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마지막 시대의 방언과 성경 예언

사도 시대는 기적의 시대였습니다. 사도들은 죽은 자를 살리고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을 다니면서 방언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12제자 중에 11제자가 순교하고 사도 요한마저 밧모섬에 끌려가 유배당했습니다. 그렇게 사도 시대가 끝나면서 기독교회 안에 기적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저기서 조금씩 특별한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났지만, 초대 교회를 채웠던 현저한 기적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가 지나면서 방언도 사라졌습니다. 거의 1,800년 동안 방언은 기독교회 안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말세가 되면서 갑자기 방언이 전세계적으로, 거의 모든 교파에서 홍수처럼 밀려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고 있는 것일까요? <방언 문제>의 마지막 결론으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얻어야 합니다.

오순절파 교회들에서 강조하는 순복음은 초대 교회의 은사와 이적을 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나타났던 기적과 방언이 왜 이 시대의 교회들에는 나타나지 않냐고 말합니다. 이 시대에도 예수님이 행했던 기적, 사도들이 행했던 은사들이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았으니 나도 쫓아야 하고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셨으니 나도 걸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정말 그런 기적들이 이 시대에도 나타나야 할까요?

물론, 이 시대의 교회도 사도 시대의 순수했던 모습을 나타내야 합니다. 방언이나 병 고치는 은사만 나타내면 안 됩니다. 그들이 했던 순수한 회개, 그들이 드렸던 전적인 헌신,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걸었던 진리의 좁은 길,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대의 교회는 초대 기독교회와 너무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회의 신앙은 없는데 그들에게 내렸던 하늘의 은사를 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교회와 그런 교인들에게 하늘의 권능이 함께 하실 수 있을까요? 그런 교회에게 하늘의 권능이 임한다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요?

초대 기독교회는 제자들과 사도들이 전파한 순결한 진리와 신앙 위에 세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회에 성령을 크게 퍼부어주셨습니다. 오순절에 하늘로부터 성령이 임한 이후, 초대 기독교회는 은사와 기적으로 불타올랐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행하셨던 기적들이 초대 기독교회 안에서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에 의해서 죽은 자가 부활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소경이 눈을 뜨는 사건들이 생겼습니다.

방언과 은사가 사라지게 된 배경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하나씩 죽어갔습니다. 죽은 자를 살렸던 사도 베드로도 죽어서 흙이 되어버렸고 12제자 중 11제자가 순교당했습니다. 사도 요한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지만 그 역시 로마 황제에게 붙잡혀서 밧모섬에 유배당했습니다. 초대 기독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좁은 길을 걸으라고 호소하는 복음, 희생과 순교마저 불사했던 신앙, 뜨거운 믿음을 지켜왔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강림이 지연되면서 지쳐갔습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는 정신이 교회 안에 들어왔고, 그 결과 구원에 대한 가르침이 변질되었습니다. 그 당시 교회의 모습을 한 종교 서술가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조직된 지 반세기 이상이 지나자…한 사람 한 사람 연로한 선구자들은 그들의 자리에 쓰러졌다. 선구자들의 짐을 분담하고 지도자로서의 임무를 이어받아야 할 젊은 일꾼들 중 어떤 이들은 반복된 진리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신기하고 놀라운 어떤 것들에 대한 갈망으로 그들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만, 복음의 근본 원칙에는 일치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교리를 도입하고자 하였다.”(The Acts of the apostles 580, 제1세기의 교회)

사도들이 순교당하고 초대 교회를 세운 늙은 장로들이 늙어가면서 교회는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은 변화시키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사도들이 전수해준 옛 신앙은 그 빛이 사라지게 되었으며,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이 가르쳐준 신앙,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는 믿음이 희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미혹하는 영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지배하게 되었고 기독교회는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를 통과하면서 깊이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이런 모습이 되자, 하나님의 영광이 더 이상 교회와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살아있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사라지게 되자, 방언과 치유 은사와 같은 성령의 은사도 거두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거의 1,800년 동안 교회 안에서 은사와 이적이 불타올랐던 때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말세가 되면서 은사와 방언에 대한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교회 예언에서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로 접어들면서 순복음 운동이 일어나고 방언과 기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전 교파에서 방언과 기적을 환호하면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우리는 초대 기독교회와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얼마나 다른 교회인지 알아야 합니다.

초대 기독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의 차이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일곱 교회 예언이 나옵니다. 일곱 교회 예언은 사도 시대부터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까지 하나님 교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예언입니다. 일곱 교회 예언의 첫 번째 교회는 에베소교회(초대 기독교회)이고 마지막 일곱 번째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인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지금 이 시대의 교회, 즉 말세의 교회를 뜻합니다(마지막 사명 5호와 6호 참조).

에베소교회: 에베소교회는 사도들이 직접 세운 서기 1세기의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이 퍼부어진 교회이고 신약성경을 기록한 교회입니다. 그 교회 교인들은 제자들과 사도들로부터 직접 말씀을 전수받았고, 그들이 가진 신앙을 실제로 목격했던 교회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았을 뿐 아니라 진리를 가진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를 실제로 보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온갖 오류와 거짓 복음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순결했고, 진리에 대한 불타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 2:1-7)

하나님께서는 초대 교회에 성령의 큰 능력을 퍼부어주셔서 기독교 복음이 민족과 방언을 초월해서 전파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는 대역사가 이루어졌으며, 방언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죽은 자가 부활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로마 제국 황제의 핍박 속에서도 지칠 줄 모르는 열심과 수고로 일하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가난과 핍박 속에서도 성경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기 위해서 생애를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에베소교회를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2-3). 예수께서는 에베소교회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은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에베소교회가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사도들의 정체를 드러낸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참고, 견디고, 일하는 에베소 교인들의 수고와 희생과 인내를 칭찬하셨습니다. 이런 신앙적 특징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초대 교회에게 오순절 성령의 능력을 퍼부어주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두려운 사실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는 기별 속에는 칭찬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재강림하시기 직전의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인데 이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가장 심한 책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5-17)

왜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단 한마디의 칭찬도 하지 않으셨을까요? 왜냐하면 마지막 교회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고 맞이해야 할 교회가 돈과 세속에 깊이 젖어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예언하고 있는 마지막 환난을 통과하고, 일곱 재앙을 통과하며, 아마겟돈 전쟁을 치러야 할 교회가 전혀 준비 없이,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긴박한 순간에 깊은 잠에 취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예언의 성취를 앞두고 있으면서, 예언에 관심을 갖지 않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마음 속에 우상을 품고 살고 있습니다. 돈의 우상, 자녀의 우상, 명예의 우상을 품고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서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고, 성령의 음성을 들어도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답해야 할 질문

놀라운 사실은, 마지막 시대의 라오디게아 교회가 이런 영적 암흑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 방언과 이적이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초대 기독교회가 다시 태어난 것처럼 방언을 말하고 병든 자를 안수하여 낫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초대 기독교회처럼 순결하지 않으며, 초대 교회처럼 죄와 세상을 미워하지 않는데, 방언을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방언과 기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회에는 사도 시대의 신앙이 없는데 사도 시대의 방언과 이적처럼 보이는 것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가장 문제가 많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장 순결했던 교회인 에베소교회의 방언과 이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에베소교회의 방언과 은사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지금 이 시대는 사도 요한이 가졌던 신앙, 바울과 같은 믿음, 베드로와 같은 충성을 찾아보기 정말 어려운데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행했던 이적과 방언이 수많은 교회들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시대의 미혹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4장(재림의 징조장)에서 말세에 “사람의 미혹”을 조심하라고 강력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4장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운명을 제자들에게 예언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 24:2)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곧 이 세상의 멸망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폐허가 된다는 말은 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이 끝나는 종말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세상 끝과 재림의 징조에 대해서 질문했던 것입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 24:3)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어떤 징조를 가장 먼저 말씀하셨을까요? 말세에 “사람의 미혹”이 나타날 것이라는 징조를 가장 먼저 언급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징조를 가장 많이 강조하셨을까요? “사람의 미혹을 조심하라”입니다. 재림의 징조에서 가장 중요한 징조는 해와 달과 별의 징조도 아니고, 전쟁이나 지진이나 홍수와 같은 징조도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말세에 기독교회 안에서 나타날 “미혹”에 대해서 6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24:4)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 24:5)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마 24:11)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마 24:23)

예수께서 말씀하신 재림의 징조 중에서 가장 구체적인 말씀은 거짓 이적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막 13:21-22)

사도 바울도 마지막 시대에 사탄이 귀신의 가르침과 이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

“악한 자의 임함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9-10)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마지막 시대에 사용하는 사탄의 무기

요한계시록도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와 동일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람의 미혹”이 마지막 시대에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말세의 교회를 “큰 성 바벨론”이라고 부르면서 그 속에 “귀신의 영들”이 가득 차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깊은 영적 암흑 속에 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말세에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이적이 거짓 선지자과 악인들 사이에서 크게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장면은 짐승의 표 환난에서 사탄이 어떻게 온 세상 사람들을 미혹할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계 13:13-16)

사탄이 온 세상 사람을 미혹해서 하나로 모으는데 그가 사용하는 강력한 수단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이적”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이적이 언제 있었던 이적인가요? 구약 시대에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 왕과 거짓선지자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했던 이적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에는 사탄이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와 똑같은 이적으로 온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적을 보면서 거짓 선지자들을 하늘이 보낸 사자들로 받아들이고 환호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미혹을 당하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계 13:16)

이적을 통해서 온 세상을 미혹하는 사탄의 전략은 아마겟돈 전쟁에서도 동일합니다. 이 말씀에서는 사탄이 거짓 선지자를 통해서 미혹하는 모습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이….입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개구리의 긴 혀로 먹잇감을 채먹듯이 거짓 선지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영들, 즉 귀신의 영들로 사람들을 미혹한다고 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계 16:13-14,16)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미혹당하는 시대입니다. 말씀 위에 서야 합니다. 그것만이 사탄의 미혹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적과 거짓 은사를 강조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에 거짓 선지자에게 미혹당하는 영혼들과 귀신의 영들이 뛰노는 곳에서 빠져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계 14:8-11)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계 19:20-21)

성도 여러분, 제자들과 사도들은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 위에 순결한 초대 기독교회를 세웠지만, 마지막 때가 되면서 교회가 귀신의 처소가 되고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바벨론이 된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이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교회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지구 인구 72억 명 중에 20억 명이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참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예수께서는 “인자가 올 때” 믿는 자가 많을지라도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매우 적을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지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성경 말씀입니까? 체험입니까?

현대 오순절 운동에서 나타나는 표적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방언입니다. 그러나 방언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하지만 자신은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경쟁과 시기의 정신이 있으며, 자랑과 과시하고 싶은 욕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영혼의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언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다”라는 거짓 가르침과 설교 때문에 사탄의 미혹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짓 가르침과 거짓 복음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말씀으로 방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진리를 분명하게 제시해도 “권능을 행하는 사람이 어떻게 거짓 교리를 말할 수 있는가? 방언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거짓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적에 몰입되어 있는 사람들은 성경말씀의 권위보다 은사를 행하는 사람의 말과 설교를 더 높은 위치에 둡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의 말씀보다 20세기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따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라는 말보다 “우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은사와 기적을 강조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떨어지게 됩니다. 교회에서 “성령 체험나누기”가 많아질수록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게 됩니다. 은사와 기적에 몰입해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며 말씀에 대한 지식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적과 감정적인 체험에 초점이 맞추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방언을 하는 분들 중에 날마다 성경을 몇 시간씩 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마음에 뜨거운 전율을 일으켜보겠다는 희망으로 성경을 읽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이적과 은사를 강조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직통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성경 66권 외에 하나님께 계시를 받는 새로운 통로를 만드는 것입니다. 계시와 환상에 의존하는 것은 성경 이외에 또 하나의 진리의 원천을 갖게 되는 것임으로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사 체험과 황홀함 속에서 떠오른 생각과 환상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을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하신 경고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구약성경의 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넘어서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을 이적과 체험 속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오순절 성령을 다시 체험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정말 개신교인이라면 “오직 성경”을 외치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운동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중세기 로마 천주교회는 성경 이외에 다른 권위를 존중함으로써 부패와 세속화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교황의 칙령을 성경과 같은 차원의 말씀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16세기 초에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자들의 구호가 개신교회 기초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감정과 체험을 강조하는 은사주의자들은 종교개혁의 정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빌립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하십니까?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는 동안 제자들이 하나님을 이미 보았음을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 14:7) 그러나 빌립은 예수님의 말씀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직접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예수께서는 말씀을 믿는 대신에 눈으로 보아야 믿는 신앙을 크게 책망하시면서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성경말씀보다 더 분명한 계시를 구하고 말씀을 통해서 얻는 것보다 더 강한 느낌을 얻기 원하는 사람들은 빌립과 같은 문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의 절대 확실한 말씀이 항상 우리 곁에 있는데 은사와 이적에 매달리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불신하고 모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이적과 짜릿한 느낌을 찾고 있는 사람들은 성경말씀이 성령께서 주신 완전한 계시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구세주께서 직접 주신 말씀보다 방언과 꿈이 더 큰 만족을 준다고 믿는 사람들은 말씀 중심의 신앙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방언과 꿈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의 원동력이 진리로부터 나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진리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성도들아, 주님의 탁월한 말씀 속에
믿음의 굳건한 기초가 놓여 있으니
주님을 피난처 삼은 성도들아
주님이 이미 하신 말씀 외에 더 무슨 말씀을 하시겠는가?

우리 주님께서 성경 외에 무슨 빛을 더 주시기를 기대하십니까? 성경 밖에 나가서 어떤 이적을 경험하고 어떤 은사를 체험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시도는 사탄의 미혹으로 들어가게 만들 것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계 22:18) ■

4부, 방언에 대한 인터뷰 Q&A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서울의 어떤 교회에 방언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동료 목사들과 교인들로부터 압박을 느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신앙이 깊은 목사님의 어머니까지 아들이 방언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염려를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헬라어로 주기도문을 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여러 시간 동안 연습한 결과, 헬라어로 유창하게 주기도문을 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아침 예배시간에 가족들과 어머니 앞에서 기도하는데 헬라어로 주기도문을 외웠습니다.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온 가족들이 드디어 목사님의 입에서 방언이 터져 나왔다고 기뻐하면서 축하해주었습니다. 헬라어 주기도문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들렸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솔직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이제 더 이상 방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고 축하를 받았습니다.

이튿날 어머니는 방언 통역에 뛰어난 은사를 받은 것으로 유명한 어떤 전도사님을 모시고 목사님 사무실을 찾아왔습니다. 어머니는 아들 목사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내용을 알기 원했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부탁으로 목사님은 어쩔 수 없이 헬라어로 주기도문을 외웠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통역 은사를 받은 전도사님이 다음과 같이 통역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에게 말씀하십니다. 빨리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으셨습니다. 목사님, 마음 준비하시고 떠나셔야겠습니다.”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직접 내리신 그 명령을 귀하게 받아들이고 감사했습니다. 목사님은 한동안 고민하다가 다음과 같이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방금 제가 드린 기도는 헬라어입니다. 헬라어로 주기도문을 외운 것입니다.” 그 상황이 어떠했을까요? 통역 은사를 받은 전도사님은 매우 당황했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오늘날 방언에 대한 많은 의문과 의혹이 있는데 그중 몇 가지를 모아서 질문과 답변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 하나님께 정직한 마음으로 나가는 영혼마다 진실과 진리를 깨닫게 되실 것을 확신합니다.

 

Q. “요즘 교회에서 하는 방언이 비록 의미가 없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통역하면 의미가 전달되고 복음이 전파됩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도 통역만 잘하면 되지 않을까요?”

A. 물론, 사도 바울은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 14:13). 이 말씀은 알 수 없고, 의미가 없는 소리를 통역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방언 통역에 얼마나 문제가 많은가를 보여 주는 사례는 너무나 많아서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몇 해 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통역 은사에 대한 실험 보고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통역의 신뢰도를 확인하기 위해서 방언을 녹음한 후 통역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7명에게 각각 녹음을 틀어 주고 통역을 요청했다. 그 일곱 가지 통역 중 비슷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아프리카어에 능통한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방언 집회에서 그는 아프리카어로 주기도문을 외웠다. 그러자 갑자기 근처에 있던 통역은사를 받은 사람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지금 이 형제가 방언으로 곧 재림하실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했습니다.’”(John P. Kidahl, The Psychology of Speaking in Tongue, Harper & Row, 1972, p. 63).

오늘날 교회에서 똑같은 소리를 내는 방언이 여러 가지로 통역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교회는 어떻게 설명할까요?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통역하는 사람마다 다른 해석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둘 중 하나입니다. 통역하는 사람이 엉터리이거나 방언 자체가 통역이 불가능한 소리입니다. 물론, 둘 모두일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들려오는 방언이 갖고 있는 수많은 문제가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데, 왜 사람들은 고민하지 않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진리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오늘 내가 느끼는 감정과 체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Q. “통역될 수 없는 소리도 언어인가요?”

A.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사도 바울은 “방언은 통역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5번이나 반복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고린도 교인들이 하던 방언(tongue)은 “통역될 수 있는 언어(language)”라는 뜻입니다. “통역될 수 있는 언어”라는 것은 그 말 속에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미가 없는 방언”은 결코 성경의 방언이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의미가 있는 방언도 통역하지 않아서 의미가 전달되지 않으면 그 방언은 단지 “소리”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의미가 있는 방언도 통역이 안 되면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인데 하물며 의미와 뜻이 전혀 없는 소리들은 무엇입니까? “허공”에 소리치는 것입니다.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전 14:7~9). 방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명상하시고 성령의 음성을 들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Q. “바울은 방언을 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방언을 해야 합니다!”

A.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이 말씀을 “알 수 없는 방언”에 대한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문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해석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통역 없이 방언을 난발하는 것을 책망했습니다. 복음 전파와 봉사를 위해서 사용되어야 할 은사인 방언이 자기 의를 세우는 데 사용되고 있는 모습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책망 때문에 방언의 은사 자체가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방언을 적극적으로 하라”고 말하는 대신에 “금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또한 “방언을 금하지 말라”는 표현 속에는 잘못을 범한 형제들에 대한 동정과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방언을 잘못 사용해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지나친 정죄 속에서 좌절하게 되는 것을 염려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씀 속에는 잘못을 범한 형제에 대한 바울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후 2:7).

 

Q.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날마다 여러 시간 동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영적으로 큰 유익을 얻게 됩니다. 내가 경건해지면 그것이 곧 교회를 세우는 일이 아닙니까?”

A. 방언으로 기도해야만 경건해진다면, 예수님은 하루 종일 방언 기도를 껴안고 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처럼 사탄의 유혹과 시험을 많이 그리고 강력하게 받았던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방언으로 기도했다는 말씀이 성경에 나오나요? 사복음 전체를 보아도 예수께서는 항상 정확한 언어로 하늘의 가르침과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기도문도 모든 사람이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방언은 반드시 통역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무시할까요? 왜냐하면 “내가 경건해지는 것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라는 그럴듯한 거짓 가르침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은사는 다른 영혼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는 은사인데 방언만큼은 “나”를 위한 은사라고 가르치는 방언 신학이 세워졌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방언하기를 원하십니까? 왜 노력하고 봉사하고 수고하는 은사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능력이 나타나는 방언에 관심을 가지십니까? 오늘날 현대 교회는 방언에 대한 탐욕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랄랄라 방언’으로 날마다 3시간 기도하면 경건해집니까? 날마다 하나님과의 비밀 대화로 얻어진 경건의 열매가 무엇인가요? 전에는 하나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충성스런 삶을 사십니까? 전에는 돈을 사랑했는데, 이제는 재물을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위해서 사용하십니까? 전에는 세상을 사랑했는데 이제는 복음을 위해서 삶을 바치십니까? 전에는 습관적인 죄에 묶여 있었는데, 이제는 그 죄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까? 방언을 하는 많은 사람의 고백은 “방언을 하기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죄에 끌려다니고 여전히 정욕적이고 세속적이라는 것이 방언하는 분들의 고백입니다. 참된 경건은 기도를 오래 하고 신비를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경건은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2~4).

 

Q. 사탄이 방언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요?

A. 사탄의 목적은 단지 “알지 못하는 방언”을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텔레비전 방송 목사는 십여 년 동안 매주 방송에 나와 방언을 하고 귀신 쫓아내는 일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방송을 보면서 하늘의 기적을 목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방송 목사가 부인 몰래 다른 여인과 십여 년 동안 부정한 관계를 유지했던 일이 신문에 폭로되면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목사로서 무서운 죄에 빠져 있었지만, 사탄이 그에게 매주 이상한 지절거림을 주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처럼 보이는 거짓 이적을 나타냈기 때문에 기만당한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병을 주고 또 그 병을 고치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 사람들을 기만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속에 악령을 들어가게 하고, 또 사탄의 부하 악령을 쫓아내는 기만을 행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열매로 그들을 분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열매로 영을 분별하라는 말씀에 이어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해도 하나님의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이 말씀은 정말 두려운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방언을 하면서 많은 권능을 행해도 불법을 행하면 주님께서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주님께서 알지 못하신다고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것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주신 능력이라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사탄이 준 능력을 행사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사탄에게 기만당하게 된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23절) 불법을 행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불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늘의 권능을 행사하기 원하면, 사탄이 그런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거짓 이적으로 그들을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모습을 마지막 시대의 징조로 경고하셨습니다.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3-24)

말세가 되면 온 세상이 표적과 기사로 덮일 것이라는 것이 예수께서 주신 재림의 징조입니다. 말세가 되면, 사탄이 큰 표적과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데, 신앙이 없는 사람들만 미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도 미혹”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말세에 나타나는 사탄의 미혹으로 거짓 이적을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외면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사탄의 미혹에 기만당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9-10)

지금까지의 말씀을 정리하면,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열매를 맺은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방언도 성령의 은사이므로 방언을 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관심을 먼저 성령의 열매로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거룩한 열매를 마음과 생애 속에 풍성하게 맺은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눠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열매가 무엇인가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성령의 열매는 진리를 통해서 거룩하게 된 신앙과 성품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떤 사람들에게 성령의 열매가 맺혀진다고 했습니까? 이어지는 24절의 말씀에 대답이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육체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의 열매가 자연스럽게 맺히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방법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이런 삶을 살지 않으면서 하늘의 권능을 구하는 사람들은 매우 위험한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모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는 그리스도인이 하늘의 권능을 탐하면, 사탄이 그에게 거짓 권능을 줘서 미혹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말세의 사탄 전략입니다.

오래 전부터 사탄은 하나님께 나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없애고 혼돈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마음에 죄를 붙잡고 있는 사람에게도 지절거리는 방언을 줍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방언을 줍니다. 심지어는 바람을 피우는 사람도 방언을 하고,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방언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이 아무리 더럽고 추한 죄에 빠져 있다고 할지라도 날마다 입에서 터져 나오는 방언을 보면서 “거짓 안전”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여전히 함께 하신다”는 완전한 기만의 덫에 걸리게 됩니다. 결국, 영혼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양심에 호소하시는 성령의 역사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사탄이 노리는 두 번째 목적은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기적에 익숙하고 취하게 되면 말씀에 대한 관심이 없어집니다. 예수께서 명하신 좁은 길과 순종에 대한 관심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허전할 때마다 “알 수 없는 방언”을 하면 황홀한 느낌과 감정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마약과 같아서 한번 취하면, 그것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게 됩니다. 사탄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대신에 체험을 따라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 들어온 방언을 받아들이면 매우 위험합니다. 빠져 나와야 합니다!

 

Q. 성령을 받을 때 어떤 느낌이나 감정을 갖게 됩니까?

A. 성령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느낌과 감정이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받은 증거로써 감정의 극치를 기대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다음과 같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우리는 바람을 보지 못하지만 바람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마음에 역사할 때 그것을 볼 수 없지만, 그분의 능력은 조용한 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 줍니다. 비록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보거나 만지지는 못할지라도, 그분께서 해놓으신 결과를 볼 수는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변화된다면, 우리의 생애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은 오직 변화된 생애를 통해서만 확증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비우고 마음의 우상과 죄를 버린다면,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충만하게 채우실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에 대해서 자랑치 않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심이라”(고전 2:10,12)

성령을 받을 때, 우리는 황홀함과 무아지경 속에 머물기보다는 오히려 더 침착하고 더 예리한 판단력을 가지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생애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생애는 감정적 환희와 흥분으로 차있는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교회의 죄와 세속을 지적하면서 분노하셨고, 이스라엘의 죄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희생과 봉사로 점철된 생애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죄와 불의를 거절하셨으며,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 위한 이기심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런 삶이 성령 충만한 생애입니다. 예수께서는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으며, 오직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만 성령의 능력을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성령 충만함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조용하면서도 진지하게 행하는 순종의 삶으로 표시되었습니다. 그분의 삶은 사랑과 희생과 극기와 자아부인으로 꼴 지워졌습니다. 성령 충만할수록 이성적인 분별력은 예민해지며 하나님의 진리가 감정과 느낌을 지배하게 됩니다. 진리는 건전한 상식 위에 세워지며, 질서 있는 가정을 통하여 다른 영혼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는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고…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26,33,40)

 

Q. 기적은 모두 하늘에서 온 것인가요?

A.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오늘날 이 시대에도 나누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은사를 분석하고 사용할 때에 한 가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사탄이 진리에 굳게 닻을 내리지 못한 사람들을 혼동시키기 위해서 성령의 역사를 위조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는 사탄의 활동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으로 특징 지워질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살후 2:9). 사탄의 활동이 매우 기만적인 이유는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자칭하”고 있으며,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1:13,14). 그 기만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택하신 자들”까지도 미혹당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마 24:24).

이러한 말씀들은 성령 은사를 추구하는 교회나 성직자들을 모두 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교회와 모든 종교적 체험 그리고 모든 기적을 시험해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기 위해서 말입니다(살전 5:21).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는 사도 요한의 또 다른 충고를 들어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그렇다면, 성경은 영을 시험하는 판단 기준으로서 어떤 것을 제시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5가지 성경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

성령의 참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이며, 자신이 믿는 바가 성경의 진리에 일치해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리라”(렘29:9)

어떤 사람이 예언하는 은사를 받았으면, 그가 예언하는 바가 정확하게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3)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면, 그의 성품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대표자로 설 수 있을 만큼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과 생애를 바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방언을 하고 병 고치는 은사를 행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늘에서 내려온 은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그를 잘 알고 있는 믿지 않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감화를 끼칠까요?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양면을 보면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이상한 혼돈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내려주심으로써 복음을 전파하고 증거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사람은 혹시 자신이 다른 영을 받았을 가능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늘은 위대한 성령의 능력을 받기에 적합하게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하늘의 거룩한 선물을 줍니다.

4)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리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 4:2~3)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셔서 시련과 고통 중에서 승리하셨던 것처럼, 진실한 그리스도인들도 그분의 모본을 따라서 죄와 시험을 승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영을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죄와 유혹에 대하여 승리하는 생애를 살아야 하며, 그러한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거룩한 생애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한 하늘의 선물이 내려지게 됩니다.

5)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12)

사도 요한 역시 앞에서 이사야가 말했던 영의 구별법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견디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계시를 보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것은 영을 분별하는 분명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기적과 은사를 무조건 하나님의 영의 은사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질문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대답입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충고는 모든 기적과 은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하고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Q. 현재, 성령의 은사와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A.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 자체는 영원불변하지만, 진리를 이해하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진리를 검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기준점으로 해서 우리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판단해보아야 합니다. 즉,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진리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시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경험을 진리 위에 놓으려고 애씁니다. 우리의 경험은 그것이 올바른 진리의 테두리 안에서만 가치 있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사건을 관찰했을 때, 각기 다른 경험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우리가 어떤 교단에 속했으며, 어떤 사람에게 성경을 배웠느냐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동일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 있다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을 설명합니다.

A) 나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경험을 하였다.

B) 그런데, 나는 나의 경험과 매우 흡사한 경험을 성경에서 발견하였다.

C) 그러므로 나의 경험은 진리이다.

이와 같은 3단 논법에 의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성령의 은사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논리의 전개는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자신의 경험이 초대교회의 경험과 비슷하다고 해서 자신들의 경험이 진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탄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위조할 수 있고, 사람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최고의 증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영”에 의해서 진리를 척량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살후 2:10,11). 하나님의 진리인 성경 말씀을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마지막 시대에 펼쳐지는 사탄의 대기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한다고 공언할지라도, 진리의 말씀에서 벗어나거나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영적인 위치는 매우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만을 강조하면서 진리를 무시하는 사람은 감정적인 신앙을 갖게 되며, 진리를 주장하면서 사랑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율법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끝까지 따라가야 하며,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 마음 속에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사랑과 진리를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성령이 주어진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성령)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니라”(요14:15~17). 사도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계명(commendment, 명령)을 순종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순종이야말로 자신의 경험을 시험할 수 있는 최종적인 판단 기준이며, 동시에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자신의 경험과 느낌 그리고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식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바를 단순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종의 생애를 사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을 지배하는 영을 분별하는 최고의 기준입니다.

 

Q. 심리학자들은 오늘날의 방언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A. 성경에서 방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하지만, 오늘날 교회들은 방언을 연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방언을 습득시켜주는 전문 강사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방언 전문가인 킬달 박사는 오늘날 교회에서 발견되는 방언의 학습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서 발표했습니다.

1. 방언을 연습시킬 때는 오직 방언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집회함.

2. 방언 강사는 간절한 마음으로 방언을 사모하도록 분위기를 상승시키고 있음. 음악과 통성기도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음.

3. 방언 강사는 사람들이 특정한 소리를 내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방언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지속적으로 줌.

과학자들은 방언을 사모하거나 방언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삶 속에서 받고 있는 스트레스와 고통이 방언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보면, 방언과 스트레스 사이에 다음과 같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이 외로움을 느끼고 자신감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을 때, 방언에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30% 사람들이 정신적인 불안을 겪었던 반면, 방언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85% 사람들이 정신적인 불안 때문에 고통당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정신적인 불안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사람일수록 방언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불안할수록,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학생은 시험과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클수록 방언을 해서 현실을 잊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John P. Kildahl, The Psychology of Speaking in Tingue, Harper & Row, p78.)

사람들이 방언을 추구하는 이유는, 방언 자체가 아니라 방언이 가져다 주는 효과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방언을 하면 현실에 있는 모든 문제를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방언을 하면 목사님과 교인들에게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방언을 하면 감정적으로 깊은 황홀함과 무아지경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방언을 하면, 핍박당하고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며 좁을 길을 걸으면서 돈과 세상을 포기해야 한다면, 방언이 여전히 인기가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애를 쓸까요?

 

Q.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언제,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요?

A.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이 되자 하늘로부터 큰 성령의 강림이 있었는데 그때 방언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의 표적으로 사용하시는 방언을 이방 종교에서 오래 전부터 하던 방언에서 가져다 쓰셨을까요? 오래 전부터 우상숭배자들이 그들의 신전에서 하던 주문과 같은 방언을 가져다가 오순절 성령의 역사로 나누어주셨을까요?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방언은 교회 안보다는 교회 밖에서 훨씬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종류의 방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상한 방언 현상은 그 뿌리를 성경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이방인들의 제사 의식에 두고 있음을 역사는 말해줍니다. 기원전 6세기에, “델피의 오라클”이라는 사람은 아폴로신과 뮤즈의 신의 영지라고 알려진, 그리스 중부에 있는 파르나소스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델피는 “술, 다산, 선정적 춤의 신”이라고 부르는 “디오니소스”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 의식 중에 분위기를 돋우는 선정적인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을 때, “피디아”라고 부르는 부족의 사제장은 이상한 연기를 들여 마시면서 황홀경에 빠져들어가면서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여 지절거렸습니다. 그 사제가 이상한 소리를 낼 때에 다른 사제는 그것을 통역을 했습니다. 그의 소리는 아폴로신에 관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추상적인 것이었고 그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New Mexico에 사는 미국 인디언들 속에서도 그와 비슷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 인디언들은 “페이요우티”라는 환각제를 마시고 둥글게 앉아서 몇 시간 동안이나 드럼소리를 들으며 종교적 노래를 부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몇몇 인디언들은 자극적인 몽상에 관한 말을 중얼거립니다. 이러한 제사 형식의 유사함 때문에 미국에서 오순절파 교회들은 미국 인디언들에게 인기가 가장 좋은 곳이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교도적 미신을 믿는 아프리카의 부족들은 그들의 신으로부터 축복을 받아내기 위하여 닭이나 염소 등을 제물로 드리고 여러 시간 동안 불을 중심으로 돌며 춤을 추며, 최면적인 리듬과 드럼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몇 사람들은 신접한 상태에 이르게 되고 혼령 세계의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마을 마법사나 사제가 그 말을 통역합니다. 이러한 의식은 오늘날에도 서인도의 Voodoo Catholic 들에 의하여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방적인 제사의식들이 처음 미국 교회에 들어온 시기는 1800년도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노예들이 미국에 온 후 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강압 받아서 교회에 나갔지만, 그들은 스스로 성경을 읽어서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지성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비록 아프리카의 서로 다른 부족들에 속해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신령적 춤과 신접한 소리를 낸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노예들은 그들의 신접한 소리를 방언의 은사로 오해하게 되었고, 새로운 방법의 방언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강한 리듬의 음악과 같이 진행되는 이러한 광신적 의식은 미국 남쪽 지방의 교회들에서 처음 받아들여졌으나, 당시의 기독교 단체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Holy Rollers”라고 비난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접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의식도중에 독사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마가복음 16장18절에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을 잘못 오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독사를 사냥하여 들고 있는 것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고 실제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백인들의 오순절파 운동은 1906년 로스앤젤레스의 Azusa Street에 있는 Apostolic Faith Gospel Mission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단체의 지도자는 William Seymour 이라는 흑인 전도사였습니다. 그때부터 이 단체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교리를 계속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일반 기독교인들에게 더욱 흥미 있게 보이도록 노력했습니다. “1960년대부터 이 오순절파 운동은 전통적인 백인 기독교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전세계에 걸쳐서 개신교와 천주교 안에 오순절파의 가르침을 믿는 수백만의 교인들이 있다.”(Compton’s Interactive Encyclopedia, under the entry “Pentecostals”)
무아경의 주문을 외우는 이방 종교의식에서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것을 모방한 거짓 방언들은 이방 종교의 음악을 모방한 기독교회의 음악과 종교의식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비정규적인 리듬의 연주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성적인 능력을 잃게 만들고 최면적인 무아경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통하여 극렬한 상태로 반복되는 중얼거림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지금 사탄은 위조된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트로이의 목마처럼, 이방 종교의 예배 방법이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놀라울 만큼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탄은 기독교인들을 믿음에서 감정으로 이끌려고 합니다. 방언에 깊이 빠져 있는 어떤 교회들은 성경은 이미 지나간 구식이고, 방언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새롭게 주어진 기별이며, 심지어는 방언이 성경보다도 더 믿을 만한 것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회 안에 사탄을 위한 무대가 이러한 단계까지 완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

 

3부, 아프지만 받아들여야 할 말씀

가장 아픈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체험’을 인정하지 않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이고 아픔입니다. 그러나 참된 겸손은 하나님 말씀 앞에 자기를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참된 겸손은 하나님 말씀에 어린아이와 같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체험, 자신의 입장, 자신의 견해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독자 여러분이 갖고 있는 방언에 대한 생각과 견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어 볼 때, 어떤 분들은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버리고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가 ‘나’를 포기하고 말씀을 붙잡아야 할 때입니다. 아프더라도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편집실>

 

‘은사장’ 전체를 보아야 오해가 풀린다!

전체 숲을 보지 못하면 오해가 깊어지고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방언에 대한 오해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몇 가지 성경절에만 집중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과 14장, 세 장을 하나로 묶어서 ‘은사장’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12장에서 은사의 본질에 대해서 다루었으며, 13장에서는 사랑 없는 은사의 문제점과 사랑의 가치를 강조하다가 14장에서 문제의 핵심인 고린도 교회의 방언 문제를 지적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흐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제3부 기사는 ‘은사장’에 나오는 단 하나의 성경절을 위해서 준비되었는데, 그 말씀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입니다. 오늘날 방언을 하는 개인이나 교회 모두 입을 모아서 강조하고 있는 말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의 흐름 속에서 14장 말씀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방언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

고린도 지역과 교회에 대한 성경학자들의 저술은 대체적으로 일치합니다. 고린도에는 두 개의 국제 항구가 있어서 여러 항로가 교차했기 때문에 상인들과 외국인들의 왕래가 많았습니다. 고린도는 헬라인, 로마인, 수리아인, 아시아인, 이집트인, 유대인들이 섞여서 살아가는 다인종, 다문화 도시였습니다. 그런 환경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도 여러 인종이 모여들었고 그들의 가장 큰 관심이 방언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각처에서 이주한 다민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종족의 언어들을 구사하면서 “내가 하는 언어는 성령께서 주시는 방언이다.”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고린도 지역의 거대한 신전에서 이교도들이 지절거리는 방언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살았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은 “우리도 방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큰 능력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은사, 특히 방언에 매달리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은사의 정신을 잊은 채 방언 자체에 매달렸습니다. 바울은 그런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를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에서 은사의 본질과 사랑을 설명한 다음, 거기서 마련된 참된 은사의 기준을 근거로 14장에서 본격적으로 방언 문제를 집중해서 다루었습니다. ‘은사장’을 살펴보면 볼수록 우리는 그 속에서 현대 기독교회가 갖고 있는 은사 문제를 점점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속에서 우리 자신과 교회의 모습을 거울에서 보듯이 보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은사의 본질에서 떠난 고린도 교인들

방언을 마지막에 놓은 이유: 고린도전서 12장 중반부에 여러 가지 은사의 종류를 기록하면서 가장 먼저 “지혜의 말씀”을 썼고 마지막에 “방언 말함과 통역”을 기록했습니다(8~10절). 왜 그렇게 순서를 정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과 진리’이므로 지나치게 방언에만 매달리지 말라는 뜻에서 방언을 맨 끝에 넣은 것입니다. 12장 마지막 부분에서도 그런 의도는 반복됩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전 12:28). 이어지는 성경절에서도 ‘말씀’을 가르치는 사도가 가장 먼저 나오고 방언을 마지막에 나옵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 12:29~30). 카슨 교수는 바울이 기록한 은사의 순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가서 바울은 방언을 확연하게 평가 절하합니다…그는 의도적으로 은사 목록에서 방언을 가장 끝에 위치시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이라는 은사를 너무 높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D.A. Carson, Showering the Spirit, BakerBooks, 1987, p. 36)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현대 기독교회 속에도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무덤에서 나와 현대 기독교회를 보면서 은사의 순서를 기록한다면 어떤 순서가 나올까요? 고린도전서 12장과 비슷한 순서가 나올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는 방언하는 사람만 가득하고, 어떤 교회는 귀신 쫓는 일에 집중합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 문을 여는 순간 방언 소리가 들려오고, 어떤 교회는 교회 문을 여는 순간 안수받고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런 현상이 생길까요? 특정 은사를 지나치게 높이기 때문에 그런 교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방언이 잘 터지고 병이 잘 낫는 교회라는 소문이 나면 그 교회는 대형 교회로 성장하게 됩니다. 어떤 상품이 잘 팔리면 너도 나도 그 물건을 파는 장사꾼처럼, 어떤 은사 때문에 교회가 성장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교회들이 앞을 다투어 그 뒤를 따라갑니다. 현대 기독교회에서 가장 각광 받고 있는 교회 성장법은 기복 신앙과 방언입니다. 말씀과 진리는 사라지고 은사와 이적만 난무한 현대 기독교회를 보는 것은 너무나 큰 고통입니다.

은사를 주시는 분은 성령: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1절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은사의 본질을 설명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은사를 구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주목해야 할 성경절입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은사를 주시는 분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은사를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에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령께서 누구에게, 무슨 은사를, 언제 주실지 결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제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가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은사는 달라고 떼를 쓴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사용하고 부리시는 것이지 우리가 성령을 사용하고 부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은사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처럼 방언과 같은 특정 은사를 사모한 나머지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은사에 매달린 결과 교회 안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바둑의 급수를 나누고 태권도 도복의 띠 색깔을 구별하듯이, 은사의 등급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누가 누구보다 더 영적인 ‘고수’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영적 열등감에 시달리고, 어떤 사람들은 영적 교만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문제 때문에 신앙이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외식과 위선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새 신자가 방언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주변에서 그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은근히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도 생깁니다. 신앙 연륜이 오래된 교인들 중에 방언이 아직 터지지 않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신앙없는 사람’으로 볼까 봐 눈치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절박한 심령으로 더욱더 열심히 매달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로부터 받아야 할 은사를 흉내 내고 연습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옆 사람이 하는 방언 소리를 흉내 내려고 애쓰게 됩니다. 지금 현대 기독교회 안에는 방언 전문 강사들이 전국 교회를 돌면서 방언을 구하는 신자들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 모습을 지켜본다면 뭐라고 말할까요? 지금 교회 안에서 코미디가 벌어지고 있는데 처음에는 그 모습을 보고 웃지만, 나중에는 울게 됩니다. 영적 분별력이 있는 성도들은 은사와 방언 때문에 죽어 가는 교회를 보면서 탄식하고 통곡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속에 내 가족과 형제와 부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해결책: 바울은 12절부터 16구절에 이르는 긴 비유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설명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12,21,26,27). 눈이 발을 무시하고 손이 발가락을 무시하면 몸이 어떻게 될까요? 고린도 교회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내가 가진 은사가 네가 가진 은사보다 더 크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 절에서 “더욱 큰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라. 나는 너희에게 가장 좋은 길을 보이겠노라”(고전 12:31, 킹제임스 영어성경). 바울이 말한 “더욱 큰 은사”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바울은 12장 마지막 절에서 “더욱 큰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한 다음에 13장 1절부터 “사랑”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만을 위해서 쓴 글이 아닙니다. 12장에 나열한 은사와 방언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기 위해서 “사랑”을 설명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바울은 13장 1절부터 고린도 교인들이 하고 있는 방언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은사의 순서에서는 가장 끝에 있었던 방언이 문제를 일으키는 면에 있어서는 가장 먼저 지목되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마음에 사랑이 없은 사람들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하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모습을 지적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당신들의 눈으로 볼 때는 방언이 대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의 방언뿐 아니라 그보다 높은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어!”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무시한 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고린도전서 13장 1절을 이용해서 방언을 이렇게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방언은 천사의 말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언어이기 때문에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서점에서 방언의 중요성을 다루는 책을 살펴보십시오. 인터넷에서 방언을 강조하는 동영상을 찾아보십시오. 모두 예외 없이 고린도전서 13장 1절의 “천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의 성서적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들려오는 방언의 치명적인 결함을 바울이 계속해서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천사의 말”이라는 한마디를 가지고 무마시켜 버리고 있습니다.

 

방언이 “천사의 말”이 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

첫째, 방언을 문자 그대로 “천사의 말”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본문의 의미와 전혀 다르게 됩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성경학자들은,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 나오는 “천사의 말”은 바울이 자신의 논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2절과 3절에서도 바울의 과장법은 계속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 이런 표현들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성경은 너무나 이상한 책이 되고 말 것입니다.

둘째, 방언이 정말 하늘에 있는 “천사의 말”이라면 천사들에게 큰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장차 방언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shall cease)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수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만일 방언이 “천사의 말”이라면, 장차 방언이 중단될 때 천사들은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하늘에 가서 언어를 잃어버린 천사들을 만나서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요? 천사들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서 배워야 하나요? 문맥을 무시하고 성경절 한마디에 붙잡혀서 말씀을 해석하면 이런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방언도 그치고”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까지 방언은 그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 복음 전파를 위해 주신 방언은 “그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재강림하셔서 성도들을 하늘로 데려가시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주신 방언은 더 이상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되면 예언과 지식의 은사도 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가서도 영원히 사랑할 것입니다.

 

사랑은 진짜 은사와 가짜 은사를 구별하게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서 은사 속에 사랑이 없으면 그런 은사는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은사를 질투하지 않고, 자기 은사를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사랑이 있는 진짜 은사와 사랑이 없는 가짜 은사의 가장 큰 차이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가 아닌가”입니다. 어떤 은사를 통해서 자기의 유익을 구한다면, 그 사람의 은사는 성령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오늘날 많은 사람이 “방언을 해야 오래 기도할 수 있고, 방언을 해야 마음이 뜨거워지며, 방언을 해야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방언의 이유와 목적이 모두 “나”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은 “나”를 위해서 하는 방언은 은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 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서 “가르치는 은사”를 주시고, 환자를 치유하기 위해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시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방언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확신과 자기 경건과 자기 감정을 위한 은사는 하늘로부터 온 은사가 아니며, 사랑이 없는 은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은사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정신이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 은사를 받은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고 높이기 때문에 더 밝은 빛이 왔을 때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체험을 강조하면서 말씀을 소홀히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사대”보다는 “내가 체험한 것”이 더 중요한 사람들은 신비주의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은사와 방언에 매달리면 체험 위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 위에 체험이 있게 됩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요 14:15).

13장의 결론: 바울은 “사랑장”을 마치면서 다시 한 번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12장과 13장을 마친 다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빠져 있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다루기 위해서 14장으로 넘어갑니다. 14장으로 들어갈 때 바울은 어떤 말씀으로 시작할까요? “사랑을 구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은사와 방언의 시작과 끝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선으로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을 바라보아야 오해가 풀리고 문제가 해결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방언의 난발로 혼돈에 빠진 고린도 교회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14장은 “방언장”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을 따라서 은사를 구하라”는 말로 14장을 시작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는 사랑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요청했습니다. 왜 예언에 관심을 가지라고 했을까요? 구약 시대 예언하는 은사를 받은 선지자들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예언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봉사로 인해 교회는 하나님의 뜻과 교훈을 얻었습니다.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4).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은사의 참된 정신을 잃어버림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게 되었고,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방언 대신에 “예언을 하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5).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이 문제가 되었던 이유는, 고린도 교인들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다문화, 다민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3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고린도 시는 국제항구도시이고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 지역에서 가장 주목받을 수 있는 은사는 방언이었습니다. 또한 고린도 지역의 거대한 신전에서 지절거리는 방언으로 예배드리는 이교도들에게 고린도 교인들은 “우리도 방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해서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큰 능력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은사, 특히 방언에 매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방언에 매달린 고린도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까요? 14장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 문제를 지적하고 책망하기 위해서 기록된 장입니다. 이제부터 나누는 말씀이 현대 기독교회가 갖고 있는 방언에 대한 오해와 혼돈의 뿌리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에서 살펴보았던 은사의 본질과 참된 사랑을 기초로 해서 고린도 교회의 방언 문제를 살피게 되기를 바랍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지지하는 책들 중에서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가장 중요한 성경절로 제시하지 않은 책은 “단 한 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이 성경절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성서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있어서 기둥과 같은 성경절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만 올바로 해석하면 방언 문제 95% 이상이 해결됩니다.

바울은 왜 고린도 교인들이 방언을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만 하라고 했을까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통역 없이 혼자 방언하는 것이 하나님과 자신만 아는 어떤 신비한 비밀을 서로 나누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14장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판단할 때 우리는 2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 방언이 은사의 본질과 사랑에 기초해서 복음 전파와 봉사로 사용되고 있는가?

2.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해서 책망하고 있는가? 칭찬하고 있는가?

2절은 칭찬일까요? 책망일까요? 만일 이것을 칭찬으로 받아들이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하면서 홀로 황홀경에 빠져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12장부터 시작해서 14장이 끝날 때까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칭찬한 적이 없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하던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2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 전체 흐름을 무시하고 2절만 뽑아내서 읽으면, 큰 오해를 하게 되고 결국 바울의 책망을 칭찬으로 왜곡하게 됩니다. 물론, 바울이 “방언하기를 구하라”는 권면을 했지만, 그것은 방언이 분명히 성령의 은사 중 하나였기 때문에 원칙적인 측면에서 했던 말씀이고, 통역 없이 하는 방언에 대해서는 항상 책망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으로 2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unknown tongue)으로 말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하나니 아무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나 그가 영안에서 신비들을 말하느니라”(고전 14:2)

바울은 왜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이 통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절 이후에 바울은 계속해서 “통역하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통역자가 없으면 교회에서 방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고전 14:28). 한국 사람이 미국인 교회에 가서 한국어 방언으로 설교하면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로 남을 뿐입니다. 통역자가 없으면 설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절을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너희가 아무리 방언을 해도 통역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 주변에 사람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너 혼자서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너희의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들이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너희가 통역 없이 방언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알아들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 혼자서 하나님께 신비를 중얼거리는 것이지 사람들과는 상관이 없다!”

2절은 매우 심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모든 은사는 사람을 향해서 이루어지는데, 방언만 하나님을 향해서 신비를 나누는 것이라고 믿는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2절 말씀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해서 신비한 분위기에 빠지고 마음을 뜨겁게 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방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직통으로 연결해서 신비를 이야기하는 체험이 아닙니다.

바울은 2절의 내용을 한 번 더 반복하면서 강조했습니다. 2절에서는 바울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하나니 아무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나 그가 영안에서 신비들을 말하느니라”라고 표현했는데, 9절에서는 똑같은 말을 “허공에 말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전 14:9).

방언도 은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 “복음 전파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로부터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 목적에서 벗어나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는 것은 홀로 황홀경에 빠져서 즐기는 “감정 놀이”일 뿐입니다. 2절 이후의 말씀을 살펴보면 2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4)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은사와 방언에 대한 기준으로 제시했습니다(고전 13:4).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는 이러한 기준과 상반되는 듯한 말씀이 나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오늘날 “방언”을 강조하는 모든 책, 모든 강의는 고린도전서 14장 4절을 이용해서 “방언은 자기의 덕, 즉 개인의 경건을 위한 도구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사랑이 있는 은사는 자기를 세우지 않고 교회를 세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사는 모두 복음 전파와 봉사를 위해서 주셨는데, 방언만 “자기의 덕을 세우”라고 주셨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바울은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은사의 기준을 스스로 뒤집는 것이 됩니다. 말씀의 일관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늘날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방언을 해야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고, 경건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외롭고 힘들어도 방언을 하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기 때문에 영성을 세울 수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방언을 하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오늘날의 방언은 철저하게 “나”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자기 덕을 세우”라는 말이 정말 그런 뜻일까요?

고린도전서 14장 4절은 번역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덕”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원문의 의미는 “자기를 세우다, 자기를 나타내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원문에는 “알지 못하는”(unknown)이라는 단어와 “그러나”(but)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영어성경은 4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운다(나타낸다).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운다”(4절). “He that speaketh in an unknown tongue edifieth himself; but he that prophesieth edifieth the church”(1 Cor 14:4). 이 말씀은 “알지 못하는 방언”을 해서 자기를 높이라는 뜻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방언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책망의 말씀을 “자기를 높이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한국 교회에 방언에 대한 깊은 혼돈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책망했을까요? 고린도 교회는 통역 없이 방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방언으로 가르치고 설교했습니다. 그런 태도는 고린도 교회가 다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없고, 사랑을 기초로 한 방언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상대방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방언하는 것은 단지 “내가 방언할 수 있다.”는 영적 우월감과 자기 만족을 즐기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리새인처럼 “나타내고자 하는 정신”으로 방언을 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이 제시한 해결책이 무엇일까요? “통역”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가장 강조한 메시지는 “방언은 반드시 통역하라.”입니다. 그는 14장에서 5번에 걸쳐서 방언은 통역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통역되지 않는 외국어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5)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 14:12~13)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순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고전 14:27)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고전 14:28)

방언이 통역되지 않으면 복음이 전혀 청중에게 전달될 수 없습니다. 단지 “내가 방언을 할 줄 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데서 끝나게 됩니다. “자기의 덕을 세우”는 데서 끝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주신 방언이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통역자가 없는 고린도 교회에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는 것보다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을 하라고 충고했던 것입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교리를 가르치고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고전 14:1~2, 5~6).

 

“내가 만일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an unknown tongue)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spirit)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킹제임스 성경)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가리키면서 바울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기도했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만일”이라는 가정법으로 이 말씀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 자체가 은사의 본질에 어긋나기 때문에 가정법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14절의 전반부는 “내가 만일 고린도 교인들처럼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기도하면….”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책망을 칭찬으로 왜곡함으로써 이상한 오해가 생겼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한 구절만 떼어서 보면 안 됩니다. 문맥 속에서 그 의미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이 14절을 떼어 내어 이런 식으로 받아들입니다. “방언 기도는 영으로 하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는 나의 깊숙한 진심을 드러내는 것이 방언 기도입니다. 방언으로 하지 않으면 5분도 기도하지 못하는데, 영으로 기도하니까 몇 시간을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내 영은 나의 이성과 마음이 알 수 없는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마음은 모를지라도 내 영은 그 모든 비밀을 아버지께 털어놓고 싶어 합니다.”

“영으로 기도해도 마음에는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어지는 15절에서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 이 말씀에서 우리는 바울이 “영”과 “마음”을 동일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영으로 기도하”는 것은 곧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고, “영으로 찬미하”는 것은 곧 “마음으로 찬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마음”입니다. 영과 마음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영으로 기도하면 마음에 열매가 맺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교회에서 청중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기 때문에 흡족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아무리 방언으로 기도해도 알아듣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 소용없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과 “영”의 관계에 대해서 리처드 개핀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바울의 서신에서) ‘마음’과 ‘영’은 근본적으로 동의어이다. 아니 적어도 이 두 용어는 인격의 서로 대치되는 별개의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성경은 전인을 다루고 있다. 인간이 마음과 뜻과 혼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새로워진 마음으로 자아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다루고 있다.”(리처드 개핀, 성령 은사론, 91~93쪽).

영으로 기도하는데 마음에는 열매가 맺히지 않는 상태란 실제적으로 어떤 상태일까요? 최면이나 환각 또는 마취 상태가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자기가 하는 것을 자신이 모릅니다.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오늘날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정말 ‘영으로 기도하는데 마음에는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최면이나 환각 또는 마취상태로 기도하고 있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방언을 하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의도하지 않는 소리나 음을 냅니다. 또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방언을 했던 사실조차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18~19절에서 14절의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보여 주면서 다시 책망합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unknown tongue, 알 수 없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8~19).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나는 소아시아와 로마를 다니면서 온갖 방언으로 기도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래서 나는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고린도 교회 교인들보다 더 많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 받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영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비밀을 만 마디 하는 것보다 깨달을 수 있는 말 다섯 마디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

 

말씀이 위에 있습니까? 체험이 위에 있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이 방언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은 정말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에 대해서 오해하면 이상한 신비주의로 흘러가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만나야 할 하나님을 느낌을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으로 오해하면, 말씀은 사라지고 체험만 남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가르침보다 내가 느끼는 체험이 중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운 사실은, “내가 이렇게 느꼈다. 내가 이렇게 체험했다.”에 집중하게 되면, 내 경험에 맞추어서 말씀을 재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장의 해석이 이상하게 왜곡된 것입니다. 내 경험이 말씀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말씀을 내 체험 수준으로 끌어내리게 됩니다. 결국, 입으로는 말씀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체험을 가장 높은 위치에 놓게 됩니다. 체험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을 높이는 대신에 자신을 높이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체험했고 내가 이렇게 느끼는데 왜 나를 말씀으로 제한시키느냐?”고 항변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말씀과 체험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체험과 진리 중 어느 것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가를 결정하는 전쟁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체험이 말씀을 밀어내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말씀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의 체험을 강조하는 신앙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체험이 말씀을 밀어냄에 따라 각 교파가 갖고 있는 신앙의 정체성이 사라지게 되었고, 마르틴 루터의 정신과 요한 웨슬레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구별하는 중요한 잣대가 “이 교회는 방언을 하는데 저 교회는 방언을 하지 않는다.”가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뢰아인들처럼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지 않으면 “느낌과 체험”이라는 미혹에 넘어가는 때입니다(행 17:11). ■

 

2부, 어느것이 진짜인가요? 사도행전 2장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 방언

서점에 있는 방언에 대한 책들과 인터넷에 있는 방언에 대한 논란을 정리해 보면, 한가지 분명한 흐름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방언에 대한 의견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방언에 대한 두 가지 견해는 너무나 반대되는 주장이고, 근거로 제시하는 성경절도 전혀 다르기 때문에 결코 합쳐질 수 없는 평행선처럼 보입니다.

1. 외국어 방언: 기독교회 안에 “방언은 외국어다.”라는 견해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서적 방언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오순절 때 제자들이 받았던 방언이 진짜라고 주장합니다. 방언이 외국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사도행전 말씀에 집중합니다.

2.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늘의 언어다.”라는 견해가 있는데,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방언은 거의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성서적 방언은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이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하던 방언이 진짜 방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성서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14장 말씀에 집중합니다.

두 가지 견해 중 어떤 것이 진리일까요? 첫 번째 주장에 대해서는 1부에서 살펴보았으므로 2부에서는 두번째 견해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부족한 인간의 체험을 낮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는 성도들은 이 기사를 통해서 더 밝은 빛과 진리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지혜와 성령의 감동하심이 독자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고린도를 알아야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보인다!

고린도 교회에서 하던 방언을 살펴보려면, 고린도 지역과 그곳에 세워진 교회 형편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정말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던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지적했습니다. 교회 내의 분쟁, 세속화, 거짓 복음의 침투, 상상을 초월한 성적 타락, 신도들 간의 소송 사건, 결혼 문제, 여자의 복종, 성찬식 문제, 은사와 방언에 대한 문제, 부활의 부정, 등등. 고린도 교회가 갖고 있던 문제 하나 하나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지금처럼 타락하고 세속적인 사회에서도 고린도 교회처럼 문제가 많은 교회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 고린도 교회에는 그렇게 많은 문제가 있었을까요?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고린도 지역이 갖고 있는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고린도 같은 곳에서 교회의 순결을 유지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고린도는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처럼 행동하다.”라는 말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고린도”라는 단어가 동사로 쓰였을 때는 “창녀와 관계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린도 시 중앙 높은 곳에는 아프로디테(라틴어로는 ‘비너스’) 신전이 있었는데 그 신전에는 1,000여 명의 여사제들이 예배의식으로 성욕을 불태웠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 시에 있던 여사제들의 음란한 종교 의식에 대해서 성경주석가 크리스 웰 박사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고대 고린도 앞에는 장엄한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는데 사랑과 미의 여신이 성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신전에는 여사제들이 이교적인 음란한 종교 의식을 집전함에 따라 무아경의 광란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음란한 광란에 빠진 여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였는데 그런 광경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흔한 것이었다.”(Dr. W.A. Criswell, The Batism, Filling & Gifts of the Holy Spirit, Ministry Resources Library, 1966, p.113)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 당시 고린도 시의 거리를 활보했던 남창들을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긴 것입니다.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고전 11:14).

고린도 시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이방 종교의 방언이 창궐하는 곳이었습니다. 이교의 방언이란 광란의 상태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주문과 지절거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회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도 그 뜻을 모르고, 듣는 사람들도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방언을 하면서 “우리가 하는 방언은 고린도 교회에서 했던 방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사도 바울은 그 당시 고린도 시를 휩쓸고 있던 이방 종교의 여사제들이 마약을 태우면서 하던 무아지경의 방언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우상숭배자들의 지절거림과 같은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인정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두 가지는 분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사도 바울은 단 한 번도 고린도 교인들이 하던 방언이 이교도들이 하는 방언이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고 지적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로 주어진 방언을 잘못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책망하면서 문제를 고치라고 했습니다.

2.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하던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에서 단 한 번도 고린도 교인들이 하던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칭찬하거나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 방언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린도전서 14장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에 대해서 어떤 말을 했고, 무엇을 지적했는지 독자 여러분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교회의 “알 수 없는 방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매우 부정적이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5절)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6절)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7절)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9절)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10,11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13절)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14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16절)
“너는 …. 잘하였으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17절)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9절)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22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23절)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순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27절)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28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33절)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린도전서 14장 40절-마지막 절)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방언을 하되 통역을 해서 올바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방언은 하늘의 언어이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고린도 지역의 이교도들은 무아지경 속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했는데, 고린도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무질서하게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면서 예배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라.”고 훈계한 내용이 고린도전서 14장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왜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게 했는가?

고린도 지역에는 두 개의 유명한 국제 항구가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여러 민족과 인종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다양한 외국어가 사용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도 여러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고 예배에 혼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통역이었습니다. 외국어로 예배드리는데 통역이 없다면 어떨까요? 미국에는 여러 인종이 모이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는데 통역이 없으면 예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설교자가 영어로 설교하면 한국 사람을 위한 통역이 있어야 하고, 중국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을 위한 통역이 있어야만 설교와 기도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언어로 예배드릴 때보다 여러가지 배려가 필요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통역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5,9,10,11,13절).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데 통역해 주는 배려가 없었습니다. 통역이 없었기 때문에 방언을 해도 알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 방언을 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28절). 그뿐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방언을 하니까 예배가 무질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을 해도 질서를 지키면서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순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27절).

독자 여러분, 이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보이십니까? 바울은 만약 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어를 사용할 때는 통역을 해야 하는데, 통역하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차라리 조용히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묵상으로 교통하라고 조언했습니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28절). 바울이 왜 이런 조언을 했을까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무질서하게 예배드리는 것은 경건한 예배 분위기를 해치는 일이며,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와 예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을 책망하는 말씀의 keyword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통역하지 않으면…유익하지 않으며…음을 분별하지 않고…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않으며…허공에다 말하고…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해서 야만인이 되고…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며…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여 하지 말고…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며…순서를 따라 통역하고…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교회에서 믿은 자들끼리 모여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니”(22절). 비록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으로 아무리 많이 설교하고 기도할지라도, 듣는 청중들이 이해할 수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통역을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5, 19절).

오늘날 기독교회에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방언이라고 부릅니다. 방언하는 사람도 그 뜻을 모르고, 듣는 사람도 그 뜻을 모릅니다. 뜻을 모른 채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가 응답되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고린도 교인들이 했던 방언이라고 믿으면서, 방언은 하늘의 언어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래전부터 기독교회가 치명적인 혼돈 가운데 빠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깊은 혼돈 속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교도의 신전에서나 들을 수 있는 “지절거림”이 수많은 교회들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정말 두려운 상황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인터넷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방언은 하늘의 언어입니다. 천사가 인간의 몸을 빌려서 하는 말입니다. 사람마다 방언이 달라지는 이유는 각기 다른 천사의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언의 소리가 달라지고 음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방언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일명 ‘랄랄라 방언’부터 찬양 방언, 신음처럼 들리는 방언, 아름답게 들리는 방언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방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을 통해서 나온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황홀하기 때문에 무슨 방언을 했는지 기억도 못합니다. 듣는 청중도 그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하늘의 언어이고 천사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하늘의 언어를 즐기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구원에 대한 확신을 붙잡으면 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했던 방언을 2천 년이 지난 후에 내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 그들이 했던 하늘의 방언을 나도 할 수 있어서 감격하게 됩니다. 방언이 없으면 오랫동안 기도할 수 없고, 내 영혼이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방언이 없으면 경건의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방언을 하면 모든 고통과 문제를 잊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인간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주셔서 하나님과 비밀을 나눌 수 있게 해 주신 은혜가 너무나 감사합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까? 얼마나 바울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생각입니까! 성경에는 오직 하나의 방언이 있는데, 그것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이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방언이며, 설교자와 듣는 청중이 다른 언어를 사용할 때를 위한 방언이고,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기 위한 방언입니다.

 

칭찬이 아니라 책망

우리는 바울이 단 한 번도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을 칭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문제를 지적하고 책망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에서 총 14권의 편지서 중 고린도전서에서만 방언을 다루고 있는데, 고린도 교인들이 방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은 현대 기독교회가 하는 방언이 성서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방언하는 모습을 보면서 책망했습니다. 왜 책망했을까요?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이 교회 안에 모여서 자기들끼리 방언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교인들이 모여서 상황에 맞지 않게 방언을 난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인데, 교회 안에서 믿은 자들끼리 모여서 서로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면서 예배드리는 모습이 바울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까요? 바울은 “미쳤다.”고 했습니다.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23).

 

오직 하나의 방언

우리는 사도행전의 방언(외국어)이 고린도 교회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도 오순절에 제자들이 했던 처음 방언과 동일한 ‘외국어’였습니다. 성경에는 오직 하나의 방언만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동일한 방언입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이 있고,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Q. “원래 방언은 오순절에 내린 방언밖에 없었지만, 그 후에 새로운 방언이 추가되어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생기게 된 것이 아닙니까?”

A. 정말 새로운 방언이 추가되었을까요? 성경은 오직 하나의 방언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AD 57년에 기록한 편지서이고, 사도행전은 AD 62년에 누가가 기록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이 고린도전서보다 나중에 기록되었는데, 적어도 사도행전 시대까지 방언의 은사는 ‘외국어’였습니다. “내(베드로)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고넬료와 집안사람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오순절)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 11:15).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이 받은 방언은 제자들이 “처음”(오순절) 받았던 방언과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아서 예전에는 몰랐고, 사용하지 않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44~46). 이방인 고넬료는 로마 사람이었고, 베드로는 유대인으로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행 10:1). 그러나 방언의 은사가 내리자 그곳에 있던 유대인들과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임을 들”었다고 기록했습니다(행 10:46). 성경이 말하는 방언의 은사는 외국어입니다! ■

 

1부, 오순절 방언은 어떤 방언이었나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없었으면 오늘날 기독교회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능력이 초대 기독교회에 퍼부어지고 방언 은사와 능력을 받은 사도들과 교인들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으면 기독교회가 세워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과 은사를 강조하는 교회들이 “오순절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오늘날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는 방언의 근거를 사도행전 2장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찾는다는 사실입니다. 방언을 강조하는 수많은 서적들도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방언의 근거를 사도행전에서 찾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은 외국어인데,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방언은 외국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방언이 오순절에 주어진 이유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있는데, 그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방언의 은사를 내리기 위해서 오순절까지 기다리셔야만 하셨을까?” 사도행전 2장 5~11절에 그 이유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때(오순절)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행 2:5)

오순절이 되자, “천하 각국”에 흩어져 살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은 오순절을 마치면 다시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게 됩니다.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이며, 그분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복음을 “천하 각국”에 전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오순절이었습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speak in his own language, 자신의 언어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행 2:6)

미국에 이민 간 한인 교포2세, 3세들은 모국어를 잃어버리고, 영어가 자신의 언어가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천하 각국”으로 이주한 유대인들도 세대가 바뀌면서 모국어를 잊어버리거나 매우 서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하늘로부터 방언의 은사가 내려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셔서 여러 나라에서 모인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언어로 설교를 들을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그 장면을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제자들은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외국어를 배웠거나 습득했던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유창한 외국어를 구사해서 복음을 전하자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된 것입니다.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행 2:7,8)

갈릴리가 고향인 제자들이 여러 나라의 말로 설교를 하니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놀랐던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주셨던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었던 방언이었습니다. 여러 나라들로부터 온 청중들이 제자들의 설교를 자신의 고향 말로 알아들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제자들이 몇 개 나라의 방언으로 복음을 전했을까요?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리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 2:10,11)

중동과 소아시아와 유럽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과 유대교회를 받아들인 이방인들이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순절을 택하셔서 방언의 은사를 제자들에게 내리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날 자신이 방언의 은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과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서 “방언”이라는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말씀에 따르면 적어도 15개 이상의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 때문에 오순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그들이 듣고 깨달은 복음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방언이 반드시 소통할 수 있는 “언어”이어야 하는 이유는 방언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복음 전파”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증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이 모두 외국어라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들려오는 방언의 모습을 살펴보면, 혀가 말리면서 나오는 ‘랄랄라 방언’을 하거나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를 반복적으로 냅니다.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 교회에서 들려오는 방언 중 어떤 것도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외국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방언의 예증을 살펴보면 방언 은사가 외국어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고넬료가 받은 방언 은사: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44~46)

사도행전 10장은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전도하는 장면입니다. 이방인 고넬료는 로마 사람이었고, 베드로는 유대인으로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행 10:1). 그래서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났을 때, 두 사람 사이에는 언어 장벽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령이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에게 내려졌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했습니까? 그곳에 있던 유대인들과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임을 들”었다고 기록했습니다(행 10:46).

베드로도 고넬료와 집안 사람들이 받은 방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내(베드로)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고넬료와 집안사람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오순절)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 11:15).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이 받은 방언은 제자들이 ‘처음’(오순절) 받았던 방언과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전혀 몰랐고, 사용하지 않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의 방언: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이 12명의 에베소 사람들에게 전도했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6). 바울은 사도들 중에서 가장 많은 교육을 받은 사도였으며, 가장 많은 선교 여행을 했습니다. 성령께서 12명의 에베소 사람들에게 임했을 때에 바울은 그들이 방언을 하고, 예언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이 어떤 방언을 받았을까요? 로마 제국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방언으로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언어를 받아야만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는 여러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그들이 서로 소통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는 방언이 주어지지 않은 이유: 사도행전 4장에도 2장의 오순절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1, 4, 31).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였고 장소가 흔들리면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는 방언의 은사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곳에서는 방언의 은사를 주지 않으셨을까요? 그곳에는 다른 언어를 쓰는 외국인이 없고, 유대 백성과 유대 지도자들만 모여 있었기 때문에 방언이 필요없었습니다(행 4장).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은사 때문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외국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복음 전도자들에게 성령의 큰 능력과 함께 방언의 은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주의 종들이 예수의 증인이 되어 전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Q. “방언은 신약 시대에 처음 나타난 것입니까? 아니면 구약 시대에도 방언이 존재했었습니까?”

A. 방언을 통한 성령의 역사는 구약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방언은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사용하던 언어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이방 민족에게 보내서 이방인의 방언(외국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이 복음을 이방인의 언어로 전했기 때문에 그들이 말씀을 듣고 이해했지만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서도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사 28:11~12).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인용해서 고린도 교인들이 하던 “알 수 없는 방언”을 책망했습니다. “율법(이사야서)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고전 14:21~22).

 

Q. “사도 바울이 ‘방언은 불신자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가요?”

A. 사도 바울은 방언의 용도에 대한 분명한 지침을 남겼습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고전 14:22). 예수께서는 복음 전파를 12제자들 어깨 위에 올려놓으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능력으로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여러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없었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외국어)를 제자들에게 내려 주심으로써, 복음이 모든 민족과 족속에게 전파될 수 있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갈릴리 사람인 제자들이 유창한 외국어로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자 방언은 불신자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이적이 되었습니다. 이방인들 마음속에 방언은 복음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한 번 설교에 수천 명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38, 41).

그러나 오늘날의 방언은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전도용이 아니라 이미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 확신용으로 사용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의 용도가 변경되고 말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제2부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서론, 이런 고민, 해 보셨습니까?

얼마 전에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교회를 8년 동안 열심히 다녔습니다. 교회 목사님께서 방언을 하는 것이 성령 받는 것이라고 하셔서 새벽기도 다니면서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방언이 터졌습니다. 처음에는 “랄랄라” 방언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날마다 “주여! 주여! 주여!” 삼창하면 “와카라바라 샤카말라~~니 카마랄 쌀랄라라~~”라는 소리가 나오면서 혀가 돌아갑니다. 무릎 끓고 한 시간, 두 시간 기도를 해도 계속 혀가 돌아갑니다. 혀가 돌아가는 것인지 제가 혀를 움직이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방언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방언을 하고 나면 제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 주신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제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목사님께서 방언은 천국의 말이라고 해서 날마다 열심히 방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제 마음에 고민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주변에 있는 몇몇 분들이 저를 걱정하면서 지금 기독교회에서 하는 방언은 대부분 가짜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진짜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라고 합니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외국어를 오순절 때 제자들에게 은사로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외국어를 전혀 몰랐던 사도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고 나가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이 준 방언의 은사를 보면서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제가 하고 있는 방언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했던 방언이 아닌가요? 만일 사도들이 했던 방언이 제가 하는 방언과 다르다면, 날마다 제 입에서 나오는 방언은 무엇인가요? 정말 혼돈이 됩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꼭 가르쳐주세요!”

순복음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방언과 은사의 체험을 강조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운동은 ‘순복음’(full gospel, 완전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힘차게 전파되었습니다. ‘순복음’이라는 이름은 기독교회가 사도 시대 이후부터 줄곧 80% 정도의 불완전한 복음에 머물러 왔음을 뜻합니다. 기존 교회들이 교리를 가지고 있지만, 뜨거운 체험이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 ‘순복음’이 갖고 있는 이름의 의미입니다. ‘순복음’을 전하는 교회들은 사도 시대 교회에게 주어졌던 성령의 폭발적인 은사 체험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방언은 달라고 구해야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라는 방언 신학을 앞세워서 기독교 전체를 흔들었습니다. 그들의 설교와 은사 체험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순복음’에 열광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교단에서 뜨뜻미지근한 믿음과 형식적으로 반복되는 예배에 지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체험과 은사를 강조하는 ‘순복음’이야말로 초대 교회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에 힘입어서 ‘순복음’을 전하는 교회들은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면서 초대형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래전에는 기독교계가 이러한 현상을 위험한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순복음’을 전하는 교회들에서 나타나는 방언과 이적을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더 나가서 그들을 이단시하는 분위기까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기독교계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거의 모든 교파에서 방언과 이적에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서점에서 방언에 대한 책들이 다량으로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회에서는 체험만 같으면 교리는 달라도 문제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힘 있게 올라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카톨릭교회 안에도 오순절파 카톨릭을 중심으로 방언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회와 카톨릭교회가 하나로 연합하는 데 있어서 방언보다 더 좋은 매개체는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학생 기독교 단체나 청년들도 방언과 은사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중국이나 아프리카 같은 선교지에서도 방언과 신유의 열풍이 뜨겁게 불고 있습니다. 선교지에서 기존에 있던 교회와 마을이 방언과 신유 은사를 강조하는 선교사들에게 통째로 접수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교회는 방언을 하는 교회들입니다.

방황하는 성도들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들이 방황하는 이유는, 교회가 그들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입니다. 매 주일 열심히 설교를 듣는 분들입니다. 헌신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영적 공허함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기도원에 가면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간절한 마음으로 그곳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진리를 모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적과 은사에 매달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오랜 세월 교회에 다녔지만, 참된 중생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고, 말씀을 모르니까 답답해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데 만날 수 없으니까 방언과 치유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고민하는 성도들

오늘날 수많은 교인들이 방언을 합니다. 그중에서 스스로에게 정직한 그리스도인은 어쩔 수 없이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나는 교회에서 뜨겁게 성령을 체험합니다. 가슴에서 뜨거운 불도 나오고, 이 세상을 떠난 것 같은 황홀한 느낌도 느꼈습니다. 그래서 목이 쉬도록 찬송을 불렀고 하늘의 방언을 토해 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모든 것이 전과 같았습니다. 변화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세상과 돈을 사랑하고 있으며, 미워하던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고, 정욕이 속에서부터 끓어올랐습니다. 분명히 조금 전에 하늘의 언어로 방언을 했는데, 왜 내 마음과 감정과 삶은 변화되지 않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방언을 할 때는 뜨겁지만, 얼마 지나면 다시 허전함이 몰려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용한 시간에 양심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이런 음성을 듣게 되면 다음과 같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정말 성령을 받은 것일까? 정말 구원받은 것일까? 왜 교회에 가면 믿음이 하늘 높이 올라가는 것 같은데, 집에 돌아오면 똑같은 생활이 반복되는 것일까? 왜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는 정신이 그대로 있고, 왜 아직도 경쟁과 시기에 붙잡혀 있으며, 왜 아직도 자랑과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세상에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를 끌고가는 것일까? 왜 아직도 세속적인 일들이 재미있는 것일까? 교회에서 나를 황홀하게 했던 감정이 왜 이렇게 빨리 사라지는 것일까? 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쉽게 흔들리는 것일까? 왜 양심의 소리가 자꾸 나를 책망하는 것인가? 정말 나 같은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주시고, 방언을 허락하시는 것인가?”

놀라운 사실은, 성경 말씀과 예언을 모르고, 회개와 의의 열매가 맺히지 않았으며, 심지어 교회 다닌지 며칠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방언과 은사를 체험하는 사람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 주변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배우자 몰래 부적절한 관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방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마지막 사명>은 이번 호에서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들려 나오는 방언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정직한 양심으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영혼들은 이번 호를 통해서 이 시대를 위한 진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

11호를 시작하며…

요즘 이런 고민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저에게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나보다 신앙 연륜이 깊지 않고, 교회 나온 지도 얼마 되지 않는 교인의 입에서 방언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은근히 질투가 생기고 다른 교인들 보기도 부끄럽습니다. 방언을 정말 하고 싶은데 왜 저에게는 방언이 터지지 않을까요?”

우리 주변에서 방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방언이 교파를 초월해서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심방 중에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질문도 방언과 신유에 대한 질문이라고 합니다. 오랫동안 신앙을 해 온 사람들은 물론이고 교회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까지 방언을 하고 특별한 이적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일들이 흔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은사와 기적을 기이하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지금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교회와 세상 그리고 우리의 양심이 지금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이런 일들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 성경은 방언과 신유 은사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만일 방언과 같은 기적이 성령의 역사이고 하늘에서 내려 온 능력이라면 우리는 지금 교회를 휩쓸고 있는 은사주의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도 신약 시대의 교회처럼 은사와 기적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방언과 초자연적인 현상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기적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언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중간에 서 있을 수 없습니다. 받아들이든지 거절해야 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현대 기독교회에서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방언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령께서 독자 여러분의 마음을 진리로 인도해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

<마지막 사명>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