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나를 따르라-2

사도 시대가 끝나고 그리스도인들이 극렬한 핍박을 받고 있을 때, 그리스도 교회가 갑자기 로마 황제의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태양신교에서 기독교회로 개종하면서 기독교회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핍박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밀려들어 왔습니다. 교회 안으로 돈과 명예와 권력이 들어오자, 교회는 세속화되었으며 은혜가 요구하는 대가에 대한 가르침도 점차 빛을 잃어버린 채 희미해져 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12제자에 의해서 세워진 은혜에 대한 진리는 중세기의 종교암흑시대에도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전수되었습니다. 은혜란 그리스도의 초청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분의 부르심에 응하는 데에는 희생적인 대가가 지불된다는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은혜의 복음을 이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날마다 그분의 명령을 따르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비록 중세기 기독교회의 수도승 제도가 나중에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대표적인 예증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초창기의 경건한 수도승들의 동기와 목적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교회에 들어오는 세속적인 정신과 값싼 은혜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는 파수꾼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중세기 천주교회의 지도자들과 신부들은 수도승 제도를 교회의 타락상을 가리는 가면으로 사용했습니다. 천주교회는 사람들이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를 지적하고 저항할 때마다 수도원의 고결함을 내세워 그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중세기 천주교회의 이러한 태도는 수도원 사람들과 일반 교인들의 삶을 분리시켰습니다. 수도원은 특별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수도원 밖에 사는 일반 교인들은 적당히 살아도 구원받는다는 오해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은 수도원 사람들에게만 해당되고 일반 교인들에게는 의무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충성이 높은 수준과 낮은 수준으로 나뉘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직분이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수도원 사람들은 경건해야 하지만, 일반 교인들은 세속적이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수도원도 변질되고 타락하게 됨으로서 중세기 교회 전체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온갖 거짓 가르침과 거짓 은혜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루터를 제자로 부르신 그리스도

1517년, 하나님께서는 값비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수도승이었던 마틴 루터를 개혁자로서 선택하셨습니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살다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진리를 깨닫고 수도원 밖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수도원 사람들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도원 밖에 사는 일반 교인들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루터는 특별한 사람들만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 생애를 살기 위해서 세상이 주는 장미빛 유혹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마틴 루터 역시 엄격한 수도원 생활을 통하여 행함과 공로를 이룩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루터를 더 밝은 빛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 직분은 소수의 제한된 수도승들의 개인적인 성취나 공로로 이용되어서는 안 되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적 눈이 열린 마틴 루터는 수도승 제도가 소박하고 겸손한 봉사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공로를 쌓으면서 극단적인 영적 교만으로 빗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중세기 종교암흑시대에 세속과 탐욕의 정신이 수도원을 점령하자 말할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버리려고 수도원에 들어온 수도승들이, 이제는 수도원 안에서 세상을 그리워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중세기 천주교회가 바닥까지 타락했을 때,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그물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처음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그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자기 자신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자아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죄를 용서받고 경건하게 살기 위해서 심한 고행과 고통을 감수했지만, 여전히 실패하고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때마다 사탄은 루터에게 다음과 같은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너는 죄를 범했지만 네 고행과 고통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셨다. 네 죄는 용서받았다. 그러므로 너는 현재의 경험 속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된다. 용서를 받았으니 안심하라.” 그러나 루터는 사탄의 미혹을 거절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엄청난 은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값비싼 은혜는 루터로 하여금 스스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정신까지 버릴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루터가 수도원을 뛰쳐나왔던 것은 하나님께서는 죄를 회개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가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하기 시작하자, 유럽에 있던 거의 모든 수도승들이 그를 대항해서 일어섰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섭고 두려운 신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손을 뻗고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루터는 믿음의 손을 뻗어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바울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 마련해 주신 은혜는 값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고귀한 은혜라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산산이 깨뜨렸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그를 붙잡고 있던 자신에 대한 평판도 하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스스로 의와 공로를 쌓으려고 애쓰는 대신에,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에 응하라는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그� 결과, 그는 “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우리는 믿음으로 선한 생애를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수도원을 나와서 세상으로 간 것은 세상이 선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간 것이 아니라, 수도원도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가 세상으로 돌아간 사건은 유럽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갈 당시에 했던 세상의 포기는, 그가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에 했던 자아의 포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루터의 개심은 그 당시 교회를 향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동기와 목적과 모든 것이 변화된 루터의 회개는 그 당시 수도승과 사제들이 감당할 수 없는 신앙이었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수도원도 안전한 피신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매일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진리를 배웠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매일의 삶 속에서 헌신적인 순종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끊이지 않는 투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루터를 오해하면 값싼 은혜를 받아들인다

오늘날 가장 비극적인 오해는 이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은혜의 복음을 발견한 후부터 더 이상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정말 루터는 “은혜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제거해 준다.”라는 믿음을 가졌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루터는 세상에 살지만 세속에 대하여 결정적인 저항을 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거룩함에 이른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음을 설교했으며, 수도원 밖의 세상에서도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거룩한 경험을 지속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루터가 믿었던 신앙은, 하나님께서는 죄를 의로운 것으로 인정해 주신다고 믿는 신앙이 아니라, 죄를 버린 죄인을 의인으로 인정해 주심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그가 받아들인 은혜는 값비싼 은혜였습니다.

루터는 용서를 가져오는 것은 자신이 힘들게 쌓아 나가는 공로나 희생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베푸시는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고달픈 수도승 생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이전보다 더욱 엄숙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베푸신 값비싼 은혜가 루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값비싼 은혜는 루터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걸어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아들이 치르신 대가가 너무나 크기에 그것은 타락한 인류에게 은혜가 될 수 있으며, 그런 엄청난 은혜를 바라보고 묵상하는 사람마다 희생적인 대가를 치르면서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은혜는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거절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오히려 제자의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한다는 강력한 소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매우 참담한 경험을 하고 있을 때, 그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죄로부터의 자유와 용서를 붙잡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없앨 수 없었던 죄를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의지해서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자, 그는 그러한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헌신과 충성을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생애 전체를 대가로 지불할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 일생 처음으로 그리스도께 완전하고 순수한 순종을 드릴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루터에게 있어서 사랑과 감사의 정신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완전한 헌신과 충성을 드릴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은혜는 그리스도 제자 직분을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열성적으로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루터가 은혜를 강조했던 이유

루터는 오직 은혜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루터를 따르던 그의 후예들은 루터의 교리를 받아들였지만, 루터가 했던 회심의 경험을 이해하는 일에는 실패했으며, 루터가 했던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루터의 경험을 체험하지 못한 그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이 걷게 되는 제자의 길을 가르치는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물론, 마틴 루터는 오직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런 설교나 가르침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배경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는 그 당시에 가장 엄격한 방법으로 자기 의와 공로를 쌓으면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결심한 수도승들을 대상으로 설교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에 젖어 있던 천주교회를 향해 설교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루터는 그들의 시선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식과 고행과 엄격한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 직분과 의무를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대답은 분명합니다. 루터는 그 당시의 수도승과 사제들에게 가장 적합한 설교를 했던 것입니다.

루터는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도록 만들 수 없으며, 오직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만이 우리에게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그가 수도원을 나올 때, 즉 두 번째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응하면서 했던 말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루터는 엄청난 죄로부터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죄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은 루터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에 매달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은혜를 바라보았지, 방종과 게으름에 대한 핑계로서 은혜를 강조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얻은 해결책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를 따르던 후예들은 루터가 발견한 해결책을 자신들의 경험으로 깨닫지 못했으며, 은혜를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교리나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은혜를 함부로 죄를 덮어 버리는 싸구려 덮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계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있는 값싼 은혜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대담하게 죄를 범하라”는 말의 의미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말을 인용하면서 진리를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값싼 은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루터의 말은 이것입니다. “대담하게 죄를 범하라. 그러나 이보다 더 용감하게 그리스도를 믿고 즐거워하라.” 루터는 어떤 의도로 이 말을 했을까요? 이 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마음대로 죄를 범하라는 뜻일까요? 죄를 범하는 것보다 더 은혜를 모독하는 것은 없습니다. “대담하게 죄를 범하라”는 말은 불순종과 죄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서 말씀과 성령의 음성을 따르다가 부지불식간에 죄를 범할지라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히 4:16). 주 앞에 큰 죄를 범했을지라도 용감하게 죄를 고백하라는 뜻입니다. 죄를 숨기거나 변명하지 말고 빚진 자의 심령으로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대담하게 죄를 범하라. 그러나 이보다 더 용감하게 그리스도를 믿고 즐거워하라.”는 말은 날마다 죄와 싸우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성도들이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절망하고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했던 격려였습니다.

 

값싼 은혜 때문에 내린 재앙

만일 은혜가 우리의 심령 깊숙한 곳에 박히지 않고 지식과 문자적 교리로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곳을 가게 되며, 우리가 원하는 모든 죄를 범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우리의 죄를 덮어 준다고 믿게 됩니다. 본성적으로, 사람은 가장 싼값을 주고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장소를 찾으려고 합니다. 본성적으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마음을 만족시켜 주는 설교를 하는 목사나 교회를 좋아하게 됩니다. 그래서 값싼 은혜를 전하는 교회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했던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을 오해한 사람들은, 세속으로 물들은 신앙을 붙잡고 있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이전의 상태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덮어 주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교회는 세속과 부패 속에서도 ‘안전’을 느끼고 있습니다. 값싼 은혜의 교리 때문에 교회와 세상 사이에 차이가 없어졌으며,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선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처럼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며, 세상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해도 아무런 책망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걷고자 애쓰는 그리스도인이 오히려 교회 안에서 외로움과 고립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가는 것으로 그리스도인 의무를 충분히 수행했으며, 그것으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 그리스도 교회에 가져온 참담한 결과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값싼 은혜가 사람들을 제자로서의 의무와 직분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정했을 때 지불해야 하는 대가를 면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지식으로만 이해하는 값싼 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싼값을 치르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값싼 은혜의 가르침이 만들어 놓은 결과들을 보면서 엄숙한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누가 값싼 은혜의 가르침 때문에 멸망하게 될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질 것입니까?

값싼 은혜를 믿는 사람들과 값비싼 은혜를 믿는 사람들이 모두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은혜의 복음이 많은 사람들의 눈에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얽혀져 있지만, 복음은 학문이 전혀 없는 시골 노인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합니다. 은혜의 복음은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만 정확히 이해하고 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할 때, 그리스도인 신앙은 크게 빗나가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은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고 자신을 위해 정결케 하사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독특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1~14, 킹제임스성경역)

루터의 의도와는 달리 그의 말과 가르침이 많은 설교자들에 의해서 전혀 다른 의미로 왜곡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절망마저 느끼게 됩니다. 물론, 아직도 루터와 요한 웨슬리 같은 개혁자들이 가르쳤던 값비싼 은혜에 대해서 존경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값싼 은혜의 가르침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어서는 사람들은 매우 적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믿는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만일 값싼 은혜의 가르침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말하는 바대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값비싼 은혜를 믿는다면,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가를 치르면서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가장 값싸고 쉬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마틴 루터의 후예로서 마땅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쉽고 간편하며 값싸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그래서 루터의 가르침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다수가 말씀과 계명에 충성하는 그리스도인을 율법주의자로 몰아가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이 사라지면서 참된 제자의 직분에 대한 가르침도 거의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불해야 할 대가가 너무나 싼값으로 책정되었기 때문에 값싼 은혜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값싼 은혜가 가져온 결과가 부메랑처럼 교회에게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속과 부정직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는 거대 교단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위선과 부도덕에 치를 떨면서 교회를 무시하는 세상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회개하지 않으며, 세속으로부터 돌아서지 않고, 진리에 대한 확신과 순종이 없어도 “당신은 구원받았다.”고 선언해 주는 성직자들의 음성이 교회를 채우고 있는데 아무도 그 음성에 대항해서 분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땅히 책망받아야 할 죄인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죄를 가려 줄 것이라고 위로하는 무책임한 성직자들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은혜의 샘은 퍼붓듯이 나뉘어지고 있는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 제자의 길을 걸으라고 호소하는 설교는 점점 더 듣기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가 세워 놓은 옛 신앙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값비싼 은혜에 감격하여 자신의 목숨을 단두대와 화형대에 던졌던 중세기 성도들과 개혁자들의 모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성도들이시여, 여러분은 기독교계 전반에 걸쳐서 내리고 있는 값싼 은혜의 재앙이 보이지 않습니까?

 

구원을 빼앗아 가는 값싼 은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불순종의 생애를 살 수 있도록 사람들을 끌어가는 것이 값싼 은혜의 가르침입니다. 값싼 은혜는 그리스도인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사람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값싼 은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제자 직분을 잃어버렸으며,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도구가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값싼 은혜에 깊이 빠진 사람들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믿는 자의 구원을 확정한다. 한 번 구원받으면 아무도 구원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지금 당신을 부르고 계신다.”는 설교를 들을 때에 어리둥절하며 당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값싼 은혜을 붙잡고 있으면, 값비싼 은혜에 대한 진리에 눈과 귀가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깊은 기만 속에서, 그들은 값싼 은혜가 자신들을 구원하여 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애 속에서 제자로서의 의무와 순종을 이끌어 갈 만한 실제적인 능력이 결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을 위한 구원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지 못하게 되며, 성령의 능력이 삶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에 있어서 은혜에 대한 오해는 다른 어떤 가르침에 대한 오해보다 무서운 재앙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값비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을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대다수의 교인들이 참된 제자의 길을 걷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정통이라고 불리는 교단의 교인들로 인정해 줄지라도,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정직하게 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제자 직분(discipleship)과 은혜 사이에 존재하는 긴밀한 관계를 반드시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그리스도 교회를 이토록 참담하게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값비싼 은혜, 진짜 은혜

수많은 사람들이 까마귀처럼 값싼 은혜라는 시체 주변에 모여들어서 그것을 파먹고 있습니다. 값싼 은혜를 받아들인 교회는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복음에서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세속과 허무함과 파렴치함이 교회를 채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짜 은혜를 발견한 사람은 이 악한 세상에서 경건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확신과 영혼의 평안을 갖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사탄의 권세를 이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며,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풍요로움을 만끽하게 될 것이고, 하늘 시민으로서의 확신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2~14).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6,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

 

3부, 나를 따르라-1

디트리히 본 회퍼 : 본 회퍼는 독일을 대표하는 신학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정직한 삶을 살았던 그리스도의 증인이었습니다. 1943년 나치스의 게스타포에 체포되어 사형 당할 때까지 히틀러의 압제에 대항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기독교회를 책망했습니다. 1945년 4월 9일, 옥중에서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순교했습니다. 이 기사는 그의 저서, <나를 따르라>에서 발췌/편집했습니다.

은혜를 모르면 불효자식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팬은 은혜를 값싸게 즐기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는 십자가 은혜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팬은 은혜를 값싸게 낭비하지만, 제자는 그리스도의 피로 물들은 은혜를 통해서 놀라운 변화를 경험합니다. 팬은 죄를 값싼 은혜로 헐값에 덮어 버리지만, 제자는 죄를 고백하고 끊어버립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은혜만큼 기독교회에서 크게 오해되고 있는 가르침도 없습니다. 이 기사를 통해서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오는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편집실

오늘날 기독교계에 가장 크게 오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의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은혜’입니다. 소위 값싼 은혜(cheap grace)라고 불리어지는 가르침이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으로 마련된 ‘값비싼 은혜’가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물건처럼 헐값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값싼 은혜란?

오늘날 기독교계에 가장 크게 오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의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은혜’입니다. 소위 값싼 은혜(cheap grace)라고 불리어지는 가르침이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으로 마련된 ‘값비싼 은혜’가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물건처럼 헐값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값싼 은혜는 하나님의 교회의 철천지원수입니다. 우리는 값비싼 은혜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해야 합니다. 값싼 은혜란, 계산이 이미 끝났기 때문에 영수증만 제시하면 모든 것을 공짜로 가질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값싼 은혜란,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고 머리로 인정하면 모든 죄가 용서되고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입니다. 값싼 은혜가 들어가는 교회마다 침례(세례)와 죄의 용서가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되며,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죄를 범한 죄인에게도 위로와 격려의 말들이 무책임하게 난발되고 있습니다. 물론, 은혜에는 어떤 대가나 가격이 붙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에 대해서 생각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인에게 주어지는 은혜를 위해서 엄청난 값이 지불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은혜를 위하여 무한한 대가가 지불되었으며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희생이 치러졌기 때문에, 그것을 무한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의 가격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음에 내어 준 고통이고,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가격을 아는 자마다 은혜를 매우 소중하고 값비싼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값싼 은혜가 뿌리는 독

오늘날 기독교회를 휩쓸고 있는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값싼 은혜는 죄를 버리고 돌아서는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붙잡고 있는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합니다. 은혜가 모든 것을 처리해 주기 때문에 죄인은 현 상태 그대로 머물러도 좋다는 것이 값싼 은혜의 복음입니다.

값싼 은혜의 가르침 하에서는 인간의 노력과 희생과 헌신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값싼 은혜가 진리라면,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값싼 은혜가 기독교회를 거의 점령했습니다. 그래서 은혜 아래 있지만, 죄 아래 있는 것처럼 살아도 그리스도의 피와 은혜가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바울의 복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4,15).

값싼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은혜에 대한 저항으로 생각합니다.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을 은혜보다 율법을 높이는 바리새인 신앙으로 취급합니다. 값싼 은혜를 설교하는 사람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계명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더 이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값싼 은혜의 열성적인 지지자들은 날마다 습관적으로 죄를 범할지라도, 주어진 은혜와 위로를 즐기는 것이 믿음이라고 설명합니다.

 

헛되고 공허한 값싼 은혜

은혜를 값싸게 취급하는 사람들은 은혜를 단순히 어떤 교리나 이론으로 받아들입니다. 값싼 은혜 속에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창조의 능력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은혜를 죄의 용서에만 국한시켜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께서 베푸신 용서하시는 은혜를 정신적으로 인정하고 동의하기만 하면, 은혜는 자신의 죄를 용서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에 대한 매우 위험한 오해입니다. 은혜에 대해서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은 죄를 값싼 은혜로 거침없이 덮어씌우기 때문에, 순수한 회개의 경험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값싼 은혜가 구원을 완벽하게 보장해 주기 때문에 죄와 세속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도 생길 수 없으며, 가난한 마음으로 의를 사모하지도 않게 됩니다.

만일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이 진리라면,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처럼 살아도 됩니다. 은혜가 정말 값싼 것이라면,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도 됩니다. 정말 은혜가 값이 싼 것이라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항상 나를 덮어 주고 있으므로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다. 은혜 아래 있으면 경건한 삶을 살기 원하는 척할 필요가 없다.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설교를 들을 필요도 없고, 한 번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상으로 나간 교인에게 재침례를 요구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은혜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죄되고 이기적인 생애를 살 수밖에 없으므로 거룩한 생애에 대한 소망도 가질 필요가 없다. 은혜가 항상 베풀어져 있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나의 삶이 어떠하든지 간에 구원은 보장되어 있다. 은혜가 나를 덮어 주고 있으므로, 더 이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온 세상을 덮어 주고 있으므로, 나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도 된다. 어차피, 나는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부흥과 개혁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구태여 세상 사람들과 조금 다른 척하거나, 조금 다른 길을 가는 척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에서 베풀어진 은혜가 나를 구원하기에 넉넉하지 않은가? 세상에서 오는 유혹과 시험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난을 당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과 구별되기 위해서 세상을 버려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8). 이 말씀을 거절하거나 무시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세상을 정복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값싼 은혜, 생명력이 없는 거짓 은혜를 믿는다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주는 쾌락을 즐기면서 살되, 세상보다는 조금 높은 표준을 가지고 살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피 묻은 은혜를 위해서 살기보다는, 세상을 위해서 생애를 바치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을 위해서 모든 일을 다했으므로, 편안한 마음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려고 애쓰는 대신에, 십자가의 은혜가 주는 위로와 위안을 즐기라고 말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그것이 값싼 은혜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를 버리고 통회하는 죄인을 의롭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품고 있고 이리저리 끌려다녀도 의롭다고 여기는 은혜가 값싼 은혜입니다. 물론, 값싼 은혜도 죄의 용서를 말하고 믿음을 말하지만, 그것은 값비싼 은혜의 복음에서 말하는 것과 그 내용이 전혀 다릅니다. 값싼 은혜는 얄팍하고 헛되고 기만적입니다. 값싼 은혜에는 열매가 없고 잎만 무성하기 때문에 경건의 모양만 만들어 냅니다. 값싼 은혜는 회개하지 않은 죄인을 의인으로 위조하는 허무한 포장지입니다.

오늘날,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은 교회를 참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값싼 은혜는, 참된 회개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진리에 대한 확신과 개혁 없이도 침례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고, 아무런 고백도 없이 성만찬 예식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값싼 은혜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요구하지 않는 은혜, 십자가가 없는 은혜 그리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의 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은혜입니다.

 

값비싼 은혜와 부르심

값비싼 은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기쁨으로 사게 됩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 13:44). 은혜의 참된 가치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소유뿐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버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값비싼 은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값진 진주와 같은 것입니다. 값진 진주의 가치를 올바로 알아보는 그리스도인 역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것을 사게 될 것입니다. “또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 13:45, 46). 값비싼 은혜란 무엇입니까? 만일 눈과 손이 그대를 넘어지게 만들면, 그 눈을 뽑고 손을 찍어 버리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이 값비싼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을 잃는 것보다 이 세상을 장님이나 불구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 30).

하나님의 은혜는 선물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은혜를 받기 위해서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값비싼 은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베드로에게 그물을 놓고서 자신을 따르라고 명하신 그리스도의 부르심입니다. 값비싼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호소하는 부르심입니다. 한 번 따르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따라야 합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두드리고 도전해야 열리는 문입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르라는 부르심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값비싼 것입니다.

 

은혜의 값이 비싼 이유

은혜가 비싼 이유는, 죄를 책망하지만 죄인은 의롭다는 선언을 받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매우 비싼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음에 내주는 비싼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얼룩진 은혜를 헐값으로 팔아넘기려고 합니까? 누가 감히 값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비싼 하나님의 은혜를 적당하게 슬쩍 사용하려고 합니까? 물론, 우리의 노력과 희생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않지만, 은혜에는 그것을 구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인생을 대가로 지불하라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해받고 희생하는 길을 걷게 되기 때문에, 은혜는 매우 값비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은혜만이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위선이나 가식이 없는 진실한 것으로 꼴을 지울 수 있습니다. 은혜는 죄를 죄라고 정죄하기 때문에 값진 것이며, 죄를 범한 사람이 죄를 버리고 의를 선택할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은혜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값진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는 죄인마다 은혜가 죄를 압도하는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0,21). “너희는 값으로 산 바 되었으니” 라는 성경 말씀에 나오는 “값”이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 값을 치르셨는데 어떻게 우리 인간이 그것을 값싼 것으로 취급할 수 있겠습니까! 온 우주의 왕께서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그 은혜를 어찌 값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값비싼 은혜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뜻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위대한 역사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치르신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대가를 깊이 명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통해서 세우신 교회는 마땅히 세속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얼룩진 은혜를 개나 돼지에게 던져 주는 자가 누구입니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와 그 목적을 명상하는 자마다, 은혜를 매우 귀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놀라운 희생을 통하여 세워진 은혜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은혜의 초청장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산산이 깨어진 마음으로 죄를 깊이 뉘우치는 영혼에게 용서의 약속을 제공합니다. 은혜는 사람의 마음을 겸손하고 가난하게 만들어서 그리스도의 초청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며, 깊은 회개에 이르도록 도와줍니다. 다시는 그리스도의 가슴에 못질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심어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은혜는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은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을 따르라고 호소합니다. 이러한 호소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인데, 왜냐하면 예수께서 “나의 멍에는 쉬우며, 나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 30). 은혜로 녹아진 마음에는 주를 위한 희생과 고난이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멍에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그리스도의 제자만이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호소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베드로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도록 만들었으며, 은혜가 베드로로 하여금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니”라는 고백을 하도록 했는데, 그런 신앙 고백은 그 당시의 유대교인들에게 있어서 참람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은혜의 역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은혜는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이 세 번이나 부인했던 주님을 위해 순교자의 길을 걷도록 이끌었습니다. 베드로는 값비싼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사랑과 충성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과 생애에서, 은혜와 제자의 직분(discipleship)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제자가 되는 대가를 기꺼이 지불함으로써 은혜의 초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누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와 충성으로 응답할까요? 지금,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뒤를 따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멍에와 짐이 우리에게 가벼운 것이 될 때까지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

 

2부, 그리스도의 팬도 제자로 변화될 수 있다

팬(fan)의 사전적 정의는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얼굴과 몸에 페인트로 태극기를 그리고 축구장에 가는 사람은 팬입니다. 팬은 관중석에 앉아서 응원만 할 줄 압니다. 경기장에서 필요한 희생과 고통은 전혀 모릅니다. 선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고 모든 기록을 줄줄 꿰지만 선수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습니다. 예수께서 어디서 태어나셨고 어떤 기적을 행했으며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정확하게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예수님께 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사 29:13).

팬은 자신이 종교적인 규칙과 의식을 잘 지키기 때문에 스스로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매주 빠짐없이 교회에 출석하고 각종 헌금과 십일조를 드리고 양로원에 가서 봉사하기 때문에 “나는 제자이다.”라고 생각합니다. 팬은 자신이 속한 교파와 교회와 가문과 성경 지식을 근거로 스스로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돌 가수에게 열광하는 팬들에게 나타내는 독특한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돌 가수가 반드시 자신과 결혼해 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신랑이다”라는 강력한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살든지, 내 마음속에 어떤 우상이 있든지 예수께서는 나의 신랑이기 때문에 나를 하늘 집으로 데려가실 것이다.”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갑니다. 팬은 입술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제자는 예수를 따라갑니다. 팬은 기도하고 찬양하는 데서 그치지만, 제자는 자신의 삶을 예수께 바칩니다.

 

팬이었다 제자가 된 니고데모

산헤드린 회원인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남몰래 예수님의 팬으로 남아 있으면 잃어버릴 것이 별로 없지만, 제자의 길을 걸으려면 그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밤에 찾아온 이유입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요 3:2). 때때로 예수님과 동행하려면 직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인정과 인기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팬은 예수님 때문에 삶이 조금 변하는 것은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삶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은 결코 허락하지 않습니다. 팬은 약간의 손질만 하고 예수를 따르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깊은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십니다. 팬은 교리와 가르침만 받기 원하지만, 예수님은 복음과 말씀에 순종하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밤에만 찾아오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낮에도 만나서 동행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초청이 니고데모에게는 매우 거북한 부담이 되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예수님을 고소하는 산헤드린 회의가 열렸는데 니고데모는 처음으로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옹호하게 됩니다.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요 7:50, 51). 니고데모는 더 이상 믿음을 마음속에만 간직할 수 없었습니다. 직장을 잃어버리고, 평판이 망가지며 인생 전체를 위험에 빠트리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 니고데모가 팬의 길을 떠나 제자의 길로 접어든 때입니다. 산헤드린 회원들이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고 위협했지만, 니고데모는 갈릴리 출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서기 1세기의 어느 날, 그는 예수를 위해 순교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더이상 숨기지 말아야 한다

미국에서 “당신은 중고차 세일즈맨 같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상대방의 인격을 매우 모욕하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중고차 세일즈맨은 100% 진실을 말하는 대신, 50% 진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팔려고 하는 자동차의 문제점은 말하지 않고, 좋은 점만 과대 포장하기 때문에 중고차 세일즈맨의 신뢰도는 매우 낮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100%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50% 진실도 아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교인 숫자가 줄어들고 매출이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서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대가가 무엇인지 말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제자가 되는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노아는 산 위에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고 생애를 바쳐서 방주를 지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 이집트의 왕 앞에 목숨을 걸고 서야만 했습니다. 다니엘은 페르시아 왕의 명령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에게 경배하지 말라”는 둘째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풀무 불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대가를 처절하게 지불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그러나 오늘날 설교자들은 마치 중고차 세일즈맨이나 텔레비전 쇼핑호스트처럼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부담을 주는 것은 최대한 감추고, 세속적인 정욕을 충족시켜 주는 것을 최대한 강조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단 한 번의 회개로 죄를 모두 용서받고 영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불타는 지옥을 피해서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설교보다 더 노골적인 설교들도 많이 있습니다. “돈방석에 앉고 싶습니까? 들어가나 나가나 복 받고 싶습니까? 누구든지 예수를 영접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서 준비해 놓으신 건강과 재물을 통째로 받을 수 있습니다. 죄를 버릴 수 없지만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가질 수는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안수받으면 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설교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전형적인 팬클럽 회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팬들은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주는 ‘종합 선물 세트’와 같은 복음을 원합니다. 그리스도 팬클럽 회원들이 교회를 향해서 하는 요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고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라는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주일마다 교회 가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식사 기도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동차 범퍼에 예수님 물고기 표시를 붙히고 뒷 창문에는 ‘I love Jesus’ 스티커를 붙히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제 삶이 방해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진실은 이것입니다. “회개 없이는 용서도 없습니다. 죄를 버리지 않는 회개란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개혁이 없는 신앙은 자기 기만입니다. 의의 열매가 없는 은사는 사탄의 미혹입니다. 모든 축복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사도 야고보의 가르침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됩니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8, 9).

 

어떤 비용과 대가가 필요한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팬클럽을 갖고 있는 단체는 기독교회입니다. 수백개의 교파들이 저마다 거대한 팬클럽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들 모두 그리스도를 슈퍼스타로 모시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팬클럽 회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5~27). 온 마음과 생애를 바쳐서 그리스도를 따를 때, 때때로 부모의 반대를 받을 수 있습니다. 호적에서 이름을 파 버리겠다는 호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제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가족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미워하라”는 표현은 제자의 길을 걷기 위해서 예수님을 어느 정도까지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쪽 마음으로는 결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할 때, 모든 사람은 제자가 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비용과 대가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눅 14:28~30).

예수께서는 제자가 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미리 정확하게 계산해 본 후에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팬들은 비용과 대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계약금도 필요 없고 원금도 없이 공짜로 하늘 집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편안하게 예수님을 따라다니지만, 결국에는 제자 되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도무지 너를 모른다”는 예수님의 선언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제자되는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직장을 잃어버릴 수 있고, 가족을 잃어버릴 수 있으며, 심지어 목숨까지 잃어버릴 수 있음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제자인가?

태어나면서부터 좁은 길을 좋아하고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거듭나고 변화된 마음을 가진 사람만 제자의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성령께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과 생애 속에 역사하시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펼쳐지면서 그리스도께서 거하시게 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예수의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는 변화가 일어나는데, 변화는 품성과 습관에서 나타나고 생활 속에서도 나타나게 됩니다. 과거의 옛 생애와 현재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신앙과 품성은 일시적 선행이나 일시적 악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표현되는 말과 행동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과 은혜 없이도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는 도덕적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예의 있게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자존심 때문에 누추하고 비겁한 모습을 감출 수도 있습니다. 이기심을 품고 있는 사람도 너그럽게 행동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사탄 중에서 누구의 편에 속했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누가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누구에게 가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십니까? 여러분의 애정과 관심이 어디에 몰려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면 여러분의 생각은 그리스도께 있을 것이며, 그분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는 바에 따라 몸과 마음과 생애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일하게 될 것이고,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하고 주께서 무엇을 좋아하고 기뻐하는지 살피게 될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그분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할 것입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성령의 역사 이전과 이후는 분명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전에는 미워하던 것을 지금은 사랑하게 되고, 전에는 사랑하던 것을 지금은 미워하게 됩니다. 교만하고 자기 주장만 하던 사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며, 허영심이 많고 거만하던 사람이 침착하고 조심스럽게 됩니다. 술을 마시던 사람이 절제하게 되고, 방탕하던 자가 깨끗한 자가 됩니다. 세속적인 습관과 허영을 버리게 됩니다. 외모 단장에 힘쓰지 않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단장할 것입니다(벧전 3:3, 4).

하나님의 영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 분명한 증거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기를 좋아하고 의를 사모하며 가난한 자의 멍에를 풀어 주고 도둑질한 물건을 돌려주며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 그분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입으면,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서 샘솟게 됩니다. 예수께 나가 모든 짐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말씀과 계명은 가벼운 것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즐거움이 되고 희생은 기쁨이 됩니다. 흑암으로 덮였던 인생의 길이 의의 태양으로 환해지게 됩니다.

 

제자가 되기를 소원하는 분들께 드리는 말씀

각 교파마다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제자의 길을 걸어가기를 소원하는 소수의 진실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이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면 삶 속에 문제가 많고 성품에 결함이 많은 것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 내가 성령으로 거듭났는가?”라는 의심을 품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낙심하여 뒤로 물러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8).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 속에는 자신의 부족과 문제 때문에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우리가 낙담 속에 빠질 때 기도를 통해서 하늘로 올라가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나가 낙망과 좌절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은혜와 위로와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사탄에게 정복당했다고 느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거나 거절하거나 배척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말하기를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예수께서도 우리가 죄 때문에 스스로 낙망할 것을 염려해서 “하늘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6:27).

죄를 범했을 때, 유일한 해결책은 가난하고 애통하는 심령으로 그리스도 앞에 나가 죄를 버리는 것입니다. 참된 중생을 경험했을지라도 유혹을 받을 수 있고 죄의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사탄의 유혹과 죄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와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혹시 죄를 범했을 때에는 빨리 그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문제는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죄를 움켜잡고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범했기 때문에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애 전체를 주님께 바치는 경험을 반드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쳐야만 우리 속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제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반드시 이해해야 할 영적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예수께 가까이 갈수록 내 자신의 허물이 더 많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 보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께서 영적 눈을 더 밝게 해 주시고, 양심을 예민하게 해 주셔서 우리 자신의 부족과 감추어진 이기심을 예수님의 완전하신 성품과 비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는 예수님과 나의 차이점이 희미하게 보였지만, 예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내 자신의 공로와 행함과 선함을 자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주 앞에 나가 머리를 조아리고 겸손하게 됩니다. 더욱더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됩니다. 더욱더 성령의 도우심과 은혜를 간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변화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성품과 생애를 날마다 바라보고 그것을 닮고자 하는 거룩한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이런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사탄의 미혹이 힘을 잃어버리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께서 생명력 있는 감화를 통해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성령께서 성도 여러분의 마음 깊숙한 곳을 만져 주셔서 주님을 위해 생애를 남김없이, 후회 없이 바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주여,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여 주소서!” ■

 

1부, 팬클럽 회원입니까? 제자입니까?

인기 연예인이 인천공항으로 입국하면, 공항 전체가 마비될 정도로 팬클럽 회원들이 모여들고 환호합니다. 인기 가수와 영화배우들은 어디를 가든지 군중으로 휩싸이게 되는데 그런 모습은 그들이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많은 아이돌 가수와 배우들이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인기가 높을 때에는 팬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지만, 인기가 떨어지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팬들은 자신을 즐겁게 해 주고 행복하게 해 줄 때는 열광하면서 따라다닙니다. 그러나 인기가 떨어지고 더 이상 자신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지 못하면 여지없이 등을 돌리고 떠나는 것이 팬클럽 회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아무리 열성적인 팬클럽 회원도 가수처럼 목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지 않고, 배우처럼 혼신을 다해서 연습하지 않습니다. 팬클럽 회원은 가수와 배우의 공연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박수 치고 즐길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슈퍼스타 그리스도”를 지지하는 팬클럽 회원으로 가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스승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서 배우는 제자처럼,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을 순종하고 생애로 받아들여서 살아 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피묻은 길을 함께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팬클럽 회원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찬양하고 기도할 때는 열성적인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고난 속에서도 진리에 순종하고 좁은 길을 걸으라고 명하시면 등을 돌리고 떠나갑니다.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신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그분께서 나의 삶을 간섭하는 것은 싫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때때로 충격적이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명령하면 팬클럽 회원들은 모두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마 16:24). 교회나 교파가 주는 ‘안전감(?)’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들도 결국에는 진리를 버리고 떠나갑니다. 기독교 신앙을 단순히 “복을 받고 지옥을 면제해 주는 공짜 티켓”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참 이상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구세주인데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화평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들의 마음에만 허락되는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절하는 마음마다, 가정마다, 교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검이 되어 양심에 가책을 주고 화평을 깨뜨립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길에는 외로움과 곤란함과 핍박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을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환호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셨을 때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높이 외쳤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떡과 물고기를 나눠 줄 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그와 똑같은 일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이름을 외치는 팬클럽 회원은 많은데 제자가 없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팬들이 원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께서 나눠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구원과 복과 건강과 재물은 좋은데,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께서 구원하시는 사람은 예수를 말로만 따르고 그분께서 나눠 주시는 복을 받아 챙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삶을 바치는 제자를 찾고 계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피 묻은 깃발을 붙잡고 서 있는 영혼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편안하게 객석에 앉아서 구경하고 환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링 위에 올라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히 12:4). 매주 교회에 몰려와 예수님을 응원하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정말 적습니다. 팬은 맑은 날에만 그리스도를 찾지만, 제자는 폭풍우가 내리치는 날에도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붙잡고 서 있습니다.

천국의 문은 육신의 떡이 아니라 생명의 떡을 먹기 위해서 그리스도께 나오는 성도들을 위해서 활짝 열릴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예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시자 육신의 떡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습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세속적 필요를 위해서 따르던 팬들은 모두 예수를 떠났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던 군중 대부분이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렇게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복음을 전하셨지만, 십자가에서 홀로 외롭게 죽어 가야 했던 것입니다.

 

숫자가 아니라 헌신의 깊이

예수께서는 떠나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생명의 떡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서 그들의 입맛에 맞게 복음의 질을 떨어뜨리지도 않으셨습니다. 부자 법관이 찾아와서 구원의 도를 물어보았을 때에도 그가 듣기 원하는 말씀을 주시는 대신 그가 받아야 할 말씀을 주셨습니다. 부자 법관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부자 법관의 마음을 얻으면 큰 교회 몇 개를 짓고 수많은 군중을 모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1,22).

오늘날 기독교회의 문제는 장사꾼이 물건 값을 낮춰서 많은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려고 애쓰는 것처럼, 복음의 표준을 낮춰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싸게 나눠 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대가를 분명히 지불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너무나 값싸게 팔고 있기 때문에 싸구려 복음을 받고 들어온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수많은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은 참된 제자의 길을 찾지 못해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방황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을 편안하고 편리한 길로 포장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지만, 교회는 제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팬들의 모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기독교회는 거짓말을 중단하고 세상을 향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동안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된 것은 저희들의 죄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은 교인의 숫자가 아니라 헌신의 깊이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우리를 부자로 만들고, 복 많이 받게 하려고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속과 죄로부터 구원해서 하늘로 데려가시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위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좁은 길을 걷는 제자가 되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 가난하고 힘들고 업신여김을 받을지라도 진리의 길을 걸어가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설문 조사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몇 해 전에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라는 설문 조사가 있었습니다. 몇 퍼센트의 사람들이 자신을 제자라고 생각했을까요? 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제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답변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당신은 왜 자신을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어떤 답변이 나왔을까요? 이런 종류의 답변들이 나왔습니다. “나는 모태로부터 교인이기 때문에 제자입니다. 나는 설교 들을 때 크게 아멘이라고 화답하기 때문에 제자입니다. 나는 방언을 하기 때문에 제자입니다. 나는 주말마다 교회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기 때문에 제자입니다. 나는 성가대와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제자입니다. 나는 자녀들을 미션 스쿨에 보내기 때문에 제자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신앙이 좋기 때문에 제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제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왜 제자라고 생각하시나요?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내린 평가를 모르는 사람들은 “평균 이상이면 안전하다.”라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내린 예수님의 평가를 읽어보아야 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5~17).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몸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부족하기 때문에 영적 빈혈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유혹에도 쓰러지고 넘어지게 됩니다. 진리가 인도하는 좁고 험한 길을 활기차게 걷지 못합니다. 잠시 잠깐이면 사라질 것들에 욕심을 내고 이기심에 붙잡혀 죄를 범합니다.

예수께서 주신 가장 두려운 경고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데 스스로 제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우리는 그리스도의 팬클럽 회원이 될 것인지 아니면 제자가 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좁은 길을 피해 가는 사람들, 진리가 무엇인지 관심 없는 사람들,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 팬으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어떤 미국 목사님이 목사가 가장 하기 힘든 설교는 이런 설교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참으로 멋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좋은 집을 갖고 있고 좋은 직장을 갖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아내와 착한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좋은 자동차와 좋은 집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삶이고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과 삶에 예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설교는 충격적이지만 진리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뜨겁게 찬송하고 예배드려도,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경험해도, 우리 마음과 생애 속에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느끼는 감정, 소유하는 재물과 물건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침 해가 뜨면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들입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입에서 나온 생명의 말씀이 없으면 우리 인생 전체가 무가치합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설교를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만 맺으면 구원받습니다.” 그 말은 정말 진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말 올바로 맺어져 있다면 마음과 생애 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서 구원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만 잘되어 있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대개 이런 간증을 합니다. “이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었으니까 오늘부터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었을 때, 죄와의 관계도 새로워졌습니까? 세상과 돈과의 관계도 새로워졌습니까? 아내와 남편과 자녀와의 관계도 새로워졌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관계가 정말 올바로 맺어져 있으면, 모든 관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돈과의 관계가 달라집니다. 원수와의 관계도 달라집니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도 달라집니다. 권력이나 명예와의 관계도 달라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말 올바로 되어 있으면,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살지 않게 됩니다.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게 되며 의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한국 대통령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 인생이 달라지게 됩니다. 미국 대통령이나 중국의 주석과 개인적인 친분 관계를 맺으면 인생에 놀라운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 우주의 통치자, 창조주 하나님과 만나서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 어떻게 될까요?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데,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변화이고 “거듭남”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진리를 소홀히 여기며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지만, 거듭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높은 권위를 차지하게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사랑하던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무시하며 소홀이 여기던 의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에 대한 미움이 점점 더 커져 가고 있습니까? 의에 대한 사랑이 점점 더 커져 가고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절함과 충성이 점점 커져 가고 있습니까? 이런 경험이 흔들리거나 불분명하게 되면, 예수님의 손을 놓고 제자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의 팬클럽 회원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사탄은 그런 사람들을 불의와 이상한 경험으로 끌고 갑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우리가 있는데, 우리 마음에는 예수께서 거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헛되고 허무하고 황폐하게 됩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잃어버림을 당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더 기쁨을 느끼고, 더 행복해지고, 더 큰 복을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원하는가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는가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은가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내 마음에 계시고 내가 예수 안에 있는가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4~7, 10).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악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손에서 놓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속에 어떤 아픔과 상처를 주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죄를 붙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정말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에 날마다 물 마시는 것처럼 죄를 마시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죄인이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는데서 멈추지 말고, 죄를 버리는 경험까지 나가야 합니다. 오랫동안 아끼고 애지중지하던 죄를 끊어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깊은 아픔을 주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게 만든 죄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그런 회개와 헌신을 드리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하늘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사람의 마음속에 참된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비록 진리를 따르는 길이 좁고 험할지라도 분명한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걸어가게 됩니다. ■

 

 

서론, 98%입니까? 2%입니까?

몇 해 전에 미국에서 흥미 있는 설문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설문 내용은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이 교회 다니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는데,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정말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오직 2%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교회 다니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 사람들만이 성경 말씀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네마다 교회가 있고 주말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는데, 성경 말씀을 알기 원하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교회를 다니고 있는 교인들이 2%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98%의 사람들도 매주 교회 다니고 찬양하고 기도하지만, 성경 말씀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98% 교인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찬양이 좋아서, 어떤 사람들은 병 고치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비즈니스를 위해서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 활동 때문에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더 밝은 빛을 사모하고 더 밝은 진리를 알기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전체 기독교인 중 2%밖에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나라마다 조금씩 달라질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일수록 말씀을 사모하는 교인들의 퍼센트는 높아지는 경향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미국이나 한국처럼 산업화되고 물질주의가 흘러넘치는 사회에서는 비슷한 결과가 나옵니다.

2%, 그들은 누구인가?

말씀을 사모하는 2% 사람들, 그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을까요? 낚시점에 가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는데 미끼를 주십시오.”라고 하면, 점원이 이렇게 물어봅니다. “어떤 물고기를 잡기 원하십니까?” 이 질문이 무슨 뜻입니까? 물고기 종류에 따라서 좋아하는 미끼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메기가 좋아하는 미끼가 있고, 입이 큰 베스 같은 물고기가 좋아하는 미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내가 좋아하는 말씀의 종류가 다릅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말씀을 좋아하십니까? 바로 그것이 여러분이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인인가를 나타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설교를 좋아하고, 어떤 말씀에 관심을 나타내고 감동하십니까? 그것에 따라서 여러분이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인인가가 결정되고, 여러분의 신앙과 인생이 꼴 지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2%의 그리스도인들, 그들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일까요?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성경 지식이 부족하고 어려운 교리를 잘 모를 수 있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빛대로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서 더 밝은 빛으로 나가기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이리저리 핑계 대면서 도망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진리가 무엇인지 살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들려오는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자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그들은 혼돈 속에 있는 교회를 깨우고 옛날 침례 요한이 외쳤던 광야의 소리와 같은 메시지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킬 말씀에 갈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평범한 말씀보다는 자신의 필요를 채워 주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가야 할 분명한 길을 제시해 주는 말씀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98%의 사람들은 왜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고 더 밝은 빛으로 나오지 않으려고 할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현재 상태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 형편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영적으로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데, 벌거벗고 있는데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말씀을 들어도 흔들리지 않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혼의 공허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찾지 않고, 말씀이 와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좁은 길을 걷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예수께서는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넓은 길을 걸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사도 바울은 말세에 사람들이 좁은 길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1~4). 바로 이것이 지금 이 세상과 교회를 뒤덮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아주 적은 사람들만 말씀을 사모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속적 분위기에 압도되어 좁은 길을 걸으라는 말씀이 들려올 때, 모른 척하면서 외면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거룩하지� 않으며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기 때문에 말씀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2%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곁을 지나갈때 금세 눈치채고 그것을 붙잡습니다. 그들은 영적 예민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 밝은 빛, 더 밝은 말씀이 지나갈 때 그것을 놓치지 않습니다. 또 누군가 나타나서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는 말씀을 전하면,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씀을 무시하고 싫어할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참된 주의 종의 증거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2% 사람들이 갖고 있는 매우 독특한 특징입니다.

두 종류, 제자들과 제자가 아닌 사람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자신의 마음과 생애를 다해서 좁은 길을 걷기 원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기 위해서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쪽에는 진리의 길이 너무 좁고 협착하다고 불평하면서 넓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문제는 이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말씀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한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듣기 원합니다. 때때로 마음이 아프고 받아들이기 힘겹지만, 성경 말씀 그대로 전하는 설교와 글을 찾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큰 희생과 헌신을 요구해도 그것을 자신에게 필요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말씀을 원합니다. 재미있고 부드러운 설교를 듣기 원합니다. 넓고 쉬운 구원을 찾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주고 희생을 요구하는 말씀은 거절합니다.

지금 이 두 무리가 교회 안에 섞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세의 이런 교회를 향하여 구원의 초청을 보내고 계십니다.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말씀에 기갈이 들고 목마른 자가 너무나 적습니다. 제자의 길을 걷기 원하는 자가 너무 적습니다. 그래서 결국 적은 숫자만이 그 초청에 응하게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에 충성하기 원하는 교인들의 통계 수치가 2%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씀의 기근이 왔다!

선지자 아모스는 마지막 때에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을 예언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암 8:11, 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지자 아모스가 말세에 올 것이라고 예언했던 말씀의 기근, 그것이 이미 오래전에 기독교회를 덮쳤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갈이 들려서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해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주 수많은 설교가 흘러나오고 수많은 집회가 열리지만,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은 정말 찾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회개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이 펼쳐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나가는데 영혼이 살아나지 않고 삶에 변화가 없다면, 여러분은 지금 말씀의 기근 속에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찾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려운 시험에 도전하는 고시 준비생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리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의 낙오도 없이 생명의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2%, 98%와 같은 통계숫자는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참된 제자의 길을 걷기 원하고 정직한 양심으로 성경 말씀을 읽으면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사명> 8호에서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을 보여 드릴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번 호에서 새로운 빛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더 밝은 빛 때문에 오래된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동일한 빛 때문에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살피신다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

8호를 시작하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찬송 부르지만, 생명을 잃어버린 채 외로움과 허전함과 절망감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좁은 길을 힘차게 걸어가야 하는데, 돈과 세상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마음이 냉랭해지고 영혼이 말라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마음 밭을 옥토로 만들고 싶고 묵은 땅을 깊이 갈아엎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부터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된 후 100여 년이 지나면서 개신교 신앙은 시들고 병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인 요한 아른트 목사는 다음과 같이 교회의 세속화를 책망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한 걸음씩 따라가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기독교 신앙은 지식이나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걷는 길은 아무나 갈 수 없는 길인데, 그 이유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마음과 생애를 주님께 바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는 비결에 대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내려놓는 신앙을 간절히 사모해 온 분들은 이번 호를 읽으면서 환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나의 길을 인도해 오셨다.”라는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깊이 파헤쳐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을 새겨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

<마지막 사명>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