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에 성령의 기름을 채우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기름을 채우는 경험은 나와 하나님만 아는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갖고 있는 것을 통해서 경험을 주십니다. 가난을 갖고 있으면 가난을 통해서 경험을 주시고, 병을 갖고 있으면 병을 통해서 경험을 주십니다. 내가 갖고 있는 말씀, 내가 알고 있는 빛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알고 있는 빛과 알고 있는 말씀에 충성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진리와 기름의 관계

기름은 진리를 통해서만 내 속으로 흘러들어 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소개하면서 “진리의 성령”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요 15:26). 예수께서 성령을 “진리의 성령”으로 부르신 이유는, 성령은 진리를 통해서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비성서적인 복음과 거짓 교리를 믿으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방언과 은사가 정말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거짓 복음과 비성서적인 교리를 믿고 있으며 의의 열매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성령께서 기적과 은사를 주신다면, 사도 바울이 “미혹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주의하라고 경고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 그러므로 성령을 달라고 매달리기 전에 진리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성령을 구하면, 사탄은 그런 사람을 “미혹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으로 멸망의 늪으로 끌고 갑니다.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실제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름을 채우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간절한 심령으로 진리를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갈급하고 목마른 심령으로 말씀을 읽을 때 성령께서 진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진리를 가르치고 전하는 하나님의 종들과 만나게 되고, 진리가 담겨져 있는 책자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해서 갈급하지 않은 사람들은 미련한 처녀가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짐승의 표 환난이 올 때 자신이 미련한 처녀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모든 자”가 짐승의 표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계 13:16).

 

미혹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

예수께서 가장 강조하신 재림의 징조는 지진과 전쟁과 홍수가 아니라 “사람의 미혹을 조심하라”는 경고입니다. “사람의 미혹을 조심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더러운 영들이 들어와서 거짓 가르침, 거짓 복음, 거짓 성령을 퍼트린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마지막 시대의 미혹을 위해서 오래전부터 작업을 해 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미혹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이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

사도 바울은 미혹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어떤 문제가 생긴다고 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마비된다고 했습니다. 왜 양심이 마비될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짓 가르침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무시하고 성령의 음성을 거절해도 두려움도 없고 마음이 불편하지 않게 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가르침, 예수를 영접하면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 내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구원할 것이라는 가르침.” 이런 가르침들이 이 시대에 가장 강력하게 퍼지고 있는 귀신의 가르침입니다. 그런 가르침과 복음을 받아들이면, 양심이 화인 맞게 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신앙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돈과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아도 양심의 가책이 없게 됩니다. 사탄은 죄를 붙잡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는 복음을 교회 안에 깊숙이 퍼트렸습니다.

“미혹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두 번째 미혹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것이 거짓 성령(가짜 기름)입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에 거짓 복음과 거짓 성령의 역사로 미혹당한 기독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예수께서도 사도 요한과 같은 시선으로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보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그러므로 말세에는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는지 모르면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탄의 미혹을 따라가고 있으면서, 자신은 성령을 받았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미혹의 시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짓 교리로 미혹당하고, 감정적 신앙과 거짓 성령으로 미혹당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 교회의 문제는 기름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참된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후의 미혹이 나타날 때 수많은 미련한 처녀들이 짐승의 우상에게 달려가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3~15).

 

그릇이 비어야 기름이 채워진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구해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릇이 비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릇이 이미 다른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릇이 다른 것들로 채워지면 미련한 처녀로 남게 됩니다. 그릇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남보다 높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더럽고 추한 것들로 채워지면, 기름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에 대한 근심과 염려로 채워지면, 그릇에 기름이 들어갈 자리가 없게 되고 결국 미련한 처녀가 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가난한 사람만 생활의 염려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도 염려 때문에 그릇을 비우지 못하게 됩니다.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까 봐 염려하고, 그릇에 더 많은 것을 채우기 위해서 근심합니다. 성도 여러분, 기름을 채울 수 있는 빈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위로를 갈급하고 구하는 심령입니다. 땅에 속한 것들에 시달리고 지쳐서 하늘에 속한 것을 사모하는 심령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에 깊은 허무를 느끼고 간절하게 그리스도를 향하여 손을 뻗는 심령입니다. 죄와 세속에 끌려다니는 삶이 너무나 싫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저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절규하는 심령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마음에 기름이 채워지게 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어린아이는 내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지금 필요한 것이 채워지면 엄마 품 안에서 잠이 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4). 어린아이는 엄마만 있으면 만족하고 행복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커가면서 장난감이 있어야 행복하고, 예쁜 옷이 있어야 만족합니다. 더 나이가 들면 돈이 있어야 행복하고, 좋은 집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더 나이가 들면, 말 잘 듣고 신앙 좋은 자녀가 있어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더 나이가 들어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 은퇴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어야 행복합니다. 처음에는 엄마만 있으면 만족했는데, 커 가면서 돈과 환경 속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원하는 물질과 원하는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행복과 감사가 사라지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그릇이 어린아이 마음같지 않으면 기름을 구하지 않게 됩니다.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려올 때까지 세상을 쫓아다니다가 자신이 미련한 처녀라는 사실을 모르게 됩니다. 하나님만 있으면 자족할 수 있는 사람이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세상과 물질을 쫓아다니다가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신념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입으로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시다.”라고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세상의 인정과 성공에 목을 매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하나님 한 분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내게는 당신 한 분뿐입니다. 저는 당신 한 분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주변 사람들 때문에 속상해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물질 때문에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간증합니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 23:5~6).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야 그릇을 비울 수 있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주께서 나와 내 가족을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릇에 기름을 채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은 죽어 가는 라오디게아 교회 속에서 기름을 채우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25~33).

우리의 그릇이 비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기름을 채워 주십니다. 그릇에 기름이 가득 채워질 때까지 채우실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기름을 채워 줄 성도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중 누가 하나님을 위해서 그릇을 비우시겠습니까? 우리 중 누가 온갖 염려와 허망한 것들을 버리고 진리와 복음으로 그릇을 채우겠습니까? 오래전에 사르밧 과부의 그릇에 기름을 채워주신 하나님께서 비어 있는 우리의 그릇에도 성령을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오해하면 그릇에 기름을 채울 수 없다

오늘날 어떤 분들은 성령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기운이나 힘이나 파워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대하면 그릇에 기름을 채울 수 없게 됩니다. 우리와 하나님,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성령님과의 관계도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령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서 그릇에 기름을 채울 수 있습니다. 성령을 인격체로 받아들여야만 그분께 도움을 구하고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성령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면 성령의 판단과 생각과 지혜를 구하지 않게 되고 내 곁에서 도와주시고,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분의 임재를 인식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하늘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이름”을 가진 인격체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마 28:1). 바울도 성령을 생각하고 근심하는 인격체로 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자녀가 부모의 권면을 거절하면 부모 마음에 근심이 생기는 것처럼,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면 성령의 마음에도 근심이 생깁니다. 성령의 마음에 근심을 주는 상황이 지속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을 쳐 주실 수 없고 결국 구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인격체가 아니면 근심이 생길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속이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성령께서 인격체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 나오는 어떤 기운이나 파워라면 어떻게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 사도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완전한 인격을 가진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기 전에 성령을 진리로 인도하는 분으로 소개해 주셨습니다. 성령은 말하고 듣고 장래 일을 알려주는 인격체입니다. 기운이나 파워는 진리를 가르치고 인도하고 말하고 듣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13, 26).

또한 예수께서는 예수님을 거역하는 것보다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 더 심각한 죄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 성령께서 독립된 인격체로서 중요한 사역을 하시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성령을 거역하면…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거절하면 처음에는 마음이 아프고 상처가 나지만, 계속해서 거절하면 마음의 고통과 통증을 잃어버리고 마비가 됩니다. 성령의 감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양심이 단단하게 굳어 버립니다. 그렇게 될 때 성령을 거스리는 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호소하시고 우리 마음을 찌르실 때 성령의 생각과 지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내 속에 있는 그릇에 기름을 계속해서 채우는 경험입니다. 우리가 그런 경험 속으로 들어가면,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죄가 떨어져 나가며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의 기름이 계속해서 우리 마음에 흘러들어 와야 이기적인 생각과 음흉함과 간계가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세속적인 생각과 욕심으로부터 풀려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그릇에 기름이 채워져야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옮겨지는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씀은 그릇에 기름이 채워진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일어나는 하늘의 기적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