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질문 : “다윗은 북을 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드릴 때 꽹과리처럼 요란하고 강력한 악기를 사용했는지 어떻게 압니까? 성경이 특별히 금지하는 음악 스타일은 없는데 왜 교회 음악에 율법적 굴레를 씌우려고 하십니까?”

 

기독교회를 CCM과 복음성가로 이끌고 있는 선두주자인 릭 워렌 목사와 같은 사람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합니다.

“시편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의 예배에서 드럼과 심벌즈, 요란한 나팔과 탬버린 그리고 현악기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본다. 그것이 그 시대의 CCM이 아니면 무엇인가?”(릭 워렌, 새들벡 교회 이야기, 315)

오늘날 이런 생각에 취해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습니다.

 

“꼭 엄숙하고 조용하게 드리는 예배에서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모든 예배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경 어디에도 “너희가 조용히 앉아서, 경건하게 예배드리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편에서는 소고 치며, 춤추며, 소리 높여서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시편 98편 4절에서는 소음이라는 표현까지 나오는군요.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할지어다 소리를 발하여 즐거이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Make a joyful noise unto the Lord!)’ 실제로 구약성경에서는 예배드리면서 여호와 앞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홍해를 가르신 주님을 춤추며 찬양했습니다. 그러므로 엄숙하고 조용한 예배당이건, 화려하게 조명이 비취고 시끄러운 음악이 가득한 집회 장소이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에서는 죄인이 참회하고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기독교적인 음악은 없습니다. 기독교적인 가사만 있을 뿐입니다. 왜 춤추어서는 안 됩니까?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 춤을 췄는데 왜 열광적으로 예배드려서는 안 됩니까?”

 

오늘날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금지하지 않았으면 무엇이라도 괜찮다.”는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성경에 조용하고 엄숙하게 예배드리라는 말씀이 없기 때문에 시끄럽게 광란적으로 예배드려도 문제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정말 성경에 엄숙하게 예배드리라는 말씀이 없을까요? 또한 성경이 구체적으로 금지하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는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구체적인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담배가 몸에 매우 해롭다는 사실은 현대 과학이 입증했고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그리스도인이 “성경이 담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흡연해도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주장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독자 여러분,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신앙과 정신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독자 여러분, 성경이 음악과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with solemn sound, 엄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시편 92:1)

 

드럼과 탬버린과 베이스기타에서 나오는 음악이 ‘정숙한 소리’일까요? 성경에 기록된 이런 분명한 메시지를 거절하면서까지 정숙하지 않은 음악을 사용해야 할까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서 다윗과 미리암처럼 춤이나 북으로 표현하고 싶다면, 주중에 가정이나 옥외에 나가서 하는 것이 어떨까요?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드리는 안식일에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조용하고 엄숙한 태도로 찬양하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다윗도 미리암도 성소 안에서 안식일에 소고를 치고 춤을 춘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과 평일, 성소 안과 성소 밖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십계명은 다음과 같이 예배에 대해서 명령하고 있습니다

“제칠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복음과 예배의 관계

현란한 반주와 음악으로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대부분의 교회가 “한번 예수를 영접하고 믿으면 내가 어떻게 살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복음을 믿기 때문에 그러한 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탄은 오늘날 기독교회 속으로 온갖 종류의 오류들을 밀어 넣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한 복음과 이상한 예배 방식들이 교회를 채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은 신앙과 경험을 가져야만, 다윗의 춤과 음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 당시 블레셋 사람들의 춤을 추고 그들이 부르던 음률에 시편의 가사를 붙여서 찬양했을까요? 다윗이 블레셋 이방인들의 음률로 찬양하고 이방인의 춤을 추면서 성소에서 예배드렸을까요?

다윗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음악은 이스라엘의 음악이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아브라함이 불렀고 야곱이 사용했던 음악이었습니다. 그의 음악 속에는 믿음의 조상들의 혼과 신앙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다윗의 신앙을 이해해야만 다윗의 찬미와 예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남은 교회였던, 이스라엘 교회는 항상 이스라엘의 예배와 찬양을 고수했습니다. 하나님의 남은 교회 안에 금송아지가 세워지고 애굽의 예배와 찬양이 울려 퍼졌을 때는 항상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장 위험한 예배

가장 위험한 예배는 감정을 인위적으로 조장하는 예배입니다. 참된 영적 경험은 악기를 사용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음악을 통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영적 경험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경험입니다. 구원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구원을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감사의 찬양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쁨과 평강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주는 기쁨과 평강은 찬양을 열정적으로 한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먼저 회개하고 의롭게 되는 경험이 있을 때 평강과 기쁨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이 순서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때문에 오늘날 교회 안에 이상한 음악들이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회개와 죄와 세상을 버리는 경험 없이 기쁨과 평안을 강조하는 사람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 전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는 없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는 사람, 죄를 붙잡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진리는 무엇보다 이성에 호소되어야 한다. 이성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깨달을 때 비로소 감정의 불이 켜지고 가동이 일어난다. 그런 후 의지가 발동되며 그 의지는 순종으로 나타나게 된다.”(로이드 존스, 설교와 설교자들, 271)

오늘날 기독교회가 드리는 예배의 위험은 죄를 붙잡고 있는 사람에게 인위적으로 하늘이 주는 감정을 만들어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인위적으로 기쁨과 감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이방인들의 음률과 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교회를 휩쓸고 있는 정신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아닌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려고 할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왜 시작되었는가?

기독교회가 세속화하면서 교회는 복음 전파가 아니라 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축제하는 분위기로 예배드리면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주장과 이론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진리를 강조하고 그리스도인 신앙의 높은 표준을 말하면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축제 분위기로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짧고 밝게 하면 교회가 성장한다.” 이런 흐름에 맞춰서 신학교에서도 ‘교회 성장’이라는 과목을 강의하는데, 그 과목에서는 대중가요에서 사용하는 악기와 음률로 드리는 ‘축제 예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축제식 예배 방식의 의도와 목적은 뿌리부터 부패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배와 음악이 교인들을 더 많이 모으기 위해서 그리고 이미 들어와 있는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층을 붙잡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이 좋아하는 악기와 음악과 춤을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음악 속에서 자란 청소년들의 신앙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의 신앙이 충격적일 정도로 초보적이고 말씀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 음악으로 만들어진 가짜 회심자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요 3:36).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 풀무불과 사자굴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말씀으로 길러내는 것이 교회의 목적입니다.

 

➋ 두 번째 질문 : “시편에서 다윗은 ‘새 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했는데, 왜 현대의 새로운 음악으로 주님을 찬양하면 안 됩니까?”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새 노래’에 대한 가르침이 크게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미국 뉴저지에 있는 어떤 한국 목회자는 ‘새 노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편 149편 1절에 나타난 새 노래란 시대적 변화에 맞춘 새로운 음악임과 동시에, 변화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 부르는 찬양을 뜻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요즘 유행하는 대중가요식으로 만든 ‘새로운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점점 더 빠른 템포의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오래된 찬송가에는 빠른 템포가 없으므로 현대 대중음악의 멜로디와 박자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기독교회의 대세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정숙하고 경건한 찬송가를 부르기 원하는 분들은 눈치를 보게 되고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현대 대중가요의 음률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경절은 시편의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지어다”(시 149:1). 이 말씀이 정말 교회가 각 시대마다 새롭게 나오는 세상 음악의 유행을 따라가라는 의미일까요? 심지어 어떤 분들은 시편에 나오는 ‘새 노래’는 방언 찬양을 뜻한다고 주장합니다. 시편의 이 말씀이 정말 그런 뜻이라면 오늘날 교회를 휩쓸고 있는 CCM이 가장 성서적인 음악일 것입니다.

 

‘새 노래’의 의미

시편에 나오는 ‘새 노래’가 정말 매 시대마다 나오는 새로운 리듬과 멜로디를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우리는 성경 속에서 새 노래의 의미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시편 41편에는 새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 40:1-3)

 

이 말씀에서 다윗은 ‘새 노래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린다’고 했는데, 새 노래는 어떤 노래일까요? 바로 앞에 있는 2절 말씀이 새 노래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시 40:2)

 

새 노래란 하나님께서 나를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려 주시고 반석 위에 세워주신 역사에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다시 말해서, 새 노래란 경험의 노래인데, 시험과 유혹의 구덩이에서 빼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뜻하는 것입니다. 새 노래란 “나는 하나님 때문에 승리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시험에서 빠져나왔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경험의 노래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4,000인은 새 노래를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새 노래”로 찬양하라는 시편의 말씀은 시험과 환난에서 구원받은 경험에 대한 고백을  말하는 것이지, 세상 음악의 유행을 따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 14:3) 

 

독자 여러분, 144,000인은 누구입니까? 이마에 인침을 받고 마지막 시대 짐승의 표 환난과 7재앙을 통과하는 의인들입니다. 그러므로 144,000인은 지구 역사에서 가장 큰 짐승의 표 환난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받고 구원받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는 환난의 수렁에서, 시험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경험을 하는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144,000인밖에는 능히 새 노래를 배울 자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➌ 세 번째 질문 :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그 당시 민중에서 불리던 노래에 가사를 붙여서 찬송가를 만들었는데, 왜 지금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까?”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교회 음악도 변해야 한다는 사상이 강력하게 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합니다. “만약 우리가 전통적인 찬송가만 사용해야 한다면, 마틴 루터도 비난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위대한 종교개혁자도 그 당시 대중들이 부르던 음악을 사용해서 찬송가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얼핏 들으면 일리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는 오늘날 CCM을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음악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틴 루터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마틴 루터는 대중가요에 가사를 붙여서 찬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가 처했던 시대적 상황은 지금 우리의 상황과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왜 새로운 찬송가를 만들었을까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 :  중세기 천주교회 음악은 교회 음악의 목적에서 크게 빗나가 있었기 때문에 회중을 위한 찬양을 만들어야 했다.

중세기 예배 음악은 매우 기교적인 음악이었으며 성가대 단원이 아니면 도저히 따라 부를 수 없는 음악이었습니다. 가사는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성도들은 가사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며, 성가대는 즉흥으로 곡을 만들어서 부르거나 심한 변주를 삽입하여 부르는 것을 수준 높은 찬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악보를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중세기에 천주교회는 회중이 예배 시간에 찬양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예배에 회중의 찬송을 도입하기 위해서 그 당시 흔히 불리던 민중 음악에 신앙적인 가사를 붙여서 찬송가로 사용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마틴 루터는 중세기 동안 천주교회의 전유물로 되어버렸던 예배 음악을 성도들에게 돌려주었고 회중 찬송을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오늘날처럼 상업화된 음악을 교회 속으로 가지고 들어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루터의 찬송과 오늘날의 CCM은 내용과 의도와 목적에 있어서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찬송입니다.

 

두 번째 이유 :  개신교 신앙의 전달을 위해서 새로운 찬양이 필요했다.

천주교회가 사용해오던 음악에는 잘못된 교리와 잘못된 사상이 깊이 담겨 있었습니다. 또한 천주교회의 많은 음악은 예배와 의식 진행에 필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일으킨 위대한 종교개혁 운동은 그 당시 유일한 교회였던 천주교회의 부패와 교리를 개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찬미 가사 속에 있던 비성서적 사상과 교리도 개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미사와 의식에서부터 벗어나야만 했습니다.

“뛰어난 음악가였던 루터는 종교개혁 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에게 시편을 토대로 찬송을 써서 모든 사람들을 일깨우고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라고 촉구했다.”(앨리스터 맥그래쓰,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472)

루터는 새로운 찬송곡을 만들어서 그 속에 새로운 빛과 진리를 불어넣기 원했습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마틴 루터의 정신과 요즘 복음성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정신은 전혀 다른 차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이유 :  중세기 종교암흑기를 거치면서 교회 음악이 황폐되었기 때문에 개신교 찬송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중세기 천주교회 예배에는 오늘날처럼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다 함께 일어나 찬양을 부르는 ‘회중 찬송’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찬양을 담당한 성직자들만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성도들이 찬양을 부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성도들에게 찬양을 부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중세기 성도들은 당시 거짓 복음의 먹구름에 가려져 성경의 진리를 얻을 수 없었던 것처럼, 찬양을 통해 그 어떤 기쁨과 은혜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이런 암담한 현실을 바라보는 루터에게 중세 천주교회 음악은 또 하나의 개혁 대상이었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 신앙에 있어서 찬양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잃어버린 찬양을 되돌려주기 위해 회중 찬송을 교회에 도입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교회는 천 년 이상 음악적 암흑기를 겪었기 때문에 새로운 진리를 담을 수 있는 음악적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대중음악 가운데에 예배에서 부를 수 있을 만한 고상하고 좋은 멜로디를 선택해서 성경적인 가사를 붙여 교회에서 찬송으로 부르도록 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요즘처럼 사용할 수 있는 아름다운 찬송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중가요를 사용했던 것이 아닙니다. 루터는 대중음악을 최선의 선택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대중음악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이유는 오늘날 록앤롤이나 대중가수의 음악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 오려고 하는 사람들의 이유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수백 년에 걸친 풍부한 개신교 음악이 있습니다. 아름답고 진리를 전하기에 적합한 찬송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 음악을 제쳐두고 세상 음악을 무분별하게 사용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틴 루터도 대중음악을 사용했는데, 우리도 사용하면 어때?”라는 주장은 종교개혁자들의 정신과 의도를 너무나 왜곡하는 것입니다.

현대 대중음악은 음률 자체가 매우 관능적이고 자극적입니다. 오늘날은 음악을 기획하는 단계부터 강한 자극과 깊은 우울함을 목적으로 제작이 이루어집니다. 마틴 루터의 시대나 요한 웨슬리 때의 대중음악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개신교 신앙의 선구자들은 오늘날 복음성가를 만드는 사람들의 의도와 목적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가 찬송을 만든 이유와 목적이 다음의 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는 찬송이 개신교의 신앙과 신학적 이해를 함양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 18세기에 일어난 복음의 부흥은 찬송이 신앙적 헌신과 갱신과 이해를 촉진하는 엔진으로 바뀌어 신자들의 마음과 정신에 호소력을 발휘하는 것을 목격했다. … 그러나 정작 웨슬리의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찬송을 신학 교육의 도구로 만든 것이었다. 좋은 찬송은 영감을 고취시킬 뿐 아니라 기억하기도 쉽다는 점을 깨달은 찰스 웨슬리는 이런 찬송이 교리 교육의 보조수단으로서 갖고 있는 잠재력을 개발하여 정교하고 세련된 찬송 문구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신학과 결합시켰다.”(앨리스터 맥그래쓰,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480~481)

 

➍ 네 번째 질문  : “오래전에 교회에서 오르간을 사용할 때 그것을 세속적이라고 생각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어떤 사람도 오르간 사용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드럼이나 탬버린 사용을 처음에는 반대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음악이 ‘재미와 오락’으로 사용되는 것을 매우 경계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도 그런 성향을 강하게 나타냈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메트로폴리탄 테버너클 교회에서 오르간을 쓰지 못하게 했다. … 오르간은 찬양이 아닌 다른 음악적 요소를 통해서 듣는 청중들의 귀를 간질거린다고 스펄전 목사는 말하곤 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예배보다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러 교회에 오는 것을 경계했다. 그가 무엇보다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은 음악의 아름다움과 연주 기술 자체가 예배로 또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로 간주되는 것이었다.”(Peter Maters, Worship in the meeting pot, wakeman Trust, 2002, p.19)

스펄전 목사가 어떤 교회에서 오르간 사용하는 것을 반대했던 이유는, 오르간이 예배의 원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사용될 것을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은 음악적 기술이 아니라 성도의 마음이기 때문에 경계했던 것입니다. 피아노나 오르간이라고 할지라도 지나치게 음을 장식하고 멋을 내는 데 치중하게 되면, 예배의 목적이 흐려지고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개신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갖고 있던 일치된 사상은 “찬양을 통해서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자라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 안에서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 음악을 사용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목적과 수단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가 아니라 사람이 주인공이 되고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는 예배로 바뀌었습니다.

그 결과,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데 목적이 맞추어졌기 때문에 교회 음악이 요란하고 화려하게 되었고 말씀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배의 본질이 무너진 것입니다. 복음성가와 CCM의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는 릭 워렌 목사가 교회 음악에 대해서 갖고 있는 생각을 보시기 바랍니다.

“수년 전 … 나는 우리 교인들에게 설문조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예배에 온 모든 사람들에게 조그만 종이를 돌리고 자신들이 듣는 라디오 방송국의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이 조사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교인 중의 96%가 중도적인 성격을 띤 가요를 듣는다는 것이었다. … 그들에게 클래식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률이다. 그들은 강한 박자를 가진 밝고 기쁘고 즐거운 음악을 좋아하며 그들의 귀는 강한 베이스 리듬이 있는 음악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그런 점을 감안해서 교회 음악과 예배를 준비해야 한다.”(릭 워렌, 새들벡 교회 이야기, 315)

오늘날 교회에서 듣는 대부분의 복음성가는 이런 사상에서부터 온 음악입니다. 말씀이 예배의 중심이 아니라 교인들의 감정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악기를 고르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해결책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참된 구원의 경험으로 인도하는 말씀을 찾으십시오. 생명으로 인도하는 설교를 들으십시오. 진리가 아닌 것은 무엇이든지 버리십시오. 그것만이 살 길입니다.

 

◆교회 음악에 대한 10가지 제안◆ (Philosophy of Church Music–10 Guidelines, 1972)

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성도의 마음을 성 결하게 준비시켜주는 음악을 선택해야 한다.

2. 마음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사상과 생각을 고결한 분 위기로 인도하는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

3. 찬양 가사는 성서적 가르침과 조화되어야 한다.

4. 음악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성경이 전달하는 메시지 와 일치하는 음악을 사용하여,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이 섞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5. 청중의 감성을 인위적으로 흥분시키거나 몸을 흔들 게 만드는 음악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6.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되 인간의 교만이 드러나는 과다한 기교를 피해야 한다.

7. 베이스기타나 드럼과 같은 자극적인 악기에 의해서 분위기가 압도당해서는 안 된다.

8. 신체적, 정서적, 지적, 영적 요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균형 있게 만드는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

9. 찬양 인도자 또는 교회의 지도자는 품위 있고 경건 한 음악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 성경의 원칙을 타 협하지 말아야 한다.

10. 매주 음악과 찬양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설교와 성 경연구가 소홀히 여김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