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한 큰 그릇으로 쓰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이룩한 놀라운 사업과 희생에 대하여 스스로 교만해질 수 있는 위험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스스로 자신을 높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높여질 위험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바울의 몸을 괴롭혔던 질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세 번이나 그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울의 육체에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가시는 바울의 육체 속에 남아서 일평생 고통을 주었습니다. 바울이 “사탄의 사자”라고 불렀던 그 육체의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의 구원을 위하여 남겨진 바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은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후 12:7~9).
가장 많은 신약 성경을 기록하였고, 제자들과 사도들 중에서 가장 많은 전도 여행을 하였던 위대한 사도 바울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려도 치유를 얻지 못하는 이유를 믿음이 부족하거나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매우 비성서적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병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하게 낮추기 위한 경험이 어떤 것이며, 또한 언제 그러한 경험들이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바울을 생각하면서 “하물며 바울과 같은 사람도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는데, 나처럼 연약하고 쉽게 교만해질 수 있는 사람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더욱 필요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자세입니다. 바울과 같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 불평할 수 있을까요?
고통은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찾아옵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교만을 치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주 사용하시는 치료책이 우리의 육체에 가시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과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불평과 좌절의 세월을 보낼 수도 있고, 그분의 뜻을 겸손히 받아들이면서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몸에 가시를 허락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을 당할 때에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시련에 대한 만족할만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는 이유를 발견했지만, 어쩌면 우리는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이유를 모를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비통함과 슬픔을 이해하시며 동정하시는 그분의 위로를 받으면서 견뎌야 합니다. 혹시 지금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습니까? 어쩌면 지금보다 더 겸손하고 온유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기 위하여 고통의 훈련학교를 통과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67, 71).
고통, 봉사를 위한 준비 과정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보냈던 편지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이 고난을 통하여 어떻게 승화되었는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경험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찰 정도로 발전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바울의 봉사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고통을 많이 받을수록 시련과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준비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돕고 어떻게 동정하실 줄을 배우셨던 것처럼, 바울 역시 고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 1:3~7).
이 말씀에서 바울은 고통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는 고통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고통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에 마음을 쓰기보다는, 고통을 통하여 자신이 좀 더 동정적이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사실로 인하여 감사했습니다. 바울은 고통을 통하여 고통 받는 자들의 심정을 좀 더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게 되었으며, 더욱 유능한 전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고통은 봉사를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고통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육체를 쓰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인류를 위한 봉사를 위함이었습니다.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함에 싸여 있음이니라”(히 5:2).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과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 9).
사람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투병 생활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병자들의 느낌과 절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셨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히 2:18). 예수께서는 가장 많은 고통을 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우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위로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고난의 왕이시며, 또한 위로의 왕이십니다.
바울이 그토록 갈망했던 것이 바로 이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경험하셨던 그 방법 외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자비롭고 은혜롭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그는 고난의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경험을 알게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통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었으며, 남겨진 육체의 가시에 대하여 만족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인생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쉽게 낙심하게 되며,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없고, 위로해 줄 수도 없습니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의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그와 비슷한 경험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도와줄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 고통 중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대를 더 나은 봉사를 위해서 준비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음을 겸손히 낮추고, 그대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명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