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시골 교회에 젊은 목회자가 부임했습니다. 80세가 넘으신 장로님이 새로 부임한 목사님을 집으로 초청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이곳에서 목회하시는 동안 교인들에게 은혜스럽고 감동적인 설교만 한다면, 교인들은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설교자는 성도들에게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하고, 성도들은 어떤 복음을 받아야 할까요? 몇 해 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남침례교회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세미나 내용을 4부와 5부에서 다루었습니다. 이 기사를 통해서 성령께서 설교하는 사람과 설교 듣는 사람 모두에게 하늘의 빛을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편집실>

사랑하는 목회자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 절망을 느끼십니까? 제가 목사로서 절망을 느낄 때는 매주 설교하고 말씀을 전하는데 교인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입니다. 설교를 듣는 교인들의 마음과 생애가 변화되지 않을 때입니다. 설교의 목적은 듣는 자의 마음과 생애를 거룩한 삶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인데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설교를 수년 동안 하게 되면 설교자에게 고민과 좌절이 밀려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왜 성령께서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역사하지 못하시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씀 속에서 설교의 목적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치명적인 설교 

설교는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설교가 비성서적이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마지막 날에 하늘의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설교는 듣는 사람들에게도 무거운 책임을 요구합니다. 성령께서 설교를 듣는 사람의 양심에 “이것이 진리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호소하셨던 말씀에 대해서는 큰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께서 주시는 빛을 거절하는 사람들도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단지 교리나 성경 지식을 늘어놓는 데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바울처럼 온 마음을 다해서 진리에 굴복하도록 호소해야 합니다. 설교에는 설교자의 마음과 생애가 실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남의 이야기하듯이 해서는 안됩니다. 옛 전설을 이야기하듯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설교하면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생애를 바치지 않게 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진짜를 가짜처럼 설교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도 심각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멋진 주석을 나열하고 마치는 설교는 하나님을 높이는 대신 설교자를 높이게 됩니다. 그런 설교는 “내가 이런 해석을 발견했습니다.”라는 주목을 받고 끝나게 됩니다. 목회자 여러분, 우리는 주석이나 교리의 전달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할 때, 성도들이 우리에게 이런 모습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목회자가 설교하면 교인들은 설교를 통해서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교인들 사이에서 죄와 세상을 버리는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감리교회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가 영국의 탄광촌에서 설교했을 때 마을 술집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설교자는 그런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면서 말씀을 준비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1년에 100번 이상 교인들에게 설교하는데,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대로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은 그대로 불순종하면서 살아간다면, 설교자는 주 앞에 나가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제 설교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왜 성령께서 제 설교에 역사하지 못하시나요? 제가 아직 주 앞에 드리지 않고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가르쳐 주시옵소서.”

 

멍에가 되는 설교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설교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그런 설교는 교인들에게 멍에가 됩니다. “거룩하게 살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해야 거룩한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가?”를 설명해 주지 않으면 그것은 신자들에게 큰 짐을 지우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무슨 일을 하실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올라가야 할 목표와 표준만을 제시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율법적 신앙을 심어 주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말씀과 표준대로 살아갈 수 있는지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교인들의 고민에 대답해 주어야 합니다.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사람들은 말씀 사이로 빠져나가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분명하게 전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전하는 것이 “내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하게 전할 수 있는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섞인 설교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의견”을 섞어서 설교합니다. “순종하면 좋지만,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므로 너무 애쓰지 마세요.”라는 인상을 주는 설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나머지는 예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십니다. 더 이상 우리가 할 것은 없습니다.”라는 분위기의 설교도 있습니다. 마치 크게 인심을 쓰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디스카운트시켜서 나눠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10을 말하고 있는데, 6이나 7로 할인해서 전하는 설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현대인들은 그런 설교자들을 “멋진 목사님”으로 치켜세우고, 세속적인 양들은 그런 설교를 통해서 양심을 위로하고 죄책감을 해결합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제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교인들의 양심을 불편하게 만들고 동료 목사들이 거북해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믿음으로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보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서 있는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마른 뼈에 생명을 불어넣는 설교 

말세가 되면서 세상은 물질의 풍요와 세속에 휩쓸려 떠내려 갔고 거룩함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말세의 설교자는 순종과 거룩한 삶에 대한 주제를 정확하게 다뤄야 합니다. 거룩함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그들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이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재강림을 위해서 성도들을 준비시킬 수 없습니다.

살아 있지만 죽음의 냄새가 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죽음의 길목에서도 생명의 향기를 진하게 풍기고 있습니다. 고난 속에 있는 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영적으로 죽어 가는 자들에게는 사망의 길에서 돌아서라는 호소가 매 주일 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동료 목사 여러분, 우리는 심리상담사도 아니고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레이터도 아니며 웃음을 선사하는 웃음치료사도 아닙니다. 우리는 해박한 지식을 나누어 주는 신학 교수도 아닙니다. 우리는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현대 기독교회의 모습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를 채우고 있는 죽은 뼈들을 일으키라는 하늘의 부르심이 우리의 어깨 위에 놓여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겔 37:1~2). 기독교회라는 골짜기에 마른 뼈가 산같이 쌓여 있습니다. 죽은 지 이미 오래된 마른 뼈들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들을 살리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설교해야 할까요? 그들이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들어가 하늘의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설교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설교와 산 제사  

사도 바울의 설교는 호소와 탄원의 설교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설교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 붙잡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하면서 교인들을 죄 가운데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교인들이 예수님과 세상을 함께 붙잡고 있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스포츠와 연예 이야기를 합니다. 지난밤에 본 연속극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구원에 대한 설교를 들었어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수들의 인기 순위 때문에 흥분합니다. 우리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런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사랑하는 목회자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설교해야 할까요? 우리는 설교 단상에 올라갈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마음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할까요? 어떤 태도로 전해야 할까요?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눈을 보지 않고 설교해 왔습니다.

저는 30년간 사역자로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동안 저에게도 멋진 차, 아름다운 집, 맛있는 음식, 매혹적인 여자 그리고 나를 높이고 자아를 만족시켜 주는 것들에 대한 유혹이 그치지 않고 찾아왔습니다. 한 가지 유혹이 지나가면 또 다른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설교에서 능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바치지 않으면 사탄의 공격을 받아서 설교가 무너지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호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바치라고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드리고 싶은 아들, 아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주고 싶은 아버지, 이런 관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몇가지 행동을 뜯어 고치거나 몇가지 습관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말과 행동과 설교를 통해서 신자들이 회개하게 되고 성령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심장 전체를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잡혀서 사용되기를 소원합니다. 완전한 자유는 완전한 굴복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이 날마다 드리는 저의 기도입니다. 제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전달되어서 성령께서 성도들의 마음과 생애 속에 크게 역사할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동료 목회자 여러분, 하나님이 정말 우주를 창조하신 여호와시라면 우리는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더 이상 두 주인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기면, 내 자신이 먼저 그 사실을 압니다. 내 아내와 가족이 그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내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그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성령께서 설교를 통해서 교인들의 마음을 파고들지 못하게 되고 예배는 죽은 형식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과 삶 때문에 더럽혀지게 됩니다. 목회자는 신자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설교해야 합니다. 더 이상 세상을 위해서 살지 말고,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도 멈춰야 한다고 설교해야 합니다. 진정 하나님의 희생과 죽음을 안다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의 도리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들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다수가 되면, 세상은 교회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심령이 곤고한 사람들, 세상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는 성경절을 잘 정돈해서 발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단순히 성경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진리를 멋진 문장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교인들이 좋아하는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절실한 것입니다. 설교는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설교는 지옥에 떨어지려는 영혼을 붙잡아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설교는 사망의 구덩이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등에 업고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는 죽어 가는 영혼의 입에 생명수를 넣어 주는 것입니다. 설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호소입니다.

설교는 죄와 세상 쾌락에 빠져서 잠자고 있는 사람을 흔들어 깨우는 것입니다. 설교는 구원과 멸망 사이에서 고민하는 영혼이 생명으로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진리 앞에서 갈팡질망하는 사람의 마음을 붙잡아 주는 것입니다. 설교는 예수께 나가 죄를 버리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완전한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설교자는 반쪽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세상을 포기하지 않은 설교자는 복음을 “내 수준”에 맞춰서 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한 설교자는 진리를 반대하고 성도를 핍박하게 됩니다. “이제 결정하라”는 호소가 없는 설교는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교인들을 깊이 잠자게 만듭니다.

나쁜 설교는 교인들로부터 그리스도의 재강림을 위한 준비를 빼앗아 갑니다. 나쁜 설교는 성도들로 하여금 알곡의 경험을 잃어버리게 하고 가라지의 경험 속에서 만족하게 합니다. 나쁜 설교는 성도들의 흰옷과 구원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듣는 사람은 말씀을 전하는 자의 영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