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드와이트 무디 목사님이 한 소년에게 “기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니?”라고 물었습니다. 그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기도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감사하며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올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소년과 같은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기도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대답할까요? “하나님께 내 소원과 필요를 요청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한번은 어떤 집사님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번 달에 우리 아들이 꼭 일류기업 00회사 입사 시험에 합격하게 해주세요.” 그런데 아들이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그 집사님은 크게 시험받아서 목사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정말 하나님께서 계신 것이 맞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제가 드린 기도에 응답하지 않습니까?” 이런 기도는 하나님을 우리의 심부름꾼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기도가 나의 요청으로 채워져 있으면, 그런 기도는 거지가 부잣집 대문을 두드리면서 구걸하는 수준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기도는 방향이 정해진 소원을 간구하는 것인데, 그 방향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당신의 뜻대로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처분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병에 걸린 환자가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제 인생의 처음과 끝을 아시는 하나님이시여, 저는 하나님께서 제 인생의 최선을 위해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당신께 제 몸과 마음을 온전히 맡깁니다. 부디 당신의 선하신 뜻을 제 속에서 이루어 주옵소서.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로부터 영적 생명을 얻는 교제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예배드리고 찬송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죄와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영적 생명을 얻지 못하면 그것은 살아있는 교제가 아닙니다. 그런 기도는 형식적인 교제이고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도하는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교제는 허망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나는 성화되지 않을까? 왜 나는 죄를 이기지 못할까?”라고 고민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늘과 교제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얻는 기도를 드려야만 죄가 들어오지 못하게 마음의 문을 막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이유 :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 말을 조리있게 잘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말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말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주를 움직이는 권능의 손을 어떻게 인간의 말과 논리로 움직일 수 있습니까?

기도는 하나님의 팔을 꺾어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바꿀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구원과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바꾸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기도란 무엇일까요? 기도는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내 소원과 필요를 아뢸지라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통해서 얻는 가장 큰 유익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무엇을 얻거나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 그 다음부터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그 뜻대로 행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확신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도는 친한 친구와 대화하는 것처럼 드려야 합니다. 1700년대에 독일에 친첸도르프 백작이 있었는데, 그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친구처럼 교제했습니다. 사람들이 친첸도르프 백작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작님,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친첸도르프 백작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보다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나는 기도의 응답을 구하기보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가서 그분과 교제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큰 소원과 기대를 갖고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데,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풍요롭고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경험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간구하지 않은 것들까지 풍성하게 나눠주셨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응답을 얻게 되는 비결입니다.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진실한 친구관계가 맺어져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친구가 전혀 연락하지 않다가 돈을 꿀 때나 도움이 필요할 때만 연락하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얌체 같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그런 식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1년에 두어 번씩 부모를 방문하는데, 그들이 오는 이유가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유산상속 때문이라면, 부모 마음이 어떨까요? 참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순결한 마음, 아버지를 사모하는 마음,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해 움직이십니다. 일일이 요청하지 않고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최선의 것을 주십니다.

성경은 계속 기도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왜 기도하지 않을까요? 기도보다는 내가 노력하는 것이 더 빠르고 효과적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은 그렇다고 하지 않지만, 실제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탄원하는 것보다는 내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일을 해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기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내 노력으로 다 하고 나서 안되면 그때 주님께 가서 기도하겠다.’라는 생각은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 속에는 주님의 뜻과 계획이 없기 때문입니다. 독자 여러분, 우리는 기도에 대한 성경의 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가 미신과 의미 없는 주문이 되어버립니다.

 

기도와 의무의 관계

두 사람이 농사를 짓는데,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사람은 불신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씨를 뿌려놓은 다음에 밭에 가서 일하는 대신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불신자는 기도하지 않았지만 열심히 일했습니다. 누구의 농사가 더 잘 되었을까요? 불신자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기도는 우리의 의무와 노력을 대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노력하지 않고 하나님께 어떤 것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병이 생겼을 때 의사에게 가서 진찰받기를 원하실까요? 아니면 의사에게 가지 않고 기도를 통해서 치유되기를 원하실까요? 이런 질문은 한마디로 답변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태도를 요구하시며, 그러한 우리의 태도에 축복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노력하다가 안될 경우에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도는 비오는 날에만 기도하는 구두닦이 소년의 기도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기도와 의무는 병행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를 하나님께 여쭈어 보면서 우리의 의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무엇인지를 살피면서, 우리의 의무를 조심스럽게 수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대로 밀고 나가다가 스스로 탈진되어 포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심과 지성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사용해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분의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기도와 의무에 대한 문제를 예화를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소년이 물에 빠졌는데, 구명대가 근처 나무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음과 같은 4가지를 선택할수 있습니다.

 

  1. 소년을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2. 소년에게 구명대를 던져줄 수 있다.
  3. 물속으로 뛰어들어 본인이 직접 구해줄 수 있다.
  4.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이 4가지 중에서 어떤 방법을 택해야 할까요? 만일 그 사람이 수영을 잘할 수 있다면, 직접 물에 뛰어들어서 소년을 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수영에 자신이 없으면, 구명대를 던져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수영을 하든지 구명대를 던져주든지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바로 그런 태도가 기도와 의무가 잘 조화를 이룬 모습입니다. 그러나 만일 구명대를 던지지 않은 채 무릎을 끓고 소년을 구해달라는 기도를 드리기만 한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결정이고 광신적인 판단을 한 것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그런 선택을 하는 분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이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만약 구명대를 던져주었는데, 물에 빠진 사람이 구명대를 붙잡기를 거절한 뒤 “나는 하나님만 신뢰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기도만 한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은 상식과 판단력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의무를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의무를 행할 경우에도 마음과 정신이 하나님의 영의 주관하에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하늘의 지혜를 따라서 어떤 때는 의무를 행하고, 어떤 때는 기도를 하면서 아름다운 신앙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도와 의무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룬 모습입니다.

 

Do you know? 기도는 얼마나 오랫동안 해야 할까요?

기도는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집중력에 의해서 평가됩니다. 반드시 기도를 오래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날마다 3시간을 기도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러나 3시간을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절박함과 간절함으로 기도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기도를 오래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간절해서 도무지 중단할 수 없기 때문에 오래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의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너무나 바빠서 오랜 시간 기도하지 못하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시간의 길이에 대해서 염려하지 마시고, 간절함과 믿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설교하는 사람, 사람들의 신앙에 대하여 짐을 지고 있는 사람,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 이런 분들은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들은 하늘로부터 영성과 능력을 받아야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 싶지만, 너무나 지쳐서 기도할 수 없는 육체 노동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분들을 동정하시고 불쌍히 보십니다. 충분한 수면과 휴식을 포기하면서 장시간 기도해서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물론, 특별한 경우,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장시간 정신을 집중해서 기도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하는 자세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가급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좋으나. 건강과 형편에 따라서 서서 하거나 의자에 앉아서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심령과 마음의 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