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미국 남침례교회 폴 워셔 목사님의 글을 편집해서 정리한 내용입니다. 이 글은 매우 강력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빛을 향해 나가는 성도들에게 성령의 음성으로 전해지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마지막 사명 편집실>

예수께서는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여름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여름이 오고 겨울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겨울은 오는 것처럼,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않고,기다리지 않는 사람들도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장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구에 사는 사람 중 한 사람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의 최종 결론입니다. 재림이 없다면 부활의 소망도 없고, 그리스도를 믿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르는 상태에서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음 질문에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오실 때, 어떤 사람들이 구원받게 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 속에서 찾을 때마다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수많은 문제 속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지적하시는 문제를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13~27)

설교 문제

진리를 정확하게 전하려면, 사람의 눈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자들이 어떤 설교를 듣고 싶어하는지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직자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면서 걱정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내 설교를 매주 듣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서 준비되고 있는가?”입니다. 설교자는 “내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정말 죄를 버리는 회개를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하지 않으면 교회 신자들 대부분이 지옥불의 형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8~10).

세속 문제

오늘날 기독교인의 신앙이 성경 말씀과 상관없는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내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가든지 구원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처럼 살면서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 장로님도 그렇게 살고, 저 집사님도 그렇게 사니, 나도 이렇게 살아도 돼.”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교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고, 세상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내 구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나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 들어온 가장 멋진 이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예수님께 “제 마음에 들어와 주세요.”라고 기도만 하면 예수님은 항상 그 사람의 마음속에 거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30년 전만해도 기독교 안에서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구원이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반드시 회개가 동반되어야 하며 죄로부터 돌아서는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을 나도 싫어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것을 나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성장하는 사람은 세속을 의미없고 유치한 것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을 흉내내거나 닮지 않게 됩니다.

30년 전에는 교인들이 숨어서 영화를 보고 몰래 술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교인들끼리 모여서 영화관에 가고 어울려서 술 마시러 갑니다. 많은 집사님과 장로님이 이제는 거룩함이 무엇인지 모르며 관심도 없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구원 문제

50년 전에는 진리는 하나라고 가르쳤습니다. 오직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만 구원받는다고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진리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진리는 사지선다형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원하는 것을 골라서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50년 전에는 구원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너무나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께 오지도 않으며 하나님께 반역하고 계명을 범할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선한 일을 한 것같지만 내면 깊은 곳에는 나를 높이는 정신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준 적이 있지만 깊이 살펴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고자 하는 정신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녀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런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가난한 심령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과 사랑을 바라보면, 성령을 통해서 하늘의 생명 에너지가 마음과 생애 속으로 흘러들어가면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게 됩니다. 중생의 경험 속에서, 마음 깊은 곳에 은근히 깔려있던 교만과 자랑, 세상에 대한 욕심과 정욕은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육적인 것들이 내 속에서 충동질해도 진리와 성령의 음성을 따라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마음이 전격적으로 달라지게 됩니다. 전에는 눈치보고 두려워하면서 억지 신앙을 했고, 늘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살았지만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내 온 몸과 마음을 바쳐서 충성을 바치는 대상이 하나님 한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감추고 싶은 죄와 우상이 없기 때문에 영혼에 평안이 깃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충성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받는 경험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복음을 위와 같이 설명하면 이런 항의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죄가 많을지라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한 번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결코 예수님이 우리를 버릴 수 없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다음과 같은 말씀은 사도들이 구원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0~22)

거룩함 문제

요즘 젊은 목회자들 중에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인을 정죄하거나 미워할 수 없습니다. 죄와 불순종 때문에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도덕률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그런 신앙은 행위 신앙이고 율법주의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만 바라보세요.” 나는 그런 목회자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책망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가 마약에 빠져 사는 것을 미워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녀가 마약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사랑하게 되면 거룩하지 않는 것들을 미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거룩함을 잃어버렸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것들 중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1:32)

어떤 사람들은 기도회에 가기 전에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갑니다. 그리고는 “왜 나에게는 성령의 감동이 없고 뜨거움이 없는가?”를 고민합니다. 마음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뜨거움을 만들어내려고 애쓰고, 억지 감동을 얻기 위해서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방언을 해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후에는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불안을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영께서 내 안에 임재하지 않으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섞지 말아야 합니다. 왜 섞으면 안 될까요? 왜냐하면 그 둘이 섞이면 사탄에게 미혹당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거룩하지 않은 것을 통해서 영혼을 채갑니다.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신 22:9~11)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계 21:27)

십자가와 죄 문제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이 씌워졌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창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관통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로마 군인이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이유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 우리의 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죄를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떨어졌어야 할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아들에게 떨어졌던 것입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죄의 댓가를 치루어야만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누군가는 지옥불의 형벌을 받고 멸망당하는 둘째 사망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서운 죄의 댓가를 치루도록 아들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죄 때문에 하늘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루스벨과 그를 따르는 천사들이 하나님 곁을 떠났습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그리스도)과 그의 사자들이 용(사탄)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계 12:7, 8).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깊은 슬픔과 상처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진노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입니다. 십자가는 죄가 너무 치명적이고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마저 죽음으로 내몰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죄를 범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지옥을 경험하면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진노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대로 받으시면서 죽음의 길을 끝까지 걸으신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부터 예수께서는 이미 피의 잔을 들이키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죄의 값을 온전하게 치루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이것이 십자가 복음입니다. 그런 사랑과 죽음을 보여주신 후, 예수께서 우리를 좁은 문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 중 누가 문이 너무 좁다고 불평할 수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17~20)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좁은 문과 좁은 길 문제

구원은 주기도문을 외우거나 “나는 회개했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내가 주님을 영접했습니다.”라고 말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마음과 생애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짐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번 거듭나면 영원히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예방주사처럼 한 번 경험하면 무조건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했습니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계속해서 죄를 회개하고 버리고 계십니까? 지금도 계속해서 자아를 부인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그 일을 끝내지 않으셨는데 내 마음대로 그 일을 중단하고 “나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너희 속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우리는 복음의 중요한 가르침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문만 좁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에 가는 길도 좁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교회로 인도한 후, “이제 당신은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남은 인생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도 됩니다”라는 인상을 주면 안됩니다.

천국가는 길에는 좁은 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도 있습니다. 50년 전에는 교회에서 “좁은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한다.”는 설교를 거의 매주 들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예수께서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표적은 좁은 길을 걷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표적을 무엇으로 제시합니까? “한 번 영접기도를 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신자가 구원에 대한 확신이 부족할 때, 교회가 무엇이라고 말해줍니까? “당신은 영접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지금 너무나 쉽게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누가 교회에게 그런 자격을 주었습니까?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과 동기를 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위해서 전혀 준비 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지금 현재 상태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세례받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지금 교회는 진리를 말하지 않으며 진실을 숨기고 있습니다.

갤럽 조사, 바너드 조사, 그외 어떤 통계 조사를 볼지라도 기독교인들의 삶과 세상 사람들의 삶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지금 교회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교회도 세상만큼 돈을 사랑합니다. 교회도 세상만큼 이혼합니다. 교회도 세상만큼 포르노를 보고 있습니다. 교회는 지금 한입으로 세상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약 3:10, 11)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3~15, 20)

신학대학 문제

오늘날 기독교회를 부패하게 만드는 대부분의 교리는 신학대학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교인에게도 구원을 선언해 주는 교리와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교리 대부분이 신학대학에서 만들어지고 있는데, 그런 곳에서 졸업장을 받고 목회에 나서는 성직자의 모습을 보면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진리로 세우신 좁은 길을 넓히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거듭나지 못한 마음과 세속적인 정신을 기준으로 성경을 재해석하는 일들이 꾸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Once saved, always saved.”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교리, “믿기만 하면 내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구원받는다”는 교리, “계명은 십자가에서 폐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교리들이 교회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악인에게 “의롭다 하심(칭의)”을 선언해 주는 교리 때문에 교회 속에 세상이 깊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악인을 의롭다고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사 5:20, 23)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 15:8, 9)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5~9)

교회 문화와 예배 문제

요즘 교회 안에서 유행하는 말들은 기독교인들이 입는 티셔츠 뒤에 쓰여진 문구들에서 나옵니다.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는 많은 말들이 영화나 드라마의 대사나 복음성가의 가사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예배 형식이 기도와 금식과 성경 연구를 통해서 결정되어야 하는데, 세상 문화와 트랜드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습니다. 먼저 티셔츠나 복음성가에 나오고, 세상 문화와 트랜드에 의해서 만들어지면, 그것을 성경 말씀으로 포장해서 교회에 내놓습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양들은 그것을 마치 불변의 진리처럼 따라가게 됩니다. 지금 교회 안에 새롭게 나타나는 대부분의 예배 형식과 아이디어들은 그렇게 만들어 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1~13)

여기에 희망이 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받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를 구원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예수께서도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그분의 사랑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십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모두 행복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을 “천국행”과 “지옥행”으로 미리 정해놓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은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면, 왜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합니까?”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 거절하고, 양심에 호소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호소하셨던 것입니다(행 26:14).

구원을 거절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정말 중요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대항해서 싸우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이끄셔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했으며(딛 2:11),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고 했습니다(히 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인데, 그것은 의롭게 하고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저항하고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마지막 시대에 구원받게 될까요? 심령 속에 진리에 대한 목마름과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구원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이르러 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구원이 이르러오자, 그녀는 값비싼 옥합을 깨어서 예수님의 발에 쏟아부었습니다. 삭개오에게 구원이 찾아오자, 예수님께 죄를 고하고 자신이 토색질한 것들을 4배로 돌려주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진리에 대한 간절함과 목마름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고 천국 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 아버지의 큰 사랑와 은혜를 보면서 회개하고 죄를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충성하는 백성으로 준비시켜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진리의 빛을 주셔서 바벨론의 거짓 복음과 거짓 가르침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본 사람들은 결코 사탄이 교회 속에 넣어둔 거짓에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과 희생을 깨달은 자녀는 결코 부모를 배반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죄와 배도 때문에 고통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해드리고 싶은 소원이 마음을 채울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혀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내 구원, 내 자녀, 내가족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고통받는 이웃과 가난한 자들의 손을 붙잡아 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율법주의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신앙의 중심에 하늘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충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영적 교만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나보다 부족한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남들에게는 자비로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가난한 자와 어려운 자들을 돕고 위로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흰옷을 입고 있다고 했습니다. 흰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순결하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동기와 생애가 순결하다는 것입니다. 순결하다는 것은 내 생각과 내 상식과 내 철학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얻어진 순결이기 때문에, 그것은 내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계명에 불순종하며,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고 동안에는 순결함이 있을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성도에게 의의 옷을 입히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부드럽게하고,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끌려가게 됩니다. 그리스도께 가기 위해서 억지로 애쓰는 것이 아니라 끌려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를 끌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가는 것입니다. 원해서 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은 구원받지만, 진리의 이끌림을 거절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은 멸망당하게 됩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12:35).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이지만, 그것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될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지식적으로 깨닫는데서 그치면 구원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 가슴에 새겨진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그리스도인은 내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할 필요도 없고, 목사나 장로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마음의 동기와 영혼의 순결함입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며, 누구를 위해서 살며, 왜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깊숙한 곳을 보시면서 기뻐하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주변 사람들이 진리를 무시하고 돈과 세상을 사랑할 때, 여전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의지하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기 위해서 순종하지 않습니다. 지옥불을 피하기 위해서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순종은 구원받기 위한 목적이나 수단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호소

교회를 바라보면 마음이 아프고 깨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부모님과 자녀와 형제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음성을 듣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가 지금 어떤 모습인가를 잘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책망을 들었을 때 목을 세우지 말고 자존심을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예수께서 피와 죽음으로 세우신 진리를 붙잡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재림을 위해서 준비시켜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