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과 대적하는 설교가 듣기 싫어서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설교자가 복음과 죄를 가볍고 얄팍하게 다룰 때 설교는 성령과 대적하고 싸우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가 이런 설교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아무리 경건한 사람도 죄를 범합니다. 그러므로 너무 죄와 불순종에 대해서 염려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했습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정죄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이런 식의 설교에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교인들이 죄와 세속을 버리고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을까요? 이런 설교가 우리에게 참된 구원의 경험을 가져올 수 있을까요? 이런 설교가 교회에 부흥과 개혁을 가져올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죄에 대한 핑계를 만들어주고, 구원에 대한 착각과 거짓 안전을 주게 됩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고 거룩함을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1~2)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말세의 교회 상태를 지적한 것입니다. 이런 교회에서 어떤 설교를 해야 할까요? 교인들을 죄와 세속으로부터 구원하려면 무엇을 강조해야 할까요?

성령께서는 교인들의 양심 속에서 죄를 심각하게 다루시는데, 설교자는 죄를 붙잡고 있어도 구원받는 것처럼 설교하면 어떻게 될까요? 설교자는 성령과 싸우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죄를 보여주면서 “조심하라”고 경고하시는데, 설교자는 신자들의 죄를 덮어주고 의와 심판의 기별을 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설교자는 성령과 대적하게 됩니다. 목사는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성령과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목사가 성령과 대적하는 설교를 하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고민에 빠지게 되고,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를 찾는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이고, ‘가나안 성도’가 증가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바울은 성령과 싸우는 문제에 대해서 엄숙한 경고를 남겼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9)

이 말씀에서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은혜로 임하실 때 거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서 죄와 세속을 지적하는 은혜를 베풀 때 저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나에게 진리를 보여주는 은혜를 베풀 때 외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죄와 불순종의 삶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교하면 그것은 성령과 싸우는 것이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자들에게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고 경고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죄에 대한 진지한 설교를 듣기 힘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충격적인 이유는 ‘교인들이 다른 교회로 갈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지금 시대 사람들은 종교개혁 시대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지금 우리는 포스트 모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세속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죄를 버려야 한다는 설교를 하면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진리가 있는 그대로 선포되면 감당하지 못합니다.”

정말 지금 이 시대는 교회에서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말씀을 선포하면 안 될까요? 2천 년 전 예수께서도 유대교회가 감당하지 못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도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백성에게 외면당하고, 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도 16세기의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회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 역시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영국 교회에서 이단으로 낙인 찍히고 쫓겨났던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진리가 있는 그대로 제시될 때, 그것을 감당할 수 있었던 시대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직하게 제시될 때, 대다수의 교회와 사람들은 핍박의 정신을 갖고 복음과 대적하였고, 성령과 싸웠습니다. 매 시대마다 오직 소수의 성도들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 앞에 마음을 낮추고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진리가 정확하게 제시될 때 저항하고 대적합니다.

<Very Important> 귀가 가려우면 다른 스승을 찾는다

교회에서 거짓 복음이 흘러나올 때, 진리를 사모하는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진리가 정확하게 선포될 때,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설교 단상에서 말씀이 있는 그대로 선포되는데 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될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lust, 악한 욕망)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 4:3)

바울은 교인들이 왜 “바른 교훈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바울은 세 가지 이유를 말했는데, 첫 번째 이유는 ‘귀가 가렵기’ 때문이고 둘째 이유는 ‘자기 사욕을 따라가기’ 때문이며 셋째 이유는 ‘스승을 많이 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왜 귀가 가렵게 될까요? 듣기 싫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할까요? 마음속에 있는 악한 욕망이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종류는 말씀을 들을 때 귀가 가려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누구일까요? 정확한 진리를 들을 때 귀가 시원한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주의 말씀을 들으면 답답했던 가슴이 뚫리고, 뱃속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는 감격을 느낍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떤 그리스도인입니까? 주의 말씀을 들을 때 귀가 가렵습니까? 아니면 막혔던 가슴이 열리면서 시원해집니까?

‘귀가 가렵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바르게 선포될 때 마음이 불편하다면, 마음속에 말씀과 충돌하는 더러운 욕망과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을 들을 때 귀가 가려운 병을 고치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lust, 사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과 디모데후서 4장의 말씀을 연결해서 생각하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좇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이 왜 말씀을 거절하는지 아십니까? 그대들 마음속에 있는 악한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대들은 십자가 앞에 나가 그리스도의 희생과 피를 봐야 합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끓어오르는 정욕과 욕심을 쳐서 복종시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분명한 말씀이 선포될 때 교인들이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듣지 않으려고 할까요? 왜냐하면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말씀을 무시하고 외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외면하면,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요?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3절)

이 성경절은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귀가 가려운 사람들은 왜 “스승을 많이 두”게 될까요?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스승들을 찾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죄와 욕심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스승을 찾아가게 됩니다. 어떤 스승을 찾아갈까요? 귀가 가렵지 않는 설교를 해주는 스승(목사)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스승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거짓 선지자, 미혹하는 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스승을 찾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바라보실까요?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의 교회에게 당신의 종들을 보내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기 원하시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귀가 가렵고 마음이 불편해서 다른 스승을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이것이 말세의 교회 모습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이런 일들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튜브와 온라인에 매주 수많은 설교들이 올려지고 있습니다. 온라인에 올라오는 설교 중에서 어떤 설교를 들으면, 양심에 찔림이 오면서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부담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구원에 대한 진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다른 설교를 들으면 ‘지금 내 상태 그대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죄를 버리지 않고 세속에 붙잡혀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몰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까요? 한 목사는 귀를 가렵게 하는 설교를 하고, 다른 목사는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설교를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욕을 좇는 사람들은 스승을 많이 두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욕을 좇으면 왜 스승을 많이 두게 될까요? 내가 품고 있는 죄와 욕심을 정당화시켜줄 설교자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사욕을 좇는 사람들은 스승을 많이 두게 된다’고 했을까요? 재미있는 설교, 죄를 인정해주는 설교, 구원을 쉽게 주는 설교, 넓은 길을 걸어도 구원받는다고 해주는 설교, 종류대로 설교를 듣기 위해서 많은 스승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유튜브와 온라인에서 자신이 원하는 스승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스승을 찾기 원하십니까? ‘악한 욕망과 이기적인 성품을 갖고 있을지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해주는 스승을 찾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부담이 되고 양심이 아플지라도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는 스승을 찾기 원하십니까?

바울은 ‘사욕을 좆는 사람들은 스승을 많이 두게 된다’고 했는데, 그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요? 거짓 스승이 나를 찾아와서 미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입맛에 맞는 거짓 스승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인터넷을 통해서, 내 교만과 이기심을 만족시켜주는 설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로부터 흔들려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 과정입니다.

분명하고 예리한 성경 진리를 받아들이기 원하지 않는 자들은 끊임없이 자기의 양심을 진정시켜줄 이야기를 듣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영적인 설교를 싫어할 것이며, 자아를 부인하는 신앙과 겸비함을 적게 요구하는 말씀을 제시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더 호감을 갖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악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지성과 양심이 말하는 진실된 음성을 거절한다.”(선과 악의 전쟁, 523)

얼마나 분명한 말씀입니까? 우리 속에 있는 육체의 욕망은 작은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큰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때 주 앞에 나가 기도하는 성도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받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진리가 내 죄와 내 불순종을 곧바르게 지적하는데, 기쁘고 행복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진리가 제시될 때 내 생각과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신앙이 없으면 결국 거짓 스승을 따라다니다 멸망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매 시대마다 사탄이 교회 안에 수많은 거짓 복음과 거짓 교리를 뿌려놓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한 심령으로 따라가는 성도들은 모두 구원받았습니다.

독자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앙 상태에 대해서 정직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조용한 시간에 나를 찾아오셔서 “너는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었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지 못하고 벌거벗고 있다”고 말씀하실 때 성령의 음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세주를 향해서 절박한 심령으로 손을 뻗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왜 멸망했습니까? 자신이 진리와 구원에 대해서 무지하고 잃어버린 바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매 시대마다 “나는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 나는 잃어버림을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멸망 당했습니다.

두려운 사실은, 오늘날 교회가 너무나 쉽게 “당신은 구원받습니다”라고 선언해준다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말씀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살면서 “나는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교회에서 구원을 너무나 쉽게 선포해주기 때문에 “주여, 제가 잃어버림을 당했습니다. 저를 살려주시옵소서.”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백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참된 회개의 경험이 거의 사라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하고, 교인들은 어떤 말씀을 찾아서 들어야 할까요? 이 시대에 필요한 말씀은, 인간의 교만한 마음을 꺾고 진리 앞에 납작하게 엎드리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만약 의사가, 환자가 다른 병원으로 갈 것을 두려워해서 환자가 지켜야 할 건강 원칙을 숨기고 환자가 듣기 원하는 말만 해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환자는 심각한 병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사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외면한 채 환자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삯꾼이 되고 맙니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자가 교인을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해서 죄와 의와 심판의 기별을 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교인들은 자신이 무슨 문제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 채 멸망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대로 선포될 때 ‘귀가 가려운 사람들’은 불평하거나 교회를 떠나지만, 진리를 사모하는 성도들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 눈을 열어주셔서 진리가 무엇인지 보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제 신앙 속에서 막혀 있는 것들을 뚫어주셨습니다. 제 속에 말씀을 사모하는 심령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소원이 생겼습니다. 전에는 더럽고 추한 것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순결하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독자 여러분, 지금 이 시대에 왜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을까요? 교회에서 순수한 거듭남과 복음의 경험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성령과 대적하고, 말씀이 있는 그대로 선포되지 않을 때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