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젊은 목회자에게 보내는 호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젊은 목사들이시여, 저는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바꾸어 보려고 하고, 새로운 것들을 시작하려고 애쓰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예배 분위기를 밝게 하기 위한 여러분의 고민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길 때 인간의 감정과 세상의 트랜드로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는 여러분의 뼈와 몸과 아이디어도 노쇠해서 쓸모없게 됩니다. 그때가 되도 후회하지 않을 충성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십시요. 여러분은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이 진리를 경험해야 합니다. 더 깊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제 신학교를 갓 졸업한 여러분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만질 수 있습니까? 인생의 희로애락이 무엇인지 모르는 젊은이가 어떻게 인생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신학교를 졸업하고 안수를 받았다고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말씀에 젖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이 아닌 “내 것”이 목회와 설교를 통해서 흘러나가게 될 것입니다. 목회는 방법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재치 있고 말 잘하는 설교를 버리고 듣는 자의 심령을 주 앞에 굴복시키는 말씀을 준비해야 합니다. 설교 준비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된 것은 아무리 멋지게 보여도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 모두 불에 타서 없어질 것입니다.

청년 사역의 목표가 아이들을 교회 안에 붙잡아 두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청년 세대는 인터넷과 트랜드에 젖어 있는 세대입니다. 그들은 숨 가쁘게 뛰어도 따라가기 힘든 경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회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과 무관심이 청년들의 정서 속에 깊이 깔려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정서와 마음을 뚫고 들어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들을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요? 반드시 말씀을 높이 들어 올려야 합니다! 청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참담한 형편 가운데 있는지 알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청년들도 구원받아야 합니다! 부모와 장년에게는 거룩함을 요구하면서, 왜 청년 예배는 감정과 엔터테인먼트로 끌어가려고 합니까?

젊은 목회자들이시여, 하나님께서 매 주일 청년들을 여러분 앞에 앉혀 놓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께 무엇을 기대하실까요? 하늘의 말씀을 나눠 주기를 기대하십니다. 청년들의 친구가 되어 주고 사랑으로 보듬어 주어야 하지만, 진리를 소홀히 여기고 가리운 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채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여러분은 방법과 수단을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하나로 하늘에 해와 별을 지으시고 땅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인간의 방법과 수단은 너무나 초라하고 무력한 것입니다.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진리가 청년들의 마음에 고민을 줄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설교가 재미있는 바이블 스토리가 되어 버리면 안 됩니다. 마지막 날에 그대들이 왜 그런 설교를 했고 왜 예배를 그렇게 이끌어 갔는지 하나님께 대답해야 합니다.

 

겉과 속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겉모습을 가지고 사람을 정죄하면 안 됩니다.” 물론입니다. 우리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은 겉모습과 속마음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겉모습과 속마음이 그리스도인다워야 합니다. 겉과 속이 달라서는 안 됩니다. 입과 코에 구멍을 뚫고 팔과 목에 문신을 그리는 것이 신앙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보고 듣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는 상관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그런 생각과 믿음을 인정해 주는 설교를 하면 마음이 관대하고 사랑이 많은 목사로 존경받습니다. 지금 기독교회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까? 영혼의 갈급함, 죄에 대한 애통, 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참된 행복, 진리를 위한 희생과 헌신, 이런 특성들이 성도들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겉모습은 속마음과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8). 겉은 속을 나타냅니다. 속마음이 깨끗하면 겉모습도 세상을 따라가지 않게 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속에서 일어난 변화가 겉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겉모습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것이 겉 열매로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복음적인 설교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심장도, 손과 발도, 위장도, 입술도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가 하는 말, 우리가 가는 곳, 우리가 사는 물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을 드러내기 위해서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교파적으로 볼 때 이런 사상에 가장 충실했던 사람들은 청교도입니다. 그들은 정말 그들이 믿는 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청교도들에게 그런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유럽에서 그들이 누리던 기득권과 재산을 버리고 전염병이 들끓고 황량한 신대륙 미국으로 왔던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과 충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후배 목회자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께 사로잡혀서 그분께 모든 것을 바치고 싶다면, 제자들이 전했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매료되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모든 것을 바치고 헌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 심령은 신학이라는 학위를 받는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는 사람에게 새겨지는 회개와 감사와 충성의 심령입니다. 그것은 교파와 교단을 초월한 하늘의 마음입니다.

 

설교와 손해 

우리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린다는 것은 손해를 뜻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엄청난 손실을 의미합니다. 가장 큰 손실은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 뜻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억지로 포기하고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더 좋은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마다 너무나 죄송하고 감사하고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분의 가슴에 못질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희생을 무릅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당할 때, 우리는 그분의 마음과 생애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때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싶다는 소원을 갖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데에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에 지불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그리스도께 갈 수 없도록 사탄이 이 세상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대가를 치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손해를 보고 대가를 지불하는 과정 속에서 더 깊은 진리를 만나게 될 것이고 거룩함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최고의 동기  

매일 아침 일어나 우리 자신을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산 제사를 드리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습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우리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릴 수 있는 위대한 동기가 어디로부터 옵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산 제사를 드리게 된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가 모든 신앙과 헌신과 희생의 동기가 됩니다.

설교를 할 때 우리는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하지 말라”는 계명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능력 있게 말씀을 전할 수 없습니다. 교인들에게 “어떻게(How)”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하고, 이기심을 버리라고 설교하면, 신실한 그리도인이라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어디서 얻을 수 있나요? 저는 결심을 해도 자꾸 쓰러집니다. 제게 승리의 비결을 알려주세요!” 이런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주는 것이 목사의 임무입니다.

 

구원으로 나가는 길  

구원은 하나님을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를 아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충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가 의를 향한 욕망을 자극하게 됩니다. 성령의 거룩한 충동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의를 사모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뜻과 계명이 무거운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펼쳐 보여 주시면, 심령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오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사람의 의지에 영향을 주어서 죄가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의 의지 자체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지만, 사람의 의지가 성령께 붙잡히게 되면 그런 의지는 죄를 거절하고 의를 붙잡게 됩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1). 은혜 아래 거하는 사람은 주의 거룩함을 따라가게 됩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4~15). 죄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사람의 심령 속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거룩한 속성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무신론자처럼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심령에 거룩한 충동을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윤리에 대해서 설교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설교해야 합니다. 도덕에 대해서 설교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 설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인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을 바라보며 살게 됩니다. 내 속에 있는 것을 다듬고 고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죄인의 심령과 삶에 어떤 역사를 이룰 수 있는지를 설교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사의 임무입니다.

 

은혜와 설교   

억만장자인 빌 게이츠에게 맛있는 샌드위치 수십 개를 주어도 그는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에게 샌드위치 반 조각을 주면 어떨까요? 그 아이는 제 손에 입을 맞추고 온 동네를 다니면서 저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그것을 받는 자에 따라서 크게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무엇인지 알려면, 우리가 얼마나 희망이 없는 존재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죗되고 교만하며 이기적인 존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향해서 손을 뻗게 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으로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그리스도인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희생을 말하지만 마음에 감동도 없고 죄송함도 없게 됩니다.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빚을 조금 졌지만 곧 갚겠습니다!”라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 눈에 순수한 복음과 헌신과 희생은 맹목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비춰집니다. 그래서 은혜를 모르는 사람의 설교는 메마르고 무의미한 강론에 그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어떤 무게의 희생이 치루어졌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치룬 희생을 정말 안다면, 우리 마음은 무너지게 됩니다.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하나님,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대적하는 첫 번째 무기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무기는 힘들고 곤궁한 자들을 껴안고 살아가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무기는 지치지 않는 기도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수단과 방법을 찾는 사람들은 길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에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신앙  

신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목회할 때 저는 열정적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때 나이 지긋한 장로님이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혼자 있을 수 있습니까?” 저는 그 장로님의 말을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경건한 설교를 하면 따돌림을 당하고 결국 혼자 남게 될텐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러나 장로님의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이 세상 풍습을 따라 살아갈 때, 목사님은 혼자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말씀을 무시할 때, 목사님 혼자 말씀을 붙잡고 있을 수 있습니까?”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짜 신앙은 혼자 있을 수 있는가로 나타나게 됩니다. 혼자 있는 신앙이란, 다른 사람들이 잠을 잘 때 혼자 일어나 기도하는 신앙입니다. 호텔방에 혼자 있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신앙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원칙을 지키고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이 혼자 있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기도가 필사적인 이유  

기독교 역사상 가장 많은 교회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가장 많은 전략과 아이디어로 선교하는 시대이지만, 목사는 전략과 아이디어에 매달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지식이나 지성에 의지해서 일하지 말고 온전히 성령에 의지해서 일해야 합니다.

믿음은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하면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부자를 의지하게 되고 돈에 굴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은 많이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기 원하는 목사는 필사적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 목회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설교와 삶을 통해서 세상이 줄 수 없는 감동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부서짐과 설교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의해서 부서진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를 깨뜨리십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울 때까지 우리를 깨뜨리십니다. 하나님의 깨뜨림이 싫은 사람들은 진리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깨뜨림을 받은 사람은 붙잡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자신을 비우게 됩니다. 인기와 평판과 자존심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그릇이 됩니다. 깨뜨림 받지 않은 사람이 갖고 있는 학위와 재능과 지성은 아무 쓸모없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그런 것들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목회를 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주석을 살필지라도 하나님께 깨어짐을 받지 않은 사람은 쓸모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정통이라고 인정해 주어도 하나님에 의해서 부서지지 않은 목사는 참된 목자가 아닙니다. 부서지지 않은 사람은 재능이 많으면 많을수록, 설교를 잘하면 잘할수록 자신을 높이게 됩니다. 양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대신에 자신에게 인도합니다.

 

매달림과 설교  

사랑하는 젊은 목사들이시여, 우리는 날마다 주 앞에 나가 마음과 생애를 보여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주님의 생애와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시계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신발도 어디에 벗어 놓았는지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그런 연약함 때문에 날마다 주님께 매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집요하고 끈질기게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영적 생애의 승패는 내 의지의 견고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의지와 매달림은 다른 것입니다. 칠흙같이 캄캄한 밤에 바다에 홀로 떨어진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요. 그 사람은 수영할 줄 모르기 때문에 허우적거리면서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무엇인가 붙잡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잡을 수 있는 것을 찾고 또 찾을 것입니다. 그것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지 의지가 강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자신의 연약함을 느끼는 사람이 하나님께 매달리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잡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 그것이 날마다 하나님을 찾는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잡는다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승리하는 생애를 살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목사님, 그것은 신앙을 너무나 절박한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청년 목회자들이시여, 우리는 정말 절박한 존재입니다. 단 한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손을 놓으면 순식간에 죄를 범하고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눈을 돌리는 순간 나를 높이고 교만해지는 존재입니다. 얼마나 절박한 상황입니까?

적당하게 주님을 찾았던 사람들 중 누가 좁은 길을 끝까지 걸었습니까? 적당하게 진리를 붙잡고 있던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이 끝까지 충성했습니까?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분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런 설교자에게 해야 할 말과 강조해야 할 메시지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무시하지 마십시요.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요? 새벽에 자신의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사람은 성령을 받습니다. 이른 아침 시간에 기도하고 말씀을 펼쳐서 묵상하는 사람은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아침 시간에 받은 말씀을 성령의 능력으로 전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고, 힘들고 어려운 자들을 품고 사는 설교자가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종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설교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와 세상을 “큰 성 바벨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의 설교는 예수께서 재강림하기 전에 바벨론에 갇혀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내는 외침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오실 때 바벨론은 완전히 무너지고 멸망당할 것입니다. 바벨론의 복음과 죄 가운데 남아 있기로 선택한 사람은 모두 칠 재앙을 받고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2~4).

이 세상은 너무나 악하고 어두운 바벨론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우상을 품고 악을 토해 내고 있습니다. 사탄이 주의 종들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굶주린 사자처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는 결코 악의 세력과 대항해서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겸손과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휘두르면서 전진하는 목회자는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막고 있는 모든 산이 무너지고 바다에 던져질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전진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와 우리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

 

4부, 목사님, 어떤 설교를 하십니까?

조그만 시골 교회에 젊은 목회자가 부임했습니다. 80세가 넘으신 장로님이 새로 부임한 목사님을 집으로 초청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이곳에서 목회하시는 동안 교인들에게 은혜스럽고 감동적인 설교만 한다면, 교인들은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설교자는 성도들에게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하고, 성도들은 어떤 복음을 받아야 할까요? 몇 해 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남침례교회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세미나 내용을 4부와 5부에서 다루었습니다. 이 기사를 통해서 성령께서 설교하는 사람과 설교 듣는 사람 모두에게 하늘의 빛을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편집실>

사랑하는 목회자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 절망을 느끼십니까? 제가 목사로서 절망을 느낄 때는 매주 설교하고 말씀을 전하는데 교인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입니다. 설교를 듣는 교인들의 마음과 생애가 변화되지 않을 때입니다. 설교의 목적은 듣는 자의 마음과 생애를 거룩한 삶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인데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설교를 수년 동안 하게 되면 설교자에게 고민과 좌절이 밀려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왜 성령께서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역사하지 못하시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씀 속에서 설교의 목적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치명적인 설교 

설교는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설교가 비성서적이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마지막 날에 하늘의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설교는 듣는 사람들에게도 무거운 책임을 요구합니다. 성령께서 설교를 듣는 사람의 양심에 “이것이 진리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호소하셨던 말씀에 대해서는 큰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께서 주시는 빛을 거절하는 사람들도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단지 교리나 성경 지식을 늘어놓는 데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바울처럼 온 마음을 다해서 진리에 굴복하도록 호소해야 합니다. 설교에는 설교자의 마음과 생애가 실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남의 이야기하듯이 해서는 안됩니다. 옛 전설을 이야기하듯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설교하면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생애를 바치지 않게 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진짜를 가짜처럼 설교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도 심각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멋진 주석을 나열하고 마치는 설교는 하나님을 높이는 대신 설교자를 높이게 됩니다. 그런 설교는 “내가 이런 해석을 발견했습니다.”라는 주목을 받고 끝나게 됩니다. 목회자 여러분, 우리는 주석이나 교리의 전달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할 때, 성도들이 우리에게 이런 모습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목회자가 설교하면 교인들은 설교를 통해서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교인들 사이에서 죄와 세상을 버리는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감리교회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가 영국의 탄광촌에서 설교했을 때 마을 술집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설교자는 그런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면서 말씀을 준비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1년에 100번 이상 교인들에게 설교하는데,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대로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은 그대로 불순종하면서 살아간다면, 설교자는 주 앞에 나가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제 설교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왜 성령께서 제 설교에 역사하지 못하시나요? 제가 아직 주 앞에 드리지 않고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가르쳐 주시옵소서.”

 

멍에가 되는 설교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설교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그런 설교는 교인들에게 멍에가 됩니다. “거룩하게 살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해야 거룩한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가?”를 설명해 주지 않으면 그것은 신자들에게 큰 짐을 지우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무슨 일을 하실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올라가야 할 목표와 표준만을 제시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율법적 신앙을 심어 주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말씀과 표준대로 살아갈 수 있는지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교인들의 고민에 대답해 주어야 합니다.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사람들은 말씀 사이로 빠져나가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분명하게 전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전하는 것이 “내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하게 전할 수 있는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섞인 설교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의견”을 섞어서 설교합니다. “순종하면 좋지만,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므로 너무 애쓰지 마세요.”라는 인상을 주는 설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나머지는 예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십니다. 더 이상 우리가 할 것은 없습니다.”라는 분위기의 설교도 있습니다. 마치 크게 인심을 쓰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디스카운트시켜서 나눠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10을 말하고 있는데, 6이나 7로 할인해서 전하는 설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현대인들은 그런 설교자들을 “멋진 목사님”으로 치켜세우고, 세속적인 양들은 그런 설교를 통해서 양심을 위로하고 죄책감을 해결합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제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교인들의 양심을 불편하게 만들고 동료 목사들이 거북해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믿음으로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보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서 있는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마른 뼈에 생명을 불어넣는 설교 

말세가 되면서 세상은 물질의 풍요와 세속에 휩쓸려 떠내려 갔고 거룩함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말세의 설교자는 순종과 거룩한 삶에 대한 주제를 정확하게 다뤄야 합니다. 거룩함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그들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이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재강림을 위해서 성도들을 준비시킬 수 없습니다.

살아 있지만 죽음의 냄새가 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죽음의 길목에서도 생명의 향기를 진하게 풍기고 있습니다. 고난 속에 있는 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영적으로 죽어 가는 자들에게는 사망의 길에서 돌아서라는 호소가 매 주일 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동료 목사 여러분, 우리는 심리상담사도 아니고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레이터도 아니며 웃음을 선사하는 웃음치료사도 아닙니다. 우리는 해박한 지식을 나누어 주는 신학 교수도 아닙니다. 우리는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현대 기독교회의 모습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를 채우고 있는 죽은 뼈들을 일으키라는 하늘의 부르심이 우리의 어깨 위에 놓여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겔 37:1~2). 기독교회라는 골짜기에 마른 뼈가 산같이 쌓여 있습니다. 죽은 지 이미 오래된 마른 뼈들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들을 살리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설교해야 할까요? 그들이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들어가 하늘의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설교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설교와 산 제사  

사도 바울의 설교는 호소와 탄원의 설교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설교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 붙잡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하면서 교인들을 죄 가운데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교인들이 예수님과 세상을 함께 붙잡고 있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스포츠와 연예 이야기를 합니다. 지난밤에 본 연속극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구원에 대한 설교를 들었어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수들의 인기 순위 때문에 흥분합니다. 우리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런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사랑하는 목회자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설교해야 할까요? 우리는 설교 단상에 올라갈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마음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할까요? 어떤 태도로 전해야 할까요?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눈을 보지 않고 설교해 왔습니다.

저는 30년간 사역자로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동안 저에게도 멋진 차, 아름다운 집, 맛있는 음식, 매혹적인 여자 그리고 나를 높이고 자아를 만족시켜 주는 것들에 대한 유혹이 그치지 않고 찾아왔습니다. 한 가지 유혹이 지나가면 또 다른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설교에서 능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바치지 않으면 사탄의 공격을 받아서 설교가 무너지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호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바치라고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드리고 싶은 아들, 아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주고 싶은 아버지, 이런 관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몇가지 행동을 뜯어 고치거나 몇가지 습관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말과 행동과 설교를 통해서 신자들이 회개하게 되고 성령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심장 전체를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잡혀서 사용되기를 소원합니다. 완전한 자유는 완전한 굴복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이 날마다 드리는 저의 기도입니다. 제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전달되어서 성령께서 성도들의 마음과 생애 속에 크게 역사할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동료 목회자 여러분, 하나님이 정말 우주를 창조하신 여호와시라면 우리는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더 이상 두 주인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기면, 내 자신이 먼저 그 사실을 압니다. 내 아내와 가족이 그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내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그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성령께서 설교를 통해서 교인들의 마음을 파고들지 못하게 되고 예배는 죽은 형식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과 삶 때문에 더럽혀지게 됩니다. 목회자는 신자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설교해야 합니다. 더 이상 세상을 위해서 살지 말고,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도 멈춰야 한다고 설교해야 합니다. 진정 하나님의 희생과 죽음을 안다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의 도리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들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다수가 되면, 세상은 교회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심령이 곤고한 사람들, 세상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는 성경절을 잘 정돈해서 발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단순히 성경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진리를 멋진 문장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교인들이 좋아하는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절실한 것입니다. 설교는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설교는 지옥에 떨어지려는 영혼을 붙잡아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설교는 사망의 구덩이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등에 업고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는 죽어 가는 영혼의 입에 생명수를 넣어 주는 것입니다. 설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호소입니다.

설교는 죄와 세상 쾌락에 빠져서 잠자고 있는 사람을 흔들어 깨우는 것입니다. 설교는 구원과 멸망 사이에서 고민하는 영혼이 생명으로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진리 앞에서 갈팡질망하는 사람의 마음을 붙잡아 주는 것입니다. 설교는 예수께 나가 죄를 버리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완전한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설교자는 반쪽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세상을 포기하지 않은 설교자는 복음을 “내 수준”에 맞춰서 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한 설교자는 진리를 반대하고 성도를 핍박하게 됩니다. “이제 결정하라”는 호소가 없는 설교는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교인들을 깊이 잠자게 만듭니다.

나쁜 설교는 교인들로부터 그리스도의 재강림을 위한 준비를 빼앗아 갑니다. 나쁜 설교는 성도들로 하여금 알곡의 경험을 잃어버리게 하고 가라지의 경험 속에서 만족하게 합니다. 나쁜 설교는 성도들의 흰옷과 구원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듣는 사람은 말씀을 전하는 자의 영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

 

3부, 단 한 번의 경험으로 구원받습니까?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너무나 쉽게 성도들에게 구원을 선언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단 한번의 결정으로 “당신은 이제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한번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가르침이 밀물처럼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영접하고 교회 문턱을 갓 넘어온 사람도 “나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마음에 품고 있는 죄를 해결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구원이 확정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의 이런 모습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구원의 경험을 식물의 성장에 비유해서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막 4:28, 29). 성경은 결코 사람이 갑자기 변화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씨를 땅에 묻어야 하는데 씨앗은 그곳에서 썩어서 죽는 경험을 먼저 해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싹이 나오는데 그 이후에도 시간과 절차에 따라서 이삭이 나오고 서서히 자라게 되고, 열매가 맺기까지 필요한 양분과 경험을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인의 변화와 구원입니다. 세속적이고 이기적으로 살던 사람이 부흥회에 참석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갑자기 변화되어 은사를 받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없습니다. 먼저 진리를 깨달아 마음에 새기는 경험이 있어야 하고, 성령께서 깨달은 진리에 순종하는 경험으로 인도하셔야만 ‘변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성경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변화의 경험을 부인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도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변화 경험을 설명하셨습니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1~33). 겨자씨같이 작은 존재가 먼저 나물로 성장하는 단계가 필요하고 그다음에 새들이 날아와 머물 수 있는 나무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사람이 급진적으로 하루아침에 변화될 수 없음을 증거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급진적인 변화와 급진적인 열매에 대해 동의하지 않습니다.

참된 변화의 경험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경험도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으로 불타는 심령을 받은 루터의 변화는 단순히 그의 스승 스타우비츠가 전해 준 한마디 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수도원 안에서 홀로 사색과 기도하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으며 진리를 찾아서 방황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양심의 가책과 고통 속에서 방황하던 루터의 심령 속에 떨어진 진리의 씨가 자라면서 감사와 충성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로 죄가 사함 받는다는 진리를 깨달은 후에 몇년 동안 베드퍼드 감옥에서 외롭게 지내는 시련의 과정을 통과했습니다. 존 번연의 심령 속에 떨어진 진리의 씨앗은 후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마 9:29). 무엇을 믿는가에 따라서 생애가 꼴 지워집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생애 속에 진리를 심어야 변화됩니다. 참된 영적 경험은 진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절규하고 기도하고 매달리면서 눈물을 흘려도 그런 경험이 진리와 상관없는 것이라면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는 감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부흥회나 기도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다가 사탄의 미혹에 빠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와 개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의 진리 위에 굳게 서는 일이 필요합니다. 참된 부흥은 이성과 양심이 진리를 심사숙고한 이후에만 올 수 있습니다. 진리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감정은 하나님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부흥회는 죄를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구원의 확신을 느낄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절규에 가까운 통성 기도, 시끄러운 음악, 가수의 콘서트 같은 분위기로 이끌어 가는 예배와 부흥회에서 사람들은 황홀한 무아지경을 경험하게 됩니다. 참된 거듭남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르고 성경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에서 얻은 감정적 환희를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되어야 할 신앙이 빗나가고 있습니다. 사회심리학자들은 부흥회를 찾는 사람들은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고 감정적 기쁨과 행복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예배와 부흥회를 이용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넓은 길을 선택하는 이유  

내려가기는 쉽게 생각되고 올라가기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지옥으로 내려가는 길에도 양심의 가책이 있고 후회와 불행이 있기 때문에 내려가는 길도 결코 쉽다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길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고, 성경 말씀 속에서 확신을 얻으며, 죄로부터 풀려나는 자유가 있고, 간간히 쉬어 갈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도성으로 가는 길에도 육체의 끊임없는 방해가 있고 세상의 유혹이 있기 때문에 올라가는 길도 쉽다고 말할 수 없는 길입니다. 두 길 모두 어려운 길이지만,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내려가는 길을 선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왜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을 선택할까요? 사탄의 유혹과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육체의 충동과 싸우는 영적 투쟁이 너무나 길고 힘들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유혹과 충동을 거절하는 삶은 재미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투쟁하기를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투쟁이 힘들고 반복되는 패배가 싫기 때문에 투쟁 자체를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양심을 책망하는 것이 싫고, 달콤한 유혹에 저항하고 싶지 않으며, 육체의 욕심에 맞서서 싸우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쉬운 구원”을 찾아서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다니게 됩니다.

세상이 바쁘고 스트레스가 심해지면서 사람들은 단번에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기 원합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진리를 명상하기 보다는 쉽게 구원의 경험을 갖기 원합니다. 사람들의 그런 심리를 가장 잘 만족시켜 주는 곳이 기도원과 부흥회입니다. 죄에 대한 책망도 없고 양심의 가책도 없으며 계명도 없고 순종도 없으며 절제와 인내도 없는 집회가 많은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구원과 행복과 만족을 느끼지만 그런 곳은 내려가는 길로 연결되어 있는 넓은 길입니다. 육체와 유혹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넓은 길입니다. 존 번연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가끔 개와 고양이의 신세를 부러워했다. 왜냐하면 개나 고양이에게는 사람이 겪어야 할 선과 악의 싸움과 투쟁이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그리스도인 존 번연 역시 자아와의 투쟁이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구원과 평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유혹과 싸우는 전쟁을 하는 대신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평안은 죄와 싸우는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를 만나면, 우리는 거기서 구원과 평안과 승리를 얻게 됩니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3~24)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인데, 그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걷기 원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런 이유 저런 미혹에 빠져서 그 길로 들어서지 못하게 됩니다.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어도 영생할 수 있다.”고 미혹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미혹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넓고 평탄한 길을 선택할 것이며 오직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좁은 길은 감정적인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깊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 길 위에는 진리가 있고 평안이 있으며 은은한 성령의 인정하심이 있기 때문에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심령의 참된 부흥을 경험한 사람은 주저 없이 좁은 길을 걷기로 선택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20~21). ■

(성서적이고 순수한 복음을 원하는 분들은 <마지막 사명> 2호를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부, 구원받는 것이 어렵습니까?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받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왜 구원을 어렵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구원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예수께서도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그분의 사랑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십니다. 부모의 간절한 소원은 자녀들 모두가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도 당신의 자녀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하늘에서 함께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자녀들을 ‘천국행’과 ‘지옥행’으로 미리 정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은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면, 왜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합니까? 왜 어떤 사람들은 멸망당하게 됩니까?”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 거절하고, 양심에 호소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그것에 저항합니다. 구원을 거절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대항해서 싸우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이끄셔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했으며(딛 2:11),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고 했습니다(히 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인데, 그것은 의롭게 하고 거룩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저항하고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기가 더 쉬운 이유

 “구원받기가 쉽습니까? 멸망받기가 쉽습니까?” 물론, 구원받기가 더 쉽습니다. 왜 구원이 쉬울까요?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오는 복음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큰 산을 무너뜨려서 도로를 만들 때 어떤 폭발물을 사용합니까?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합니다. 성경에는 ‘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이 정말 많이 나옵니다. 주로 어떤 장면에 나올까요? 복음을 설명할 때 ‘다이너마이트’ 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이 말씀에서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능력”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가 “두나미스”입니다. 두나미스는 영어로 다이너마이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인이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구원받는 “복음의 능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이너마이트” 라는 단어를 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는 무엇이든지 무너뜨리고 부서뜨리는 강력한 폭발물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심령마다 죄가 물리쳐지고 악한 마음이 깨지고, 이기적인 성격이 폭파되어 ‘변화’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 속에 “능력”이라는 단어가 그토록 많이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와 세속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 즉, 다이너마이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능력을 잃어버린 이유

그런데 만약 바울의 말이 사실이라면,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마음과 생애 속에서는 다이너마이트가 터져서 죄의 높은 산이 무너져내리고 이기심의 깊은 계곡이 평탄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불행히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무기력하고 나약합니다. 죄와 세속에 끌려다니고 패배와 좌절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복음 속에 다이너마이트가 없는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폭발하지 않는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가짜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바울은 말세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가짜 복음이 진짜처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복음을 잘못 받아들였기 때문에 능력은 없고 모양만 남게 된 것입니다. 콩을 심어야 콩이 나오는데, 팥을 심고 콩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마음에 심어야만 ‘변화’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믿기만 하면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도 구원받는다.”는 가르침, “믿기만 하면, 죄를 마음에 품고 있어도 은혜가 덮어 주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 이런 가르침들 속에는 복음의 능력인 ‘다이너마이트’가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죄를 붙잡고 살아가게 됩니다. 마음이 허전해집니다. 늘 정죄받는 느낌을 갖게 되고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불안과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서 이상한 성령 집회를 찾아다니고, 어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달래고 구원받았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 선한 일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조용한 시간이 되면 성령께서 오셔서 세상을 사랑하고 죄를 붙잡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공허한 심령을 이용해서 “쉽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의 덫을 기독교회 안에 뿌려 놓았습니다. 그 덫에 걸리면 마음과 생애가 변화될 수 없습니다.

 

누가 더 강합니까? 

사탄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보다 힘이 세고 능력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기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마치 사탄이 하나님보다 강한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더라도 죄를 버릴 수 없고 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사탄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처분과 은혜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사탄이 하나님보다 강하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값없이 구원받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어떤 것인지 알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의의 종으로 살게 됩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3~16) 

독자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탄보다 훨씬 강하십니다. 사탄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면, 사탄은 꼼짝 못하고 벌벌 떨면서 피합니다. 왜 사탄이 예수님을 피할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탄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말 영광스런 진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탄보다 강하다는 진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강하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만족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바울은 하나님의 강하심을 믿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 가난하고 아프고 고통스러운데 어떻게 만족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강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강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컨트롤하고 계시며, 언제든지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탄이 하나님보다 약하지만, 인간보다는 훨씬 강합니다.” 물론, 사탄도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이 사람들에게 역사해서 그들을 자기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사탄이 인간보다 강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내 자신의 힘’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마음과 생애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다면 누구도 우리를 실망시키고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온 마음을 다해서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의 마음과 생애 속에서 사탄은 쫓겨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탄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훨씬 강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세력보다 은혜의 능력이 훨씬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쉽고 가벼운 짐

하나님께서 정말 사탄보다 훨씬 강하다면, 구원받는 것이 멸망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진리는 매우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걷는 자아 부정과 희생의 길은 매우 힘든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것이 쉽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성경 말씀과 계명이 요구하는 의무와 규칙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불행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전혀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짐이 쉽고 가벼울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은 너무 무겁고 힘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런 사상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무거운 멍에입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것이 너무 무거운 짐인가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너무 무거운 짐인가요? 부모를 공경하고 거짓말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는 것이 너무 무거운 짐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면 그것은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거짓말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은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성경 말씀이 짐처럼 느껴지고 무거운 멍에로 느껴지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이 “지나친 부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치르신 피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알면 그렇게 느낄 수 없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께서는 멍에가 무거워지고 짐이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를 또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핍박하던 사울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양이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면 목자는 지팡이 끝에 있는 가시채로 양을 찌르면서 올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그런 찌름을 받을 때, 양이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쉽습니다. 저항하지 않으면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어떤 양들은 목자의 가시채를 뒷발질합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고 싶지 않다고 저항하는 것입니다. 따르고 싶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은 정말 무거운 짐입니다. 죄를 붙잡고 있는 사람이 가는 길은 양심의 가책으로 힘겹지만, 순종하는 자의 길에는 마음의 평화와 확신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탄의 능력이 지나치게 강조되었고 과장되어 왔습니다. 사탄이 하나님보다 강하다는 거짓말에 세뇌당해 왔습니다. 물론, 죄가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선을 행하기보다 악을 행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다스리는 곳에서는 죄를 범하는 것보다 의를 행하기가 훨씬 더 쉽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능력을 바라보지 않고 사탄의 권세를 바라보면서 움츠러 들어야 합니까? 사탄의 권세를 과장하면 “사탄 때문에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핑계가 생깁니다. 그래서 사탄의 권세를 과장하는 사람들은 “쉬운 구원”을 찾아가게 됩니다. “죄와 세상을 포기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탄의 미혹에 빠지게 됩니다. “한 번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적당히 살아도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도전  

사도 바울은 사탄의 권위에 도전하기를 망서리지 않았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0~21). 바울은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서 왕으로 군림할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을 굳게 붙잡고 있으면, 은혜가 왕처럼 군림해서 우리 마음과 삶을 의의 길로 인도합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물러가는 것처럼, 은혜가 왕 노릇 하면 사탄이 쫓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을때, 죄를 붙잡고 있을 때, 거짓 복음을 따라가고 있을 때,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고 있을 때, 그런 때는 죄가 왕 노릇 하게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 하면 이런 삶을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1~14). 우리가 은혜의 왕국에 살면, 우리의 삶에 변화가 생깁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이고,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면, 우리 속에 놀라운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물론,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고 허물이 많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안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어떤 것인지 알면 은혜를 배반할 수 없게 됩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은혜를 저버리는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배은망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십자가의 사랑을 안다고 하면서, 은혜를 짓밟고 마음대로 살아가면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아는 사람과 은혜를 모르는 사람 사이에는 살아가는 모습에서 큰 차이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은 그 마음과 생애에서 은혜가 왕 노릇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은혜가 죄의 세력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능력(Power)으로 일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약속이고 보증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사탄은 물론 강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보다 강하고, 가장 힘이 센 삼손보다 강하며, 가장 완전했던 아담보다도 강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예수께서는 “사탄을 이기시고” 사탄의 손에서 포로된 자를 구해내시는 “더 강한 자”이십니다. 이 진리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가 됩니까? 우리의 대장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멸망시키려고하는 자보다 더 강하시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원받는 것이 멸망받는 것보다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에게나 구원받는 것이 멸망받는 것보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되고 이기적인 본성을 갖고 태어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려고 애쓰는 것처럼 힘든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이 쉬워질까요? 거듭나야 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5~7).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감사와 충성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높이 받들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순종의 길이 즐겁고 기쁘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순종하는 것은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열매일 경우에만 힘들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경험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시편 기자의 말에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시 119:127). 하나님의 계명을 금이나 돈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모든 일들로부터 돌아서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할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원은 멸망보다 훨씬 쉽습니다!

 

1부, 하나님은 정말 공평하신 분인가요?

한번은 친구가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와 멸망당할 자를 이미 예정해 놓으셨어. 아기가 어머니 배속에서 나오기도 전에 이미 구원 또는 멸망이 결정되어 있는 거야.” 그런데 얼마 후 그 친구가 다시 찾아와서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지? 솔직히 말해서 구원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두려운 생각이 올라오는 것을 막을 수 없어. 사춘기 아들이 신앙에 관심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어쩌면 내 아들을 멸망시키기로 예정하셨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잠이 오지 않는단다. 나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성경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 그 친구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천국행 그리스도인들’ 속에 자신과 아들이 포함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가를 두려워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마음속 깊은 곳에 그런 두려움을 갖고 계십니까?

인간의 구원과 멸망이 예정되었다는 가르침은 중세기 천주교회의 어거스틴에 의해서 첫 번째 기초가 놓여졌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다음과 같은 반대와 의문이 끊임없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1) 만일 모든 사람의 구원과 멸망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전도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은 대로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멸망받게 될 텐데 전도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2) 만일 모든 사람의 구원과 멸망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성경을 공부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진리에 대한 지식이 구원과 멸망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데, 우리가 왜 성경을 공부하고 예언을 연구해야 합니까? 적그리스도가 누구이고 짐승의 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구원과 멸망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성경은 왜 우리에게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라고 합니까?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행 17:26~27).

3)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대로 사람들이 멸망받게 된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죄를 책망하고 심판하십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살아갔을 뿐인데 왜 그들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과 멸망을 미리 예정해 놓으셨다면, 천국에 갈 사람들은 행운아지만, 지옥 불에 들어갈 사람들은 너무나 억울한 것이 아닙니까? 유대인 6백만 명을 죽인 히틀러도 억울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굶주려 죽게 한 김정일도 억울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예정해 주신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어차피 모든 사람의 구원과 멸망이 결정되어 있다면, 예수께서는 왜 넓은 길을 걷지 말고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왜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5)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사람들의 구원과 멸망을 결정해 놓으셨다면, 성령께서는 왜 우리의 양심 속에 의의 음성을 들려주십니까? 우리가 죄악의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 성령께서 왜 “이 길이 정로니 이 길로 가라.”고 호소하고 가책을 주십니까?

예정론이 기독교회에 들어온 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런 도전과 질문에 대한 명백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구원과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의도를 믿고 받아들이라.”는 설명만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불공평하고 설명되지 않는 예정론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예정 

분명한 사실은,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예정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예정하심에는 온 인류에 대한 깊은 사랑과 자비와 동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주의 약속은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그렇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예정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를 믿으면 구원받게 하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whosoever)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킹제임스 성경)

하나님의 예정은 참으로 공평하고 자비로우며 사랑이 충만한 예정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예정이야말로 다른 어떤 가르침보다도 복음적이고 하나님의 성품을 정확하게 반사하는 교리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올바로 이해해야만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희생이 분명하게 우리 가슴에 와서 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진리를 올바로 알면 감사의 정신을 가지고 좁은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능력

물론,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멸망하게 될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미리 아는 것과 미리 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어떤 사람은 멸망하기로 정하신 것이 아니라 미리 아시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과 멸망을 이미 알고 계신다.”는 사상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시는 능력’을 의심스런 눈으로 쳐다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미리 아시는 능력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다니엘에게 2,500년 동안 나타나게 될 제국들의 순서와 특징을 정확하게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단 2장, 7장). 바벨론 다음에는 누가 메데-페르시아를 일으키고, 그다음에는 누가 그리스를 세우고, 그다음에는 어떻게 로마제국이 세워지고 분열될 것인지에 대한 예언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국가의 흥망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과 멸망도 미리 예지(豫知)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2).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미래를 보시면서 그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양심을 통해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받아들일 것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용서받고 정결하게 될 것을 보십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가 될 것을 보시고,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생애를 살아가게 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음성을 주시고 호소하실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빛과 진리를 주실 때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멸망을 미리 아신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구원 또는 멸망을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정과 선택을 존중해 주십니다. 아무도 억지로 구원받거나 멸망을 강요당하지 않습니다. 구원과 멸망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팔자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반응하는 우리의 태도에 따라 결정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한 매우 아름다운 균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공평한 예정을 믿는 사람들은 몇가지 성경절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각자의 구원과 멸망을 이미 정해 놓으셨다고 생각합니다. 다음과 같은 말씀은 불공평한 예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시는 하나님께서 당신께서 사용할 종들을 미리 선택하는 모습입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 1: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한 평생의 삶을 미리 보실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끝까지 구세주를 거절하고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멸망받게 될 것을 아십니다. 또 어떤 사람은 큰 그릇으로 사용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혼자만 겨우 담을 수 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머니 복중에 있는 태아를 당신의 선지자로 선택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인정한다면,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사고락과 구원과 멸망을 모두 아시지만 우리 모두에게 십자가의 은혜를 허락하시고 그것을 붙잡고 믿을 기회를 주심으로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기를 원하십니다(요 3:16). 구속의 역사가 이렇게 이루어져야만 각 사람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자신이 범하기로 선택한 죄와 그리스도를 등진 반역과 진리를 거절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고, 하나님께 아무런 원망이나 불평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불공평한 예정론이 가져오는 어둠과 그늘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구원과 멸망을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불공평한 예정론을 믿게 되면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깊은 오해로 이어집니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구원의 예정에 포함되지 않았을 때는 지옥불 속에서 엄청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온 마음을 다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섬길 수 있습니까? 자신의 구원과 멸망에 대해서 전혀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왜 하나님은 이렇게 불공평하게 우리를 취급하실까?”라는 의혹이 생기지만 입을 다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공평한 예정론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 때문에 자신이 피해자가 될까 봐 두려워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죄를 범하고 악한 결정을 할 때 이런 추측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 넘긴 유다처럼 악역을 담당하게 하기 위함이 아닐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유다를 이용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용해서 사탄의 불의를 드러내시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두려운 생각입니까? 이런 생각을 마음속에 갖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십자가의 사랑과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불공평한 예정론을 믿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극심한 영적 요요 현상에 시달리게 됩니다. 상황이 좋아지고 신앙이 좋아지는 것같이 느낄 때는 “나는 구원받았다.”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잘 안 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영적으로 낙담이 될 때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멸망시키기로 예정하셨는가?”라는 의혹을 마음에 품게 됩니다. 신앙과 정서가 상황에 따라서 구원이 크게 흔들리기 때문에 우울한 생애를 보내게 됩니다.

불공평한 예정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어차피 구원과 멸망 여부가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경고와 교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그 결과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이 사라지게 되고, 점점 더 세속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예정론을 믿으면, 예수를 영접하고 교회 문턱을 넘어가는 순간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는 오해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원을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죄를 죄로 여기지 않게 되고 세속 안에서 거짓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복음 안에 믿음과 순종이 함께 있다는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두려운 사실은,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예정보다는 불공평한 예정론을 믿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불공평한 예정론은 구원을 매우 쉽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천국행 그리스도인들’ 속에 포함되면, 돈을 사랑해도 구원받고, 세상을 사랑해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예정론은 기독교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르침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예정론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진화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한 번 받은 구원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 예수를 영접하고 거듭나면, 죄를 붙잡고 있을지라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와 같은 말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매혹적인 설교입니까? 누가 그런 복음을 거절하겠습니까? 믿기만 하면 구원은 바로 결정되고 한 번 얻은 구원은 자신의 삶과 관계없이 항상 보장된다는 식의 설교가 얼마나 아름답게 들립니까? 아무리 죄를 범하고 진리를 거절할지라도 이미 결정된 구원 속에서 평안과 안전감을 느끼면서 사는 길을 누가 거절하겠습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불공평한 예정이나 그와 유사한 복음을 제시하는 교회마다 교인들이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새로 올라오는 신흥 종교들도 이런 가르침을 그들이 전하는 복음 속에 깊이 새겨 놓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었던 사울왕도 구원을 잃어버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한때 참된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네게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그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삼상 10:6). 사울은 “여호와의 신”(성령)을 받았으며, 예언을 했고 새 사람이 되는 놀라운 경험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왕이 된 후 교만과 질투의 화신이 되었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살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삼상 31:1~6).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진실로 하나님의 예정 속에 포함되기 원하는가?

오늘날 예정론은 교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르침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만일 성경 학자들과 목사들이 하나님의 예정을 성서적으로 교인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친다면, 예정에 대한 가르침은 교회에서 가장 인기 없는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만일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예정을 참으로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놓고서 고뇌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정을 받은 사람들은 가시밭길을 걷게 될 것이고, 진리의 좁고 가파른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예정받은 경험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하나님의 예정 속에 포함된 그리스도인은 핍박과 박해, 가난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교회로부터 쫓겨남, 악인으로 취급받음 그리고 모든 의무를 짊어지고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걸었던 고난의 길을 걷게 될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을 받은 자들의 삶이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감사와 충성으로 하나님의 예정에 응답하시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예정하셨다는 사실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 속에 포함된 나머지 절반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들어가는 특권을 누릴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통이 먼저 오고 영광이 나중에 오는 것입니다. 좁은 길이 먼저 나타나고 하늘 진주 문은 나중에 나타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예정론을 믿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예정 속에 포함되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히 원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예정을 받았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의 고통을 목전에 두시고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옛적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예정을 받은 사람들의 삶을 성경 속에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12제자 중 11제자가 순교당했습니다. 그들을 따르던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맹수에 뜯겨서 죽었습니다. 그런 기독교 역사를 깊이 명상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세상은 하늘의 예정을 받았던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흠모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께 예정받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그것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예정받은 자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상은 그들을 미워했습니다.

 

우리의 몫  

예정론을 믿는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로 구원과 멸망이 결정되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예정론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닙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우리의 몫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해야 하고, 나뭇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어야만 생명이 유지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 계속해서 붙어 있어야만 합니다. 계속해서 말씀에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성품과 생애 속에 들어와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주신 진리를 굳게 붙잡는 것, 바로 그것이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몫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내쫓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스스로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 대신에 사탄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늘 대신에 세상을 선택하기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과 결심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옳은 일을 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성령께서 마음속에 의를 사모하는 심령과 거룩한 충동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의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영혼마다 주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은 심령이 생기고,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열망이 끊임없이 샘솟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복음을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20~21) ■

 

12호를 시작하며…

성경을 연구할 때 가장 힘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내가 속한 교단 입장에서 말씀을 살피게 됩니다. 성경은 교회를 교파나 교단으로 나누지 않는데, 사람들은 교파나 교단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말씀을 봅니다. 슬픈 사실은, 오랜 세월 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자신이 속한 교단의 울타리 너머에 있는 빛과 진리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채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빛과 진리를 갖고 있는 교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로교인은 감리교회의 말씀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하고, 감리교인은 침례교회의 말씀에 어떤 것이 있는가를 보아야 하며, 침례교인은 성결교회의 말씀에서 빛을 얻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때는 어떤 교파에 속한 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더 밝은 빛으로 나갈 수 있고 더 분명한 복음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복음이 주는 전체적인 빛을 받을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교파는 없습니다. 오직 완전한 말씀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수백 개의 교파가 있는데, 각 교파마다 서로 다른 복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복음이 타락한 죄인을 변화시켜 영생에 이르게 할까요? <마지막 사명> 12호에서는 오늘날 교회에서 나눠지고 있는 복음의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복음이 정확해야만 참된 변화가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에 따라 경험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 앞에 세 가지 예언이 남아 있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짐승의 표 환란과 아마겟돈 전쟁과 그리스도의 재강림이 순서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핍박과 순교의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순교자의 신앙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이번 호에서 드리는 말씀을 통해서 참된 변화의 경험을 갖게 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마지막 사명>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