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의 여자의 후손을 설명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시험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하면, 사람들이 율법주의를 연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사탄이 마지막 시대의 여자의 후손에 대한 가르침을 땅에 묻어버리기 위해서 그런 오해를 교회 안에 퍼트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것이 어떻게 율법주의입니까?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율법주의입니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어떻게 율법주의입니까? 부모를 공경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율법주의입니까? 십계명에 대한 이상한 오해로부터 벗어나셔야 합니다. 성경은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사랑과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늘 아버지의 계명을 온 마음을 다해서 순종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그날(그리스도의 재강림의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15, 20~21)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0,11,14)
오래전부터 용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율법주의로 몰아갔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강조하면,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이고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닙니까?”라고 공격합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계명을 지켰기 때문에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이 “회칠한 무덤”같았기 때문에 책망하신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무덤 속에는 시체가 썩어서 냄새가 나고 부패해 있는데 무덤 표면에 하얀 횟가루를 뿌리면 아름답게 보이는 것처럼, 바리새인들이 속으로는 세상과 돈을 사랑하면서 겉을 선한 행위와 율법으로 하얗게 치장했기 때문에 책망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죽음을 본 사람은 마음과 생애 전체를 주님께 드리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의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을 갖게 되는데, 그것이 “계명을 지키는 신앙”입니다.
용은 왜 하나님의 계명 위에 검은 보자기를 씌워 놓았을까요? 사람들이 계명에 대한 “빛”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만일 중세기에 무너진 계명과 복음이 회복되어서 사도 시대의 순수한 복음이 세워지면 어떻게 될까요? 용이 그토록 미워하는 마지막 시대의 주인공,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게 됩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마지막 시대에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가진 여자의 후손이 생기면 용은 최고의 위기에 몰린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자의 남은 자손을 통해서 용과 싸우는 최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 12).
짐승의 표 환난에서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승리하면 예수께서 재강림하셔서 여자의 후손들을 하늘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용은 마지막 전쟁에서의 승패가 “계명을 지키는 신앙”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모든 미혹과 핍박을 동원해서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남은 무리만 구원받는다
이 세상 도처에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남은 무리”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은 사람들이 바다 모래처럼 많을지라도 남은 무리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a remnant shall be saved)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롬 9:27~28).
마지막 시대가 되자 용은 여자에게 분노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용이 여자(교회)에게 분노하지만 싸우는 상대는 여자의 남은 자손입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용이 싸우는 상대는 교회 전체가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남은 무리입니다. 왜 용은 남은 무리에게 공격의 초점을 맞출까요? 왜냐하면 용이 남은 무리만 제거하면 하나님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깊은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뱀의 후손이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남은 무리만 구원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조용히 이 시대의 남은 무리를 부르셔서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그 준비가 마치면 큰 환난과 재난이 생기면서 지구 역사의 마지막 국면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들 모두 여자의 후손이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의 남은 무리가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남은 무리를 여러 장면에서 다른 모습으로 설명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남은 무리가 마지막 시대에 용과 싸우는 성도들인데,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요한계시록 12장에서 “계명을 지키는 자들”로 나오는 남은 무리가 다른 곳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올까요?
라오디게아 교회에서의 남은 무리: 지구 역사의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으로 죽은 교회입니다. 거짓 복음과 세속때문에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교회입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시대 기독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예언해 주셨습니다.
영적 사망: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4~17).
이런 참혹한 형편에서 예수께로부터 세 가지 처방을 받고 치유받는 사람들이 생기는데, 그들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남은 무리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 입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1)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2)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3)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21).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는 시련 속에서 순결한 믿음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으며 영적분별력을 가진 성도로 나타났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용과 싸우는 여자의 남은 자손이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는 예수께 치유함을 받는 성도로 나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144,000인=계명을 지키는 자들: 요한계시록 14장에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성도들이 누구인가를 2번 보여 주는데 1~5절에서는 “144,000인”으로 나오고 12절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로 나옵니다.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인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1, 3~5)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12)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 14장 서두에 나오는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들(144,000인)과 1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동일한 성도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동일한 남은 무리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들=144,000인=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여자의 남은 무리)
아마겟돈 전쟁의 남은 무리: 요한계시록 16장에도 남은 무리가 나옵니다. 마지막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영적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는 자들이 어떤 사람들일까요?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 16:14~15).
누가 아마겟돈 전쟁의 승리자입니까?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지 않은 자들”입니다.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떤 옷을 지켜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리스도의 의의 옷, 흰옷을 지켜 입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흰옷을 입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신앙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 매우 흥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사도 요한은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천국문을 들어가 생명나무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옷을 하얗게 빠는 자들이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4부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영어성경에는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흰옷을 입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흰옷 입은 성도는 온 마음과 생애를 다해서 하나님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성도는 예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이라면 순종하지 못할 말씀이 없고, 지키지 못할 계명이 없다는 충성이 마음에 새겨지게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의의 열매가 자연스럽게 맺히게 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아도 흰옷을 입을 수 있다는 가르침에 미혹되면 벌거벗게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미혹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아담과 하와에게 의의 옷이 벗겨졌던 것처럼,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의의 옷을 사탄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벌거벗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에게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호소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요한계시록 3장의 라오디게아 교회와 요한계시록 16장의 아마겟돈 전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되십니까?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입으라고 호소하시는 흰옷을 입어야만, 아마겟돈 전쟁에서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흰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순결하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동기와 생애가 순결하다는 것입니다. 순결하다는 것은 내 생각과 내 사상과 내 철학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얻어진 순결이기 때문에 그것은 내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계명에 불순종하며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는 한, 순결함이 있을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 1:22). 성도들이 이런 경험으로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진리로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은 구원받지만, 진리의 이끌림을 거절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은 멸망당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지구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거절하지 않는 한,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충성하는 남은 무리로 준비시켜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진리와 예언의 빛을 주셔서 바벨론의 거짓 복음과 거짓 가르침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재림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말세에 수많은 거짓선지자들이 나타나서 그들 때문에 계명에 문제가 생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 24:11~12)
예수께서 말씀하신 재림의 징조가 무엇입니까? 말세에 교회 안에 많은 거짓선지자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고 불법을 조장하는 것이 마지막 시대 재림의 징조입니다. 이 시대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가볍게 여기는 설교자들입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의를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현대기독교회에 그런 가르침이 세워졌기 때문에 “불법이 성행하”게 되었고 신자들의 삶은 부도덕으로 채웠으며 진짜 사랑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한 번 구원받았으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식의 기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사랑만 하면 된다. 계명에는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폐지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폐지될 수 없는 것처럼 십계명도 폐지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