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오랜 투병 생활에서 깨달은 진리

불치의 병으로 인하여 자리에 누워 있는 내게 있어서 세상은 더 이상 유쾌하고 즐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힘겨운 노동을 하는 사람이 어서 빨리 해가 져서 밤이 오기를 기다리듯 나 역시 힘겨운 투병 생활이 끝나고 죽음이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꽃을 보아도 즐겁지 않았고 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어도 감흥이 없었습니다.

목사인 내가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없다면 더 이상 가족과 친지들을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음과 같은 욥의 절규가 나에게도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욥 3:20~23).

누워서 천장을 쳐다보면 지난날의 내 생애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너무나 많은 실패와 잘못된 결정들을 생각할 때마다 숨이 막혀 왔습니다. 무익하게 낭비한 세월, 생각 없이 지나쳐 버린 기회, 알면서도 고의로 범한 죄들, 무관심하게 지나친 선의 기회들로 인하여 내 고통은 육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영적 전쟁은 아직도 한창인데 나는 쓸모없는 군인으로 방에 홀로 누워서 군마가 동서로 치닫는 소리,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 적군의 북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나는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내게 두 가지 실망이 찾아왔는데, 하나는 나는 결코 다시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실망은, 이제 나는 폐인이 되었으므로 하나님과 세상에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성령께서 내게 찾아오셔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주셨습니다. “너는 어떻게 네 병이 불치라는 것을 아느냐? 의사와 병원이 네게 불치의 선고를 내렸기 때문에 네가 스스로 좌절하고 주저앉아 있는 것이지? 우주를 창조하고 너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인데 어찌 너는 세상의 과학과 통계와 사망률에 의존하느냐? 의사는 창조주가 아니다. 이 세상의 의사와 병원이 너를 버렸을지라도 하나님께 가라. 그분께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치료법과 처방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현대 의학이 발전됨에 따라서 사람들은 의학을 신으로 만들었는데, 너도 의학이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내가 발견한 신앙 치료법

신앙 치료법이란 기도와 위생과 하나님께서 천연계 속에 넣어 두신 단순한 약초들을 사용하는 치료법을 말합니다. 어떤 극단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의사는 마귀의 사자요 약품은 마귀가 준 독극물이라고 믿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 치료법은 난치병의 치료에 매우 효과적임을 나는 믿습니다. 신앙 치료법이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처럼 부처에게 절을 하거나 신령한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우매함이 아닙니다. 신앙 치료법이란 몸을 자연의 창조주와 그 법칙에 맡기고 온 마음과 영혼을 그분께 의지하여 내 몸의 상태를 생명의 법칙하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미신이 아니라 과학적 진리입니다. 세상 의사들이 말하는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신앙 치료법에 몸과 마음을 맡겨야 합니다.
 
병을 고치기 위하여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신앙 치료법은 무익합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고통 중에서도 영혼의 평안을 얻는 치료법입니다. 하늘로부터 받는 평안한 마음과 영혼은 최고의 회복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식물과 자연과 신앙에 의지하여 치료에 힘쓸 때 불안과 좌절과 고통은 사라지고 하늘로부터 놀라운 치료의 은혜가 내려옵니다.
 
목사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마귀는 내 귀에 다음과 같이 속삭였습니다. “너는 이제 아무 쓸모도 없는 폐인이 되었다. 이제 포기해라.” 그러나 성령께서는 즉시로 내 마음속에 이러한 음성을 주셨습니다. “어떤 일을 해야만 마음의 평안이 생긴다면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떤 공로가 없어도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평안이 있어야 한다. 네가 목사의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실망하고 좌절한다면 너는 아직 그리스도인의 참된 평안과 행복을 알지 못하는 거야. 선교 사업은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물이어야 한다. 그 이상의 다른 의미가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네가 하는 선교 사업보다 상한 마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원하신단다. 네가 만일 네 병마로 인하여 목회 사업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면 네 마음을 바쳐라. 어쩌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병마를 허락하신 것도 네 마음을 얻기 위함이 아니겠니? 그동안 베다니의 마르다의 심정으로 열심히 동분서주하면서 뛰어다녔지? 이제 하나님께서는 너에게 말씀을 사모하는 마리아의 심령을 주시기 위하여 너를 바삐 뛰어다니지 못하게 만드셨단다. 네가 항상 부르던 찬송가 ‘빈손 들고 십자가를 의지하네’의 진정한 의미를 이제부터 배워 보렴.”
 
나는 이제 손발을 놀릴 수도 없습니다. 강단에 서서 설교도 할 수 없고 바다 건너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배를 탈 수도 없습니다. 이런 나에게 주의 영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너의 초라한 병실 안에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수 있단다. 불치의 병을 가진 환자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평안과 겸손 그리고 인내와 정숙에서 나오는 미소는 네가 지금까지 한 모든 설교보다 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방문객의 손을 잡고 드리는 너의 기도 소리에 사람들은 이 병실에서 천사의 임재를 느끼게 될 것이다. 네가 그러한 투병의 삶을 살 때 너는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대신에 오히려 위로가 될 것이다. 지치고 외로운 자들은 너를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들은 너에게서 천사의 얼굴을 보고 말을 들으며 위로받게 될 것이다. 네가 멋진 설교를 할 때는 교인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지 못했지만 지금 네가 나누어 주는 말씀은 다른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고 있단다.”
 
“즐거움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동물적인 너는 병들었지만 천사적인 즐거움이 네게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병든 자가 너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이 병으로 죽어 가고 있으며 1년에 수십만의 사람이 무덤에 들어가고 있다. 너를 낳은 육신의 어머니도 너와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세상을 떠났고 너보다 나이 어린 누이동생도 불평 없이 눈을 감았다. 너만 불행하고 너만 고통스러운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서 사람이 당하는 최대의 고통을 겪고 죽도록 하셨다.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의 시간을 보낼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고 눈에 보이는 어떤 도움이나 기적도 베풀지 않으셨다. 지금 네가 통과하는 이 시간이야말로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란다. 무덤에 들어가는 것은 하루의 일을 마치는 것에 불과하다. 무덤이란 깊고 캄캄한 터널이 아니라 완전한 쉼 속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란다. 완전한 쉼 속에서 영광의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는 것이 어찌 고통이 될 수 있겠느냐!”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가졌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불치의 병은 두려움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회복될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좁은 병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합니다. ■

 

결론, 고난이 필요한 다섯 가지 이유

선천성 무통증이라는 희귀병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태어나면서부터 통증 감각이 없는 질병입니다. 마취 주사를 맞지 않아도 아무런 통증이 없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관절을 이탈시켰다가 다시 넣을 수도 있습니다. 통증이 없기 때문에 참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매우 끔직한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무통증 환자들은 화가 나면 셀 수도 없이 머리를 책상에 내리치면서 분을 풀기도 하고, 뜨거운 난로를 붙잡고 흔들면서 격노하기도 합니다. 결국 무통증 환자들은 통증이 없는 세계에서 홀로 외롭게 살다가 죽게 됩니다. 통증이 없기 때문에 다쳐도 모르고, 상처는 그대로 방치되어 살이 썩어들어가게 됩니다. 통증은 건강한 생활과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 불가결하며, 인격을 형성하는 데도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고통은 언제나 아프고 힘들지만,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이유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순종하게 하십니다. 다윗은 고난을 통하여 세상을 버리고 순종하는 신앙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67, 71). 고난은 우리의 마음을 겸손케 하고, 하늘을 바라보게 해 줍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남아 있는 애정과 죄를 버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래서 고난을 한참 당하고 나면,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크게 신뢰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난 당한 후에 이런 간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시 119:75). 이것이 고난을 수없이 경험한 다윗이 내린 결론입니다. 고난을 허락하는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은 의롭다는 것이 다윗의 간증입니다. 또한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성실하심 때문이라는 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우리를 그냥 모른척하고 놔둘 수도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과 성실함 때문에 도무지 그렇게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자식보다 고난을 허용하는 부모가 훨씬 더 힘들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이유

죄의 흉악함을 보게 해서, 우리의 마음을 진리와 의를 사랑하는 쪽으로 옮기게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고난은 내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해 줍니다. 내가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아왔는지 보게 해 줍니다. 얼마나 나만 생각하며 살아왔는지 보게 해 줍니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서 자아를 버리게 되고 하나님의 의를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애굽에 내린 열 재앙 가운데 어떤 재앙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는 고센 땅에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애굽으로부터 떼어내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쪽으로 옮겨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마음을 하늘 방향으로 옮겨 줍니다. 그래서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난이 없었다면 구원받지 못했을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을 하늘에 가서야 알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

세속적 재물보다 신앙을 선택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이 세상이 내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이 없고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행복하기만 하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집과 돈을 늘려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오고 힘들어지면, 자신이 나그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은 세상에 대한 정을 떼게 만들어 주며, 하늘에 우리의 관심을 고정시키게 해 줍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해 줍니다.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려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보게 해 줍니다.

네 번째 이유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유의지와 선택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와 악을 선택했을 때 우리는 그 결과 때문에 고난 당하게 됩니다. 그런 경험을 통하여 우리는 선택을 하는 데 있어서 더욱 신중하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과 진리의 편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선택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제로 하늘에 데려가시지 않습니다. 구원과 영생을 강제로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것의 가치를 깨닫고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데, 고난을 통해서 도와주십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간절히 원하는 심령을 가지고 주 앞에 나오도록 인도해 줍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에게 고난이 없다면, 우리는 절박한 심령으로 진리를 찾지 않을 것입니다.

다섯 번째 이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욥은 의인이었습니다. 고통을 받을 만한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순결한 신앙이 온 우주 앞에서 나타나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어떤 것이 진짜 신앙인지를 보여 주길 원하셨습니다. 복 받기 위해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의를 사모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온 세상 앞에 보여 주길 원하셨습니다. 욥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순수한 충성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욥의 신앙을 마귀에게 보여 주길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망하고, 건강에 큰 문제가 생기고, 자녀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그런 상황에 들어가면,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을 따랐던 모든 이유와 목적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히브리서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히 12:5, 6).

바울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시며 채찍질하시기 때문입니다. 부모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집 자녀에게는 손대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자식에게는 꾸중도 하고 매질도 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 12:7).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과 같은 대우를 하기 때문에 징계하고 채찍질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처럼 미천한 인간을 아들 대우하시느라 그 어려운 매질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매질하는데,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하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요?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히 12:8).

고난과 징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바울은 고난과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닐 수 있다고 증거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 징계받고 고난 받은 경험이 없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잘되고, 인생이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가나요? 왜 자신에게 고난이 없는지 깊이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히 12:9, 10).

이 말씀에 징계와 채찍질의 최종적인 목적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재난이 오고 질병이 오며 사고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올 때마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만 당하고, 하나님의 성품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고난 중에 있을 때 누가 즐겁고 재미있을까요? 고난은 정말 아픈 경험이지만, 그것을 통과하면서 교만이 떨어져 나가고, 나만 생각하는 정신이 사라지고, 의와 평강의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내가 무엇을 하고, 어떤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12, 13)

비록 고난이 힘들지라도,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와 사랑을 알기 때문에 팔다리에 힘을 주고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모든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운 경험의 노래를 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고난은 정말 힘들고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이기심과 교만으로부터 구원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심지어 예수께서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함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7~9). 이것이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서 사신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예수께서도 고난 속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매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서 하늘 아버지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고난 속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와 직접 살지 않았으면, 우리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이해하는 사람마다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직접 보여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 마음대로 상상하고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이 올 때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신뢰하는 신앙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는 고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을 비는 기복신앙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믿음의 대가로 복을 약속합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가짜 신들은 자신을 믿는 믿음의 대가로 복을 약속합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와 우상 종교를 구별하게 만드는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무엇을 얻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감사하기 때문에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충성을 바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경배를 유도하기 위하여 축복을 미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탄의 궤변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업체와 가정을 크게 축복하실 것입니다.”라는 설교들이 점점 더 대담하게 하나님의 교회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런 설교에 귀가 솔깃해진 세속적이고 어리석은 양들은 보다 많은 헌금과 보다 열성적인 활동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 내고, 지옥의 형벌을 피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과 하나님의 복을 거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주말마다 수많은 사람이 교회에서 예배드리지만, 한 번도 하나님께 온 마음을 바쳐본 경험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들은 돈과 명예와 자랑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실 것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좁은 길로 인도하여 그들의 성품과 생애가 결정적으로 변화되어 영생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생애 속으로 고난이 들어오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

6부, 가난의 고통을 이기는 방법

가난 때문에 그대가 수치스럽다면, 정직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부지런함에도 불구하고 가난이 그대 곁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대는 가난 속에서 만족과 행복을 찾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그대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뜻을 그대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난의 가시를 품고서 인생을 힘차게 살아가는 비결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6:20). 물론, 이것은 마음의 가난함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무리 가난하고 꽃잎처럼 고울지라도 깊은 산속에서 누더기를 걸치고 산다면 누가 그를 거들떠볼까요? 세상에 괴로운 일이 많지만 가난처럼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대로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모든 복을 허락하실 것이므로 의인은 절대로 가난해질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마태복음 6장 33절을 인용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이 모든 것”을 축복으로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모든 것”이란 무엇일까요? 대 저택과 다이아몬드와 멋진 자동차와 같은 것들인가요?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설명이 바로 앞에 있는 성경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 32). 예수께서 당신을 진실한 마음으로 따르는 자들에게 보장하신 것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방인들처럼 불안한 마음으로 이러한 것들을 구하지 말고,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의연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십 년치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한 번에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의 식탁을 펼쳐 놓으셨던 것처럼, 지금도 “이 모든 것”을 하루하루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4).

필요가 하루를 단위로 공급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생애에는 궁핍과 가난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마지막 시대에 순결한 양심과 하나님의 자녀다운 기백을 잃어버리지 않고 좁은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 가난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실제적 아픔들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친구에게 받는 아픔

가난에서 오는 고통 중에 첫 번째는 친구에게 냉대를 받는 것입니다. 잘살 때는 친구들이 많이 모여들지만, 가난해지면 친구들이 떠나갑니다. 내가 궁하지 않을 때는 신용이 있었지만, 호주머니가 비니까 가까운 친구도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습니다. 친구를 찾아가도 나를 만나길 꺼려 하고 어쩌다가 도움이라도 청하면 나를 한심한 인간으로 바라봅니다. 한때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 하나님과 진리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던 교우도 가난이 싫어서 나를 멀리합니다. 그래서 옛 현인은 “가난에 쫓겨 눈물이 소매를 적실 때, 사람의 마음은 알려진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가난은 가난해진 사람의 마음도 드러내지만, 가난해진 자의 친구의 마음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가난해질 때까지는 친구를 믿지 마세요. 이 세상의 친구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내가 햇볕 아래를 거닐 때에는 나와 함께하지만, 가난이라는 그늘에 들어서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언제나 나의 곁을 떠나지 않는 친구가 한 분 계신데, 그분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내가 가난해지고 갈급해지면 오히려 가까이 오셔서 나의 온 마음과 생애를 당신의 영원한 진리로 배불리 채워 주십니다.

 

가족에게 받는 아픔

가난 때문에 받는 피할 수 없는 아픔은 나로 인하여 가난해진 가족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 혼자라면 가난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기대어 살아가는 늙으신 부모님과 연약한 아내 그리고 어린 자식이 있기 때문에, 가난은 내 마음에 깊은 아픔과 불안을 남깁니다. “어떻게 하면 나로 인해 가난해진 부모와 처자의 슬픔과 딱한 사정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나의 신앙과 철학을 움추러들게 만듭니다. 가난에 지친 어머니와 식솔들이 힘없는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을 보는 것, 이것이 가난이 가져다주는 아픔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그리스도인 생애의 목적은 가난을 벗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생애를 가슴에 담고 살기 때문에 내 가난을 잊어버리고 다른 가난한 자를 위로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좁은 길을 걷고자 할 때에 가장 먼저 우리 앞에 나타나는 문제는 가난일 수 있습니다.

 

일터에서 받는 아픔

가난과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부정직과 거짓으로 빵을 얻고자 하는 시험을 받게 됩니다. 정직과 성실로 일하는 자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거짓과 처세로 일하는 자들은 점점 더 부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가난한 그리스도인은 자주 시험을 받게 됩니다. 어떤 때는 나의 정직과 성실 때문에 부모, 처자와 함께 또 한끼의 식사를 걸러야 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굶주리는 자가 나 하나라면, 내 뜻을 세워 무릎을 꿇지 않으련만, 지금의 나는 나 혼자만이 아닙니다.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마음과 몸을 바치는 아내를 위하여, 나는 내가 존경할 수 없는 사람 앞에서 복종의 예를 갖추어야 합니다. 빵을 위하여 존경하지 않는 사람 앞에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 바로 이것이 가난이 가져오는 아픔입니다.

그러므로 식생활을 위하여 비굴해지지 않는 것, 부정직하게 살지 않는 것, 이것이 진리를 위하여 세상을 버린 그리스도인들이 통과하게 되는 경험입니다. 부정직하고 비굴한 방법으로 가족을 위하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할 수는 있지만, 존경의 마음으로 그대를 바라보는 가족의 눈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육을 위하여 영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과 열등감

가난은 비루한 열등감을 내 마음속에 싹트도록 합니다. 부자 이웃을 보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특별한 이유 없이 부자 친구를 비웃는 자는 가난 때문에 비루해진 자입니다. 가난한 자가 아무런 마음의 부담 없이 부자 친구와 교제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지만, 진리와 의를 위하여 살다가 가난해진 그리스도인은 비겁한 열등감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현대는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합니다. 돈이 사람을 세우고, 돈이 사람을 넘어뜨립니다. 돈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사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돈을 일만 악의 뿌리”로 믿는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가난의 아픔을 피하기 위하여 양심을 더럽히고 마음의 순결을 싼값에 팔아 치우고 있습니다. 비루한 열등감이 우리 마음을 채우려고 할 때, 가난 속에서 의를 지켰던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명상하시길 바랍니다.

 

가난이 가져오는 시험

가난은 남을 부러워하게 하고 자신을 비굴하게 만드는 동시에, 또한 자신을 염세주의자로 만듭니다. 가난해지면 사람이 많이 모이는 모임을 싫어하게 되고 사람들과의 교제를 피하게 됩니다. 마음은 점점 냉랭하고 완고해져서, 의연한 그리스도인의 자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가난은 자신을 사회와 교제로부터 몰아냅니다. 가난은 사람에게 깊은 외로움을 가져다줍니다.

가난은 가난을 낳습니다. 부모가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하게 된 자는 그 마음에 한을 품습니다. 가난은 사람을 한 맺힌 수전노로 만듭니다. 가난이 한이 되어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을 생애의 목적으로 삼은 자는 물욕에 찌든 수전노의 길을 걷게 됩니다. 배우지 못해서 가난하게 된 자는 학위의 한을 품고서 인생을 의미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파수꾼을 세워 수전노의 정신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엄격한 절약 정신을 실천할지라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는 너그럽게 주머니를 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은 가진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이미 가진 것도 빼앗습니다. 부자가 더 부해진다는 이야기는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진다는 뜻입니다. 깊은 가난은 사람을 절망의 계곡으로 몰아넣습니다. 가난 때문에 그대가 수치스럽다면, 정직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부지런함에도 불구하고 가난이 그대 곁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대는 가난 속에서 만족과 행복을 찾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그대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뜻을 그대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난의 가시를 품고서 인생을 힘차게 살아가는 비결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의 아픔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의를 위한 가난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존경을 받는 가난이 있습니다. 비록 흔하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정의와 진리를 위한 가난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말하기를 “하나의 방해물이 늘 내 몸에 붙어 다니는데, 그것의 이름은 정직이다.”라고 했습니다. 정직하게 모으지 않은 재물은 의미가 없으며, 영원한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양심의 명령을 존중하면서 축적한 부가 아니면 그것은 하늘이 인정하는 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들 중에도 가끔씩 의인들을 두심으로써, 당신께서 재물을 사용하시는 방법들을 계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가난해진 위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40년간의 봉사 후에 그의 소유로 남은 것은 웃옷 한 벌과 몇 권의 고서뿐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하루에 두 근의 빵과 아테네 성 뒤에서 솟아나는 샘물만 있으면 만족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주의 왕이신 예수께서 스스로 선택하여 가난과 굴욕의 생애를 사셨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도 말씀대로 삶으로써 가난과 굴욕의 생애를 살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가난에 대하여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9:58).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갈채와 칭찬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자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가난한 자들과 함께 거하시기로 선택하심으로써 진리가 가난한 자들의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진실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인이시라면, 그분의 종이 되기로 결심한 우리가 주인보다 안락한 인생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 속에 계십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내게 행한 것이니라”(마 25:40).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이 듣지 않는 복음은 진리가 아닙니다.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당신이 기다리던 메시아입니까?”라고 여쭈었을 때, 예수께서는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증명하기 위하여 가난한 자들이 당신께서 전하는 복음을 듣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 2천 년 전에 유대 땅에서 육신의 가난함을 돌보아 주셨고, 심령의 가난함을 채워 주셨던 예수께서는 지금도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막 14:7).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사이에 가난한 사람들을 두심으로써, 그들의 신앙과 사랑의 진실성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가정 안에서 이사야 58장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벗은 자를 입히며…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누어 주며”(사 58:7).

가난은 반드시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이 진짜 가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들 중에서도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습니다. 비록 비단옷을 입고 기름진 음식으로 세끼를 때울지라도, 그 심령이 가난하고 곤고하면, 예수께서는 어김없이 그를 찾아오십니다. 예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들을 항상 직접 돌보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의를 위하여 가난하게 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바로 이것이 의를 위하여 가난해진 자들의 모습입니다. 의를 위하여 가난해진 사람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난에 대하여 잘 이해해야만 합니다. 굶주린 엘리야를 먹였던 까마귀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셨던 예수님의 기적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셨던 기적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기적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쫓는 자들은 크게 실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할 때, 가난이 자신의 생애를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가난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선택하세요.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세요. 그리하면 수천 년 전에 유대 광야에서 날마다 펼쳐졌던 하늘 만나의 식탁이 오늘도 그대 가정에서 기적적으로 펼쳐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4). 가난을 피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세우기 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가난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가난과 궁핍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백성들의 성품과 생애를 다듬질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

 

5부, 교회를 사랑할 때 받는 고통

몇 해 전에 일본에서 2차세계대전 이후 일본에 가장 큰 영향력을 준 20인을 뽑은 적이 있었는데,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이 그중 한 사람으로 뽑혔습니다. 기독교 불모지인 일본에서 기독교 목사가 뽑혔다는 사실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은 세속화되어 가는 일본 기독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위해서 생애를 바쳤던 분입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세상이 그분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경험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기사를 소개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불행은 재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집이 없어서 길거리를 헤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도 불행이지만 아직 불행의 극치는 아닙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불행은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해가 뜰 때부터 지기까지 자신이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모르고,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을 여행하는지도 모르며, 방향도 없고, 도달해야 할 항구도 없이, 해초가 바닷물에 떠돌듯이 밀물과 함께 들어오고 썰물과 함께 나가면서 인생을 끝내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불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면 확고한 목적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속에 의의 원칙을 세우는데, 그 원칙이 세워진 사람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는 일 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사람은 아직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고통은 영광의 길을 열어 줍니다. 따뜻한 봄이 오기 전에 추운 겨울이 오듯이 영광이 오기 전에 고통이 옵니다. 그러므로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기꺼이 고통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감사하렵니다. 고통이 있기에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있기에 고통 받는 자의 친구가 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나를 괴롭혔기 때문에 하늘이 한층 그리워졌습니다. 잔인한 비난의 검이 내 가슴을 찔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나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이 세상이 나에게 낙원이 되어 무덤 너머 저편을 바라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생의 고통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면 그곳에는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 가난에 쫓길 때,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치료하고도 남는 영약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고통 속에 있을 때는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인내의 열매를 낳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나게 해 줍니다.

교회가 순결할 때는 진리와 말씀 위에 분명하게 서 있는 사람들이 존경받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속화되고 어둠 속에 있을 때는 말씀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시와 외로움이 찾아오게 됩니다. 중세기 천년의 종교 암흑시대를 끝마쳤던 마르틴 루터가 그런 경험을 했고 요한 웨슬리도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교회가 깊은 암흑 속에 있을 때 교회에서 지지받고 사랑받는 사람이 오히려 교회를 타락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 기독교 역사가 말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우고자 할 때 받게 되는 고난을 겸손과 인내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유대 교회들로부터 미움을 받은 것은 그분께서 누구보다도 유대 교회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교회가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주었습니다. 지금도 교회를 무척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를 세속과 배도로부터 구하려고 하면 미움을 받게 됩니다. 나는 예수도 아니고 종교개혁자도 아니지만, 부족한 내가 그분들의 고통과 환난에 동참할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고난과 환란이 없었다면 나 역시 세속에 빠져서 좁은 길을 떠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난한 사람을 돌보려고 호주머니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게 가난을 허락하셔서 나로 하여금 굶주림에 울게 하셨습니다. 내가 교회를 어둠으로부터 구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들로 하여금 나를 배척하게 하여 외로움 속에서 교회를 구하는 복음을 이해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드셨던 가난과 핍박과 외로움의 채찍이 이제는 구원의 복음이 되었습니다.

 

죽이는 고통이 아니라 살리는 고통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은 우리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고통이 없는 자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입니다. 고통을 위한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를 위한 고통입니다. 고통은 수단이고, 은혜가 목적입니다. 고통으로 시작하지만 은혜로 끝납니다. 하나의 고통은 백 가지의 은혜를 가져오고 짧은 이 고통의 세상은 영원한 은혜의 세계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 말하고 은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인생의 의미를 알 수 없고 참된 위로와 평화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사람을 원망하고 교회를 원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투쟁이 생기고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고통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한 사람만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어둠에 빠진 교회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쓰라린 고통은 선을 베풀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악인으로 취급받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통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한다는 말의 의미 속에는 이런 고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기와 평판을 포기했는데,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면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자들이 받게 되는 고통입니다. 많은 경우, 진리를 세우고 교회를 구하는 일에는 이러한 고통이 따릅니다.

 

고통으로 만들어지는 생애

그리스도인의 생애가 너무도 독특하기 때문에 세상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목사로서 독특한 삶을 살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내 신앙이 말라 버렸고 진리가 내 삶 속에서 그 빛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전해야 할 말씀이 없었고 설교를 준비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없고 가슴으로 부를 수 있는 찬양의 노래가 없었을 때, 하나님이 보내 주신 고통이 내게 임해서 나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나는 깊은 고뇌와 아픔 속에서 방황했습니다. 그런데 고통이 남긴 상처에서 회개가 흘러나왔고 생명을 담은 설교가 흘러나왔습니다. 내 신앙의 눈은 열렸고 찬양이 다시 내 입에 돌아왔습니다. 그때 나는 내 아픈 상처를 만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내게 고통을 주셔서 영혼을 소성케 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받는 고통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 싸우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지해서 승리해야 합니다. 이러한 승리 속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이 깊이 스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심은 당신의 능력과 은혜를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걱정과 염려가 덮쳐올 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기대해야 합니다.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6, 37).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통하여 우리를 심판해 주십니다. 오랜 세월 후에 의가 드러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과 교회 안에서 높은 지지와 존경을 받다가 오랜 세월 후에 수치 가운데로 떨어지는 사람은 죄의 사람입니다. 의인은 불평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는 자입니다.

 

4부, 법을 무시하면 고통이 온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도덕률(십계명)입니다. 그리고 자연법칙은 물고기가 물에서 살면 살고, 물 밖으로 뛰쳐나오면 죽는 것과 같은 생명의 법칙입니다. 고압선을 만지면 죽는다는 법칙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고의적으로 전깃줄을 만져서 죽었을 경우에, 우리는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독버섯을 먹는다면, 그는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의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의 법칙은 우리가 그것을 무시할 경우에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을 지키면, 그것은 우리를 지켜 주는 울타리가 되지만, 그것을 어겼을 경우에는 불행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변하지 않는 자연법칙

자연법칙을 어겼다고 해서 항상 즉각적인 대가를 지불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몇 년 후에 그 결과를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전혀 그 결과가 없이 사라지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긴 결과를 느끼든지 느끼지 못하든지 간에 그것은 항상 결과를 남깁니다. 그러므로 자연법칙은 그것을 어겼을 경우, 그 결과가 지연될 수는 있어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20대에 무엇을 뿌렸다면, 40대 혹은 50대에 가서는 그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뿌려 놓고서, 그 결과가 생기지 않기를 희망하지만 그러한 희망은 헛된 것입니다. 세상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세워 놓으신 자연법칙 또한 존재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연법칙은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에 따라서 변경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홍해를 갈라놓는 기적을 행사하심으로 자연법칙을 파괴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세워 놓으신 법칙을 결코 파괴하는 분이 아닙니다.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는 중력에 의해서 공중에 뜰 수 없다는 자연법칙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공기보다 훨씬 무거운 보잉 747 점보 제트기가 하늘을 날지 않습니까? 비록 공기보다 무거운 쇳덩어리일지라도 그것에 적당한 크기의 날개를 부착하고 빠른 속력으로 활주로를 달려가면 양력을 받아서 공중을 날 수 있다는 또 다른 자연법칙이 존재합니다. 쇳덩어리는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는 자연법칙이 존재하지만, 엄청난 무게의 유조선을 조선공학적으로 잘 설계하면 부력을 받아서 바다 위에 뜰 수 있다는 또 다른 자연법칙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법칙 안에서 모든 현상을 해석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인간의 어리석은 꾀 안에 가두어 놓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당신께서 이 우주에 세워 놓으신 자연법칙 안에서 자유롭게 기적을 행사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법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도 결코 변경되거나 폐하여질 수 없는 우주의 법칙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십자가를 가리키면서, 이제는 율법이 폐하여졌으므로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만,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마 5:17, 18). 자연법칙을 범하였을 경우에 고통을 당하거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법을 범하였을 경우에는 그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데, 성경은 그 대가를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을 범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엔 하늘을 잃게 되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그 결과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계명의 정신을 범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용서의 정신이 사라지게 됩니다. 미움과 원통함이 온 마음과 정신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 결과, 혈압이 올라가고, 심장에 무리가 가며, 갑상선에 이상이 생기고, 몸과 마음이 오랜 동안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서, 결국에는 각종 질병과 고통을 앓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불쾌히 여기시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한동안 아무런 형벌이나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시고, 시집이나 장가간 다음, 그 결과로 인하여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할 때까지 자신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노아의 시대에 아무런 징조도 없이 120년을 지낸 후에 갑자기 홍수가 이르러 왔던 것처럼, 쾌락과 자기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지금 현재는 어떤 특별한 징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죄악의 잔이 차는 순간 그들은 스스로 헤어나오기 어려운 고통과 고뇌를 갖게 됩니다.

비록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율법과 자연법칙에 불순종할 때에는 그에 해당하는 결과를 받게 됩니다. 예를 들면, 열심히 일하는 자만이 수확을 거두게 된다는 것은 자연법칙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하지 않고 기도만 하면서, 좋은 열매와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도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유전법칙에 의하여 병약한 유전인자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도 사고를 당하고, 불신자들이 걸리는 똑같은 질병 때문에 죽게 됩니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통과 불신자들이 당하는 고통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 질문은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에게 동일한 자연법칙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고통과 불신자의 고통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들이 나타내는 반응과 태도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적용시키는 자연법칙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의 생애에 다가오는 재난과 고통으로부터 면제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사건들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사람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조건적인 영적 원칙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받아들임으로써 고난을 이겨 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이라면 어떤 일에서도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을 통하여 고난 속에서도 평안한 마음으로 그 끝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 체험을 통하여 더욱더 고결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편애를 받거나 자연법칙에 따라서 받게 되는 고통을 경감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자연법칙을 적용시키시지만,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뢰하는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영적인 원칙을 적용시키고 계십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영적인 법칙에 따라서 그들의 마음에 용기를 주고 견딜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어져 있지만, 그분의 치유하시는 능력은 믿음을 가지고 나오기로 선택하는 사람에게만 조건적으로 제공됩니다.

지금 고난과 질병 때문에 고통 하고 계십니까? 먼저, 여러분의 양심과 생활 가운데서 어떤 법칙이 범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우리 자신의 이기심과 교만을 가장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죄와 잘못을 지적해 주실 때, 회개하는 심령으로 잘못된 것들을 올바로 고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최선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 속에 있는 분들이 어두운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는 비결입니다. ■

 

3부, 바울의 고통이 제거되지 않은 이유

바울은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한 큰 그릇으로 쓰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이룩한 놀라운 사업과 희생에 대하여 스스로 교만해질 수 있는 위험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스스로 자신을 높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높여질 위험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바울의 몸을 괴롭혔던 질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세 번이나 그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울의 육체에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가시는 바울의 육체 속에 남아서 일평생 고통을 주었습니다. 바울이 “사탄의 사자”라고 불렀던 그 육체의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의 구원을 위하여 남겨진 바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은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후 12:7~9).

가장 많은 신약 성경을 기록하였고, 제자들과 사도들 중에서 가장 많은 전도 여행을 하였던 위대한 사도 바울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려도 치유를 얻지 못하는 이유를 믿음이 부족하거나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매우 비성서적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병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하게 낮추기 위한 경험이 어떤 것이며, 또한 언제 그러한 경험들이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바울을 생각하면서 “하물며 바울과 같은 사람도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는데, 나처럼 연약하고 쉽게 교만해질 수 있는 사람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더욱 필요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자세입니다. 바울과 같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 불평할 수 있을까요?

고통은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찾아옵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교만을 치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주 사용하시는 치료책이 우리의 육체에 가시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과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불평과 좌절의 세월을 보낼 수도 있고, 그분의 뜻을 겸손히 받아들이면서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몸에 가시를 허락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을 당할 때에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시련에 대한 만족할만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는 이유를 발견했지만, 어쩌면 우리는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이유를 모를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비통함과 슬픔을 이해하시며 동정하시는 그분의 위로를 받으면서 견뎌야 합니다. 혹시 지금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습니까? 어쩌면 지금보다 더 겸손하고 온유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기 위하여 고통의 훈련학교를 통과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67, 71).

 

고통, 봉사를 위한 준비 과정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보냈던 편지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이 고난을 통하여 어떻게 승화되었는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경험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찰 정도로 발전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바울의 봉사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고통을 많이 받을수록 시련과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준비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돕고 어떻게 동정하실 줄을 배우셨던 것처럼, 바울 역시 고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 1:3~7).

이 말씀에서 바울은 고통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는 고통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고통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에 마음을 쓰기보다는, 고통을 통하여 자신이 좀 더 동정적이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사실로 인하여 감사했습니다. 바울은 고통을 통하여 고통 받는 자들의 심정을 좀 더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게 되었으며, 더욱 유능한 전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고통은 봉사를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고통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육체를 쓰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인류를 위한 봉사를 위함이었습니다.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함에 싸여 있음이니라”(히 5:2).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과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 9).

사람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투병 생활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병자들의 느낌과 절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셨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히 2:18). 예수께서는 가장 많은 고통을 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우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위로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고난의 왕이시며, 또한 위로의 왕이십니다.

바울이 그토록 갈망했던 것이 바로 이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경험하셨던 그 방법 외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자비롭고 은혜롭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그는 고난의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경험을 알게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통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었으며, 남겨진 육체의 가시에 대하여 만족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인생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쉽게 낙심하게 되며,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없고, 위로해 줄 수도 없습니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의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그와 비슷한 경험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도와줄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 고통 중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대를 더 나은 봉사를 위해서 준비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음을 겸손히 낮추고, 그대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명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2부, 하나님은 왜 침묵하실까요?

한 목사님이 세 살짜리 아들을 잃은 고통을 <내가 죽으면 아빠 울 거야?>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아이는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서 지내야 했는데, 그때 아들을 돌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들아, 아빠는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너를 사랑한다. 네가 당하는 고통을 줄일 수만 있다면, 아빠는 무슨 일이든지 다할 수 있단다. 할 수만 있다면 너 대신에 내가 그 자리에 누울 수도 있단다. 아들아, 너를 잃어버린다는 생각만으로도 내 마음은 견딜 수 없는 슬픔 때문에 심장이 아파오는구나. 오직 하나님만이 이 아빠의 눈물과 기도의 의미를 이해하실 것이다. 내 아들아, 네가 이 땅에서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너 없이 목사로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지 두렵구나. …사랑하는 아들, 아빠의 자랑이고 기쁨이었던 아들아 잘 자거라. 그러나 아빠는 기도하고 있단다. 네가 원래의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고.”

목사님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병은 점점 더 악화되어 결국 입원한 지 5주 만에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왜 하나님께서 세 살짜리 아들의 생명을 거두셨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날마다 밤마다 혼돈과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한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 생각이 목사님을 고통에서 구원했습니다. 목사님은 침례 요한의 죽음을 막지 않으신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침례 요한이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까지 예수께서 그를 방문하지 않으셨던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요한의 생애는 죽는 순간까지 고독과 외로움의 계속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왜 하나님께서는 요한을 어두운 감방 속에서 신음하다가 죽어 가도록 내버려 두셨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통찰력으로는 그 어두운 섭리의 신비를 투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 역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외롭게 죽어가셨습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홀로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므로 침례 요한이 동참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종들도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외로운 길을 걸어야 합니다.

침례 요한을 추종하던 사람들이 요한의 구명 운동을 위하여 애쓰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당신의 종인 요한을 구출하는 일에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그 시험을 견뎌낼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요한의 감옥을 찾아가심으로써, 요한의 마음에 기쁨을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슬픔을 마음에 숨기고 당신께서 지상에 오신 유일한 목적에 모든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장차 오랜 세월 동안 감옥에 갇혀서 살다가 외롭게 죽어 갈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 교회의 사도들을 위하여 요한은 고독한 순교의 잔을 마셔야만 했습니다. 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외로운 옥중에서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외면당하고, 하나님마저도 아무런 기적적 증거를 주시지 않을 때, 그들은 침례 요한의 외로운 죽음을 기억하면서 위로받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그 침묵의 이유와 의미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비록 요한이 기적적인 구출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버렸거나 그의 고통과 고뇌를 외면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천사들을 옥중에 보내서 그와 함께 거하도록 하셨으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관한 진리가 그 앞에 분명하게 펼쳐지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에녹이나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일지라도, 결코 옥중에서 외롭게 죽은 침례 요한보다 위대하거나 높은 영예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이러한 일련의 생각들은 목사님에게 다음과 같은 신앙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내 아들의 고통을 보시면서 무거운 침묵을 지키셨으니 나도 침묵을 지키면서 믿음으로 전진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고통과 시련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배우는 신앙입니다. 한동안 고통과 깨달음의 시간이 흐른 후에 목사님은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 아들이 의식주 생활의 전반에 걸쳐서 부모인 우리에게 완전히 의존하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아들을 위해 내 목숨까지 바치기 원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셔서 온 우주를 주관하시지만, 내 어린 아들의 생애도 지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어린 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내 아내는 아들을 잠재우기로 결정하신 하나님의 선택을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 내 아들의 생애도 포함되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목사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혹독한 시련을 통해 인류의 속죄를 위해서 독생자를 바치신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아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 갈 때 침묵하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단언했던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

 

1부, 욥에게 고통이 임한 이유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욥이 사탄의 도전 때문에 까닭 없이 고통 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욥기 1장에는 사탄이 하늘 총회에 참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회의에서 사탄은 자신이 지구를 두루 다녀 보았는데,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지구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지구에 대한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사탄의 주장이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욥 1:6, 7). 이때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으시면서, 욥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하나님께서는 아직 욥 같은 신앙인이 있기 때문에 지구가사탄의 소유가 아니라고 답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다시 반박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재물로 축복하셨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기복신앙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사탄의 고소였습니다.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욥 1:10). 순수한 동기와 양심적인 확신에 의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욥을 번영케 하셨으므로 욥이 그에 대한 답례로써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것이라고 사탄은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욥에게서 거두시면, 욥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 욥에 대한 사탄의 고소였습니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11).

하나님께서는 욥의 신앙을 신뢰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명예를 걸고서 사탄의 도전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의 몸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욥 1:12). 그리하여 즉시로 사탄은 욥을 시험하기 위해서 욥에게로 내려갔습니다. 이로써 욥의 인생에 깊은 고난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재난이 연속적으로 욥에게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외적들이 쳐들어와서 소와 나귀를 다 빼앗고 종들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양과 종들을 불살라 버렸다는 종들의 말이 마치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불어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욥 1:18, 19). 엄청난 재난의 소식을 연속적으로 전달받는 욥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사탄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습니다. 그는 욥의 재산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빼앗아 갔습니다. 사탄은 욥의 입에서 하나님께 대한 저주가 나오길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욥은 “일어나서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사탄은 완전히 실패했으며,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신뢰는 증명되었으며, 욥을 의인이라고 선언하셨던 하나님의 명예는 옹호되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욥의 신앙은 순결한 것이었습니다. 욥의 신앙은 기복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인생에 왜 이런 고통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사탄이 하나님께 도전했던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는 시련과 고통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하나님 또는 사탄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들은 모든 천사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에게 일어난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고난을 통과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형제자매들이여, 욥의 모본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욥은 자신에게 어떤 죄가 있길래 이러한 재난이 이르러 왔는지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당한 재난의 이유와 원인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 중에 있는 분들은 고통의 이유가 자신의 죄나 부족함에 있는지를 깊이 살펴야 합니다. 만일 어떤 특별한 이유 없이 고통이나 재난이 닥쳐왔다고 생각되면, 우리도 욥처럼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라는 믿음으로, 우리를 향한 사탄의 도전을 물리쳐야 합니다. ■

 

서론, 하나님,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몇 해 전에 미국 애틀랜타에서 중년 부부가 교통사고로 인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얼마 전에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나이 32살의 젊은 여의사가 폐암에 걸려 죽어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 후쿠오카 원자력 발전소에서 흘러나오는 방사능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음의 그늘 아래서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신데,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번 호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고통의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편집실>

몇 해 전에 미국 플로리다 주에 대규모의 허리케인이 불어닥쳤습니다. 큰 재산 피해가 있었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때 허리케인에 가족을 잃고 전 재산을 잃은 어떤 사람이 너무나 원통해서, 플로리다 주 지방 법원에 하나님을 고소했습니다. 그 사람은 고소장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책임을 물었습니다. “이번 허리케인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므로 하나님이 책임을 지고 모든 피해 보상을 해 주어야 합니다.” 플로리다 주 지방 법원에 어떤 일이 생긴 것입니까?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법정에 피고로 서게 된 것입니다. 그 일은 언론에 보도되었고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재판 날짜가 되자, 법원 앞에는 여러 언론들과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법원 앞에 모여서 “과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피고석에 앉으실까? 누가 어떻게 변론할까? 검사는 하나님을 상대로 어떤 논고를 내릴까?”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판 시간이 되자, 법정 문 앞에는 다음과 같은 공고가 붙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지 않으셨음!”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재난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지구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재난과 고통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재난이 전혀 없는 곳으로 만드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재난도 없었고 불행과 죽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자,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땅에서는 가시나무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독초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이 생겼고, 질병과 고통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재난과 고통은 마귀 때문에 시작된 것입니다. 모든 고통과 재난의 책임은 마귀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재난과 고통이 일어날 때마다 그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상을 퍼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재난이 생기고, 사고가 나고, 병에 걸리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암에 걸려야 하나요?”라고 말하면서 하늘을 쳐다봅니다.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재난과 고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 재난과 고통은 죄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는 일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연히 실로암을 지나가고 있는데 망대가 무너져서 여러 사람이 죽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죽은 사람들이 큰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숙덕거렸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숙덕거림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눅 13:4, 5).

예수님의 답변은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죄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유대 교회의 본부와 대제사장과 지도자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보다 더 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때문에 망대에 깔려 죽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악하고 죄가 많아서 교통사고가 나고 암에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악하고 죄가 많아서 지진이 나고 쓰나미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사탄이 지구를 점령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비록 죄 없는 의인이라고 할지라도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지구를 사탄의 손으로부터 완전하게 구원해 주실 때까지 재난과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재난과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시 118:5).

우리가 고통 중에 여호와를 찾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정말 내 편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두려움, 억울함, 좌절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외로움과 고통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내 편이 아니라, 남편이 내 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어떤 역경에서도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우리의 마음에 가장 분명한 위로를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단순히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 눈에 보이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말씀에서 위로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슬픔과 고난에 대한 정확한 이유와 목적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전체 숲을 보지 못하고 몇 그루의 나무를 보고서 쉽게 실망하고 원망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하늘에 간 다음에야 비로서 우리가 받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시종일관 우리와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통의 문제를 한 장의 자수로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자수의 뒷면을 볼 때, 거기에는 여러 색깔의 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수의 그림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수의 앞면을 보면 거기서 우리는 아름다운 그림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고통의 문제는 결코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고통을 볼 때 비로소 그곳에 아름다운 질서가 있고 구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번 <마지막 사명>에서 우리에게 고통이 찾아오는 이유를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시는 목적이 무엇인지 찾아보려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고통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마다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 하늘이 주는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

1호를 시작하며…

창간호를 내며…

<마지막 사명>은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신앙과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위해서 발간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사명>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오직 성경 말씀에 의지해서 글을 쓰고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속으로 내보낸 다음,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역사를 일으키는지 지켜보려고 합니다.

<마지막 사명>은 그리스도를 전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을 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한국 교회의 이곳저곳에서 신선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게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사명>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저희의 소원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사명>을 이 시대를 위한 광야의 소리로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창간호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인생의 길에서 만나게 되는 고통과 고난의 이유와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너무나 힘들어서 고통과 씨름하다가 길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앙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회복하기 어려운 재난을 당한 가족과 친구를 보면서,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는가?”라는 의심이 마음을 채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이번 <마지막 사명>은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가르쳐 주는 귀한 하늘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 사명>이 찾아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는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마지막 사명>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