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교회를 선택하는 기준

여러분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어떻게 선택하셨습니까? 많은 분들이 교회의 프로그램, 목사님의 인품, 교인들의 사랑, 집과의 거리, 자신과 친한 사람들이 있는지의 여부, 교인이 많은지의 여부, 어린이와 청년 프로그램이 있는지 등을 기준으로 교회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교회를 선택하는 진정한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매우 분명한 지침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

 

성도 여러분, 교회는 진리의 터가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참석하는 유일한 이유는 부모님이 정해주신 교회이기 때문도 아니요, 우리 가족이 다니기 때문도 아니요, 집 근처이기 때문도 아니요, 우리가 평생 다녔기 때문도 아니요, 그곳에 다니는 사람들이 좋기 때문도 아니요, 그 교회 목사님의 인격이 좋기 때문도 아닙니다. 내가 그 교회를 다니는 유일한 이유는, 교회가 성경 말씀과 진리를 정확하게 가르치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다니는 교회가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고 참된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회를 찾아야만 합니다. 이것 이외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말씀은 우리의 구원과 영생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 수백 개의 교단과 교파가 있고 저마다 다른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 속에서도 진실된 마음으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교회를 찾을 수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doctrine, 교리)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l7)

 

이것이 교회를 찾는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행하기 원한다면, 그는 “교훈”, 즉 성경의 교리(doctrine)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 나는 진리에 대해서 내 마음을 완전히 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내게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르겠습니다. 혹시 내 생애에 원치 않는 변화와 희생이 생길지라도, 나는 진리를 위해서 기꺼이 변화와 희생을 감수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찾는 자들에게 분명한 약속과 보장을 해주셨습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사탄의 공격 목표는 항상 ‘남은 자손’이다

여러분이 진리를 정말 알기 원하고, 진심으로 진리를 추구하며, 하나님께서 진리를 보여주실 때 기꺼이 여러분의 생각과 사상과 생애를 고치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진리를 찾게 될 것이고 그것을 붙잡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가납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spirit, 성령)과 진정(truth, 진리)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요한계시록은 마지막에 사탄의 공격 목표가 될 교회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각 시대마다 사탄은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웠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진리를 간수하고 보관하는 남은 자손의 역사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 가정에 족보가 있듯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분명한 족보가 존재하는데, 성경은 그들을 “남은 자손”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각 시대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펼쳐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의 남은 자손도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남은 자손의 후손인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남은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알아야 하고 찾아야 합니다.

 

남은 자손의 역사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 그들이 이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선고를 내리신 즉시부터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자손과 뱀의 자손들이 서로 원수가 될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뱀, 사탄)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창 3:15)

 

사탄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서로 원수가 될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들 사이에 적개심을 두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기독교 역사는 여자의 후손과 사탄의 후손들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이 있어온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과 사탄의 백성 사이에 전쟁이 생길까요? 사탄은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뜨리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역사에서 핍박과 순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은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탄은 가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배드리는 아벨을 미워하여 죽이게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남은 자손은 하나님께 너무나 소중한 백성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관하고 전수하며 하나님을 위해서 싸우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사탄이 여자의 남은 자손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시대에 사탄의 공격 목표가 될 성도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마지막 시대에 사탄이 공격하는 자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성경은 마지막에 사탄과 싸우는 여자의 남은 자손의 특징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특징은 마지막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강요될 짐승의 표 환난에서 정확하게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12)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하는 기준은 “누가 계명을 지키고, 누가 계명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갖고 있는가?”입니다. 그런데 왜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 여자의 남은 자손의 특징을 말하면서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말했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마지막 여자의 남은 자손은 예수님을 머리로만 인정하고 믿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로 받아들인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이해만 하는 자들이 아니라 말씀대로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목숨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높이는 자들, 먹고 사는 일보다 주님의 명령이 더 중요한 자들, 그런 성도들이 참된 하나님의 남은 자손들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마지막 여자의 남은 자손은 중세기에 무너진 말씀과 계명을 완전하게 회복시키는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회는 중세기 천 년 동안 수많은 진리를 무너뜨렸고 십계명을 바꾸었습니다. 심지어 개신교회까지도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천주십계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마지막 여자의 남은 자손을 말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규정한 데에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각 시대마다 남은 무리는 항상 존재했는데, 그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떠났고 진리를 버렸습니다. 그것이 구약성경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오직 남은 자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롬 9:27)

 

여자의 남은 자손들만 하나님께 돌아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시대의 남은 자손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 그대로를 따르기로 결정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남은 자손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마지막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모든 오류와 거짓을 밝히는 기준점이 됩니다.

 

호소의 말씀

한번은 세 목자가 각각 양을 몰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급히 지붕이 있는 창고로 양들을 모두 넣었습니다.

잠시 후에 비가 그치고 해가 쬐기 시작하면서 목자들은 자신의 양들을 불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양들을 불러냈을까요? 각자의 목소리로 양들을 불렀습니다. 세 목자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창고에서 양들이 나오는데, 양들이 어떻게 나왔을까요? 양들이 정확하게 세 그룹으로 나뉘어서 자기 목자를 찾아갔습니다. 한 마리도 머뭇거리거나 방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는 데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양들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양들은 성령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눈이 있는 양들은 진리를 분별할 것입니다. 누가 목자이고 누가 삯꾼이고 강도인지 압니다. 누가 충성스런 문지기인지 압니다. 말씀과 영을 분별하는 양들은 사탄의 미혹을 피해서 양의 문으로 들어가서 편히 쉬게 됩니다. 양의 문으로 들어간 양들은 충분한 꼴을 먹고 시원한 물을 마시게 됩니다. 점점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경험은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물론, 진리를 분별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거기서 어긋나면 강도와 절도와 삯꾼을 만나게 됩니다. 들짐승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메지 않은 양들은 결국 진리를 포기하고 길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당한 영혼을 동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계속해서 거짓 선지자의 미혹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경고와 교훈에도 불구하고 거짓을 따라가기로 결정하는 사람을 성령께서 어떻게 의의 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나는 내 양을 안다.”고 하십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진리를 통해서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온 마음을 다하여 응답시겠습니까?

4부, 어떤 목사의 고백, “나는 이렇게 무너졌습니다”

이 글은 내 개인의 경험입니다. 모든 신학생과 목회자가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글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성령께서 날마다 찾아와서 괴롭히시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부족하지만 내 경험을 사람들 앞에 펼쳐놓을 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의 마음을 만지시고 감동시키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모태로부터 교인이 되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내 마음속에 순결한 신앙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어머니의 정성으로 나는 기독교 신앙이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100% 확신하며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충성과 순종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내 마음속에 불타고 있던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은 나로 하여금 전혀 망설이지 않고 신학교에 등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실망과 충격

나는 신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폭넓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나는 기대하는 마음을 갖고 신학과의 여러 과목을 들었는데, 학년이 올라가면서 불타는 신앙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신학교의 학사 과정을 거치면서 예리한 논리와 이론을 배웠지만, 말씀 그대로 믿고 따라가는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신학계를 범람하고 있는 자유주의와 합리주의 그리고 세속에 물들어버린 것입니다. 내 어깨에 신학사라는 학문적 명예가 둘리어졌을 때에는 신학에 대한 신뢰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경건의 능력은 잃어버린 채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신학교를 졸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내가 왜 신학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요?

나는 신학교 교수님의 학문적 위업과 논리에 압도당했습니다. 숫돌에 간 칼날처럼 예리한 설득력으로 다가오는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내 신앙이 너무나 단순한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교수님의 강의가 성경의 영감을 부인할지라도 학점에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교수님은 성경이 100% 영감의 말씀이고 진리라는 사실에 대해서 오히려 의심과 회의를 갖도록 유도하는 강의를 했습니다.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는 어떤 사건이나 문제들에 대해서 의문점을 제시하는 강의는 학생들의 마음을 깊은 회의와 의심의 미로 가운데로 이끌어가기에 충분했습니다. 나뿐 아니라 여러 학생들이 성경의 어떤 부분은 과학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졸업할 때가 되자, 많은 학생들이 스승들처럼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인정하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신앙을 갖게 되면, 전적인 믿음, 희생, 순종, 극기라는 말은 매우 어색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신학과를 다니는 동안, 나는 내가 정말 배우고 싶었던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나는 참된 거듭남의 경험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는데, 그런 강의를 듣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순종의 열매, 죄에 대한 승리의 생애가 어떻게 가능한지 알고 싶었는데 그것을 가르치는 과목이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사는 길을 배우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많은 강의에서 그런 신앙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아니라는 가르침만 받았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생애 전체를 바쳐야 한다고 믿었는데, 신학을 공부하면서 그런 신앙이 위험한 것으로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손을 붙잡고 믿음으로 사는 신앙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용서는 필요하지만 성화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문제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 내 마음을 어지럽혔습니다. 한 번 예수를 영접하면 내 마음과 삶의 거룩함과 상관없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은 그동안 내가 믿어온 것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신학교 3학년 때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어떤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교수님은 내가 만났던 교수님들과는 다른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강의를 시작하는 첫날부터 자신의 간증을 하면서 나중에 목회를 하면 반드시 교인들을 진리에 굴복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하루는 교수님이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웃옷을 벗어제치면서 “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죄를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합니까?”라고 소리치면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목사는 생명력 있는 설교를 해야 하며 목사 자신이 거듭나고 세상을 버리는 경험을 하지 않으면, 교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교수님은 자신의 신앙 때문에 신학교 교수들과 잘 섞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외면당하고 있는 신학교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있는 그 교수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강의에서 그 교수님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종이 되든지 사탄의 종이 될 것입니다.”라고 경고했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사람도 사탄의 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교수님의 강의와 진리에 대한 열정을 통해서 잃어버린 신앙을 회복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진리를 가르치는 주님의 종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하는 침례 요한의 기별을 듣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사는 경험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가르쳐줄 수 있는 책을 접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첫 번째 직면한 문제

누구도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나는 많은 교수님들이 “넓은 길을 걸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죄를 붙잡고 있으면서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강의들이 신학 과정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물론, 죄를 범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교묘한 논리로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진리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교수님들은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성경을 학문으로 가르치는 직업 학자였습니다. 신학교에 숨어 있는 위험을 간파한 후부터, 나는 교수님들이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거나 자유주의적인 가르침을 강의하면, 지혜롭게 문제점을 지적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첫 번째 시도는 교수님에 의해서 점잖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지적을 받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강의를 듣고 있던 다수의 학생들도 교수님의 그러한 태도에 동의하였는데, 그 이유는 내가 버릇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교수님은 나를 교수실로 불러서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학생, 나는 그대가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네. 그러나 그대는 일하러 나가기 전에 경험과 지식의 폭이 넓은 사람에게 배우기 위해서 대학에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돼!” 나는 교수님께 내 마음을 설명하려고 애썼지만, 교수님은 노련하지 못한 나를 여유 있게 제압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었고, 내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충성심을 넣어주셨던 어머니는 신학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하여, 교수님은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실례를 들면서 성경의 100% 영감성을 은근히 부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논리적으로 전개했습니다.

다음 강의 시간부터 나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때로 교수님의 강의가 의심스러울지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습니다. 나는 학급의 친구들에게 교수님의 강의 내용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지만 그들은 교수님의 강의를 여과하거나 판단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무사히 졸업하기를 원했습니다.

학기말 시험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시험지에 진리와 말씀이 말하는 원칙들을 기술하였지만, 교수님은 나에게 형편없는 점수를 주었습니다. 나는 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목회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내 꿈이 교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한 가지 중요한 현실을 보게 되었는데, 교수님들은 가르치고 점수를 주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졸업 후에 목사의 길을 열어주는 면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나는 강의 시간에 교수님께 어떤 도전이나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졸업을 하고 목사직을 얻게 되면, 순결하고 인간의 논리에 오염되지 않은 진리를 분명하게 설교해야지.”라는 결심을 했습니다.

 

두 번째 직면한 문제

나는 무난히 졸업을 하게 되었고 어떤 교회에서 전도사로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담임 목사님이 복음과 진리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세속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가끔씩 주어지는 설교 시간에 신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죄와 세속에 대해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설교를 했습니다. 누구든지 마음을 열고 십자가 앞에 나가면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은혜가 함께 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런 설교와 가르침을 들어보지 못했기에 당황해했으며, 담임 목사님에 의해서 오랫동안 길들여져 온 어리석은 양들이었음을 드러냈습니다.

담임 목사님은 내가 설교할 때마다 불안해했습니다. 하루는 담임 목사님이 나를 보자고 하더니, “전도사님은 매우 유망한 장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지혜롭고 조심스럽게 설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전도사님의 설교는 교인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몇몇 교인들이 내게 와서 전도사님의 설교가 너무 강하고 사랑이 부족하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분들은 전도사님의 설교가 교회의 평안과 안정을 깰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하나님의 진리를 높이고 영혼들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교회를 아무런 문제없이 운영해야 된다는 데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다시 “진리를 고수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지만, 장래를 기약하면서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이 다음에 내가 교회를 맡게 되면, 설교 시간에 하나님의 진리를 마음껏 외치리라!”라고. 다음 설교 시간부터 나는 어쩔 수 없이 설교 내용을 부드럽고 듣기 좋게 다듬어야만 했습니다. 나중에 내가 직접 교회를 맡게 될 때까지 곧바른 진리의 선포를 미루기로 결정했습니다.

 

세 번째 직면한 문제

마침내 기다리던 기회가 왔습니다. 나는 정식 목사로서 한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를 마음껏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도 하나님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악하고 거센 양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몇몇 영향력 있는 집사들과 장로들을 찾아다니면서, “교인들이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살면서 지쳐있는데, 목사의 설교가 너무 강해서 힘들다. 교인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불만과 염려를 토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진리로 거듭난 몇몇 양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양들은 무지하고 진리의 가치를 몰랐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양들은 나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힘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한 번 예수를 영접하고 회개했으면 더 이상 구원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어떤 상황에서도 구원해준다. 날마다 죄를 짓고 불안해서 회개하는 것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들의 신앙이다.”라는 식의 설교를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내가 “참된 거듭남과 승리가 있어야 한다.”고 설교하자 부담이 되었던 것입니다. 나를 지지해주던 나이 많으신 장로님들도 교회가 깨질 것을 염려하면서 걱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 중의 몇 분이 목회실로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목사님의 설교가 매우 성경적이고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분간 교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목사님께서 설교 주제를 정하시는 일에 있어서 조금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즈음 나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또 하나의 짐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지만, 남편인 나의 장래를 더욱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나를 아끼는 마음으로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안정적인 목회 생활에 방해가 되는 설교는 제발 하지 마세요. 좀 더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내용으로 설교하세요. 교인들의 죄와 세속을 지적하는 설교는 그들의 마음을 오히려 완악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나는 내 손에 쥐어져 있는 두 가지를 보면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충성과 영혼들의 구원에 대한 깊은 염려가 쥐어져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장밋빛 목회 생활과 안정된 삶에 대한 미련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좁은 길을 걸으라.”고 속삭이는 음성이 들려왔고, 다른 한쪽에서는 “너도 다른 목사들처럼 하면 돼! 왜 너만 유별나고 특별한 설교를 해서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리려고 하니? 조금만 지혜롭게 처신하면 너도 인정받는 목사가 될 수 있어!”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결국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 교회를 떠나게 되면 나에게 맡겨져 있는 이 양들은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지금처럼 설교하면 결국 목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이 불쌍한 양들은 누가 보살필 것인가? 좀 더 지혜롭게 처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거야.”

 

타협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나는 잠시 기다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돈 많고 영향력 있는 장로님들이 나의 설교에 동의하고, 아내가 나의 부담을 이해하며, 교인들이 나의 설교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 하나님의 진리를 곧바로 설교하는 일을 미루기로 했습니다.

그 후부터 나는 참담한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나는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이렇게 저렇게 말씀을 타협하고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타협하고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자, “하나님께서 내 설교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고 양심을 짓누르는 죄책감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타협의 과정 속에서 내 마음속에 있던 진리에 대한 사랑과 경건의 능력을 선포하는 설교자가 되겠다는 포부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목사들처럼 나 역시 성공적인 목회는 교인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는 데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나도 그들처럼 정치와 행정과 심리학으로 교회를 섬기는 목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효과적인 종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점점 더 사람들의 “인정과 평판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은근히 명예를 쫓게 되었습니다. 나는 교인들의 시선을 하나님의 시선보다 두려워하게 되었고,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을 복음 전파로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돈을 받고 교회 성장을 위하여 일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열정을 갖고 복음 전파에 뛰어들고 있지만, 두 음성을 들으면서 깊은 고민에 잠기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말씀에 대한 충성과 양들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진리를 타협하고 말씀의 표준을 낮추는 한이 있더라도 양들을 불러모아야 한다는 육체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목회자는 그 두 음성 앞에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게 됩니다.

슬픈 사실은, 많은 목회자들이 진리를 포기하고 말씀을 타협하면서까지 양들을 불러모아서 교회를 세우기로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양들의 숫자를 진리보다 중요하게 바라보면 어떤 일들이 생길까요? 설교가 달라지게 됩니다. 매 주말마다 교인들에게 진리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야 하는데 그런 설교를 하지 않게 됩니다.

나 역시 내가 맡고 있던 교회 속에 유행과 세속과 이기심과 탐욕이 넘실거리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만 설교했습니다. 죄와 세속을 지적하거나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서는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교회를 잘 지키고 있으면, 언젠가는 교인들이 회개하고 세상을 버리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내 자신을 합리화했습니다.

결국, 나는 다른 목사들이 부러워하는 대형 교회의 목사로 부름을 받게 되었고, 젊은 전도사들을 몇 명 거느리는 사장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전도사가 나의 목회 지침과 설교에 대해서 질문하거나 도전하면, 과거에 내가 들었던 노련하고 지혜 있는(?) 말로 충고해 주었습니다. 젊은 전도사들에게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해 주었고, 어떻게 하면 교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을 전수해 주었습니다. 그들 중의 어떤 전도사는 석연찮은 얼굴을 하면서 내 성공담을 들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약간 분노가 섞인 음성으로, 그러면서도 노련하게 그들의 의문을 잠재웠습니다. 그런 전도사를 볼 때마다 젊은 시절의 내가 생각났습니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슬픈 사실은, 이런 모습이 나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동료 목사들에게서 나와 같은 모습이 있었는데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의 죄와 불충성을 합리화했습니다. 나는 설교를 곧바르게 하지 않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지 않을 정도로 영적 어두움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실수로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목회를 했지만,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알면서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을 준비하기 위하여 침례 요한이 일어나서 하늘의 기별을 백성들에게 전했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도 백성들에게 예리하고 곧바른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교회 안에서 곧바른 설교에 대항하여 일어서는 장로들과 집사들의 압력이 두려워서 설교 내용을 다듬었습니다.

이제 은퇴를 했고 죽음의 그림자가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인생을 덮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양심의 가책과 고뇌로 인하여 내 영혼에는 쉼이 없습니다. 젊은 시절에 나의 목회를 통하여 떼죽음 당한 양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은 절망과 죄책감으로 고통당합니다. 젊은 시절에 있었던 나의 죄와 타협에 대한 회한이 나의 영혼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당신의 목회는 성공적입니다.”라는 말을 듣기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포기했던 나의 결정에 대한 후회가 내 얼굴에 깊은 근심의 줄을 긋고 있습니다. 처음에 나를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셨지만, 나는 사탄의 덫에 걸려서 그가 이끄는 대로 양들을 인도했습니다. 치욕적인 과거를 되돌아볼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다시 목사의 길을 걸을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지만, 시간은 이미 지나가 버렸습니다. “만일 나에게 다시 목회를 할 수 있는 젊음이 주어진다면, 하늘로부터 가브리엘 천사가 내려와서 하는 것과 같은 설교를 할 텐데….”라는 후회가 내 영혼을 채우고 있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교인들의 마음에 전율을 일으키는 진리를 전하며,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온전히 굴복시키는 기별을 전하고자 하는 소원이 내 영혼을 사로잡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성결과 거룩함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싶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후배 목사들이시여, 마지막 시대에 부르심을 받은 목사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깊고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온 생애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굴복하는 헌신이 있어야 주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설교단에서뿐 아니라 가정에서 진실하고 정직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영생의 길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목사들이시여,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거룩한 부르심에 희생과 헌신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런 응답을 하는 목회자는 “내가 다시 목사가 될 수 있다면….”이라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3부, 삯꾼에게 맡겨진 양들의 운명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요 10:11-13)

 

삯꾼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삯꾼은 자기 양을 돌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삯을 받고 다른 사람의 양들을 지켜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삯꾼의 마음에는 양들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책임감이 없습니다. 삯꾼에게는 주인에 대한 충성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삯꾼에게 맡겨진 양들은 들짐승에게 늑탈당하고 해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삯꾼은 “내가 양들에게 어떤 꼴을 먹여야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양이 아니라 삯입니다. 그들은 양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삵꾼의 모습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교회 안에 있는 목자들에 대하여 충격적인 말씀을 했습니다. 에스겔서 34장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찐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겔 34:2-3)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들을 섬기고 율법사들을 존경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삯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교회 안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 살찐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제사장과 율법사에게 맡기셨는데, 그들이 양에게 꼴을 먹이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양을 잡아먹고 자기 배만 부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눈에 삯꾼들은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들이 삯꾼에게 맡겨지면 이용만 당하고 참담한 삶을 살게 됩니다.

양들이 삯꾼을 따라가면 어떻게 될까요? 죽습니다. 왜냐하면 삯꾼 목자는 양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삯꾼은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서 양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위험이 오면 양보다 먼저 도망칩니다. 양들이 삯꾼 목자 아래서 머물면 강도와 절도를 만나도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삯꾼도 설교하고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삯꾼은 양을 살리기 위해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설교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설교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 성공을 위해서 설교한다는 뜻입니다. 삯꾼은 설교를 하고 말씀을 나누지만 양들을 주님께 인도하지 않고 자기에게로 이끕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삯꾼은 양들을 살리기 위해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설교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비즈니스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런 설교들이 들려옵니까? 그렇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주의 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회에서는 비즈니스같이 거대한 조직을 가진 산업형 교회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으며 수많은 교회들이 그런 흐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수많은 삯꾼들이 있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사라지고 교세 확장에 대한 이론과 방법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도 교회 성장법의 비중이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삯꾼입니까? 복음의 전파보다 교회 성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삯꾼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가 어떤 결정과 선택을 할 때 최고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어져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성경을 펼쳐놓고 “주여,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이 원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가 원하는 쪽으로 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님께 돌리게 해서 생명의 말씀을 따라가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절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큰 교회’를 세우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진리로 인도해서 순종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롬 1:5)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롬 16:26)

 

우리는 대중의 인정과 인기를 위해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고 전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달받은 모든 사람이 거절하고, 진리의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이 외면할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가야만 합니다. 만일 교회를 특별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아니라 아무나 모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며, 그런 교회는 삯꾼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어떤 설교가 삯꾼의 설교인가?

어리석은 양들은 진리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설교를 듣기 싫어합니다. 그것을 잘 아는 삯꾼들은 세속적인 양들이 듣기 원하는 설교를 해줍니다. 그렇다면, 삯꾼들은 어떤 설교를 할까요? 진리는 없는데 양들은 모이게 하는 설교가 삯꾼의 설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그런 설교들이 가장 인기있는 설교라는 것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내 마음과 삶이 어떠하든지 간에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저 세상에서도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식의 설교들, 그런 설교가 삯꾼의 설교입니다. 왜 그런 설교가 삯꾼의 설교일까요? 왜냐하면 그런 설교는 회개를 불러일으키고 말씀에 대한 충성으로 인도하는 설교가 아니라, 교회를 키우기 위한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의의 표준을 낮춰서 사람들이 쉽게 구원받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설교들, 그런 설교가 삯꾼의 설교입니다. 왜 그런 설교들이 삯꾼의 설교일까요? 왜냐하면 그런 설교는 양들의 숫자를 늘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양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삯꾼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 열매도 필요 없고 참된 회개와 중생의 경험도 필요 없게 느껴집니다. 오늘날 수많은 어리석은 양들이 그런 설교를 듣고 싶어서 교회로 몰려들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삯꾼의 설교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주지 아니하며”(겔 34:4)

 

삯꾼의 설교를 듣고 그 밑에서 양식을 먹으면, 연약한 자가 강하게 되지 않고 죄로 상한 심령이 치료되지 않는 것입니다. 삯꾼의 설교를 들으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삯꾼들은 죄를 마음에 품은 사람들에게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길을 열어놓기 때문입니다. 삯꾼들은 죄를 붙잡고 있으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설교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죄를 붙잡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장 인기있는 설교는 “죄를 가지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설교입니다.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단 한 번만 예수를 영접하고 회개하면, 십자가의 속죄가 완전하기 때문에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가 완전하게 속량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구원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내 죄가 용서받았는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십자가를 감사하며 살면 됩니다.”

이런 설교 속에는 예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성도 여러분, 참된 목자는 결코 “죄를 붙잡고 있으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결코 “돈과 세속에 끌려다니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참된 목자는 양들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의 양식을 나눠줍니다. 양심적인 목자는 종종 양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곧은 진리를 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양들은 견책하는 메시지를 듣게 되더라도 그것이 진리이면 마음을 낮추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원과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의 비참함

이스라엘에는 수만 명의 제사장이 있었고 율법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목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목자가 없는 양들이 노략질 당하는 비참한 모습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겔 34:5)

 

오늘날에도 목자 없는 양들이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방황하다가 “들짐승의 밥이” 되는 양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다가 이상한 복음과 이상한 성령을 만나서 받아들이면, 그것이 들짐승들에게 잡혀 먹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회 속을 누비고 다니는 들짐승들의 모습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들짐승을 분별하지 못하면 그들의 “밥”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빼앗긴 양을 다시 찾아오신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서 삯꾼과 목자가 없는 양들을 말씀하신 후 기쁜 소식을 들려주십니다.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겔 34:10)

 

 하나님께서 거짓 복음을 전하는 목자들, 진리와 생명을 전하지 않는 목자들을 대적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내 양 떼를 빼앗아 오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빼앗긴 양 떼를 되찾아오는 역사를 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강도와 절도와 삯꾼들에게 끌려간 양 떼를 찾아오는 역사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양들을 다시 빼앗아 오실까요?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빛을 양들에게 보내심으로 양들을 다시 찾아오십니다. 기적을 통해서 양들을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와 방언으로 양을 불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양들을 불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의 양우리로 들어가기 원한다면, 진리를 찾고 붙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입니다. 왜냐하면 양같이 고집 세고 교만한 사람들을 양의 문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의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은 그분의 피 때문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그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는 양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양의 문을 향해서 걸어갈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양이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어떻게 될까요? 목자의 눈짓만 보아도 그분의 뜻을 알게 됩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분의 뜻을 알게 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목자만 있으면 안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목자만 있으면 내 모든 필요가 완전하게 채워진다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양들은 목자를 온전히 신뢰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선한 목자를 따라가면 영혼의 평안이 있고, 점점 더 풍요로운 진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 양들은 목자를 따라가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고 행복이 될 것이고, 목자를 향해서 무한히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2부, 문지기와 절도와 강도는 누구입니까?

유대나라에서 목자는 가난했기 때문에 자신만의 양우리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하나의 양우리를 몇 명의 목자들이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목자들이 각각 자신의 양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안으로 넣었습니다. 그래서 양들은 밤에 다 섞여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우리로 집어넣으면 목자는 쉬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문지기가 밤 동안 양우리 입구에 서서 양들을 지킵니다. 밤에 들짐승이 나타날 수 있고, 절도와 강도도 목자가 없는 밤 시간에 양을 탈취하기 때문에 밤에 양을 지키는 문지기의 사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문지기인가에 따라서 양들의 생명과 안전이 크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양이 신실한 문지기가 지키는 양우리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최고의 안전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양우리에 문이 하나밖에 없는데 그 문을 문지기가 온몸으로 막아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밤에 양들을 지키는 문지기는 누구를 상징할까요? 목사입니다. 목사가 양을 지키는 문지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를 영어로 패스터(pastor)라고 부르는데, 이 단어에는 “목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목사에게도 양들에게 꼴을 먹이는 임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목자이고, 나머지 이 세상의 모든 목사들은 문지기입니다. 목사들은 예수께서 맡기신 양들을 잘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문지기가 밤에 양들을 지키는 것처럼, 목사도 이 암흑 세상에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양을 맡아서 지키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사자든지 곰이든지 우리 안으로 들어가려면 문지기가 몸으로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문지기가 졸면 어떻게 될까요? 강도와 절도가 문지기 몰래 양우리로 들어와서 양을 훔쳐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문지기를 조심스럽게 선택합니다. 목자는 자신이 시키는 대로 정확하게 일할 사람을 선택합니다. 양은 문지기를 잘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안전하게 밤을 지낼 수 있습니다. 문지기가 게으르고 신실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끔직한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양들은 들짐승에게 잡아먹히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교회를 지키는 문지기들(목회자들)이 자신의 일을 정확하게 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는데, 여러분 교회의 문지기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길과 진리와 생명을 정확하게 전하고 있습니까? 양들이 진리를 정확하게 모르는 문지기를 만나면 교회를 수십 년 동안 다녀도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무지한 양으로 자라게 됩니다. 결국, 넓은 문으로 들어가서 강도와 절도에게 납치당하게 됩니다.

 

양들은 주인의 음성을 안다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4-5)

 

밤 시간에는 문지기가 양을 지키고,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목자가 다시 와서 양들을 우리에서 불러냅니다. 그러면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양우리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부르면, 양들이 우리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 나오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양들이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양은 주인의 음성을 압니다. 양은 자신을 인도하는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지키는 양들은 결코 다른 음성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께 속한 양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양들은 오직 진리만을 따라갑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속한 양과 거짓 목자에게 속한 양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예수께 속한 양들은 결코 거짓 복음과 거짓 교리로 부르는 목자를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강도와 절도는 누구인가?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요 10:6)

 

목자와 양의 비유는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당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나는 양의 문이고, 너희는 나를 통해서 들어가지 않는 강도와 절도”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강도와 절도는 오늘날에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요 10:1)

 

강도와 절도는 양우리로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양떼를 갖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절도와 강도라고 했습니다.

왜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들은 강도와 절도라고 했을까요?

양의 문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데,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런데 강도와 절도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길과 진리와 생명”을 피해서 다른 데로 들어가서 양들을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강도와 절도는 거짓 복음, 거짓 계명, 거짓 교리, 거짓 거듭남, 거짓 성령으로 양들을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강도와 절도가 누구입니까? 진리가 아닌 다른 것으로 양들을 탈취하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예수께서는 진리와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양들을 모으시는데, 바리새인들은 교회의 전통과 권위로 양들을 모았고 거짓 복음으로 양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들은 양들이 진리의 근원이신 예수께 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강도와 절도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마 15:9)

 

오늘날 강도와 절도는 누구입니까?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지 않고 사람의 계명과 거짓 복음으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도록 만드는 성직자들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다른 복음”과 인간의 전통으로 예수님의 양들을 빼앗는 절도와 강도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성도 여러분, 마지막 시대는 설교하고 말씀을 전하는 성직자를 조심해야 합니다. 목사가 진리 이외에 다른 것으로 양들을 부르고 모으려고 하면, 그는 강도와 절도입니다. 늘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길과 진리와 생명”을 따라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양우리 밖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양과 목자 이야기는 지금 이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에도 주께서는 진리를 통해서 양들을 부르십니다. 주님의 음성을 아는 양들은 주님을 향해서 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양들이 진리의 음성을 알아듣고 양의 문을 향해서 움직일 때 사탄은 강도와 절도를 보내서 양들을 압박하고 탈취하려고 합니다. 거짓 복음과 거짓 교리와 거짓 성령으로 양들을 미혹해서 넓은 길로 끌고 갑니다. 그러나 주님께 속한 양들은 성경으로 그들의 영을 분별하고 그들을 따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지막 시대 성도들은 누가 목자이고 누가 강도이고 절도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예수께 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

 

오래전부터 말씀에 충성하는 신학교 교수들은 줄곧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지금 신학교의 복도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거닐고 있다. 신학교 강의실에서 플라톤이 강의하고 있다. 신학교에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나타나자,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다. 신학생들이시여, 조심하기 바란다. 세상 철학자와 심리학자의 목소리가 신학교 강의실에서 울리게 되면서, 사도 바울의 음성과 사도들의 피 묻은 행적이 사라지고 있다!”

 

신학교 과정에서 철학과 심리학과 사회학이 강조되면서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들의 신앙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가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리는 대신 사회 전문가에게 의견을 구하고 심리학자의 책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왜곡된 신학을 통해서 강도와 절도가 배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외의 수단으로 양들을 모으는 목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죄와 싸워서 이기는 경험에 무지한 목사를 조심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거듭나고 생애를 주님께 바치는 경험으로 인도하지 않는 설교자를 조심해야 합니다. 신학을 공부했다고 모두 주님께서 인도하는 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깨닫고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영적 투쟁을 이해한 사람만이 양들을 예수께 인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7절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양들의 특징에 대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어떤 특징이 있는지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 오는 양들의 세 가지 특징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7-10)

 

예수께서는 당신께 속한 양들에게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첫 번째 특징은, 주님의 양들은 절도나 강도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 10:7-8)

 

마지막 시대는 거짓 선지자들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시대입니다. 심지어는 택한 자들까지 미혹당하는 시대입니다. 오늘날 교회 속에 절도나 강도가 정말 많이 있는데, 그들은 거짓 복음과 거짓 교리로 양들을 불러내서 약탈하고 헤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 속한 양들은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강도와 절도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설교가 성경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양들은 그런 설교자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예수께서 보내신 종이고 누가 강도와 절도인지 어떻게 분별해야 합니까?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모하고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린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의 성도들은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를 주께서 지키시는 양우리로 안전하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강도와 절도로부터 지켜 주시옵소서. 제가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성령으로 가르쳐 주시옵소서. 의의 길로 인도하는 목자를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주님께 속한 양들의 두 번째 특징은 무엇입니까? 예수께 속한 양들은 들어가며 나가며 꼴(양식)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양들에게 꼴을 먹인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양들은 말씀에 굶주리지 않고 충분하게 먹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참목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목자의 말씀을 듣는가는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거짓 목자를 만나면 양들이 교회 마당만 밟을 뿐,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해서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거짓 목자를 만나면 병들게 됩니다. 이상한 꼴을 받아먹으면 병들어 시름시름 앓게 됩니다. 병이 든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공허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 기독교회가 병들어서 죽어가는 교인들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4-17)

 

성도 여러분, 진리의 꼴을 제대로 먹지 못하면 양이 병들어서 죽게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주께서 주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꼴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살아있는 신앙과 경건의 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인도하는 양들의 세 번째 특징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인도하는 양들은 점점 더 생명을 얻고 점점 더 풍성한 신앙을 하게 됩니다. 과거에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받았으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풍성한 영적 생명을 누려야 합니다. 

예수를 영접해서 구원받고 생명을 얻었을지라도 계속해서 꼴을 먹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영양부족으로 힘을 잃어가게 됩니다. 예수를 오랫동안 믿었는데, 습관적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연약한 양들은 주님께로부터 꼴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교회 가서 예배드리고 말씀을 먹고 있는데, 연약해서 죽어가는 양들은 선한 목자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인도하는 양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양식을 어쩌다가 한번 먹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먹기 때문입니다. 점점 더 풍성한 구원을 경험하기 때문에 죄를 이기고 성화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수십 년 동안 예수를 믿었지만, 진리의 깨달음이 없고 영적 품성함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회개하고 진리가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생명을 받아 거듭나는 경험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주께서 보내주시는 꼴을 먹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따라가고 있는 목자가 강도와 절도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온 마음을 다해서 원하는 자에게는, 주님께서 풍성하게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얻을 것입니다.

1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양은 고집이 세고 성질이 급한 동물입니다. 양은 목자 없이는 살 수 없는 약한 동물이지만, 화가 나면 목자의 말도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떤 목동이 “양은 고집이 셉니다.”라는 제목으로 시를 썼는데, 이 시에는 양이 어떤 동물인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양은 고집이 셉니다

그끝이낭떠러지일지라도…양은그길을끝까지갑니 다. 그것이 독풀일지라도 양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먹습 니다. 그 물이 썩었을지라도 양은 당장의 목마름만 면하 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양은 자기 한 몸을 지킬 힘이 없지 만울타리밖세상으로나갈꿈을꿉니다.양은동료양들 을 치받고서라도 내가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성경은 인간을 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시는데, 우리는 양처럼 고집 세고 제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양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구원의 울타리 안으로 불러들이실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불러 모으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강도와 삯꾼과 들짐승을 보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강도와 삯꾼과 들짐승을 피하는 법을 아는 사람만이 주님의 양우리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목자는 들에서 양을 돌보았습니다. 저녁이 되면 양들은 울타리가 쳐진 양우리에 들어가서 잠을 자게 됩니다. 대개 양우리는 입구가 하나인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입구에는 문이 없습니다. 저녁이 되면 목자는 양들을 모아서 양우리로 인도합니다. 양들이 우리 앞에 모이면, 목자는 양우리의 입구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서 양을 한 마리씩 부르면서 숫자를 셉니다.

양들은 자기 이름이 불려지면 목자의 무릎을 넘어서 양우리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양이 우리로 들어가려면 무엇을 지나야 합니까? 목자의 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럼 양우리의 문이 무엇입니까? 목자의 몸이 양의 문이 되는 것입니다. 목자는 몸으로 입구를 막고 양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7,9)

이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양우리의 문”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과해야만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문이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를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양의 문은 구원의 문입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야만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의 문인 목자를 중심으로 해서 한쪽에는 죽음이 있고, 다른 쪽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넘어가지 않았으면서도 양우리 안에 들어왔다고 착각을 합니다. 양우리 밖에 있으면서도 생명을 얻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통과해야 생명이 있다

양의 문을 지키는 목자의 몸은 생명과 죽음이 나누어지는 선(線)인데, 그 선을 너무나 쉽게 넘어갑니다. 어떻게 할 때 목자의 몸을 넘어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게 될까요? 진리를 깨닫게 될 때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 말씀은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깨달아야 양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때 양우리로부터 빠져나가게 되는 것일까요?

진리를 무시하고 버리면, 그것이 목자를 등지고 양우리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넘어서 우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양들이나, 우리에서 뛰쳐나온 양들은 어떻게 될까요? 강도들 손에 붙잡혀갈 수 있고 들짐승에게 공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이 목자의 몸을 등지고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양우리를 지키는 목자의 몸을 넘어 떠나가시겠습니까? 결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문 안에만 있으면 안전하다고 했습니다. 가난하든지 병들었든지 암에 걸렸든지 누구든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구세주 안에 있으면 구원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요 10:9)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지키는 우리(진리) 안에 있으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우리 안에 있으면,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목자를 따르는 양은 목자가 책임집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책임집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어떤 조건일까요? 조건은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따라가지 않는 자들은 구원을 잃어버린다

구원과 영생은 목자를 따를 때 시작되는데, 목자를 잠시 따르다가 더 이상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과 생명이 거기서 끝나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 번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받으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양과 목자 비유를 보면, 양의 생명은 목자를 따를 때에만 보장되는 것입니다. 목자를 계속해서 따라가야만 생명이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께서 인도하는 길과 진리를 계속해서 따라가며 생명을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밤이 돼서 목자가 양우리 안으로 넣으면 좁은 우리가 답답해도 들어가야 합니다. 아침이 돼서 초장으로 인도하면 귀찮아도 일어나서 따라가야 합니다. 목자가 뜨거운 낮에 물을 찾아서 계곡을 찾아가면 힘들어도 따라가야 합니다. 목자를 따라가지 않으면, 초장을 찾지 못하고 물을 찾지 못해서 죽습니다. 성도 여러분, 목자는 자신을 따라가는 양들을 완전하게 책임집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생명입니다. 한 번 목자를 따랐다고 해서, 구원과 영생이 계속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를 영접한 단 한 번의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메고 따라가야 합니다.

 

한 명씩 이름을 부르면서 구원하신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1-2)

 

선한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양들을 우리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양들을 불러들이는데 한 마리씩, 한 명씩 불러들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양”인지 정확히 아십니다. 누가 나를 의지하고 따르는 양인지 아십니다. 그래서 한 명씩, 한 명씩 세면서 정확하게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한 명씩 구원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는 정통이고 너희는 이단이다.”라는 주장으로 구원을 나누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교파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더기로, 단체로, 한꺼번에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양이 내 양인지 한 명, 한 명 살펴보면서 구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1절과 2절을 보면 목자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이 나옵니까? 목자가 있고 문지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절도와 강도가 나옵니다. 문지기, 절도, 강도. 이들은 누구입니까?

서론, 거짓 선지자는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

기독교 역사에서 언제 가장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게 될까요? 마지막 시대입니다. 왜 마지막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이 가장 많이 나타나게 될까요? 왜냐하면 사탄은 참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참된 복음이 사라지면, 참된 거듭남의 경험과 경건의 능력이 사라지게 되고 경건의 모양과 형식만 남아있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교회에서 가라지들이 무성하게 올라오고 알곡들의 영향력이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 진리를 만나서 죄와 세상으로부터 자유케 되고 거룩하게 되어야 하는데,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면 참된 성도의 경험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탄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직전에 교회를 거짓 선지자들로 채우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사탄은 미혹과 핍박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교회를 공격합니다.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는 유대교회 속에 거짓 선지자들을 크게 불러들여서 성도들을 미혹해서 메시아를 영접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중세기가 되자 사탄은 로마제국과 천주교회를 통해서 성도들을 핍박하고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끌어갔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핍박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이 미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핍박으로는 진리를 없앨 수 없으며 오히려 성도들의 신앙이 더욱 순결하게 되고 불타오르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마지막 시대가 되자 다시 미혹이라는 카드를 집어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기독교회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이 전 세계적으로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 안에 미혹이 들어오는 경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신학교를 나온 사람이 성경을 잘못 가르칠 수 있습니까? 오랜 기간 동안 신학을 공부한 목사와 성직자가 어떻게 거짓 선지자가 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일까요? 2천 년 전에 유대교회가 침례 요한의 설교를 거절하고 메시아를 영접하지 못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오늘날 기독교회 속에 수많은 거짓 목자와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하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면 오늘날 기독교회에 거짓 선지자들이 많은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 왜 2천여 년 동안 성경을 전수해온 유대교회가 구세주이신 메시아를 거절했습니까? 구약성경 속에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 차 있고, 세상에 오실 메시아를 상징하는 각종 표상이 너무도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회 지도자들은 왜 메시아를 거절했습니까? 왜 바리새인들은 메시아를 거절했습니까?

 두 번째 질문: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와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 사이에는 왜 400년이라는 긴 시간적 공백이 있습니까? 왜 그렇게 긴 기간 동안 유대교회로부터 인정받는 선지자의 글이 없습니까?

 

위의 두 가지 질문은 서로 깊은 연관이 있는데, 두 질문에 대한 답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4백 년 동안 유대교회가 깊은 어둠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유대교회를 깨우시고 성경을 기록하도록 섭리하셨는데,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4백 년의 기간 동안 유대교회는 깊은 암흑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 이후에 성경에 포함될 만한 선지자의 글이 나올 수 없게 되었고, 유대인들이 4천 년 동안 기다려 왔던 메시아를 거절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교회를 4백 년 동안 깊은 암흑에 빠뜨린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대교회의 지도자들이 성경 중심의 신앙을 버리고 헬라 문화의 교육과 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는 로마제국이 유대인들을 지배했지만, 그 이전 오랜 세월 동안 유대나라는 헬라의 영향력하에 있었습니다. 헬라가 로마에 의해서 망했지만, 로마제국의 바탕을 이루고 있던 사상, 철학, 교육 체제는 헬라에서 그대로 넘어왔습니다. 그래서 유대교회는 헬라 문화와 철학에 깊이 물들게 되면서 길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성경 말씀을 크게 왜곡시켰습니다.

 

유대교회의 저항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바벨론에서 겪었던 쓰라린 포로 생활의 경험은 유대교회 지도자들 마음속에 다시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어떤 참상이 일어나는지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일을 행하는 족속들과 연혼하오리까? 그리하오면 주께서 어찌 진노하사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스 9:14)

 

그러나 바벨론과 페르샤 제국이 무너지고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 제국이 유럽과 소아시아를 지배하자, 헬라 문화와 철학이 유대교회 속으로 깊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기게 되었을까요? 물론, 유대교회의 지도자들은 헬라 문화와 철학이 유대교회 안으로 들어올 때 생길 수 있는 배도와 죄에 대해서 두려워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이방인의 관습과 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받았던 고통과 슬픔의 역사를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유대교회의 젊은 사람들이 헬라의 교육과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경고했습니다.

 

두 무리로 나누어짐

시간이 지나가면서 유대교회가 두 무리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성경의 진리를 헬라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에게 전파하여,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이 유대교 신앙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정말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배울 것은 배우고 지킬 것은 지키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헬라의 대학에서 공부하면 이방인의 철학과 문화가 교회 속으로 들어와서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나이 많은 사람들은 헬라 대학에서 그들의 문화와 철학을 배우는 것에 대해서 반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 있는 사람들은 유대의 젊은이들을 헬라로 보내서 그들의 문화와 교육을 배우도록 허용한다면, 유대국가와 교회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파멸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기울어져만 갔습니다. 헬라의 학자들은 유대교회의 똑똑한 청년들을 알렉산드리아로 초청하여 철학과 과학과 지식을 그들에게 교육시켰습니다. 점점 더 많은 숫자의 유대 랍비들이 헬라의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갔고, 거기서 유대인의 성경을 그리스 언어로 번역하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눈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서, 유대교회에서 헬라 대학의 학위를 딴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헬라의 철학을 인용해서 성경을 강론하는 사람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헬라에서 교육받았다고 해서 유대교회의 신앙과 표준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신앙과 상반되지 않는 교육을 헬라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 청년들이 헬라에 가서 공부할지라도 우리가 필요한 지식만 받아들이면 됩니다. 유대 청년들이 당대에서 가장 위대한 그리스 제국의 교육을 받는다면, 유대 청년들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교육적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유대교회의 지도자들은 설득당하고 말았습니다. 유대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이 진실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호해주실 것입니다.”라는 말로 유대 백성을 설득했습니다. 그때부터 유대교회와 국가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은 헬라의 대학에서 철학과 지식을 습득한 사람들이 유대교회에서 높은 지위와 명예를 갖게 된 것입니다. 헬라의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온 청년들이 여전히 안식일을 지키고 유대교회의 지시를 따랐기 때문에 유대교회는 그들의 마음에 생긴 무서운 변화를 인식할 수 없었습니다. 헬라에 가서 유학한 유대 청년들은 헬라 철학에 물들면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의 설교와 강론에서 하나님께만 충성하라. 선지자의 말씀을 신뢰하라.는 강조점이 사라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에서 학위 중심으로 변질됨

유대나라의 학교들도 헬라의 학교처럼 졸업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기 시작했습니다. Rav(랍비), Tana, Gayon, Sadi, Rabbon과 같은 등급들이 생겼습니다. 랍비 학교의 졸업생들은 졸업식 때 학위에 따라 다른 제복을 입음으로써 자신들의 등급을 표시하게 되었습니다. 학위를 가진 사람은 독특한 옷과 모자를 써야만 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귀족 교육이 생성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을 “산헤드린”이라고 불렀습니다. 산헤드린이라는 말은 헬라어이며, 히브리 이름은 베이트 딘(Beth Din)으로서 위대한 법정이라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 지식과 학위가 강조되면서 영성은 쇠퇴해져 갔습니다. 유대교 신앙이 하나님 중심에서 학위 중심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헬라의 철학과 사상으로 성경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유대 학교에서 여전히 많은 젊은이들을 배출해냈지만,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신앙은 퇴락해갔습니다. 경건의 모습은 있었지만 경건의 능력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점점 더 철학과 문화에 대한 교육 과정이 증가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는 줄어들었습니다.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세운 학교들은 설 자리가 없었고 차츰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지성과 학위가 높여짐에 따라서 사람이 높여지게 되었고, 하나님은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학식 있는 랍비들이 칭송받게 되었으며, 하나님께 충성하고 신앙이 깊더라도 학위가 없는 사람들은 무시당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순수한 믿음은 사라져 갔으며 예배가 형식과 의식으로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랍비 중심의 교육에 관한 수많은 법이 통과되었지만, 학교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라.”는 설교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육의 배도를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부조들의 윤리”라는 책에는, 랍비들이 다음과 같이 가르쳤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살에는 성경을 연구해야 하며, 10살에는 미스나(Mishna), 15살에는 저머라(Germara)를 공부해야 한다.

 

미스나는 매우 두꺼운 성경 주석 책이었으며, 저머라는 미스나를 주석하는 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 청년들은 학년이 올라감에 따라서 지식과 지성만 발달되었고,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는 산 교육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대해서는 점점 덜 살피게 되었고, 인간의 글과 학문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이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학제를 통과하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참신앙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매 안식일에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설교를 들었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신뢰하는 정신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선지자의 말보다 학위를 가진 사람의 말이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유대교회가 침례 요한과 메시아를 거절한 이유

바로 그런 상황에서 침례 요한이 보냄을 받게 된 것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침례 요한은 유대교회에서 철저하게 배척당하게 되었습니다. 유대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가르치는 자로 인정을 받으려면 반드시 랍비 학교의 교육 과정을 마쳐야 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마치지 못한 자들은 산헤드린에 의해서 밀려나게 되었으며 대중의 인정과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랍비 학교를 졸업한 자들은 특별한 표시를 달고 다녔기 때문에 그들의 복장에 의해서 인지되었습니다. 랍비의 자격을 얻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녀로 인정받기 위한 필수 요소가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떤 참상이 일어날까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보내도 교회와 백성이 거절하게 됩니다. 랍비와 학위 받은 사람의 인정이 없으면, 하나님의 기별도 백성에게 전달될 수 없습니다. 침례 요한과 예수께서 유대 땅에 태어났을 때, 그런 분위기가 유대나라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침례 요한과 예수께서는 유대교회에서 인정하는 신학교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구약성경이 침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도자들은 침례 요한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기별을 받아들이는 일에 철저하게 실패했으며, 구세주의 기별을 받아들일 만큼 준비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랍비들은 “이 사람이 배우지 않았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라고 빈정거렸습니다(요 7:15).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들도 예수에 대한 믿음보다는 유대교회에 대한 믿음이 훨씬 강했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 7:5)

 

하나님 계시의 보관자로 선택하신 유대교회 가운데 구세주께서 나타났음에도,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이 했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철학과 뒤섞음으로써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과 듣는 백성이 진리를 분별하지 못했고 영성을 잃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속에서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져 버렸고 살아있는 신앙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헬라 철학과 알렉산드리아와 아테네의 문화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힘을 빼앗아갔습니다. 이방 교육의 영향력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 하여금 구세주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유대교회 지도자들은 헬라 철학과 지식을 통해서 명예와 영향력을 얻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조상들이 물려준 옛 신앙을 고수하기를 포기했습니다. 왜 포기했을까요? 왜냐하면 그 당시 세상에서 인정받는 교육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사명을 더욱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회는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진리는 오류 속에 파묻히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높은 지식과 학위와 명예를 갈망하자, 영성은 사라지게 되었고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하게 되었습니다. 유대교회는 구세주를 직접 보았고 만졌으며 그 말씀을 들었을지라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유대교회 지도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구세주를 못 박아 죽여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이 백성 속으로 들어가서 영향을 발휘하면, 유대교 지도자들의 설교와 가르침이 거짓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지금 반복되고 있습니다. 유대인 역사의 교훈에 비추어보면, 오늘날 성경의 진리가 있는 그대로 전파되는 것을 막는 가장 큰 세력은 교회 목사들과 성직자들입니다.

물론 경건하고 진실한 성직자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성도들에게 올바른 진리를 전달해주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사람의 미혹을 조심하라

마태복음 24장은 재림의 징조 장입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4장에서 어떤 징조를 가장 먼저 말씀하셨나요? 말세에 나타날 “사람의 미혹”에 대해서 가장 먼저 언급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께서는 어떤 징조를 가장 많이 강조하셨을까요? “사람의 미혹을 조심하라.”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의 징조에서 가장 중요한 징조는 해와 달과 별의 징조도 아니고, 전쟁이나 지진이나 홍수와 같은 징조도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말세에 기독교회 안에서 나타날 “미혹”에 대해서 6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미혹”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미혹은 신학은 공부했지만 진리는 모르는 목사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습니다. 미혹은 교리를 알지만 살아있는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는 성직자들에게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사탄은 진리와 거듭남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르는 성직자를 통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영생의 길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데도 생명이 있다고 믿으며 기만당하고 있습니다.

유대교회가 그리스도의 초림을 준비하는 일에 철저하게 실패했던 이유가 지금 교회 안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소수의 사람만 메시아를 영접하고 신약시대를 여는 주인공이 되었던 것처럼, 말세에도 기독교회는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일에 실패함으로써 적은 숫자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재림을 위하여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인자의 때는 노아의 때와 같으리라”는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말세에 기독교회의 배도가 얼마나 크게 일어나고 있는지 보게 됩니다.

성경은 사탄의 미혹이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이루어질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가장하고(살후 2:4), 그리스도로 가장하고(마 24:4,5), 성령으로 가장하고(계 16:14), 선지자로 가장하고(마 7:22, 24:11), 의의 사도로 가장하고(고후 11:14,15), 헌신한 종으로 가장(마 7:22)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사탄은 교회를 수많은 교파로 분열시키고, 교회 건물을 사방에 크게 지어서 군중을 모아 각자의 취향에 맞게 성경을 가르치며 예배드리고 있는데, 이 모든 일을 누구를 통해 할까요? 교회 지도자들이 주로 이러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많은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설교를 듣고 그들을 따라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3-4)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 채 교회와 교파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은 망할 것이고 잊혀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리와 상관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목사 밑에서 영생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구원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갖고 현세의 안전과 축복을 바라면서 헌금을 드리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헛된 예배”일 수도 있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 15:8-9)

 

성도 여러분,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에서 이탈해 있으면서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기독교회 전체에서 한 번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받으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단 한 번의 속죄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가 용서받았기 때문이다.라는 거짓 복음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방언을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거짓 안전”에 취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방언현상이 교파를 초월하여 번져가고 있습니다. 천주교와 불교에서도 방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언이 정말 하늘에서 온 이적일까요?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이적과 은사는 결코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32)

 

이번 호에서는 기독교회를 채우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참 목자와 거짓 목자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번 호를 읽는 독자들에게 성령께서 눈에 안약을 발라주는 경험이 나타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25호를 시작하며…

예수께서는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을 받는 사람은 적다고 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교회에 왔는데, 택함을 받는 사람들은 적다고 하셨을까요? 예수께서는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계 22:17)을 것이라고 하셨고, 구원을 원하는 자들은 누구나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고 초청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 나온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부르심은 받았지만 택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거저 나눠주시는 은혜가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택함을 받지 못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택함을 받는 지점까지 가지 못할까요? 예수님의 기대와 사람들의 기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그분의 떡 나눠주는 기적, 병 고쳐주는 능력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진리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께 와서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군중 속에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다른 기대와 다른 소원”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기대’와 ‘예수께 모여든 사람들의 기대’가 다릅니다.

예수께서는 오직 진리를 통해서만 사람들을 이끄십니다. 다른 것을 통해서는 결코 예수께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중요성을 모릅니다. 그래서 너무나 쉽게 진리를 무시하고 버리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 교회에 나오지만, 진리에 이끌려서 온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교회와 교인들의 관심이 진리에 맞추어져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활동에 올인하고, 어떤 사람들은 방언에만 매달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과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선교만 하려고 합니다. 정말 슬픈 일이지만, 그것이 현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직 진리만을 바라보면서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택함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에 대한 굶주림이 있습니까? 그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소원과 열망이 없으면, 영적으로 죽고 미혹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됩니다.

이번 호에서는 사람들이 교회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진리를 찾기 위해 교회에 왔는데, 교회는 진리를 제대로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이번 호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성도들은 새로운 차원의 신앙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독자 여러분의 길을 인도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