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받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왜 구원을 어렵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구원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예수께서도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그분의 사랑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십니다. 부모의 간절한 소원은 자녀들 모두가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도 당신의 자녀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하늘에서 함께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자녀들을 ‘천국행’과 ‘지옥행’으로 미리 정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은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면, 왜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합니까? 왜 어떤 사람들은 멸망당하게 됩니까?”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 거절하고, 양심에 호소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그것에 저항합니다. 구원을 거절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대항해서 싸우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이끄셔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했으며(딛 2:11),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고 했습니다(히 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인데, 그것은 의롭게 하고 거룩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저항하고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기가 더 쉬운 이유

 “구원받기가 쉽습니까? 멸망받기가 쉽습니까?” 물론, 구원받기가 더 쉽습니다. 왜 구원이 쉬울까요?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오는 복음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큰 산을 무너뜨려서 도로를 만들 때 어떤 폭발물을 사용합니까?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합니다. 성경에는 ‘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이 정말 많이 나옵니다. 주로 어떤 장면에 나올까요? 복음을 설명할 때 ‘다이너마이트’ 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이 말씀에서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능력”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가 “두나미스”입니다. 두나미스는 영어로 다이너마이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인이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구원받는 “복음의 능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이너마이트” 라는 단어를 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는 무엇이든지 무너뜨리고 부서뜨리는 강력한 폭발물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심령마다 죄가 물리쳐지고 악한 마음이 깨지고, 이기적인 성격이 폭파되어 ‘변화’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 속에 “능력”이라는 단어가 그토록 많이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와 세속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 즉, 다이너마이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능력을 잃어버린 이유

그런데 만약 바울의 말이 사실이라면,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마음과 생애 속에서는 다이너마이트가 터져서 죄의 높은 산이 무너져내리고 이기심의 깊은 계곡이 평탄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불행히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무기력하고 나약합니다. 죄와 세속에 끌려다니고 패배와 좌절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복음 속에 다이너마이트가 없는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폭발하지 않는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가짜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바울은 말세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가짜 복음이 진짜처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복음을 잘못 받아들였기 때문에 능력은 없고 모양만 남게 된 것입니다. 콩을 심어야 콩이 나오는데, 팥을 심고 콩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마음에 심어야만 ‘변화’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믿기만 하면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도 구원받는다.”는 가르침, “믿기만 하면, 죄를 마음에 품고 있어도 은혜가 덮어 주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 이런 가르침들 속에는 복음의 능력인 ‘다이너마이트’가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죄를 붙잡고 살아가게 됩니다. 마음이 허전해집니다. 늘 정죄받는 느낌을 갖게 되고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불안과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서 이상한 성령 집회를 찾아다니고, 어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달래고 구원받았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 선한 일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조용한 시간이 되면 성령께서 오셔서 세상을 사랑하고 죄를 붙잡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공허한 심령을 이용해서 “쉽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의 덫을 기독교회 안에 뿌려 놓았습니다. 그 덫에 걸리면 마음과 생애가 변화될 수 없습니다.

 

누가 더 강합니까? 

사탄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보다 힘이 세고 능력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기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마치 사탄이 하나님보다 강한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더라도 죄를 버릴 수 없고 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사탄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처분과 은혜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사탄이 하나님보다 강하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값없이 구원받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어떤 것인지 알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의의 종으로 살게 됩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3~16) 

독자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탄보다 훨씬 강하십니다. 사탄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면, 사탄은 꼼짝 못하고 벌벌 떨면서 피합니다. 왜 사탄이 예수님을 피할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탄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말 영광스런 진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탄보다 강하다는 진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강하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만족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바울은 하나님의 강하심을 믿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 가난하고 아프고 고통스러운데 어떻게 만족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강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강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컨트롤하고 계시며, 언제든지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탄이 하나님보다 약하지만, 인간보다는 훨씬 강합니다.” 물론, 사탄도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이 사람들에게 역사해서 그들을 자기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사탄이 인간보다 강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내 자신의 힘’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마음과 생애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다면 누구도 우리를 실망시키고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온 마음을 다해서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의 마음과 생애 속에서 사탄은 쫓겨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탄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훨씬 강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세력보다 은혜의 능력이 훨씬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쉽고 가벼운 짐

하나님께서 정말 사탄보다 훨씬 강하다면, 구원받는 것이 멸망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진리는 매우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걷는 자아 부정과 희생의 길은 매우 힘든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것이 쉽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성경 말씀과 계명이 요구하는 의무와 규칙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불행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전혀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짐이 쉽고 가벼울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은 너무 무겁고 힘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런 사상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무거운 멍에입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것이 너무 무거운 짐인가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너무 무거운 짐인가요? 부모를 공경하고 거짓말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는 것이 너무 무거운 짐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면 그것은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거짓말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은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성경 말씀이 짐처럼 느껴지고 무거운 멍에로 느껴지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이 “지나친 부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치르신 피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알면 그렇게 느낄 수 없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께서는 멍에가 무거워지고 짐이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를 또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핍박하던 사울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양이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면 목자는 지팡이 끝에 있는 가시채로 양을 찌르면서 올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그런 찌름을 받을 때, 양이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쉽습니다. 저항하지 않으면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어떤 양들은 목자의 가시채를 뒷발질합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고 싶지 않다고 저항하는 것입니다. 따르고 싶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은 정말 무거운 짐입니다. 죄를 붙잡고 있는 사람이 가는 길은 양심의 가책으로 힘겹지만, 순종하는 자의 길에는 마음의 평화와 확신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탄의 능력이 지나치게 강조되었고 과장되어 왔습니다. 사탄이 하나님보다 강하다는 거짓말에 세뇌당해 왔습니다. 물론, 죄가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선을 행하기보다 악을 행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다스리는 곳에서는 죄를 범하는 것보다 의를 행하기가 훨씬 더 쉽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능력을 바라보지 않고 사탄의 권세를 바라보면서 움츠러 들어야 합니까? 사탄의 권세를 과장하면 “사탄 때문에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핑계가 생깁니다. 그래서 사탄의 권세를 과장하는 사람들은 “쉬운 구원”을 찾아가게 됩니다. “죄와 세상을 포기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탄의 미혹에 빠지게 됩니다. “한 번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적당히 살아도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도전  

사도 바울은 사탄의 권위에 도전하기를 망서리지 않았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0~21). 바울은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서 왕으로 군림할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을 굳게 붙잡고 있으면, 은혜가 왕처럼 군림해서 우리 마음과 삶을 의의 길로 인도합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물러가는 것처럼, 은혜가 왕 노릇 하면 사탄이 쫓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을때, 죄를 붙잡고 있을 때, 거짓 복음을 따라가고 있을 때,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고 있을 때, 그런 때는 죄가 왕 노릇 하게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 하면 이런 삶을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1~14). 우리가 은혜의 왕국에 살면, 우리의 삶에 변화가 생깁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이고,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면, 우리 속에 놀라운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물론,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고 허물이 많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안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어떤 것인지 알면 은혜를 배반할 수 없게 됩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은혜를 저버리는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배은망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십자가의 사랑을 안다고 하면서, 은혜를 짓밟고 마음대로 살아가면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아는 사람과 은혜를 모르는 사람 사이에는 살아가는 모습에서 큰 차이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은 그 마음과 생애에서 은혜가 왕 노릇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은혜가 죄의 세력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능력(Power)으로 일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약속이고 보증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사탄은 물론 강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보다 강하고, 가장 힘이 센 삼손보다 강하며, 가장 완전했던 아담보다도 강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예수께서는 “사탄을 이기시고” 사탄의 손에서 포로된 자를 구해내시는 “더 강한 자”이십니다. 이 진리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가 됩니까? 우리의 대장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멸망시키려고하는 자보다 더 강하시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원받는 것이 멸망받는 것보다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에게나 구원받는 것이 멸망받는 것보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되고 이기적인 본성을 갖고 태어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려고 애쓰는 것처럼 힘든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이 쉬워질까요? 거듭나야 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5~7).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감사와 충성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높이 받들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순종의 길이 즐겁고 기쁘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순종하는 것은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열매일 경우에만 힘들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경험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시편 기자의 말에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시 119:127). 하나님의 계명을 금이나 돈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모든 일들로부터 돌아서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할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원은 멸망보다 훨씬 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