에 큰 고통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육체적 고통을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십자가 복음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로마군인들이 그리스도를 나무에 못 박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유대 군중이 그리스도를 때리고 비웃어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이유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있는 그리스도께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한 형벌이 그리스도를 부서뜨렸고 산산조각 냈습니다. 가시관과 대못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와 저주의 형벌을 당신의 아들에게 퍼부었기 때문에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3)

 

하나님과 분리되셨던 그리스도

인류의 죄를 지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었고 완전히 분리되셨습니다.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입혀진 모든 상처와 고통을 차마 더 이상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뒤돌아서신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인간적인 감정으로 바라본 십자가에 불과합니다. 시편 기자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고뇌를 영감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시 22:1~2). 이 말씀에 이어서 시편 기자는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탄원을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은 환란에서 구원해 주셨는데 “왜 이스라엘의 메시아이며 당신의 독생자인 나를 구원해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늘을 향해서 외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시 22:4~7). 이것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버린 바 된 죄인의 모습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분리되었을까요? 시편 기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3).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를 짊어지시고 죄 자체가 되신 그리스도와 분리된 것입니다. 하늘 보좌에서 내려오셔서 인간이 되셨고 죄를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분이 죄 자체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한번도 분리된 적이 없었던 하나님과 분리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made him to be sin for us, 우리를 위해서 죄가 되게 하사)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억누르고 있었던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할 수 없는 고뇌를 하게 만든 것은 십자가의 육체적 고통과 치욕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구속하시려고 그분 자신이 범죄자가 되셨습니다. 아담의 후손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불순종과 더러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하심과 진노가 그리스도의 영혼을 전율하게 만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께서는 짊어진 죄의 엄청난 무게로 인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로부터 얼굴을 돌리심으로 인하여 인간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이 그리스도의 심장을 깊숙이 찔렀습니다. 인류를 위해서 짊어진 죄의 무게, 하나님과 분리된 고뇌의 무게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적 고통을 거의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무죄한 예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죽어 가는 장면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

성도 여러분, 저주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성경은 진심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악하고 역겨우며 사악하고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저주가 되셨다는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서 저주가 되신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죄를 붙잡고 있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진리를 거절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무시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용서를 거절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저주 아래 남아 있기로 선택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과 희생을 설명해 주어도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그런 말씀을 들어도 감격의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런 분들은 주님께 나아가 “주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제 마음이 주님의 죽음과 희생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38년 된 앉은뱅이가 주님을 향해서 손을 내밀었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저주가 되셨고 가련한 죄인이 되었으며 악한 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인류 전체가 받아야 할 형벌의 정죄를 온몸과 마음으로 받으셨습니다. 그 고통과 고뇌가 얼마가 극심했을까요? 내가 받아야 할 저주와 형벌의 정죄를 대신 받으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본 사람의 심령 속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죄만 용서받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용서는 우리의 심령 속에 감사와 충성을 깊이 심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