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말세에 다시 나타나는 금송아지

두 무리로 분리되고 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각 교파를 세운 선구자들이 죽은 지 50년이 되지 않아서 세속화되고 타락했습니다. 개신교회의 각 교파들은 종교개혁자들이 깨달은 진리와 뜨거운 정열 위에서 시작되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영적으로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개신교 신앙을 일으킨 종교개혁자들과 선구자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면서 다음 세대 지도자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들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잃어버렸고 교세를 늘리고 확장하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신앙과 정열을 잃어버린 각 교파마다 분파가 생겨나면서 개신교회는 수천 개의 교파로 나누어졌습니다.

교파들이 대형화되면서 기복신앙이 들어왔고 교인 숫자를 늘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금송아지 예배 스타일이 도입되었습니다. 애굽의 음악이 예배와 찬양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종교개혁자들이 투쟁하고 떠났던 천주교회와 손을 잡고 종교연합 운동에 앞장서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교회가 둘로 나눠지는 시기입니다. 한쪽에는 옛 신앙을 버리고 새로운 예배 방식을 받아들이는 교회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옛 신앙을 지키고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살피면서 빛을 따라가고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겠습니까?

독자 여러분, 지금 기독교회는 죄를 이기는 승리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거절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관심 없는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지고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손뼉을 치고 세상 음악을 사용하기 원하는 사람들과 거룩하고 경건하게 예배드리기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 선이 그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회는 보이지 않는 선에 의해서 두 무리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을 올바로 경배하고 계십니까?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나가 예배드릴 때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엄숙하고 경건한 예배 속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애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예배가 더 이상 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예배, 마음을 말씀으로 인도할 수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경배와 찬양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지지 않으면 인간의 감정에 맞추어지게 됩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받는 그리스도인들은 금송아지 예배의 무서움을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 다시 나타난 금송아지 예배

금송아지는 교회가 크게 타락할 때마다 나타났습니다. 시내산에서 나타났던 금송아지 예배와 음악이 북방 이스라엘에서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말세가 되면서 금송아지 예배와 음악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기독교회는 금송아지 배도로 깊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사탄은 말세의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서 오래전부터 금송아지 예배를 교회 안으로 들여왔습니다. 1900년경, 미국의 한 교회에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한 크리스천 저술가가 그 교회를 방문해서 그들이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모습을 기록했는데 그 모습은 오늘날 교회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는 금송아지 예배 방식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저술가가 세상 끝에 애굽의 예배와 음악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경고했고 이 시대에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100년 전에 기록된 경고의 글을 살펴보겠습니다.

 

“(미국) 인디애나 주에 있는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이 세상 은혜의 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있을 것이다. 온갖 기괴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큰 소리로 외치며 드럼과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리며 춤추는 광경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지적인 감각들은 혼돈되어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현상을 가리켜 ‘성령의 역사’라고 부른다. … 성령께서는 결코 잡음과 광란의 형태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신다.”(Selected message, vol.2, 36)

 

시내산에 나타나서 3천 명을 멸망하게 만든 금송아지 예배, 북방 이스라엘을 무너뜨렸던 금송아지 예배, 그 배도가 마지막 시대에 다시 한번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타락할 때마다 왜 금송아지 예배와 찬양이 반복될까요? 왜냐하면 동일한 영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교회에서 말씀이 사라지고 성령의 음성이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세상)의 음악을 교회 안으로 갖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육욕을 자극하는 음률 속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예배의 목적은 엄숙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금송아지 예배와 음악은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거룩함을 막고, 진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것이 이 글을 쓴 저자가 남긴 경고입니다.

 

“이런 음악과 예배는 성도들을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무력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사탄의 발명품이다. … 난잡한 음악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보다는 예배드리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다.”(상동)

 

100년 전에는 현대인들이 즐기는 록음악, 디스코, 랩과 같은 음악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당시 음악은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경고를 남겼습니다.

 

“영혼들을 회개시키는 사역에 있어서 이런 종류의 음악들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시끄러운 음악과 찬양하는 사람의 태도와 표정은 인간의 감각에 비정상적인 충격을 가한다. 만약 음악을 올바로 사용했더라면 큰 축복이 되었을 것인데, 잘못 사용함으로써 불쾌함을 가져다 주었다. 사탄의 대리자들은 축제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하여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와 지옥에서 올라온 음악으로 찬양하면서 이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교인들에게 이런 종류의 예배를 결코 권장해서는 안 된다. … 성령께서는 … 잡음의 혼란과 온갖 괴상한 소리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시다. 사탄은 그런 음악의 혼란 속에서 사람들에게 역사한다. 음악은 올바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탄은 그러한 음악의 효과를 뱀의 독한 이빨처럼 사용한다. …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 나타났던 (금송아지) 예배가 장래에도 나타날 것이다. 사탄은 음악을 처리되는 방법 여하에 따라서 사람을 유혹하는 덫으로 만들어 버린다.”(상동, 36-38)

 

세상 끝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사탄이 원하는 예배와 음악들이 교회 속으로 깊이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세상 음악과 세속적 분위기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때 교회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거절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서 성도들을 준비시키는 생명의 말씀을 받든지, 아니면 금송아지 예배 방식을 받아들이고 마지막 시대를 위해서 주신 복음을 버리든지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호소

독자 여러분, 사도 바울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역사가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울과 경계’가 된다고 했습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 또한 예수께서는 “인자의 때는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고,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이 무엇을 뜻할까요? 마지막 시대에 기독교회에 엄청난 배도가 일어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탄의 미혹에 휩쓸려 멸망당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 수많은 금송아지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체되면서 보수적으로 믿던 성도들도 금송아지 예배 방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하려고 했지만 복음 안에서 참된 자유와 생명을 맛보지 못하고 율법의 종으로 살던 교인들, 처음에는 뜨거웠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뜨뜻미지근해진 신자들, 이런 사람들도 애굽의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금송아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금송아지 복음과 대중가요의 음률에 가사만 바꾼 음악이 합쳐지면서 사람들은 이제 교회에 와서 뜨거운 감정과 콘서트 같은 분위기를 찾고 있습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아무도 항의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회는 시내산의 배도와 북방 이스라엘의 배도를 향하여 진군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지금은 잠에서 깨어야 할 때입니다.

금송아지 복음을 받아들이고 애굽의 예배 음악으로 찬양하는 교회마다 가정의 신앙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교회에 가도 먹을 양식이 없고 감성적인 예배와 찬양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배울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년들과 우리의 자녀들이 아무리 발을 구르고 몸을 흔들면서 찬양하고 예배드려도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세속을 붙잡고 넓은 길을 걸어가면 영생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독자 여러분, 금송아지 예배와 애굽의 음악이 들어오면 ‘말씀과 거룩함’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와 음악은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예배를 어떻게 드리고, 어떤 음악을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성도들의 관심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예배와 음악이 오히려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배와 음악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교훈과 경고를 무력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신앙과 성품을 고상하게 만들고 성화시키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육체의 감정을 흥분시키고 자극하는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도록 인도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이슈는 시내산에서의 이슈와 동일한데 그것은 ‘예배’ 문제입니다. ‘누구를 경배하는가?’에 대한 이슈가 아니라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가?’가 이슈입니다. 모든 교회가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성경 속에 알려주신 예배와 음악을 가납하실 것입니다. 지금은 말씀의 방패를 들어올려서 하늘이 무너져도 진리를 붙잡고 서는 신앙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가 갖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인간의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매 예배마다 순수한 하늘의 말씀이 선포되고 거룩한 예배가 드려지면, 귀신의 영들이 물러가게 되고 마른 뼈처럼 죽어 있던 성도들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독자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예배와 음악에 대한 진리를 깊이 새겨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어떤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까?

이제 교회도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재미없는 교회는 사람들이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재미가 하나님의 임재처럼 느껴지고 재미가 성령 충만으로 포장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를 재미 속으로 끌고 가는 것은 CCM이라고 불리는 찬양 음악입니다. 이미 때가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교회 음악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독자 여러분, 성경은 성도의 찬양과 예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경건하고 정숙한 음악으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시 92:1-3)

 

세상의 유행가나 가요를 모방하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기에 합당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찬송 가운데 거룩한 하나님이 드러나는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3)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 마음으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 13:2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8)

 

악령을 쫓아내고 죄를 승리하는 믿음으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삼상 16:23)

 

성령과 진리에 일치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Spirit and truth, 성령과 진리)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시 9:2)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나님의 자녀 성품에 걸맞는 고상하고 경건한 음악으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하늘 찬양대도 함께 부를 수 있는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 5:11-13)

7부, 금송아지 예배는 반드시 심판받는다

기도는 받아졌지만 심판은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금송아지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 진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독자 여러분, 금송아지 예배는 작은 죄가 아닙니다. 애굽 방식의 예배와 그들의 음악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진멸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9-10)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최후의 중보자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교회에 들어온 죄와 배도를 강력하게 책망했지만, 백성을 미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에 책망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마음이 출애굽기 32장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의 죄와 배도를 지적하는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이런 정신이 필요합니다.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죄와 배도로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기 원하는 사람들은 모세처럼 “나는 교회를 살리기 원합니다. 주의 백성을 진멸하시려면 차라리 생명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죽어가는 이스라엘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생명을 바치는 선지자 정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중보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멸망 하려는 뜻은 거두셨지만, 그들이 선택한 금송아지 예배는 반드시 처벌되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예배 방식과 음악을 지키고 보존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과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 감행한 배도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백성들 사이에서 악은 두려움 없이 파급될 것이기 때문에 배도에 대한 형벌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금송아지 예배 때문에 3천 명이 죽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스라엘 교회에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금송아지 예배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오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출 32:3-4)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금송아지 배도에 참여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소수의 남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남은 무리란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상을 섬길 때 우상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남은 무리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무시할 때 대가와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배도의 순간마다 나타나는 기독교 역사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두 무리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각 시대마다 교회 안으로 거짓 복음이 들어오고 거짓 예배가 들어올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거절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졌습니다.

불순종하는 대다수의 군중과 남은 무리로 나눠지는 역사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쪽에는 순종의 백성이 있고 다른 쪽에는 불순종의 군중이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정확하게 서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소수였습니다. 성경 역사에서 사탄이 교회를 공격할 때 대다수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으며, 소수의 남은 무리가 온갖 협박과 생명의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숫자로 상황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사탄의 미혹과 공격에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한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항상 남은 무리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배도에 가담하지 않은 백성을 골라내었습니다.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출 32:26). 누가 금송아지 배도에 가담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예배를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바쳤던 사람들은 레위 자손이었습니다. 모세는 레위 자손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행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출 32:28)

 

금송아지 배도에 가담한 3천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독자 여러분, 애굽의 예배와 음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조용하고 엄숙한 예배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비판적입니다. 텔레비전과 엔터테인먼트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경건하고 거룩한 찬양과 예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예배도 현대적 음악의 감각과 트랜드에 맞추어서 변해야 합니다. 가사만 기독교적이면 악기와 리듬과 멜로디는 세상 음악에서 가져와도 됩니다. 이미 수많은 교회들에게 그런 음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데 왜 예배 방식과 음악에 구속받아야 합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그분을 찬양하기 원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독자 여러분, 올바른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나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펼쳐서 하나님께서 금송아지 예배와 찬양을 어떻게 취급하셨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양심 속에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대중가요와 같은 찬양과 강한 비트가 들어간 음악에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르고 나면 속이 시원하고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정말 성령의 감동일까요? 그런 느낌을 받을 때 정말 죄가 떨어져 나가고 의의 열매가 맺히고 있습니까?

 

참회의 증거, “단장품을 제하라”

금송아지 예배 때문에 3천 명이 죽임을 당하는 심판이 이스라엘 교회를 지나갔습니다. 이스라엘은 깊은 참회의 경험으로 들어갔고, 백성은 하나님을 따르고 충성하는 증거로 놀라운 결정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 너희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 하셨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산에서부터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출 33:1-6)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다시는 몸에 단장품을 장식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회개와 슬픔의 증거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단장품을 제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낮추고 회개하는 증거입니다. 마음에는 세속과 욕심이 가득한데 바리새인처럼 겉으로만 보석과 장식품을 하지 않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지만,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 회개하는 심령을 나타내기 원하면 사치스런 장식과 단장품을 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이 되지 않는 것들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지금부터 30년 전만 해도 교회와 세상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의복과 차림새로 교회와 세상을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말씨와 생각에서도 차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보수적인 교파가 아니더라도 교인들이 보석류로 치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의 예배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세상 가수의 모습, 다리를 흔들면서 탬버린과 기타를 치는 모습, 머리를 흔들면서 드럼 치는 모습, 진한 화장과 요란한 옷과 단장품들, 이런 모습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배한다고 하지만, 인간의 교만과 자랑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보석으로 치장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더 깊이 읽으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루비와 각종 보석으로 입히셨을 때에는 그것은 거룩함의 증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예복에는 귀한 보석을 달도록 명령하셨는데, 거기에는 영적 의미와 상징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 스스로 보석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은 회개하지 않은 증표였습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딤전 2:9)

6부, 모세와 같은 목사, 아론과 같은 목사

아론과 같은 목사는 배도의 주역이 된다

이스라엘 교회의 배도 중심에 아론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회의 배도 중심에도 아론과 같은 지도자가 있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는 언제나 섞인 무리가 있고 가라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인들이 있다고 해서 항상 금송아지가 세워지고 애굽의 예배와 음악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그 지도자로 있을 때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 아론의 지도하에서 교회 안에 일어난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어떤 사람들이 교회를 이끌어가고, 어떤 신앙을 가진 목회자가 예배를 인도하는가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예배가 드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론처럼 우유부단한 지도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애굽의 예배 방식으로 끌고 갑니다. 예배 속으로 온갖 세상 음악과 감성을 극도로 자극하는 악기들이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었고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스라엘 교회가 어떻게 예배드리고 찬양해야 하는지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론은 왜 이스라엘 배도의 주역이 되었을까요? <구약의 조상과 선지자들>은 다음과 같이 놀라운 설명을 해줍니다.

 

“애굽 사람들이 신의 상징으로 섬긴 대상물 중에 황소와 송아지가 있었다. 애굽에서 이런 형태의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들(섞인 무리)이 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자고 제안했다. … 그런 위기는 확고부동하고 결단성이 있고 불굴의 용기를 가진 사람, 곧 군중의 인기나 개인적 안전이나 자신의 생명보다도 하나님의 명예를 더 높이는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 아론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아론은 무기력하게 백성들에게 저항했다. 그 중대한 시점에서 그가 보인 동요와 소심한 태도는 백성들을 단호하게 만들 뿐이었다. … 아론은 자기 자신의 안전을 염려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당히 일어서지 못하고 군중의 요구에 굴복하였다. … 아론은 백성들이 가지고 온 금을 가지고 애굽의 신을 모방해서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었다. …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욕망에 굴복하여 그들이 죄에 참여하도록 방관하는 아론과 같은 우유부단한 지도자들이 있다.”(구약의 조상과 선지자들, 316~317)

 

독자 여러분, 사탄이 교회를 공격하는 위기의 순간에 침묵하는 것은 사탄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말씀보다 자신을 높이는 목사와 지도자들은 군중의 요구에 굴복하게 됩니다. 그런 목사와 지도자는 교회의 가라지들에 의해서 배도의 늪으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왜 아론은 백성들의 배도에 무기력하게 대응했을까요? 백성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담대하게 일어서는 대신, 백성을 기쁘게 하려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배도에 대한 요구가 처음 제기되었을 때 아론은 그것을 저지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론은 교회 안에서 악이 시작될 때 졸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따라갔습니다.

누가 누구를 끌고 간 것입니까? 목자가 양들을 이끌었습니까? 아니면 무지하고 강퍅한 양들이 목자를 끌고 갔습니까? 아론은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인들의 기분과 감정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양들에게 끌려갔던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이것이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지 않은 지도자들에게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자고 주장했던 것은 잡족(섞인 무리)이지만 그것을 만든 장본인은 이스라엘 교회의 지도자인 아론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아론과 같은 목사와 지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론은 진리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자신의 인기와 교회에서의 입지 때문에 죄와 배도를 묵인하는 지도자를 상징합니다. 교인들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기 원하는 사람,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손해가 되면 진리를 말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아론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론과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모세의 의분과 단호함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와 같은 지도자들을 “사랑이 부족하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갈 줄 모른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각 시대의 교회마다 잡족(섞인 무리)과 가라지가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회 안에 죄와 배도를 들여오려고 요구하며 진리의 표준을 낮추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가라지와 섞인 무리가 요구한다고 해서 모든 교회가 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교회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어떤 교회는 거절합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어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아론과 같은 지도자가 있는 교회는 가라지의 요구에 끌려다니고 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있는 교회는 가라지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배도에 참여하지 않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 교회 안으로 죄와 배도를 갖고 들어오는 사람들은 몰래 술 먹고 담배 피는 교인들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이 없기 때문에 교회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합니다. 죄와 배도는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교회에 헌신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아론처럼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과 영광’보다는 ‘내 뜻과 내 영광’을 높이는 사람들 때문에 죄와 배도의 문이 열리게 되고 금송아지 예배가 시작됩니다. 독자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가라지와 섞인 무리의 주장에 대응해야 할까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요구와 주장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모른 척하고 그들을 따라가야 할까요? 그런 태도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

 

금송아지 예배에 대응하는 모세의 모습

우리는 애굽의 예배와 찬양에 대해서 모세처럼 반응해야 합니다.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십계명 돌비)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모세가 그들의 만든 금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출 32:19-20)

 

얼마나 분명한 태도입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나타나기를 원하시는 신앙과 태도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배도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의 거룩한 분노는 불길처럼 타올랐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배도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십계명 돌비를 내던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만든 금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했습니다(출 32:20). 얼마나 단호하고 결정적인 지도자의 모습입니까? 이런 하나님의 종 앞에서 누가 감히 죄와 배도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독자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침례 요한의 정신을 가진 목사와 성도들을 당신의 종으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금송아지 예배가 기독교회를 뒤덮고 있는 이 시대에 누가 하나님의 높으신 부르심에 응하게 될까요?

 

군중은 아론과 같은 지도자를 좋아한다

군중은 모세와 같은 사람을 싫어하고 아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군중은 모세와 같은 사람은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생각하고, 아론과 같은 사람은 균형 있고 점잖은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아론과 같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독자 여러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설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눈을 무서워하고 그들의 인기를 갈망하는 설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음의 글은 우리에게 분명한 빛을 주고 있습니다.

 

“모세의 날카로운 책망과 의분 그리고 신성한 십계명 돌판을 깨뜨림으로 나타낸 분노는 백성들의 눈에 그의 형 아론의 유쾌한 말과 품위 있는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보였다. 백성들은 동생 모세에게 책망을 받는 아론을 동정했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론은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책임을 백성들에게 전가하려고 노력했다. ‘아론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어 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출 32:22,24). 군중은 아론의 점잖음과 참을성을 존경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않으신다. 아론의 양보하는 정신과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고 싶어하는 정신은 그가 죄와 배도의 악함을 볼 수 없도록 눈을 멀게 만들었다.”(구약의 조상과 선지자들, 323~324)

 

진리를 타협하고 다른 사람들이 악을 선택하도록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가슴에 큰 고통을 주는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죄와 배도를 경고하는 것으로 자신의 충성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약하고 구부러지기 쉬운 기회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보호하거나 높이려는 정신을 갖지 말아야 하며 자기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룩한 의무를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께서 사용하는 종들은 위기의 순간에 흔들리지 않는 충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5부, 금송아지가 세워지면 예배와 찬양이 변한다

‘금송아지’라는 애굽의 우상이 세워지면서 예배 방식 또한 애굽 방식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한 가지 반복되는 패턴이 있는데, 그것은 금송아지가 세워질 때마다 예배와 찬양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금송아지가 세워질 때마다 이스라엘의 예배 방식을 버리고 애굽의 방식으로 예배드렸습니다. 시내산에서뿐 아니라 북방 이스라엘에서도 금송아지가 세워지면서 예배와 음악이 바뀌었습니다. 조용히, 엄숙하게 예배드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일어나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절일, a feast to the LORD, 주님을 위한 예배의식일),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출 32:5-6)

 

번제와 화목제는 성소에서 드리는 거룩한 의식입니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양을 죽이면서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는 성스러운 의식입니다. 그런데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습니다. 왜 그렇게 예배드렸을까요? 왜냐하면 그것이 금송아지를 섬기는 예배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입으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했지만, 속마음은 그들이 즐길 수 있는 예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감정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뛰놀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일어나서 뛰노는” 예배와 음악이 들어왔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교회를 공격했던 사탄의 미혹이 현대 기독교회 속에 깊이 들어온 것입니다.

 

금송아지가 세워지면 언약이 깨진다

금송아지를 세워놓고 예배드리는 동안 모세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시내산 아래에서 일어난 배도를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상황을 알려주셨습니다. “모세야, 네 백성이 시내산 밑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고 하면서 애굽의 우상을 세워놓고 축제를 하고 있다. 나에게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소리치고 뛰놀면서 예배드리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모세의 백성)이 부패하였도다”(출 32:7)

 

독자 여러분,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나의 백성”이라고 부르지 않으신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세우고 예배를 애굽의 예배로 바꾸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 아니라 “모세의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시내산에서 벌어진 금송아지 예배를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것은 너무 지나친 해석이 아닙니까? 한번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는데 어떻게 그 언약이 깨질 수 있습니까?”라고 항의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깨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깬 것입니다. <구약의 조상과 선지자들>은 언약이 깨진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였다고 말씀하셨다(출 32:7-8). …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세우신 그분의 언약이 무효가 되었으므로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버리셨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하여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라고 하셨던 것이다.”(구약의 조상과 선지자들, 317,318)

 

시내산을 내려오면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예배 방식을 버리고 애굽의 방식으로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을 본 것습니다. 모세가 그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모세가)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십계명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출 32:19)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기록하신 십계명 돌비를 던진 것은 이스라엘의 배도에 대한 분노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비를 던져서 깨뜨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다음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진영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모세와 여호수아는 백성들이 우상의 주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애굽의 우상숭배적 축제를 모방한, 이교적인 방탕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엄숙하고 경건한 예배와는 얼마나 다른가! 모세는 너무나 놀라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그는 방금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해 있는 데서 왔으며 비록 벌어지고 있는 사건에 대해 경고를 받았지만 이스라엘의 이처럼 무서운 타락의 장면을 보고 견딜 수 없었다. 모세의 분노는 불처럼 뜨거웠다. 백성들의 배도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그는 십계명 돌비를 내던졌다. 그러자 그것은 백성들의 목전에서 깨어지고 말았다. 돌비가 깨졌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깨뜨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들과 세우신 언약을 파기하셨다는 것을 나타냈다. …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겠다고 서약한지 얼마 안돼서 하늘 왕께 대역죄를 범하였다.”(구약의 조상과 선지자들, 319, 320, 324)

 

독자 여러분, 이것이 애굽의 예배 방식에 대한 하나님 종들의 반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공로가 없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눈에 보이지 않자 이스라엘 교회는 예배 방식을 애굽식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날에 모여서 애굽의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몸을 흔들고 뛰놀면서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한 하나님이시다.”라고 찬양했습니다. 만약 누가 와서 그들에게 “왜 당신들은 애굽의 금송아지를 경배합니까?”라고 물으면, 그들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지금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애굽의 예배 방식과 그들의 음악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기독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인데, 여러분은 그 모습이 보이십니까?

 

이스라엘 교회의 배도 장면

여호수아와 모세가 금송아지 예배를 보았던 장면을 살펴보면, 그 모습 속에서 현대 기독교회의 예배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의 떠듦을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출 32:17)

 

여호수아의 귀에는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예배 소리가 떠들고 싸우는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왜 여호수아의 귀에는 이스라엘의 예배가 싸우는 소리처럼 들렸을까요? 그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엄숙하고 거룩하게 찬양하고 예배드렸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모습과 소리로 예배를 드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번제와 화목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시끄럽게 드릴 수 있는 예배가 아닙니다.

모세는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모세는 진영 가까이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주변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가로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나의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진영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dancing, 댄싱)을 보고 대노하여”(출 32:18-19) 

 

이 장면은 애굽의 우상숭배적 축제를 모방한 예배였고 이교도들이 방탕하게 우상을 섬기는 장면이었습니다. 모세가 본 장면은 이스라엘 교회가 하나님께 드렸던 엄숙하고 경건한 예배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격분했던 것입니다. 만약 모세가 현대 기독교회가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드럼과 온갖 “애굽”의 악기를 들고 나와서 소리치며 손뼉을 치고 손을 들고 머리와 몸을 흔들면서 애굽의 음악으로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반응할까요? “대노”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은 그런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께 예배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독자 여러분, 시내산에서의 금송아지 예배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서 몸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면서 온몸에 땀이 흐르도록 찬양합니다. 그런 모습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면, 황홀함 그 자체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가사를 들어보면 하나님께 대한 내용이지만, 음률과 박자와 멜로디는 유행가이고 리듬앤블루스이고 록뮤직입니다. 교회마다 거룩한 단에서 세상 음악을 흉내 낸 찬양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바로 이것이 금송아지 배도가 교회에 들어온 모습입니다. 금송아지가 교회 안에 세워지면서 엄숙하고 거룩한 예배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금송아지 예배에 밀려서 <말씀과 거룩함>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교회의 금송아지 예배를 심판하셨던 하나님께서 이 시대의 교회에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금송아지가 세워질 때 나오는 말

독자 여러분, 오늘날 수많은 교회 안에 금송아지가 세워져 있고 지금도 세워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에 걸쳐서 서서히 세워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금송아지가 세워지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거룩하고 경건하게 예배드리던 교회에서 갑자기 “손뼉 치자.”는 말이 나오고, “가사만 기독교적이면 세상 음률과 그들의 멜로디와 박자로 찬양하는 것이 더 열정적인 예배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그때가 금송아지가 세워지는 때입니다. 피아노와 오르간으로 찬양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드럼을 때리고 전기기타를 치면서 크게 비트를 올리면 금송아지가 이미 세워진 것입니다. 조용하던 교회에서 손과 몸을 흔들면서 찬양하자고 요구하면, 그들은 교회 안에 금송아지를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교회에서 “교회를 성장시키고 청년들을 모으려면 드럼으로 비트를 올리고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들려옵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교회에서 금송아지가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목사들과 찬양 인도자들이 예배를 하나님의 말씀 중심에서 감정과 느낌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지금은 위기의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예배와 음악을 통해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기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Do you know?) 어떤 시골 교회에서 있었던 일

어떤 시골 교회에서 제직회의가 열렸습니다. 몇몇 젊은 집 사들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도시 교 회처럼 예배드리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드럼과 전자기타를 이용해서 예배드리면 예배가 더 활력이 있고 교인들이 좋아 할 것입니다.” 교회 목사님은 회의 참석자들의 눈치를 보면 서 의견을 물어보았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그러자 회의 탁자 끝에 앉아 있던 나 이 지긋한 장로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옛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요즘 교회들이 이상한 예배와 음악으로 갈지라도 우리는 성경의 예배 정신을 지켜야 합니다.” 갑자기 회의가 조용해졌습니다. 사람들은 목사님이 어떻게 말하는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잠시 머뭇 거리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로님, 이제 우리 교회도 시대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제는 젊은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예배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은 뒤에서 밀어주고 기도해주시면 감사하 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골 교회에 금송아지 예배와 음악 이 시작되었습니다.

 

북방 이스라엘 교회에서 음악과 예배가 바뀐 이유

시내산에서 금송아지 예배가 나타났을 때 하나님의 형벌을 받고 3천 명이 죽었는데, 북방 이스라엘 교회에 금송아지 예배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왕상 12:28-29)

 

북방 이스라엘 교회는 사람들의 마음이 남방 유다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웠습니다. 남방 유다 교회와 경쟁하기 위해서 애굽의 금송아지 신을 가져온 것입니다.

북방 이스라엘 교회는 왜 송아지에다 금가루를 발라놓았을까요? 불상에 금가루를 발라놓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우상에 금가루를 발라놓는 이유는 그 우상이 돈과 재물과 풍요로움을 가져다 준다는 약속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금송아지는 돈의 신이고 재물의 신이며 풍요로움의 신입니다. 여로보암 왕이 백성들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서 꺼낸 비장의 카드는 돈과 재물을 축복하시는 새로운 하나님이었습니다.

북방 이스라엘 교회는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자아를 부인하고 율법에 순종하라고 요구하는 하나님, 좁을 길을 걸으라고 요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돈과 재물을 약속해 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한 것입니다.

얼마나 매력적인 금송아지 복음입니까? 여로보암 왕은 백성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 앞에 나가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28절)

 

금송아지를 세워놓았는데,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속았던 것입니다. 북방 이스라엘 교회 지도자들이 “모양은 애굽의 신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시다. 중요한 것은 모양이 아니라 내용이다.”라고 설교하자, 그런 설교를 듣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미혹당했습니다. 북방 이스라엘 교회는 금송아지를 세우고 돈과 세속적 축복을 약속하는 설교를 하면서 예배 방식과 음악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12지파 중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열 지파가 북방 이스라엘 교회에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남방 유다의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드리려고 하던 교인들이 북방 이스라엘에 남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북방 이스라엘 교회에 금송아지가 세워지자, 이스라엘이 원래 갖고 있던 예배와 음악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금송아지가 세워지면 반드시 함께 따라서 들어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애굽의 예배 방식입니다. 애굽의 금송아지가 세워지면 애굽의 예배가 시작됩니다. 금송아지가 교회 안에 들어오면 교회 예배가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엄숙하고 경건하게 예배드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박수를 치고 드럼을 때리고 기타를 치면서 몸을 흔들게 됩니다. 지금 독자 여러분의 교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교회에 금송아지가 세워진 것입니다.

4부, 이스라엘의 배도가 마지막 시대에 반복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마음만 진실하면 되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예배와 음악의 방법이 달라지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배도하고 무너지는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까지 들어가는 여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왜 그들의 여행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을까요? 왜냐하면 광야를 지나 가나안까지 가는 그들의 여행은 우리가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지나 하늘 가나안까지 가는 여정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멸망당한 역사는 ‘말세를 사는 우리에게 거울과 경계’가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저희(이스라엘 백성)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5-7,11)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울과 경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이 광야에서 멸망당한 역사는 말세의 성도들에게 ‘거울과 경계’가 되어야만 합니다

독자 여러분,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으로 애굽을 빠져나왔고 홍해를 지나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면서 침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홍해)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고전 10:1-2)

 

애굽을 떠나 홍해에서 침례받고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왜 광야에서 멸망당했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 중 대부분이 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광야에서 멸망당했던 것입니다.

이제 홍해를 건너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배도하고 멸망당하게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 속으로 왜 금송아지가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보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스라엘 교회의 배도 역사가 지금 기독교회 안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눈을 떠서 무엇이 진리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의인지 보는 성도들은 오늘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금송아지 예배와 음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교회 속에 세워진 금송아지

홍해를 건너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첫 번째 배도는 예배와 음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이스라엘의 예배를 버리고 애굽의 예배를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교회에서 하나님의 종, 모세가 사라지자 교회에서 금송아지가 세워지면서 예배가 애굽의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결과, 배도에 가담한 사람들 3천 명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당했습니다. 홍해를 건너 구원받았던 성도들이 배도하면서 3천 명이 죽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한번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 단 한 번의 속죄로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에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라고 생각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원받았던 사람들이 죄와 배도에 빠짐으로써 수없이 멸망당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시내산에서 일어났던 이스라엘의 배도가 지금 이 시대의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배도의 장면이 보이십니까? 시내산에서 있었던 이스라엘 교회의 배도를 살펴보면, 오늘날 기독교회가 어떻게 배도하고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교회는 왜,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배도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금송아지 배도는 ‘잡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모세는 십계명 돌비를 받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긴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길어지면서 백성들이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라는 하나님의 종이 자리를 비우자 배도의 정신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원어-엘로힘, 하나님)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출 32:1)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일이 생긴 것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우상으로 만들어서 예배드리기 원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짓 신을 섬기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애굽의 방식’으로 섬기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믿고 섬기는 신은 하나님이 틀림없지만, 예배 방식은 애굽의 것을 사용하자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런 요구를 했을까요? 이스라엘 교회에서 배도가 나타날 때마다 섞인 무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섞인 무리는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날 때 따라 나온 애굽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많은 잡족(섞인 무리)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출 12:37-41)

 

섞인 무리는 광야생활이 힘들어지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들의 몸은 이스라엘 교회 속에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교회에 죄와 배도가 생길 때마다 섞인 무리가 그 중심에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조상과 선지자들>이라는 책에서는 섞인 무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나온 잡족(섞인 무리)은 언제나 시험과 문제의 근원이었다. 그들은 애굽의 우상숭배를 버렸고 참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말했지만 어린 시절에 받은 교육과 훈련으로 인하여 그들의 습관과 성품은 우상숭배와 하나님께 대한 불경으로 심하게 부패되어 있었다. 그들은 광야에서 문제의 원인이 되었고 제일 먼저 불평했으며 이스라엘 진영에서 우상숭배자와 같은 행태를 보이고 하나님께 대한 불평을 퍼뜨렸다.”(구약의 조상과 선지자들, 408)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가자, 섞인 무리의 주장에 흔들린 이스라엘 백성은 아론에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스라엘 교회의 지도자인 아론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말씀 위에 굳게 섰습니까?

출애굽기 32장에는 이스라엘 교회의 교인들이 지도자를 끌고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목자가 양떼를 진리로 인도해야 하는데, 양들이 목자를 끌고 감으로 배도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오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출 32:2-4)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금송아지 배도에 참여했다고 했습니까? ‘모든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레위족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배도에 참여했습니다. 독자 여러분, 이것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배도가 마지막 시대 교회에서도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이스라엘의 역사가 “거울”처럼 반복될 것이라고 경고했던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부, 교회 음악에 대한 4가지 질문

첫 번째 질문 : “다윗은 북을 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드릴 때 꽹과리처럼 요란하고 강력한 악기를 사용했는지 어떻게 압니까? 성경이 특별히 금지하는 음악 스타일은 없는데 왜 교회 음악에 율법적 굴레를 씌우려고 하십니까?”

 

기독교회를 CCM과 복음성가로 이끌고 있는 선두주자인 릭 워렌 목사와 같은 사람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합니다.

“시편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의 예배에서 드럼과 심벌즈, 요란한 나팔과 탬버린 그리고 현악기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본다. 그것이 그 시대의 CCM이 아니면 무엇인가?”(릭 워렌, 새들벡 교회 이야기, 315)

오늘날 이런 생각에 취해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습니다.

 

“꼭 엄숙하고 조용하게 드리는 예배에서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모든 예배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경 어디에도 “너희가 조용히 앉아서, 경건하게 예배드리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편에서는 소고 치며, 춤추며, 소리 높여서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시편 98편 4절에서는 소음이라는 표현까지 나오는군요.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할지어다 소리를 발하여 즐거이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Make a joyful noise unto the Lord!)’ 실제로 구약성경에서는 예배드리면서 여호와 앞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홍해를 가르신 주님을 춤추며 찬양했습니다. 그러므로 엄숙하고 조용한 예배당이건, 화려하게 조명이 비취고 시끄러운 음악이 가득한 집회 장소이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에서는 죄인이 참회하고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기독교적인 음악은 없습니다. 기독교적인 가사만 있을 뿐입니다. 왜 춤추어서는 안 됩니까?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 춤을 췄는데 왜 열광적으로 예배드려서는 안 됩니까?”

 

오늘날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금지하지 않았으면 무엇이라도 괜찮다.”는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성경에 조용하고 엄숙하게 예배드리라는 말씀이 없기 때문에 시끄럽게 광란적으로 예배드려도 문제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정말 성경에 엄숙하게 예배드리라는 말씀이 없을까요? 또한 성경이 구체적으로 금지하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는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구체적인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담배가 몸에 매우 해롭다는 사실은 현대 과학이 입증했고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그리스도인이 “성경이 담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흡연해도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주장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독자 여러분,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신앙과 정신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독자 여러분, 성경이 음악과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with solemn sound, 엄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시편 92:1)

 

드럼과 탬버린과 베이스기타에서 나오는 음악이 ‘정숙한 소리’일까요? 성경에 기록된 이런 분명한 메시지를 거절하면서까지 정숙하지 않은 음악을 사용해야 할까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서 다윗과 미리암처럼 춤이나 북으로 표현하고 싶다면, 주중에 가정이나 옥외에 나가서 하는 것이 어떨까요?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드리는 안식일에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조용하고 엄숙한 태도로 찬양하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다윗도 미리암도 성소 안에서 안식일에 소고를 치고 춤을 춘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과 평일, 성소 안과 성소 밖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십계명은 다음과 같이 예배에 대해서 명령하고 있습니다

“제칠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복음과 예배의 관계

현란한 반주와 음악으로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대부분의 교회가 “한번 예수를 영접하고 믿으면 내가 어떻게 살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복음을 믿기 때문에 그러한 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탄은 오늘날 기독교회 속으로 온갖 종류의 오류들을 밀어 넣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한 복음과 이상한 예배 방식들이 교회를 채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은 신앙과 경험을 가져야만, 다윗의 춤과 음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 당시 블레셋 사람들의 춤을 추고 그들이 부르던 음률에 시편의 가사를 붙여서 찬양했을까요? 다윗이 블레셋 이방인들의 음률로 찬양하고 이방인의 춤을 추면서 성소에서 예배드렸을까요?

다윗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음악은 이스라엘의 음악이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아브라함이 불렀고 야곱이 사용했던 음악이었습니다. 그의 음악 속에는 믿음의 조상들의 혼과 신앙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다윗의 신앙을 이해해야만 다윗의 찬미와 예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남은 교회였던, 이스라엘 교회는 항상 이스라엘의 예배와 찬양을 고수했습니다. 하나님의 남은 교회 안에 금송아지가 세워지고 애굽의 예배와 찬양이 울려 퍼졌을 때는 항상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장 위험한 예배

가장 위험한 예배는 감정을 인위적으로 조장하는 예배입니다. 참된 영적 경험은 악기를 사용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음악을 통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영적 경험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경험입니다. 구원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구원을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감사의 찬양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쁨과 평강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주는 기쁨과 평강은 찬양을 열정적으로 한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먼저 회개하고 의롭게 되는 경험이 있을 때 평강과 기쁨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이 순서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때문에 오늘날 교회 안에 이상한 음악들이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회개와 죄와 세상을 버리는 경험 없이 기쁨과 평안을 강조하는 사람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 전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는 없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는 사람, 죄를 붙잡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진리는 무엇보다 이성에 호소되어야 한다. 이성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깨달을 때 비로소 감정의 불이 켜지고 가동이 일어난다. 그런 후 의지가 발동되며 그 의지는 순종으로 나타나게 된다.”(로이드 존스, 설교와 설교자들, 271)

오늘날 기독교회가 드리는 예배의 위험은 죄를 붙잡고 있는 사람에게 인위적으로 하늘이 주는 감정을 만들어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인위적으로 기쁨과 감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이방인들의 음률과 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교회를 휩쓸고 있는 정신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아닌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려고 할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왜 시작되었는가?

기독교회가 세속화하면서 교회는 복음 전파가 아니라 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축제하는 분위기로 예배드리면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주장과 이론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진리를 강조하고 그리스도인 신앙의 높은 표준을 말하면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축제 분위기로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짧고 밝게 하면 교회가 성장한다.” 이런 흐름에 맞춰서 신학교에서도 ‘교회 성장’이라는 과목을 강의하는데, 그 과목에서는 대중가요에서 사용하는 악기와 음률로 드리는 ‘축제 예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축제식 예배 방식의 의도와 목적은 뿌리부터 부패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배와 음악이 교인들을 더 많이 모으기 위해서 그리고 이미 들어와 있는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층을 붙잡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이 좋아하는 악기와 음악과 춤을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음악 속에서 자란 청소년들의 신앙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의 신앙이 충격적일 정도로 초보적이고 말씀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 음악으로 만들어진 가짜 회심자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요 3:36).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 풀무불과 사자굴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말씀으로 길러내는 것이 교회의 목적입니다.

 

➋ 두 번째 질문 : “시편에서 다윗은 ‘새 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했는데, 왜 현대의 새로운 음악으로 주님을 찬양하면 안 됩니까?”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새 노래’에 대한 가르침이 크게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미국 뉴저지에 있는 어떤 한국 목회자는 ‘새 노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편 149편 1절에 나타난 새 노래란 시대적 변화에 맞춘 새로운 음악임과 동시에, 변화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 부르는 찬양을 뜻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요즘 유행하는 대중가요식으로 만든 ‘새로운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점점 더 빠른 템포의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오래된 찬송가에는 빠른 템포가 없으므로 현대 대중음악의 멜로디와 박자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기독교회의 대세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정숙하고 경건한 찬송가를 부르기 원하는 분들은 눈치를 보게 되고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현대 대중가요의 음률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경절은 시편의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지어다”(시 149:1). 이 말씀이 정말 교회가 각 시대마다 새롭게 나오는 세상 음악의 유행을 따라가라는 의미일까요? 심지어 어떤 분들은 시편에 나오는 ‘새 노래’는 방언 찬양을 뜻한다고 주장합니다. 시편의 이 말씀이 정말 그런 뜻이라면 오늘날 교회를 휩쓸고 있는 CCM이 가장 성서적인 음악일 것입니다.

 

‘새 노래’의 의미

시편에 나오는 ‘새 노래’가 정말 매 시대마다 나오는 새로운 리듬과 멜로디를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우리는 성경 속에서 새 노래의 의미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시편 41편에는 새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 40:1-3)

 

이 말씀에서 다윗은 ‘새 노래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린다’고 했는데, 새 노래는 어떤 노래일까요? 바로 앞에 있는 2절 말씀이 새 노래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시 40:2)

 

새 노래란 하나님께서 나를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려 주시고 반석 위에 세워주신 역사에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다시 말해서, 새 노래란 경험의 노래인데, 시험과 유혹의 구덩이에서 빼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뜻하는 것입니다. 새 노래란 “나는 하나님 때문에 승리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시험에서 빠져나왔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경험의 노래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4,000인은 새 노래를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새 노래”로 찬양하라는 시편의 말씀은 시험과 환난에서 구원받은 경험에 대한 고백을  말하는 것이지, 세상 음악의 유행을 따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 14:3) 

 

독자 여러분, 144,000인은 누구입니까? 이마에 인침을 받고 마지막 시대 짐승의 표 환난과 7재앙을 통과하는 의인들입니다. 그러므로 144,000인은 지구 역사에서 가장 큰 짐승의 표 환난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받고 구원받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는 환난의 수렁에서, 시험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경험을 하는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144,000인밖에는 능히 새 노래를 배울 자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➌ 세 번째 질문 :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그 당시 민중에서 불리던 노래에 가사를 붙여서 찬송가를 만들었는데, 왜 지금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까?”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교회 음악도 변해야 한다는 사상이 강력하게 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합니다. “만약 우리가 전통적인 찬송가만 사용해야 한다면, 마틴 루터도 비난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위대한 종교개혁자도 그 당시 대중들이 부르던 음악을 사용해서 찬송가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얼핏 들으면 일리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는 오늘날 CCM을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음악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틴 루터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마틴 루터는 대중가요에 가사를 붙여서 찬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가 처했던 시대적 상황은 지금 우리의 상황과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왜 새로운 찬송가를 만들었을까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 :  중세기 천주교회 음악은 교회 음악의 목적에서 크게 빗나가 있었기 때문에 회중을 위한 찬양을 만들어야 했다.

중세기 예배 음악은 매우 기교적인 음악이었으며 성가대 단원이 아니면 도저히 따라 부를 수 없는 음악이었습니다. 가사는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성도들은 가사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며, 성가대는 즉흥으로 곡을 만들어서 부르거나 심한 변주를 삽입하여 부르는 것을 수준 높은 찬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악보를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중세기에 천주교회는 회중이 예배 시간에 찬양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예배에 회중의 찬송을 도입하기 위해서 그 당시 흔히 불리던 민중 음악에 신앙적인 가사를 붙여서 찬송가로 사용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마틴 루터는 중세기 동안 천주교회의 전유물로 되어버렸던 예배 음악을 성도들에게 돌려주었고 회중 찬송을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오늘날처럼 상업화된 음악을 교회 속으로 가지고 들어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루터의 찬송과 오늘날의 CCM은 내용과 의도와 목적에 있어서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찬송입니다.

 

두 번째 이유 :  개신교 신앙의 전달을 위해서 새로운 찬양이 필요했다.

천주교회가 사용해오던 음악에는 잘못된 교리와 잘못된 사상이 깊이 담겨 있었습니다. 또한 천주교회의 많은 음악은 예배와 의식 진행에 필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일으킨 위대한 종교개혁 운동은 그 당시 유일한 교회였던 천주교회의 부패와 교리를 개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찬미 가사 속에 있던 비성서적 사상과 교리도 개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미사와 의식에서부터 벗어나야만 했습니다.

“뛰어난 음악가였던 루터는 종교개혁 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에게 시편을 토대로 찬송을 써서 모든 사람들을 일깨우고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라고 촉구했다.”(앨리스터 맥그래쓰,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472)

루터는 새로운 찬송곡을 만들어서 그 속에 새로운 빛과 진리를 불어넣기 원했습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마틴 루터의 정신과 요즘 복음성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정신은 전혀 다른 차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이유 :  중세기 종교암흑기를 거치면서 교회 음악이 황폐되었기 때문에 개신교 찬송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중세기 천주교회 예배에는 오늘날처럼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다 함께 일어나 찬양을 부르는 ‘회중 찬송’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찬양을 담당한 성직자들만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성도들이 찬양을 부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성도들에게 찬양을 부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중세기 성도들은 당시 거짓 복음의 먹구름에 가려져 성경의 진리를 얻을 수 없었던 것처럼, 찬양을 통해 그 어떤 기쁨과 은혜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이런 암담한 현실을 바라보는 루터에게 중세 천주교회 음악은 또 하나의 개혁 대상이었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 신앙에 있어서 찬양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잃어버린 찬양을 되돌려주기 위해 회중 찬송을 교회에 도입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교회는 천 년 이상 음악적 암흑기를 겪었기 때문에 새로운 진리를 담을 수 있는 음악적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대중음악 가운데에 예배에서 부를 수 있을 만한 고상하고 좋은 멜로디를 선택해서 성경적인 가사를 붙여 교회에서 찬송으로 부르도록 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요즘처럼 사용할 수 있는 아름다운 찬송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중가요를 사용했던 것이 아닙니다. 루터는 대중음악을 최선의 선택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대중음악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이유는 오늘날 록앤롤이나 대중가수의 음악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 오려고 하는 사람들의 이유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수백 년에 걸친 풍부한 개신교 음악이 있습니다. 아름답고 진리를 전하기에 적합한 찬송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 음악을 제쳐두고 세상 음악을 무분별하게 사용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틴 루터도 대중음악을 사용했는데, 우리도 사용하면 어때?”라는 주장은 종교개혁자들의 정신과 의도를 너무나 왜곡하는 것입니다.

현대 대중음악은 음률 자체가 매우 관능적이고 자극적입니다. 오늘날은 음악을 기획하는 단계부터 강한 자극과 깊은 우울함을 목적으로 제작이 이루어집니다. 마틴 루터의 시대나 요한 웨슬리 때의 대중음악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개신교 신앙의 선구자들은 오늘날 복음성가를 만드는 사람들의 의도와 목적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가 찬송을 만든 이유와 목적이 다음의 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는 찬송이 개신교의 신앙과 신학적 이해를 함양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 18세기에 일어난 복음의 부흥은 찬송이 신앙적 헌신과 갱신과 이해를 촉진하는 엔진으로 바뀌어 신자들의 마음과 정신에 호소력을 발휘하는 것을 목격했다. … 그러나 정작 웨슬리의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찬송을 신학 교육의 도구로 만든 것이었다. 좋은 찬송은 영감을 고취시킬 뿐 아니라 기억하기도 쉽다는 점을 깨달은 찰스 웨슬리는 이런 찬송이 교리 교육의 보조수단으로서 갖고 있는 잠재력을 개발하여 정교하고 세련된 찬송 문구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신학과 결합시켰다.”(앨리스터 맥그래쓰,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480~481)

 

➍ 네 번째 질문  : “오래전에 교회에서 오르간을 사용할 때 그것을 세속적이라고 생각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어떤 사람도 오르간 사용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드럼이나 탬버린 사용을 처음에는 반대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음악이 ‘재미와 오락’으로 사용되는 것을 매우 경계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도 그런 성향을 강하게 나타냈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메트로폴리탄 테버너클 교회에서 오르간을 쓰지 못하게 했다. … 오르간은 찬양이 아닌 다른 음악적 요소를 통해서 듣는 청중들의 귀를 간질거린다고 스펄전 목사는 말하곤 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예배보다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러 교회에 오는 것을 경계했다. 그가 무엇보다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은 음악의 아름다움과 연주 기술 자체가 예배로 또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로 간주되는 것이었다.”(Peter Maters, Worship in the meeting pot, wakeman Trust, 2002, p.19)

스펄전 목사가 어떤 교회에서 오르간 사용하는 것을 반대했던 이유는, 오르간이 예배의 원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사용될 것을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은 음악적 기술이 아니라 성도의 마음이기 때문에 경계했던 것입니다. 피아노나 오르간이라고 할지라도 지나치게 음을 장식하고 멋을 내는 데 치중하게 되면, 예배의 목적이 흐려지고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개신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갖고 있던 일치된 사상은 “찬양을 통해서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자라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 안에서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 음악을 사용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목적과 수단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가 아니라 사람이 주인공이 되고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는 예배로 바뀌었습니다.

그 결과,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데 목적이 맞추어졌기 때문에 교회 음악이 요란하고 화려하게 되었고 말씀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배의 본질이 무너진 것입니다. 복음성가와 CCM의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는 릭 워렌 목사가 교회 음악에 대해서 갖고 있는 생각을 보시기 바랍니다.

“수년 전 … 나는 우리 교인들에게 설문조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예배에 온 모든 사람들에게 조그만 종이를 돌리고 자신들이 듣는 라디오 방송국의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이 조사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교인 중의 96%가 중도적인 성격을 띤 가요를 듣는다는 것이었다. … 그들에게 클래식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률이다. 그들은 강한 박자를 가진 밝고 기쁘고 즐거운 음악을 좋아하며 그들의 귀는 강한 베이스 리듬이 있는 음악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그런 점을 감안해서 교회 음악과 예배를 준비해야 한다.”(릭 워렌, 새들벡 교회 이야기, 315)

오늘날 교회에서 듣는 대부분의 복음성가는 이런 사상에서부터 온 음악입니다. 말씀이 예배의 중심이 아니라 교인들의 감정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악기를 고르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해결책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참된 구원의 경험으로 인도하는 말씀을 찾으십시오. 생명으로 인도하는 설교를 들으십시오. 진리가 아닌 것은 무엇이든지 버리십시오. 그것만이 살 길입니다.

 

◆교회 음악에 대한 10가지 제안◆ (Philosophy of Church Music–10 Guidelines, 1972)

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성도의 마음을 성 결하게 준비시켜주는 음악을 선택해야 한다.

2. 마음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사상과 생각을 고결한 분 위기로 인도하는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

3. 찬양 가사는 성서적 가르침과 조화되어야 한다.

4. 음악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성경이 전달하는 메시지 와 일치하는 음악을 사용하여,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이 섞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5. 청중의 감성을 인위적으로 흥분시키거나 몸을 흔들 게 만드는 음악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6.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되 인간의 교만이 드러나는 과다한 기교를 피해야 한다.

7. 베이스기타나 드럼과 같은 자극적인 악기에 의해서 분위기가 압도당해서는 안 된다.

8. 신체적, 정서적, 지적, 영적 요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균형 있게 만드는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

9. 찬양 인도자 또는 교회의 지도자는 품위 있고 경건 한 음악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 성경의 원칙을 타 협하지 말아야 한다.

10. 매주 음악과 찬양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설교와 성 경연구가 소홀히 여김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2부, 음악을 통해서 들어오는 사탄의 미혹

오늘날 많은 분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가사만 기독교적이면 되지 꼭 멜로디와 리듬까지 기독교적이어야 합니까? 가사만 기독교적이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현대 대중음악의 음악적 요소를 예배에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의 경험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제가 20대였을 때, 팝뮤직을 참 좋아했습니다. 팝음악을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 음악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노래의 가사 내용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가사 언어가 영어인지 불어인지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이 뭉클해지면서 눈물이 글썽거렸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요즘 CCM(현대 크리스천 음악)과 세상 가요 풍의 복음성가를 들을 때마다 저는 제 마음속에 생기는 느낌과 감정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혼돈됩니다.”

 

크리스천 록, 복음 록은 정말 기독교적인 음악인가?

오늘날 교회에서 중요한 쟁점 중 하나는 음악입니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록앤롤 음악의 최면적인 마력에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록음악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서 기독교 예배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경배와 찬양 시간에는 ‘복음 록’(Gospel Rock)이라고 불리는 음악이 대세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복음 록음악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 음악이 지닌 템포와 리듬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음악을 듣는 사람의 정서와 느낌은 어떤 종류의 음악을 듣는지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슬프고 깊은 정서를 건드리는 음악을 들으면 슬퍼서 울게 됩니다. 정신을 안정시키는 음악을 들으면 온몸이 늘어지면서 잠을 자게 됩니다. 싱코페이션이 가미된 ‘야성적’ 리듬의 음악을 들으면 흥분되면서 맥박수가 올라갑니다. 가사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멜로디와 화음과 리듬 및 악기 종류에 따라서 정서와 감정이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오래전에 이미 음악과 정서의 관계, 음악과 호르몬 분비의 관계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가사가 아무리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대한 내용이라고 할지라도, 음률과 템포와 악기가 록앤롤 스타일의 음악이라면 두뇌에서는 성적 충동과 마약을 할 때 나오는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이것이 사탄이 노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노래하면서 정욕과 성적인 정서 속으로 들어가도록 만드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인체의 기능 중에서 음악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기능은 거의 없습니다. 음악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심장 박동율과 혈압, 신경계, 소화, 근육 그리고 인체의 호르몬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쇈 박사(Dr. Schoen)는 그의 저서, ‘음악의 정신학(The Psychology of Music), 39’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습니다.

 

“음악은 인체의 감각기관에 가장 강력한 자극제로서 작용할 수 있다. … 음악은 다른 어떤 행위보다도 강력하고 신속하게 우리의 정서적 기능에 작용한다.”

 

교회에서 찬양을 부르고 들으면, 그 소리가 곧바로 뇌에 전달됩니다.

두뇌의 어떤 부분이 음악을 감지할까요? 정서와 감각과 느낌의 자극을 측정하는 뇌에서 인지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귀로 들어가는 멜로디와 템포와 악기 소리는 정서와 감각과 느낌을 주관하는 ‘시상세포’를 경유하여 뇌 속으로 들어갑니다. 슐리안(Schullian)과 쇈 박사는 음악이 뇌를 자극하는 문제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한번 음악적 자극이 시상세포에 전달되면 두뇌의 중심 부분은 자동적으로 침범당하게 된다. 만일 그 자극이 한동안 지속되면 두뇌의 중심부와 현실세계 사이에 친밀한 접촉이 이루어지게 된다.”(음악과 의학, 270,271)

 

어떤 특정 리듬이나 불안정한 화음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음악은 신체적 반응을 일으킵니다. 록앤롤의 음률과 박자를 드럼과 전자악기를 통해 계속해서 반복되는 쿵쾅거리는 소리로 들으면 인체 속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미국의 타임(Time)지는 다음과 같은 실험 결과를 보도했습니다.

 

“록앤롤 음악의 최면을 일으키는 박자는 인체 속에서 이상한 마술을 행사한다. 음악에 맞춰서 몸을 흔드는 사람들은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의지력은 흐려지게 되고 눈은 초점을 잃고 흐리멍텅해진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들은 소리의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까지 정신없이 춤춘다.”

 

음악마다 나오는 힘의 종류가 다르다

가장 두려운 사실은, 음악을 계속해서 들으면 음악이 주는 영향력에 압도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음악이 이끄는 대로 감정이 달라지게 되고 그 다음에 몸의 행동까지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신경과 의사들은 정신적 퇴행이 있는 환자나 정신적 질병이 있는 환자들의 마음에 접근하기 위해서 음악을 치료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환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음악이 마음의 문을 여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현대 과학은 좋은 음악을 농사에 사용하면 수확이 늘어나고, 어떤 음악을 틀어주는가에 따라 부패의 진행 속도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음악은 노동의 효율에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레오니드 멜니코프(Leonid Melnikov)는 ‘러시아 음악과 의약품, U.S.S.R. & music and Medicine’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실험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활동하는 템포는 그가 듣는 음악의 템포를 따라간다. 빠른 음악을 들으면 활동을 빠르게 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학생들을 상대로 한 또 다른 실험은 음악은 일의 효율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맥박과 혈압의 변화까지도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주었다.”(Music JournaI XVII: 18, 1970년 11월)

 

사탄은 이러한 과학을 이용해서 교회 속으로 애굽의 음악을 퍼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인체 속에서는 온갖 이상한 느낌과 정서를 만들어내는 것이 사탄의 목적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찬양과 경배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는 사탄이 들려주는 음악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습니다. 가사와 내용이 아무리 거룩하다고 할지라도, 박자와 멜로디와 악기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성도들은 자신이 인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사탄이 원하는 쪽으로 정서가 기울어지게 됩니다. 반 드월(Van dewall) 박사는 다음과 같이 음악이 주는 영향력을 설명했습니다.

 

“음악은 저항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각 기능은 음악에 따라 반응하기 때문이다.”(병원에서의 음악; Music in HospitaIs, 15)

 

“음악에서 느껴지는 소리의 진동과 리듬은 신경계와 신경계를 통하여 근육에 충격을 주는데, 그것은 우리의 팔과 손, 다리와 발의 근육들을 수축 및 이완시켜서 움직이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들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움직이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만일 음악을 듣는 사람이 몸을 움직이지 않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근육을 억제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상동, 106)

 

음악은 정신과 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록음악의 리듬과 박자에 오랜 기간 동안 길들여진 청년들의 삶이 도덕적인 파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록음악과 같은 박자와 리듬 그리고 드럼과 전자기타와 같은 악기들은 성관계를 맺거나 마약을 하거나 불법적인 일을 할 때 우리 몸속에서 나오는 호르몬을 분비시키고 그런 정서를 느끼도록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 중 누가 애굽의 음악과 악기를 사용하자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록음악만 아니면 교회에서 사용해도 될까요?

대중음악의 작곡가들은 어떤 음률과 어떤 박자와 악기를 사용해야만 청중들의 감정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를 아는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지금 그들이 만든 음률과 박자와 멜로디를 가져다가 가사만 바꿔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세상의 감성과 흥분을 교회 음악 속에 집어 넣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탄은 예배와 찬양을 통해서 마음의 성채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음악을 통해서 마음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기회를 얻게 되고, 음악을 통해서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겨둡니다. 그렇게 될 때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이 저하되고 유혹과 죄에 대항해서 싸우는 정신력이 저하돼서 사탄의 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사탄은 음악으로 온 세상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 음악으로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애굽의 음악과 악기들이 울릴 때마다 성도들의 몸속에서 성욕을 자극하는 호르몬이 분비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인기 있는 가수와 연주자들이 마약에 깊이 빠져 있고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는 강신술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밥 랄슨(Bob Larson)은 대중가요 음악가들이 사탄과 접촉해서 성공에 대한 보장을 받아왔다는 증거들을 수집했습니다. 수많은 대중가요 음악가들이 사탄의 포로가 되어 난잡한 환락을 즐기고 있다는 것은 이제 뉴스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앨리스 잉글리쉬 몬사랏(Alice English Monsarriat)은 ‘음악은 진정시키는 안정제인가 아니면 야만적인 아우성인가?’라는 글에서 음악의 치명적인 위험을 설명했습니다.

 

“고음 부분에서 왼손으로 박자를 맞추면서 점점 더 속도를 빨리 하면서 불협화음을 내면, 사람을 거의 광란의 상태에까지 몰고 갈 수 있는데 그런 불협화음은 신체조직을 망가뜨리거나 거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가져오도록 만든다. 마치 그것은 어떤 사람이 동시에 두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려가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다. 정신과 의사들은 사람의 정서와 감정을 두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갈등이 정신병원의 병실을 채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두려운 사실은,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으로 실험을 해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앨리스 잉글리쉬 몬사랏은 “우리가 건강하고 고결한 감각을 유지하기 원한다면, 자신이 갖고 있는 자연적인 인체의 리듬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리듬에 노출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춘기 청년들이 나타내는 걷잡을 수 없는 듯 보이는 반항적인 행동은 인체의 리듬과 충돌하는 음악에 계속해서 노출되는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청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이유도 음악에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가 그런 음악과 악기들을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사탄은 지금 음악을 통해서 마음과 신앙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사탄은 오래전부터 관능적인 욕구를 미끼로 삼는 작전을 사용해 왔습니다. 사탄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사람의 느낌과 정서를 지켜보고 실험해 왔습니다. 사탄은 회개하지 않은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음악을 들려주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사탄은 세상을 사랑하는 기독교인들을 어떤 박자와 리듬으로 붙잡을 수 있는지 잘 압니다. 교회 밖에서는 세상 음악을 통해서 청년들의 삶을 지배하고, 교회 안에서는 가사만 기독교적인 세상 음악으로 경배와 찬양을 하도록 합니다. 사탄의 전략은 지금 교회 안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음악을 통한 사탄의 미혹을 조심하라

사탄은 노련한 잠복전술을 통하여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구약시대 시내산에서 성공했고 북방 이스라엘에서 크게 성공했던 금송아지 예배와 음악을 현대 기독교회 안으로 끌어들여서 놀라울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심지어 보수적이고 성경대로 믿는다는 사람들까지 음악을 통한 사탄의 전략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가사에 세상 음악을 올려놓음으로써, 교회에서 찬양할 때 술집이나 클럽에서 느끼는 동일한 관능적인 감정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성경대로 믿는다고 말하는 교회와 신자들을 음악으로 기만했을 때 사탄은 얼마나 의기양양하게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조롱할까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섞어놓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선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탄은 지금 우는 사자처럼 교회 안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교리나 예언을 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감(五感)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들을 살피고 조절해야 합니다. 사탄은 지금 음악을 통해서 우리 속에 들어가 영성을 헤치는 호르몬을 쏟아내게 하고 이상한 느낌과 정서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속의 음악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을 닫아야 합니다. 마음과 정신을 부패시키는 음악으로부터 귀를 막고 돌아서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 중에 높임을 받고 우리를 애굽으로 끌고 가는 음악으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세상 사람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몇 해 전에 어떤 가정에서 이런 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불신자였는데, 두 아들은 매 주 말 교회 다니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한번은 두 아들이 아버지에게 교회에서 했던 찬양을 들려주면서 이렇게 말했 습니다. “아버지, 형과 제가 교회에서 경배와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형은 드럼을 치고 나는 베이스기타를 칩니다. 우리 가 하는 찬양을 들어보세요.” 아버지는 두 아들의 연주와 찬양 영상을 보고서 크게 놀라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니? 이런 음악은 술집이나 댄스 홀 에서나오는음악인데….그런음악을들으면나도모르는사이에발로스텝을밟게되고손과몸을음악에맞춰서움 직이게 되는데 너희는 그렇지 않니?”

1부, 나는 드럼의 진동을 이렇게 처음 느꼈다

이 기사는 어떤 그리스도인이 30년 전 어렸을 때 찬양 집회에서 겪었던 경험입니다. 30년 전 한국 교회 속에 이런 일들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어디까지 진행되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환호를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오래전에 이미 세상 음악에 의해서 점령당했고, 어떤 교회는 눈치를 보면서 세상 음악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이번 호가 어떤 분들에게는 부담이 되고 아픔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잠시 멈추어 서서 지금 교회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성령의 불인가? 사탄의 불인가?

“청소년 시절, 처음으로 강대상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드럼 소리를 체험했습니다. 그 소리는 정말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당시 조용하고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고 나면 뭔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드럼으로 주도되는 찬양은 나에게 놀라운 충격을 주었습니다. 한번은 ‘불길 같은 주 성령’이라는 찬양 집회를 했습니다. 미친 듯이 손뼉을 치면서 찬양을 했습니다. 그 찬양을 기본적으로 10번 이상 빠르게 손뼉을 치면서 불렀습니다. 특히, ‘불로, 불로’ 부분에서는 더 강하고 뜨겁게 불렀습니다. 그러면 조금씩 몸에 느낌이 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이 불이 되어 조금씩 오시는 것 같았습니다. ‘성령님, 목마릅니다. 사마리아 여자보다 제가 더 목마릅니다. 저를 뜨겁게 해주십시오. 제 영혼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세요. 부디 충만하게 해주세요. 불로, 불로, 부디…’

‘불길 같은 주 성령’을 수없이 반복하는 동안 수련회 강사는 양복 상의를 벗어던지고 넥타이도 풀었습니다. 그의 하얀 와이셔츠가 땀에 젖어갔습니다. 강사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힘찬 박수로 우리를 유도하며 찬양에 점점 더 속도를 붙여가면서 불렀습니다. 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밤 불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오늘 밤 성령의 불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지세요. 성령의 불을 사모하세요. 사모하는 마음으로 더 힘차게 더 빠르게 더 뜨겁게 찬양하겠습니다. 여러분, 자리에서 모두 일어나겠습니다. 전도사님, 이제 방의 불을 꺼주세요.”

음악이 빨라지면서 몸까지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불길 같은 주 성령’을 더 강하게 악에 받친 듯이 불러댔습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서 내 근처에 있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허공을 향하여 손을 미친 듯이 흔드는 사람, 마치 손에 칼이라도 들고 있는 것처럼 칼싸움 시늉을 하는 사람, 알 수 없는 소리로 떠드는 사람, 마치 파리를 노리는 개구리처럼 혀를 내밀었다 넣기를 반복하면서 눈이 거의 뒤집힌 사람…. 이제 ‘불길 같은 주 성령’을 제대로 발음하며 노래하는 사람의 숫자는 점점 더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 역시 눈앞이 몽롱해지면서 팔이 내 의지와 관계없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손을 뻗어 자꾸 반복해서 네모 모양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내 입술은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내 팔은 허공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아, 이것이 성령의 불을 받는 경험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음악이 서서히 잦아들며 꺼졌던 방의 불이 켜졌습니다. 불이 켜짐과 동시에 사람들도 하나씩 이상한 행동하는 것을 마치고 웅성웅성하며 자리에 앉기 시작했습니다.

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께서 이 자리에 임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죄가 용서되고 성령의 권능이 임했습니다. 성령의 권능, 성령이 주시는 뜨거운 불의 힘을 여러분 모두 체험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오늘 이 자리에 폭포수 같은 은혜를 베푼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 집회 이후로 우리는 각자 새로운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칼잡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고 어떤 사람은 ‘개구리’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 기억에 남는 것은 다음날 아침입니다. 수련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조별로 마무리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왠지 다들 뭔가 ‘멋쩍은’ 느낌에 제대로 말을 못했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어젯밤 우리가 받은 것이 성령의 불이 맞을까?’라고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누구도 ‘성령의 불이 그렇게 지저분한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들 어색한 침묵을 지켰습니다. …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성령의 불을 받은 사람들이 왜 다 그렇게 마치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들처럼 행동했는지…. 왜 그날 밤의 일들이 ‘환상적인 밤’으로 기억되기는커녕 도리어 왜 ‘광란의 밤’으로만 기억되는지, 그것도 바로 다음날 아침부터 당장 잊고 싶은 그런 밤으로 말입니다. 그 수련회는 내게 음악이 주는 흥분이 독약임을 최초로 깊이 깨닫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독자 어려분,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이런 집회가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30년 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음악과 악기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먼저, 청년들의 예배와 음악이 세상 음악으로 덮혀버렸는데, 어른들은 아무 생각없이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나이 지긋한 장로님과 목회자까지 책임을 통감하지 못하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요즘 찬양 집회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음악적 흥분을 하나님의 임재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음악으로 최면 당한 사람들을 쉽게 지배하게 되고 그들을 ‘감정의 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수많은 양들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데 말씀을 찾지 못하니까 ‘감정의 맛’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다가 사탄의 덫에 깊이 걸려들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계 16:13)

서론, 변질된 예배와 음악 때문에 ‘말씀’이 사라졌다

얼마 전에 예수님을 영접한 새 신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교회에 들어와서 가장 놀란 사실은 술집이나 댄스 홀에서나 들었던 음악을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교회에서 그런 음악을 들을 때마다 예전에 술 마시고 춤을 추면서 가졌던 느낌과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런 음악을 들을 때마다 올라오는 감정과 느낌을 자제하지만 제 마음은 참으로 혼돈스럽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음악 때문에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음악 때문에 혼돈에 빠지고 고통을 받을까요?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애굽(세상)의 음악이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기독교회 안에서 유행가 리듬이 들려오고 팝뮤직과 리듬앤블루스(rhythm and blues)가 들려오고 랩과 록앤롤(Rock and Roll)이 들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가사는 예수님과 십자가를 말하고 있는데 곡조와 리듬은 유행가인 음악이 교회를 점령했습니다. 독자 여러분, 만약 인기 가수의 히트곡에 ‘십자가 그늘 아래’라는 가사를 붙여서 노래하면 어떤 찬양이 될까요? 만약 아이돌 가수의 노래에 ‘복의 근원 강림하사’라는 가사를 붙여서 찬양하면 어떤 느낌이 나올까요?

물론, 처음부터 기독교회에서 이런 음악과 예배가 이루어졌던 것은 아닙니다. 3~40년 전만 해도 기독교회 예배는 거룩하고 경건하게 드려졌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복음성가’란 이름으로 세상 음악의 리듬과 멜로디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풍조는 너무나 깊이 들어와서 ‘성경’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보수적인 교단까지 세상 음악의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피아노와 오르간이 사라지더니 이제는 드럼과 탬버린과 베이스기타가 설교 단상 위에 올려졌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복음 록(Gospel Rock)이라는 이름으로 록앤롤 음악이 힘있게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에 맞춰서 설교 단상은 현대식 무대로 바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조명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거룩하고 경건해야 할 예배가 콘서트 쇼처럼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 음악을 교회에서 사용해야 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옛날식 찬양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청년들을 붙잡으려면 그들이 좋아하는 노래와 문화를 교회 안으로 갖고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는 음악으로 그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독자 여러분, 이런 사상이 교회 안으로 들어온 후 교회에 내리고 있는 재앙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씀이 사라지는 재앙입니다. 청년들이 말씀에 관심을 잃어버렸습니다. 밴드와 요란한 음악을 사용하는 교회마다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전 세계 기독교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 음악을 통해서 청년들을 전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세상 음악을 통해서 청년들이 세상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상의 음악가들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음악을 통해서 어린아이들을 부모들로부터 빼앗아갈 수 있다.”(미국 밴드 그룹, 다니 부르어).

독자 여러분, 음악을 바꾸고 찬양을 열정적으로 한다고 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녀들과 청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자녀들을 말씀에 충성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교육해야 합니다. 교회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과 같은 청년들을 길러내기 위해서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어떤 기독교 언론인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기독교회에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나는 몇 해 전에 로마서를 연구하는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설교 단상에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말씀이 크게 걸려 있었다(롬 12:2). 교인들은 집회의 주제 찬양을 모두들 열성적으로 불렀다. 교인들은 집회 내내 ‘이 세대를 본받지 말자’라고 소리치면서 밴드에 맞춰 손뼉을 치고 머리를 흔들고 발을 구르면서 찬양을 했는데, 그 모습은 이미 세상을 그대로 본받은 모습이었다.”

 

독자 여러분, 세상이 너무 교회 안에 깊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제 무엇이 거룩함이고 무엇이 세속인지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섞여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에서 드럼 소리가 들리고 발라드와 록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교회는 그것을 거룩한 예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음악에 따라서 호르몬의 종류가 달라진다

세계 2차대전 이후부터 ‘음악 치료’라는 것이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 때문에 정신적으로 피해를 입은 군인들에게 정신과적인 치료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음악을 듣는가에 따라서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음악에는 사람의 마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향기 좋은 향수를 선호하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행복해 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눈과 귀와 코와 입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 대해 사람의 마음이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귀로 듣는 음악도 사람의 마음에 강력한 영향을 줍니다. 강렬한 비트가 있는 음악이나 대중가요를 들은 후에 기도를 하거나 성경을 읽으면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음악이 우리 마음에 이상한 힘을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나 교인들 중에 가사만 기독교적이면 음악은 그것이 록뮤직이건 발라드건 상관없다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가사가 아무리 좋더라도 음악이 올바르지 못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경험이 방해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할까요? 빌립보서 4장 8절의 말씀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습니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한 음악을 들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평안이 있는 사람은 대중가요처럼 들리는 찬송을 피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의 성질과 다른 성질을 가진 음악들은 자연스럽게 싫어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시대 교회 모습

독자 여러분, 사탄의 덫에 빠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영혼의 통로를 잘 지켜야 합니다. 지금은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벧전 1:13)라고 하는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할 때입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 교회가 ‘바벨론’이 된다고 했습니다. 교회 안으로 온갖 더러운 영들이 모인다고 했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사도 요한은 어떤 모습을 보았길래 교회가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고 했을까요? 거룩하고 경건해야 할 예배가 온갖 거짓 복음으로 더럽혀졌고, 신령과 진리로 드려져야 할 예배가 세상 가수의 음악으로 덮여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향이 드럼과 베이스기타와 광란의 음악으로 올려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에서 정말 두려운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바벨론의 예배 방식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바벨론은 반드시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교회 음악과 예배가 세상을 흉내 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서입니까? 청년들을 교회에 붙잡아놓기 위해서입니까? 세상 음악을 통해서 청년들을 모을지 모르지만, 과연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좁은 길을 걷는 하늘 성도로 양육될 수 있을까요? 교회의 목적은 성도들을 말씀으로 인도해서 진리에 굴복시키고 하늘 시민으로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울고 계십니다. 세상을 따라가는 교회를 보면서 깊이 탄식하고 계십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누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었고 누가 사탄의 편에 서 있었는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기독교회 안에 들어온 금송아지 예배의 실태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눈에 안약을 바르는 경험을 한 성도들은 참 예배와 거짓 예배를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26호를 시작하며…

여러 세기 동안 기독교회는 세상의 연예오락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하게 표현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연예오락의 본질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는 세상이 주는 재미에 굴복했습니다. ‘연예오락과 재미’라는 큰 신(神)을 이길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그들과 연합하여 그들의 힘을 이용하는 편이 더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교인들에게 세상적 연예오락과 재미를 제공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활동이 연예오락과 재미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회 속에 가장 깊이 들어온 ‘연예오락과 재미’는 음악입니다. 복음이 변질되고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이 쇠락하고, 더디 성장하는 교인들의 숫자가 급증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와 찬양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죄와 불의를 보고도 참는 것이 ‘사랑’이라는 설교가 퍼져나감에 따라 오랫동안 불러왔던 찬송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오래전에는 나이트클럽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댄스 리듬이 소위 ‘복음성가’라고 불려지는 곡들과 섞여서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습니다. 가사는 기독교적인데 멜로디와 박자는 인간의 저속한 욕망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 금송아지가 들어왔습니다. 구약시대 시내산에서 성공했고 북방 이스라엘에서 크게 성공했던 금송아지 예배와 음악이 현대 기독교회 안에 깊이 들어왔습니다. 보수적이고 성경대로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음악을 통한 사탄의 전략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가사를 애굽의 음률과 박자에 올려놓음으로써, 교회에서 찬양할 때 술집이나 클럽에서 느끼는 관능적인 감정을 느끼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 나누는 말씀은 진리와 성령으로 인도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기쁨과 빛이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와 음악 때문에 고통받아 온 성도들에게 이번 호는 진리를 보여주는 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