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말씀하신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실제 상황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아니면 비유로써 이해해야 합니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지옥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심을 넣어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예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왜 하셨으며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서 하셨는가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서 말씀을 전하면, 일시적인 “회개(?)”가 생길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품성과 지옥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생기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커다란 상처를 가져다 줍니다.

 

비유란 무엇인가?

램덤 하우스 대학사전에는 비유의 정의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유란, 진리나 도덕적인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간단하고 풍유적인 이야기이다.” 우리는 성경의 저자들이 비유 가운데 사용하고 있는 상징과 실제의 상황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유가 어떤 형태로 되어 있든지 간에 그것은 어떤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비유가 수없이 많이 나오는데, 예를 들어, 사사기 9장 15절에 나오는 나무들이 가시나무에게 왕이 되도록 요구하는 이야기도 비유이고, 알곡과 가라지 비유도 유대인의 농사와 추수를 비유로 해서 세상 끝에 있을 보상과 형벌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비유인지 실제 상황인지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 줄거리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매우 호화롭게 사는 부자가 있었고, 그 부자의 대문 앞에 거지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죽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부자는 지옥에 떨어졌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지옥불에 떨어진 부자는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을 향해서 도와달라고 소리를 치면서 나사로를 시켜서 손가락에 물을 찍어서 내 혀에 떨어뜨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 16:24)

또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자기 집에 보내서 형제들에게 자기처럼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 16:27-28)

아브라함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깊고 큰 수렁이 있어서 부자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라고 대답했습니다(눅 16:31).

이것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천국과 지옥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실제 상황일까요?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비유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강론할 때 자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마 13:34). 왜 예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요? 왜냐하면 그 당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공격하고 책잡기 위해서 엿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기 원하는 사람들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종종 비유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실제 상황이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

첫 번째, 거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것이 실제라면, 의인이 죽으면 모두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될까요? 아브라함 한 사람 품에 어떻게 구원받은 수많은 의인들이 안길 수 있습니까? 이 말씀은 의인들이 천국에 가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될 것에 대한 비유입니다.

 

두 번째,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에는 지옥에 있는 부자가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을 보면서 물을 달라고 부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만약 이것이 실제 장면이라면, 지옥에 있는 악인들이 천국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소리를 쳐서 혀에 물을 떨어뜨려 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곧바로 천국과 지옥을 간다고 믿고 있는데, 만일 이 이야기가 실제 장면이라면, 사람이 죽는 순간 몸 전체, 즉 손가락과 혀와 갈증을 느끼는 몸을 가지고 천국과 지옥에 간다는 것이 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가 무덤 속에서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천국과 지옥으로 가게 된다는 희한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의 무덤은 주인을 잃어버린 채 비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시체가 무덤에 들어가면, 몸 자체가 천국이나 지옥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중국과 이집트의 고대 왕실의 무덤을 발굴해 보면 지금도 여전히 시체가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비유가 아니라 실제라면, 사람이 죽으면 흙이 되었다가 세상 끝날에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통하여 부활하게 된다는 성경의 부활신앙과도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실제 상황으로 해석하면 한두 가지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실제라면, 천국의 의인과 지옥의 악인은 날마다 서로 보면서 대화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정말 그렇다면, 천국은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천국에 간 부모들이 지옥에서 불타는 자녀들을 매일 보고 대화하면서 살아야 한다면, 그것이 천국이 될 수 있을까요? 날마다 천국에 있는 부모를 향해서 “아버지, 어머니, 저 너무나 뜨거워요. 목마르고 죽을 지경입니다. 제 혀에 물 한 방울이라도 떨어뜨려 주세요!”라고 소리친다면, 천국에 있는 부모의 심정이 어떨까요? 지옥에서 고통스럽게 불타고 있는 자녀들을 보면서 영원히 사는 것이 정말 기쁨과 행복이 될 수 있을까요? 성도 여러분,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비유입니다. 실제 상황이 아닙니다.

 

누구를 위해서 주신 말씀인가?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5장부터 여러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누가복음 16장에서는 처음부터 돈과 재물을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인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4절에는,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이 어떤 상황입니까? 예수께서 여러 가지 비유를 말씀하실 때,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부자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말씀을 주시는데, 그것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입니다. 예수께서는 돈과 재물을 사랑하던 탐욕적인 부자 바리새인들을 지적하기 위해서 부자는 지옥에 가고 거짓 나사로는 천국에 간다는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교회는 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도 잘 살고 죽어서도 천국에 갈 것이고, 가난한 자들은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도 고생을 하고 죽어서도 지옥에 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유대교회의 가르침을 잘 아시는 예수께서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시면서 이기적인 부자들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오히려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고, 부자는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학과 사고방식을 고쳐주시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를 문자 그대로, 실제적으로 해석하면 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

죽은 지 나흘된 나사로를 예수께서 부활시키셨을 때 큰 무리의 유대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부활의 증거인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요 12:9,10). 예수께서는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나사로의 부활을 부인하려고 하자, 나사로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가고 부자는 지옥에 간다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유대교회 지도자들을 책망하고 양심에 호소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강력한 교훈을 주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비유를 읽을 때 비유가 주는 교훈만 받고, 비유에 사용된 이야기는 버려야 합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느린 거북이 같은 사람도 부지런하고 성실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실제로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 봐, 거북이가 토끼보다 빠르지. 거북이는 토끼보다 빠른 동물이야.” 비유를 실제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면 이런 엉뚱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과 지옥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는 아직 지옥불이 없었을 때입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천 년이 지난 후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려올 텐데 그때 무덤에서 부활한 모든 악인들은 불태워져서 사라질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태웠던 유황불에 의해서 악인들이 모두 태워져서 재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옥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서로 마주 보면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과 악한 천사들과 악인들 그리고 죄를 불로 태우고 정결케 하신 다음, 지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창조하실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잃버버렸던 낙원이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진리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중세기 종교암흑시대 동안 사탄은 수많은 진리를 짓밟고 비틀어 놓았습니다. 왜 사탄은 빛을 가리고 진리를 무너뜨리려고 공격할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오해하고 보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입니다. 빛은 진리이고 진리는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와 빛이 흐려지고 어두워지면, 하나님께 대한 오해가 생기게 됩니다. 진리를 오해하면, 그 오해는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시키고 어두움 속에 가두어 놓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크게 왜곡시키는 사탄의 기만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영원히 불 속에서 고통당하게 한다”는 지옥설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죽음을 통해서 성경을 읽지 않으면 하나님을 오해하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 대한 오해를 풀 시간이 되었습니다. 영원한 고통의 지옥설을 믿으면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내주신 하나님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성령께서 이번 호에서 제시된 빛을 통해서 독자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