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본 회퍼 : 본 회퍼는 독일을 대표하는 신학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정직한 삶을 살았던 그리스도의 증인이었습니다. 1943년 나치스의 게스타포에 체포되어 사형 당할 때까지 히틀러의 압제에 대항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기독교회를 책망했습니다. 1945년 4월 9일, 옥중에서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순교했습니다. 이 기사는 그의 저서, <나를 따르라>에서 발췌/편집했습니다.

은혜를 모르면 불효자식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팬은 은혜를 값싸게 즐기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는 십자가 은혜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팬은 은혜를 값싸게 낭비하지만, 제자는 그리스도의 피로 물들은 은혜를 통해서 놀라운 변화를 경험합니다. 팬은 죄를 값싼 은혜로 헐값에 덮어 버리지만, 제자는 죄를 고백하고 끊어버립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은혜만큼 기독교회에서 크게 오해되고 있는 가르침도 없습니다. 이 기사를 통해서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오는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편집실

오늘날 기독교계에 가장 크게 오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의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은혜’입니다. 소위 값싼 은혜(cheap grace)라고 불리어지는 가르침이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으로 마련된 ‘값비싼 은혜’가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물건처럼 헐값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값싼 은혜란?

오늘날 기독교계에 가장 크게 오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의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은혜’입니다. 소위 값싼 은혜(cheap grace)라고 불리어지는 가르침이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으로 마련된 ‘값비싼 은혜’가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물건처럼 헐값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값싼 은혜는 하나님의 교회의 철천지원수입니다. 우리는 값비싼 은혜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해야 합니다. 값싼 은혜란, 계산이 이미 끝났기 때문에 영수증만 제시하면 모든 것을 공짜로 가질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값싼 은혜란,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고 머리로 인정하면 모든 죄가 용서되고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입니다. 값싼 은혜가 들어가는 교회마다 침례(세례)와 죄의 용서가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되며,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죄를 범한 죄인에게도 위로와 격려의 말들이 무책임하게 난발되고 있습니다. 물론, 은혜에는 어떤 대가나 가격이 붙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에 대해서 생각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인에게 주어지는 은혜를 위해서 엄청난 값이 지불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은혜를 위하여 무한한 대가가 지불되었으며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희생이 치러졌기 때문에, 그것을 무한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의 가격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음에 내어 준 고통이고,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가격을 아는 자마다 은혜를 매우 소중하고 값비싼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값싼 은혜가 뿌리는 독

오늘날 기독교회를 휩쓸고 있는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값싼 은혜는 죄를 버리고 돌아서는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붙잡고 있는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합니다. 은혜가 모든 것을 처리해 주기 때문에 죄인은 현 상태 그대로 머물러도 좋다는 것이 값싼 은혜의 복음입니다.

값싼 은혜의 가르침 하에서는 인간의 노력과 희생과 헌신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값싼 은혜가 진리라면,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값싼 은혜가 기독교회를 거의 점령했습니다. 그래서 은혜 아래 있지만, 죄 아래 있는 것처럼 살아도 그리스도의 피와 은혜가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바울의 복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4,15).

값싼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은혜에 대한 저항으로 생각합니다.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을 은혜보다 율법을 높이는 바리새인 신앙으로 취급합니다. 값싼 은혜를 설교하는 사람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계명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더 이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값싼 은혜의 열성적인 지지자들은 날마다 습관적으로 죄를 범할지라도, 주어진 은혜와 위로를 즐기는 것이 믿음이라고 설명합니다.

 

헛되고 공허한 값싼 은혜

은혜를 값싸게 취급하는 사람들은 은혜를 단순히 어떤 교리나 이론으로 받아들입니다. 값싼 은혜 속에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창조의 능력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은혜를 죄의 용서에만 국한시켜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께서 베푸신 용서하시는 은혜를 정신적으로 인정하고 동의하기만 하면, 은혜는 자신의 죄를 용서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에 대한 매우 위험한 오해입니다. 은혜에 대해서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은 죄를 값싼 은혜로 거침없이 덮어씌우기 때문에, 순수한 회개의 경험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값싼 은혜가 구원을 완벽하게 보장해 주기 때문에 죄와 세속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도 생길 수 없으며, 가난한 마음으로 의를 사모하지도 않게 됩니다.

만일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이 진리라면,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처럼 살아도 됩니다. 은혜가 정말 값싼 것이라면,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도 됩니다. 정말 은혜가 값이 싼 것이라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항상 나를 덮어 주고 있으므로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다. 은혜 아래 있으면 경건한 삶을 살기 원하는 척할 필요가 없다.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설교를 들을 필요도 없고, 한 번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상으로 나간 교인에게 재침례를 요구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은혜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죄되고 이기적인 생애를 살 수밖에 없으므로 거룩한 생애에 대한 소망도 가질 필요가 없다. 은혜가 항상 베풀어져 있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나의 삶이 어떠하든지 간에 구원은 보장되어 있다. 은혜가 나를 덮어 주고 있으므로, 더 이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온 세상을 덮어 주고 있으므로, 나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도 된다. 어차피, 나는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부흥과 개혁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구태여 세상 사람들과 조금 다른 척하거나, 조금 다른 길을 가는 척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에서 베풀어진 은혜가 나를 구원하기에 넉넉하지 않은가? 세상에서 오는 유혹과 시험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난을 당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과 구별되기 위해서 세상을 버려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8). 이 말씀을 거절하거나 무시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세상을 정복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값싼 은혜, 생명력이 없는 거짓 은혜를 믿는다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주는 쾌락을 즐기면서 살되, 세상보다는 조금 높은 표준을 가지고 살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피 묻은 은혜를 위해서 살기보다는, 세상을 위해서 생애를 바치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을 위해서 모든 일을 다했으므로, 편안한 마음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려고 애쓰는 대신에, 십자가의 은혜가 주는 위로와 위안을 즐기라고 말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그것이 값싼 은혜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를 버리고 통회하는 죄인을 의롭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품고 있고 이리저리 끌려다녀도 의롭다고 여기는 은혜가 값싼 은혜입니다. 물론, 값싼 은혜도 죄의 용서를 말하고 믿음을 말하지만, 그것은 값비싼 은혜의 복음에서 말하는 것과 그 내용이 전혀 다릅니다. 값싼 은혜는 얄팍하고 헛되고 기만적입니다. 값싼 은혜에는 열매가 없고 잎만 무성하기 때문에 경건의 모양만 만들어 냅니다. 값싼 은혜는 회개하지 않은 죄인을 의인으로 위조하는 허무한 포장지입니다.

오늘날,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은 교회를 참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값싼 은혜는, 참된 회개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진리에 대한 확신과 개혁 없이도 침례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고, 아무런 고백도 없이 성만찬 예식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값싼 은혜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요구하지 않는 은혜, 십자가가 없는 은혜 그리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의 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은혜입니다.

 

값비싼 은혜와 부르심

값비싼 은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기쁨으로 사게 됩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 13:44). 은혜의 참된 가치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소유뿐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버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값비싼 은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값진 진주와 같은 것입니다. 값진 진주의 가치를 올바로 알아보는 그리스도인 역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것을 사게 될 것입니다. “또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 13:45, 46). 값비싼 은혜란 무엇입니까? 만일 눈과 손이 그대를 넘어지게 만들면, 그 눈을 뽑고 손을 찍어 버리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이 값비싼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을 잃는 것보다 이 세상을 장님이나 불구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 30).

하나님의 은혜는 선물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은혜를 받기 위해서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값비싼 은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베드로에게 그물을 놓고서 자신을 따르라고 명하신 그리스도의 부르심입니다. 값비싼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호소하는 부르심입니다. 한 번 따르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따라야 합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두드리고 도전해야 열리는 문입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르라는 부르심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값비싼 것입니다.

 

은혜의 값이 비싼 이유

은혜가 비싼 이유는, 죄를 책망하지만 죄인은 의롭다는 선언을 받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매우 비싼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음에 내주는 비싼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얼룩진 은혜를 헐값으로 팔아넘기려고 합니까? 누가 감히 값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비싼 하나님의 은혜를 적당하게 슬쩍 사용하려고 합니까? 물론, 우리의 노력과 희생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않지만, 은혜에는 그것을 구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인생을 대가로 지불하라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해받고 희생하는 길을 걷게 되기 때문에, 은혜는 매우 값비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은혜만이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위선이나 가식이 없는 진실한 것으로 꼴을 지울 수 있습니다. 은혜는 죄를 죄라고 정죄하기 때문에 값진 것이며, 죄를 범한 사람이 죄를 버리고 의를 선택할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은혜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값진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는 죄인마다 은혜가 죄를 압도하는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0,21). “너희는 값으로 산 바 되었으니” 라는 성경 말씀에 나오는 “값”이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 값을 치르셨는데 어떻게 우리 인간이 그것을 값싼 것으로 취급할 수 있겠습니까! 온 우주의 왕께서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그 은혜를 어찌 값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값비싼 은혜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뜻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위대한 역사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치르신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대가를 깊이 명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통해서 세우신 교회는 마땅히 세속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얼룩진 은혜를 개나 돼지에게 던져 주는 자가 누구입니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와 그 목적을 명상하는 자마다, 은혜를 매우 귀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놀라운 희생을 통하여 세워진 은혜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은혜의 초청장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산산이 깨어진 마음으로 죄를 깊이 뉘우치는 영혼에게 용서의 약속을 제공합니다. 은혜는 사람의 마음을 겸손하고 가난하게 만들어서 그리스도의 초청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며, 깊은 회개에 이르도록 도와줍니다. 다시는 그리스도의 가슴에 못질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심어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은혜는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은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을 따르라고 호소합니다. 이러한 호소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인데, 왜냐하면 예수께서 “나의 멍에는 쉬우며, 나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 30). 은혜로 녹아진 마음에는 주를 위한 희생과 고난이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멍에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그리스도의 제자만이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호소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베드로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도록 만들었으며, 은혜가 베드로로 하여금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니”라는 고백을 하도록 했는데, 그런 신앙 고백은 그 당시의 유대교인들에게 있어서 참람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은혜의 역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은혜는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이 세 번이나 부인했던 주님을 위해 순교자의 길을 걷도록 이끌었습니다. 베드로는 값비싼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사랑과 충성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과 생애에서, 은혜와 제자의 직분(discipleship)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제자가 되는 대가를 기꺼이 지불함으로써 은혜의 초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누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와 충성으로 응답할까요? 지금,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뒤를 따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멍에와 짐이 우리에게 가벼운 것이 될 때까지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