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에 일본에서 2차세계대전 이후 일본에 가장 큰 영향력을 준 20인을 뽑은 적이 있었는데,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이 그중 한 사람으로 뽑혔습니다. 기독교 불모지인 일본에서 기독교 목사가 뽑혔다는 사실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은 세속화되어 가는 일본 기독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위해서 생애를 바쳤던 분입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세상이 그분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경험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기사를 소개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불행은 재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집이 없어서 길거리를 헤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도 불행이지만 아직 불행의 극치는 아닙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불행은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해가 뜰 때부터 지기까지 자신이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모르고,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을 여행하는지도 모르며, 방향도 없고, 도달해야 할 항구도 없이, 해초가 바닷물에 떠돌듯이 밀물과 함께 들어오고 썰물과 함께 나가면서 인생을 끝내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불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면 확고한 목적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속에 의의 원칙을 세우는데, 그 원칙이 세워진 사람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는 일 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사람은 아직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고통은 영광의 길을 열어 줍니다. 따뜻한 봄이 오기 전에 추운 겨울이 오듯이 영광이 오기 전에 고통이 옵니다. 그러므로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기꺼이 고통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감사하렵니다. 고통이 있기에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있기에 고통 받는 자의 친구가 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나를 괴롭혔기 때문에 하늘이 한층 그리워졌습니다. 잔인한 비난의 검이 내 가슴을 찔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나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이 세상이 나에게 낙원이 되어 무덤 너머 저편을 바라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생의 고통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면 그곳에는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 가난에 쫓길 때,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치료하고도 남는 영약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고통 속에 있을 때는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인내의 열매를 낳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나게 해 줍니다.

교회가 순결할 때는 진리와 말씀 위에 분명하게 서 있는 사람들이 존경받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속화되고 어둠 속에 있을 때는 말씀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시와 외로움이 찾아오게 됩니다. 중세기 천년의 종교 암흑시대를 끝마쳤던 마르틴 루터가 그런 경험을 했고 요한 웨슬리도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교회가 깊은 암흑 속에 있을 때 교회에서 지지받고 사랑받는 사람이 오히려 교회를 타락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 기독교 역사가 말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우고자 할 때 받게 되는 고난을 겸손과 인내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유대 교회들로부터 미움을 받은 것은 그분께서 누구보다도 유대 교회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교회가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주었습니다. 지금도 교회를 무척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를 세속과 배도로부터 구하려고 하면 미움을 받게 됩니다. 나는 예수도 아니고 종교개혁자도 아니지만, 부족한 내가 그분들의 고통과 환난에 동참할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고난과 환란이 없었다면 나 역시 세속에 빠져서 좁은 길을 떠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난한 사람을 돌보려고 호주머니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게 가난을 허락하셔서 나로 하여금 굶주림에 울게 하셨습니다. 내가 교회를 어둠으로부터 구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들로 하여금 나를 배척하게 하여 외로움 속에서 교회를 구하는 복음을 이해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드셨던 가난과 핍박과 외로움의 채찍이 이제는 구원의 복음이 되었습니다.

 

죽이는 고통이 아니라 살리는 고통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은 우리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고통이 없는 자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입니다. 고통을 위한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를 위한 고통입니다. 고통은 수단이고, 은혜가 목적입니다. 고통으로 시작하지만 은혜로 끝납니다. 하나의 고통은 백 가지의 은혜를 가져오고 짧은 이 고통의 세상은 영원한 은혜의 세계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 말하고 은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인생의 의미를 알 수 없고 참된 위로와 평화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사람을 원망하고 교회를 원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투쟁이 생기고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고통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한 사람만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어둠에 빠진 교회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쓰라린 고통은 선을 베풀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악인으로 취급받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통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한다는 말의 의미 속에는 이런 고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기와 평판을 포기했는데,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면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자들이 받게 되는 고통입니다. 많은 경우, 진리를 세우고 교회를 구하는 일에는 이러한 고통이 따릅니다.

 

고통으로 만들어지는 생애

그리스도인의 생애가 너무도 독특하기 때문에 세상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목사로서 독특한 삶을 살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내 신앙이 말라 버렸고 진리가 내 삶 속에서 그 빛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전해야 할 말씀이 없었고 설교를 준비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없고 가슴으로 부를 수 있는 찬양의 노래가 없었을 때, 하나님이 보내 주신 고통이 내게 임해서 나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나는 깊은 고뇌와 아픔 속에서 방황했습니다. 그런데 고통이 남긴 상처에서 회개가 흘러나왔고 생명을 담은 설교가 흘러나왔습니다. 내 신앙의 눈은 열렸고 찬양이 다시 내 입에 돌아왔습니다. 그때 나는 내 아픈 상처를 만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내게 고통을 주셔서 영혼을 소성케 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받는 고통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 싸우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지해서 승리해야 합니다. 이러한 승리 속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이 깊이 스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심은 당신의 능력과 은혜를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걱정과 염려가 덮쳐올 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기대해야 합니다.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6, 37).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통하여 우리를 심판해 주십니다. 오랜 세월 후에 의가 드러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과 교회 안에서 높은 지지와 존경을 받다가 오랜 세월 후에 수치 가운데로 떨어지는 사람은 죄의 사람입니다. 의인은 불평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는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