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성 무통증이라는 희귀병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태어나면서부터 통증 감각이 없는 질병입니다. 마취 주사를 맞지 않아도 아무런 통증이 없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관절을 이탈시켰다가 다시 넣을 수도 있습니다. 통증이 없기 때문에 참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매우 끔직한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무통증 환자들은 화가 나면 셀 수도 없이 머리를 책상에 내리치면서 분을 풀기도 하고, 뜨거운 난로를 붙잡고 흔들면서 격노하기도 합니다. 결국 무통증 환자들은 통증이 없는 세계에서 홀로 외롭게 살다가 죽게 됩니다. 통증이 없기 때문에 다쳐도 모르고, 상처는 그대로 방치되어 살이 썩어들어가게 됩니다. 통증은 건강한 생활과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 불가결하며, 인격을 형성하는 데도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고통은 언제나 아프고 힘들지만,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이유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순종하게 하십니다. 다윗은 고난을 통하여 세상을 버리고 순종하는 신앙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67, 71). 고난은 우리의 마음을 겸손케 하고, 하늘을 바라보게 해 줍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남아 있는 애정과 죄를 버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래서 고난을 한참 당하고 나면,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크게 신뢰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난 당한 후에 이런 간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시 119:75). 이것이 고난을 수없이 경험한 다윗이 내린 결론입니다. 고난을 허락하는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은 의롭다는 것이 다윗의 간증입니다. 또한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성실하심 때문이라는 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우리를 그냥 모른척하고 놔둘 수도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과 성실함 때문에 도무지 그렇게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자식보다 고난을 허용하는 부모가 훨씬 더 힘들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이유

죄의 흉악함을 보게 해서, 우리의 마음을 진리와 의를 사랑하는 쪽으로 옮기게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고난은 내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해 줍니다. 내가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아왔는지 보게 해 줍니다. 얼마나 나만 생각하며 살아왔는지 보게 해 줍니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서 자아를 버리게 되고 하나님의 의를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애굽에 내린 열 재앙 가운데 어떤 재앙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는 고센 땅에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애굽으로부터 떼어내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쪽으로 옮겨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마음을 하늘 방향으로 옮겨 줍니다. 그래서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난이 없었다면 구원받지 못했을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을 하늘에 가서야 알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

세속적 재물보다 신앙을 선택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이 세상이 내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이 없고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행복하기만 하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집과 돈을 늘려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오고 힘들어지면, 자신이 나그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은 세상에 대한 정을 떼게 만들어 주며, 하늘에 우리의 관심을 고정시키게 해 줍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해 줍니다.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려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보게 해 줍니다.

네 번째 이유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유의지와 선택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와 악을 선택했을 때 우리는 그 결과 때문에 고난 당하게 됩니다. 그런 경험을 통하여 우리는 선택을 하는 데 있어서 더욱 신중하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과 진리의 편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선택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제로 하늘에 데려가시지 않습니다. 구원과 영생을 강제로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것의 가치를 깨닫고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데, 고난을 통해서 도와주십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간절히 원하는 심령을 가지고 주 앞에 나오도록 인도해 줍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에게 고난이 없다면, 우리는 절박한 심령으로 진리를 찾지 않을 것입니다.

다섯 번째 이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욥은 의인이었습니다. 고통을 받을 만한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순결한 신앙이 온 우주 앞에서 나타나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어떤 것이 진짜 신앙인지를 보여 주길 원하셨습니다. 복 받기 위해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의를 사모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온 세상 앞에 보여 주길 원하셨습니다. 욥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순수한 충성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욥의 신앙을 마귀에게 보여 주길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망하고, 건강에 큰 문제가 생기고, 자녀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그런 상황에 들어가면,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을 따랐던 모든 이유와 목적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히브리서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히 12:5, 6).

바울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시며 채찍질하시기 때문입니다. 부모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집 자녀에게는 손대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자식에게는 꾸중도 하고 매질도 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 12:7).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과 같은 대우를 하기 때문에 징계하고 채찍질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처럼 미천한 인간을 아들 대우하시느라 그 어려운 매질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매질하는데,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하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요?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히 12:8).

고난과 징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바울은 고난과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닐 수 있다고 증거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 징계받고 고난 받은 경험이 없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잘되고, 인생이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가나요? 왜 자신에게 고난이 없는지 깊이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히 12:9, 10).

이 말씀에 징계와 채찍질의 최종적인 목적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재난이 오고 질병이 오며 사고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올 때마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만 당하고, 하나님의 성품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고난 중에 있을 때 누가 즐겁고 재미있을까요? 고난은 정말 아픈 경험이지만, 그것을 통과하면서 교만이 떨어져 나가고, 나만 생각하는 정신이 사라지고, 의와 평강의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내가 무엇을 하고, 어떤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12, 13)

비록 고난이 힘들지라도,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와 사랑을 알기 때문에 팔다리에 힘을 주고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모든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운 경험의 노래를 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고난은 정말 힘들고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이기심과 교만으로부터 구원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심지어 예수께서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함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7~9). 이것이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서 사신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예수께서도 고난 속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매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서 하늘 아버지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고난 속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와 직접 살지 않았으면, 우리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이해하는 사람마다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직접 보여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 마음대로 상상하고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이 올 때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신뢰하는 신앙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는 고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을 비는 기복신앙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믿음의 대가로 복을 약속합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가짜 신들은 자신을 믿는 믿음의 대가로 복을 약속합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와 우상 종교를 구별하게 만드는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무엇을 얻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감사하기 때문에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충성을 바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경배를 유도하기 위하여 축복을 미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탄의 궤변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업체와 가정을 크게 축복하실 것입니다.”라는 설교들이 점점 더 대담하게 하나님의 교회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런 설교에 귀가 솔깃해진 세속적이고 어리석은 양들은 보다 많은 헌금과 보다 열성적인 활동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 내고, 지옥의 형벌을 피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과 하나님의 복을 거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주말마다 수많은 사람이 교회에서 예배드리지만, 한 번도 하나님께 온 마음을 바쳐본 경험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들은 돈과 명예와 자랑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실 것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좁은 길로 인도하여 그들의 성품과 생애가 결정적으로 변화되어 영생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생애 속으로 고난이 들어오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