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무리로 분리되고 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각 교파를 세운 선구자들이 죽은 지 50년이 되지 않아서 세속화되고 타락했습니다. 개신교회의 각 교파들은 종교개혁자들이 깨달은 진리와 뜨거운 정열 위에서 시작되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영적으로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개신교 신앙을 일으킨 종교개혁자들과 선구자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면서 다음 세대 지도자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들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잃어버렸고 교세를 늘리고 확장하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신앙과 정열을 잃어버린 각 교파마다 분파가 생겨나면서 개신교회는 수천 개의 교파로 나누어졌습니다.

교파들이 대형화되면서 기복신앙이 들어왔고 교인 숫자를 늘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금송아지 예배 스타일이 도입되었습니다. 애굽의 음악이 예배와 찬양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종교개혁자들이 투쟁하고 떠났던 천주교회와 손을 잡고 종교연합 운동에 앞장서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교회가 둘로 나눠지는 시기입니다. 한쪽에는 옛 신앙을 버리고 새로운 예배 방식을 받아들이는 교회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옛 신앙을 지키고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살피면서 빛을 따라가고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겠습니까?

독자 여러분, 지금 기독교회는 죄를 이기는 승리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거절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관심 없는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지고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손뼉을 치고 세상 음악을 사용하기 원하는 사람들과 거룩하고 경건하게 예배드리기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 선이 그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회는 보이지 않는 선에 의해서 두 무리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을 올바로 경배하고 계십니까?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나가 예배드릴 때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엄숙하고 경건한 예배 속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애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예배가 더 이상 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예배, 마음을 말씀으로 인도할 수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경배와 찬양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지지 않으면 인간의 감정에 맞추어지게 됩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받는 그리스도인들은 금송아지 예배의 무서움을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 다시 나타난 금송아지 예배

금송아지는 교회가 크게 타락할 때마다 나타났습니다. 시내산에서 나타났던 금송아지 예배와 음악이 북방 이스라엘에서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말세가 되면서 금송아지 예배와 음악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기독교회는 금송아지 배도로 깊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사탄은 말세의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서 오래전부터 금송아지 예배를 교회 안으로 들여왔습니다. 1900년경, 미국의 한 교회에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한 크리스천 저술가가 그 교회를 방문해서 그들이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모습을 기록했는데 그 모습은 오늘날 교회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는 금송아지 예배 방식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저술가가 세상 끝에 애굽의 예배와 음악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경고했고 이 시대에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100년 전에 기록된 경고의 글을 살펴보겠습니다.

 

“(미국) 인디애나 주에 있는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이 세상 은혜의 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있을 것이다. 온갖 기괴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큰 소리로 외치며 드럼과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리며 춤추는 광경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지적인 감각들은 혼돈되어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현상을 가리켜 ‘성령의 역사’라고 부른다. … 성령께서는 결코 잡음과 광란의 형태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신다.”(Selected message, vol.2, 36)

 

시내산에 나타나서 3천 명을 멸망하게 만든 금송아지 예배, 북방 이스라엘을 무너뜨렸던 금송아지 예배, 그 배도가 마지막 시대에 다시 한번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타락할 때마다 왜 금송아지 예배와 찬양이 반복될까요? 왜냐하면 동일한 영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교회에서 말씀이 사라지고 성령의 음성이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세상)의 음악을 교회 안으로 갖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육욕을 자극하는 음률 속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예배의 목적은 엄숙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금송아지 예배와 음악은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거룩함을 막고, 진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것이 이 글을 쓴 저자가 남긴 경고입니다.

 

“이런 음악과 예배는 성도들을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무력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사탄의 발명품이다. … 난잡한 음악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보다는 예배드리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다.”(상동)

 

100년 전에는 현대인들이 즐기는 록음악, 디스코, 랩과 같은 음악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당시 음악은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경고를 남겼습니다.

 

“영혼들을 회개시키는 사역에 있어서 이런 종류의 음악들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시끄러운 음악과 찬양하는 사람의 태도와 표정은 인간의 감각에 비정상적인 충격을 가한다. 만약 음악을 올바로 사용했더라면 큰 축복이 되었을 것인데, 잘못 사용함으로써 불쾌함을 가져다 주었다. 사탄의 대리자들은 축제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하여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와 지옥에서 올라온 음악으로 찬양하면서 이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교인들에게 이런 종류의 예배를 결코 권장해서는 안 된다. … 성령께서는 … 잡음의 혼란과 온갖 괴상한 소리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시다. 사탄은 그런 음악의 혼란 속에서 사람들에게 역사한다. 음악은 올바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탄은 그러한 음악의 효과를 뱀의 독한 이빨처럼 사용한다. …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 나타났던 (금송아지) 예배가 장래에도 나타날 것이다. 사탄은 음악을 처리되는 방법 여하에 따라서 사람을 유혹하는 덫으로 만들어 버린다.”(상동, 36-38)

 

세상 끝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사탄이 원하는 예배와 음악들이 교회 속으로 깊이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세상 음악과 세속적 분위기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때 교회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거절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서 성도들을 준비시키는 생명의 말씀을 받든지, 아니면 금송아지 예배 방식을 받아들이고 마지막 시대를 위해서 주신 복음을 버리든지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호소

독자 여러분, 사도 바울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역사가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울과 경계’가 된다고 했습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 또한 예수께서는 “인자의 때는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고,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이 무엇을 뜻할까요? 마지막 시대에 기독교회에 엄청난 배도가 일어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탄의 미혹에 휩쓸려 멸망당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 수많은 금송아지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체되면서 보수적으로 믿던 성도들도 금송아지 예배 방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하려고 했지만 복음 안에서 참된 자유와 생명을 맛보지 못하고 율법의 종으로 살던 교인들, 처음에는 뜨거웠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뜨뜻미지근해진 신자들, 이런 사람들도 애굽의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금송아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금송아지 복음과 대중가요의 음률에 가사만 바꾼 음악이 합쳐지면서 사람들은 이제 교회에 와서 뜨거운 감정과 콘서트 같은 분위기를 찾고 있습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아무도 항의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회는 시내산의 배도와 북방 이스라엘의 배도를 향하여 진군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지금은 잠에서 깨어야 할 때입니다.

금송아지 복음을 받아들이고 애굽의 예배 음악으로 찬양하는 교회마다 가정의 신앙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교회에 가도 먹을 양식이 없고 감성적인 예배와 찬양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배울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년들과 우리의 자녀들이 아무리 발을 구르고 몸을 흔들면서 찬양하고 예배드려도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세속을 붙잡고 넓은 길을 걸어가면 영생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독자 여러분, 금송아지 예배와 애굽의 음악이 들어오면 ‘말씀과 거룩함’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와 음악은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예배를 어떻게 드리고, 어떤 음악을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성도들의 관심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예배와 음악이 오히려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배와 음악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교훈과 경고를 무력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신앙과 성품을 고상하게 만들고 성화시키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육체의 감정을 흥분시키고 자극하는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도록 인도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이슈는 시내산에서의 이슈와 동일한데 그것은 ‘예배’ 문제입니다. ‘누구를 경배하는가?’에 대한 이슈가 아니라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가?’가 이슈입니다. 모든 교회가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성경 속에 알려주신 예배와 음악을 가납하실 것입니다. 지금은 말씀의 방패를 들어올려서 하늘이 무너져도 진리를 붙잡고 서는 신앙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가 갖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인간의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매 예배마다 순수한 하늘의 말씀이 선포되고 거룩한 예배가 드려지면, 귀신의 영들이 물러가게 되고 마른 뼈처럼 죽어 있던 성도들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독자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예배와 음악에 대한 진리를 깊이 새겨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어떤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까?

이제 교회도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재미없는 교회는 사람들이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재미가 하나님의 임재처럼 느껴지고 재미가 성령 충만으로 포장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를 재미 속으로 끌고 가는 것은 CCM이라고 불리는 찬양 음악입니다. 이미 때가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교회 음악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독자 여러분, 성경은 성도의 찬양과 예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경건하고 정숙한 음악으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시 92:1-3)

 

세상의 유행가나 가요를 모방하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기에 합당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찬송 가운데 거룩한 하나님이 드러나는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3)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 마음으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 13:2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8)

 

악령을 쫓아내고 죄를 승리하는 믿음으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삼상 16:23)

 

성령과 진리에 일치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Spirit and truth, 성령과 진리)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시 9:2)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나님의 자녀 성품에 걸맞는 고상하고 경건한 음악으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하늘 찬양대도 함께 부를 수 있는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 5: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