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교회를 8년 동안 열심히 다녔습니다. 교회 목사님께서 방언을 하는 것이 성령 받는 것이라고 하셔서 새벽기도 다니면서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방언이 터졌습니다. 처음에는 “랄랄라” 방언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날마다 “주여! 주여! 주여!” 삼창하면 “와카라바라 샤카말라~~니 카마랄 쌀랄라라~~”라는 소리가 나오면서 혀가 돌아갑니다. 무릎 끓고 한 시간, 두 시간 기도를 해도 계속 혀가 돌아갑니다. 혀가 돌아가는 것인지 제가 혀를 움직이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방언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방언을 하고 나면 제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 주신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제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목사님께서 방언은 천국의 말이라고 해서 날마다 열심히 방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제 마음에 고민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주변에 있는 몇몇 분들이 저를 걱정하면서 지금 기독교회에서 하는 방언은 대부분 가짜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진짜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라고 합니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외국어를 오순절 때 제자들에게 은사로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외국어를 전혀 몰랐던 사도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고 나가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이 준 방언의 은사를 보면서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제가 하고 있는 방언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했던 방언이 아닌가요? 만일 사도들이 했던 방언이 제가 하는 방언과 다르다면, 날마다 제 입에서 나오는 방언은 무엇인가요? 정말 혼돈이 됩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꼭 가르쳐주세요!”
순복음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방언과 은사의 체험을 강조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운동은 ‘순복음’(full gospel, 완전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힘차게 전파되었습니다. ‘순복음’이라는 이름은 기독교회가 사도 시대 이후부터 줄곧 80% 정도의 불완전한 복음에 머물러 왔음을 뜻합니다. 기존 교회들이 교리를 가지고 있지만, 뜨거운 체험이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 ‘순복음’이 갖고 있는 이름의 의미입니다. ‘순복음’을 전하는 교회들은 사도 시대 교회에게 주어졌던 성령의 폭발적인 은사 체험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방언은 달라고 구해야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라는 방언 신학을 앞세워서 기독교 전체를 흔들었습니다. 그들의 설교와 은사 체험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순복음’에 열광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교단에서 뜨뜻미지근한 믿음과 형식적으로 반복되는 예배에 지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체험과 은사를 강조하는 ‘순복음’이야말로 초대 교회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에 힘입어서 ‘순복음’을 전하는 교회들은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면서 초대형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래전에는 기독교계가 이러한 현상을 위험한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순복음’을 전하는 교회들에서 나타나는 방언과 이적을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더 나가서 그들을 이단시하는 분위기까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기독교계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거의 모든 교파에서 방언과 이적에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서점에서 방언에 대한 책들이 다량으로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회에서는 체험만 같으면 교리는 달라도 문제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힘 있게 올라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카톨릭교회 안에도 오순절파 카톨릭을 중심으로 방언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회와 카톨릭교회가 하나로 연합하는 데 있어서 방언보다 더 좋은 매개체는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학생 기독교 단체나 청년들도 방언과 은사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중국이나 아프리카 같은 선교지에서도 방언과 신유의 열풍이 뜨겁게 불고 있습니다. 선교지에서 기존에 있던 교회와 마을이 방언과 신유 은사를 강조하는 선교사들에게 통째로 접수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교회는 방언을 하는 교회들입니다.
방황하는 성도들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들이 방황하는 이유는, 교회가 그들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입니다. 매 주일 열심히 설교를 듣는 분들입니다. 헌신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영적 공허함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기도원에 가면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간절한 마음으로 그곳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진리를 모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적과 은사에 매달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오랜 세월 교회에 다녔지만, 참된 중생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고, 말씀을 모르니까 답답해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데 만날 수 없으니까 방언과 치유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고민하는 성도들
오늘날 수많은 교인들이 방언을 합니다. 그중에서 스스로에게 정직한 그리스도인은 어쩔 수 없이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나는 교회에서 뜨겁게 성령을 체험합니다. 가슴에서 뜨거운 불도 나오고, 이 세상을 떠난 것 같은 황홀한 느낌도 느꼈습니다. 그래서 목이 쉬도록 찬송을 불렀고 하늘의 방언을 토해 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모든 것이 전과 같았습니다. 변화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세상과 돈을 사랑하고 있으며, 미워하던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고, 정욕이 속에서부터 끓어올랐습니다. 분명히 조금 전에 하늘의 언어로 방언을 했는데, 왜 내 마음과 감정과 삶은 변화되지 않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방언을 할 때는 뜨겁지만, 얼마 지나면 다시 허전함이 몰려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용한 시간에 양심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이런 음성을 듣게 되면 다음과 같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정말 성령을 받은 것일까? 정말 구원받은 것일까? 왜 교회에 가면 믿음이 하늘 높이 올라가는 것 같은데, 집에 돌아오면 똑같은 생활이 반복되는 것일까? 왜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는 정신이 그대로 있고, 왜 아직도 경쟁과 시기에 붙잡혀 있으며, 왜 아직도 자랑과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세상에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를 끌고가는 것일까? 왜 아직도 세속적인 일들이 재미있는 것일까? 교회에서 나를 황홀하게 했던 감정이 왜 이렇게 빨리 사라지는 것일까? 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쉽게 흔들리는 것일까? 왜 양심의 소리가 자꾸 나를 책망하는 것인가? 정말 나 같은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주시고, 방언을 허락하시는 것인가?”
놀라운 사실은, 성경 말씀과 예언을 모르고, 회개와 의의 열매가 맺히지 않았으며, 심지어 교회 다닌지 며칠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방언과 은사를 체험하는 사람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 주변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배우자 몰래 부적절한 관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방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마지막 사명>은 이번 호에서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들려 나오는 방언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정직한 양심으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영혼들은 이번 호를 통해서 이 시대를 위한 진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