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없이 고결하게 사는 어떤 스님의 삶을 보면 불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란 신을 섬기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선택할 때 꼭 기억해야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신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불교의 석가모니는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석가모니는 한 번도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석가모니의 제자와 후예들이 그를 신으로 만든 것입니다. 불교의 윤회사상에는 창조가 없습니다. 윤회설은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을 말해주는 사상이 아닙니다. 윤회설은 이미 존재하는 생물들이 끝없이 순환된다고 믿을 뿐입니다.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종교도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끝나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불교를 믿으면, 나의 조상이 동물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원숭이나 미물들이 다음 생애에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에는 살생을 하지 않는 교리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 생애에는 원숭이나 동물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살생을 하다 자칫 잘못하면 죽은 내 친구나 가족을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이 사람의 조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불교 역시 진화론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처라는 이름의 의미는 “깨달은 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는 이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현인이지 이 세상의 기초를 놓은 신이 아닙니다. 부처는 왕족으로 태어났는데 그의 어렸을 때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입니다. 어느 날, 싯다르타는 병자와 죽어가는 사람, 지혜를 추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한 수행자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광경을 본 싯다르타는 인생에서 가장 까다로운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됩니다. “왜 우리는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고통을 피할 수 없는가? 지혜란 무엇인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싯타르타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궁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싯타르타가 찾은 결론을 불교도들은 “사성제”라고 부르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삶은 고통이다. 고통의 원인은 이기적인 욕망이다. 욕망이 그칠 때 고통도 그친다. 수행을 통해서 자아가 바뀌면 고통도 그친다.” 시대를 거쳐서 사람들은 부처의 심오한 통찰과 고통의 문제를 깨닫고자 했던 부처의 인내와 노력을 높이 평가해 왔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부처는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는 창조의 신이 아니기 때문에 지구가 어떻게 생기게 되었고 우주의 근원은 무엇이며 인간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죄와 고통과 죽음이 언제, 어떻게, 왜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부처가 씨름했던 주제는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였습니다. 부처는 사상가이고 현인이고 인류의 고통을 위해서 고민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처를 신으로 섬기고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맡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