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요 10:11-13)
삯꾼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삯꾼은 자기 양을 돌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삯을 받고 다른 사람의 양들을 지켜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삯꾼의 마음에는 양들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책임감이 없습니다. 삯꾼에게는 주인에 대한 충성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삯꾼에게 맡겨진 양들은 들짐승에게 늑탈당하고 해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삯꾼은 “내가 양들에게 어떤 꼴을 먹여야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양이 아니라 삯입니다. 그들은 양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삵꾼의 모습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교회 안에 있는 목자들에 대하여 충격적인 말씀을 했습니다. 에스겔서 34장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찐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겔 34:2-3)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들을 섬기고 율법사들을 존경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삯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교회 안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 살찐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제사장과 율법사에게 맡기셨는데, 그들이 양에게 꼴을 먹이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양을 잡아먹고 자기 배만 부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눈에 삯꾼들은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들이 삯꾼에게 맡겨지면 이용만 당하고 참담한 삶을 살게 됩니다.
양들이 삯꾼을 따라가면 어떻게 될까요? 죽습니다. 왜냐하면 삯꾼 목자는 양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삯꾼은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서 양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위험이 오면 양보다 먼저 도망칩니다. 양들이 삯꾼 목자 아래서 머물면 강도와 절도를 만나도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삯꾼도 설교하고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삯꾼은 양을 살리기 위해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설교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설교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 성공을 위해서 설교한다는 뜻입니다. 삯꾼은 설교를 하고 말씀을 나누지만 양들을 주님께 인도하지 않고 자기에게로 이끕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삯꾼은 양들을 살리기 위해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설교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비즈니스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런 설교들이 들려옵니까? 그렇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주의 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회에서는 비즈니스같이 거대한 조직을 가진 산업형 교회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으며 수많은 교회들이 그런 흐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수많은 삯꾼들이 있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사라지고 교세 확장에 대한 이론과 방법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도 교회 성장법의 비중이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삯꾼입니까? 복음의 전파보다 교회 성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삯꾼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가 어떤 결정과 선택을 할 때 최고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어져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성경을 펼쳐놓고 “주여,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이 원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가 원하는 쪽으로 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님께 돌리게 해서 생명의 말씀을 따라가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절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큰 교회’를 세우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진리로 인도해서 순종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롬 1:5)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롬 16:26)
우리는 대중의 인정과 인기를 위해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고 전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달받은 모든 사람이 거절하고, 진리의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이 외면할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가야만 합니다. 만일 교회를 특별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아니라 아무나 모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며, 그런 교회는 삯꾼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어떤 설교가 삯꾼의 설교인가?
어리석은 양들은 진리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설교를 듣기 싫어합니다. 그것을 잘 아는 삯꾼들은 세속적인 양들이 듣기 원하는 설교를 해줍니다. 그렇다면, 삯꾼들은 어떤 설교를 할까요? 진리는 없는데 양들은 모이게 하는 설교가 삯꾼의 설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그런 설교들이 가장 인기있는 설교라는 것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내 마음과 삶이 어떠하든지 간에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저 세상에서도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식의 설교들, 그런 설교가 삯꾼의 설교입니다. 왜 그런 설교가 삯꾼의 설교일까요? 왜냐하면 그런 설교는 회개를 불러일으키고 말씀에 대한 충성으로 인도하는 설교가 아니라, 교회를 키우기 위한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의의 표준을 낮춰서 사람들이 쉽게 구원받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설교들, 그런 설교가 삯꾼의 설교입니다. 왜 그런 설교들이 삯꾼의 설교일까요? 왜냐하면 그런 설교는 양들의 숫자를 늘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양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삯꾼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 열매도 필요 없고 참된 회개와 중생의 경험도 필요 없게 느껴집니다. 오늘날 수많은 어리석은 양들이 그런 설교를 듣고 싶어서 교회로 몰려들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삯꾼의 설교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주지 아니하며”(겔 34:4)
삯꾼의 설교를 듣고 그 밑에서 양식을 먹으면, 연약한 자가 강하게 되지 않고 죄로 상한 심령이 치료되지 않는 것입니다. 삯꾼의 설교를 들으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삯꾼들은 죄를 마음에 품은 사람들에게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길을 열어놓기 때문입니다. 삯꾼들은 죄를 붙잡고 있으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설교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죄를 붙잡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장 인기있는 설교는 “죄를 가지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설교입니다.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단 한 번만 예수를 영접하고 회개하면, 십자가의 속죄가 완전하기 때문에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가 완전하게 속량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구원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내 죄가 용서받았는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십자가를 감사하며 살면 됩니다.”
이런 설교 속에는 예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성도 여러분, 참된 목자는 결코 “죄를 붙잡고 있으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결코 “돈과 세속에 끌려다니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참된 목자는 양들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의 양식을 나눠줍니다. 양심적인 목자는 종종 양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곧은 진리를 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양들은 견책하는 메시지를 듣게 되더라도 그것이 진리이면 마음을 낮추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원과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의 비참함
이스라엘에는 수만 명의 제사장이 있었고 율법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목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목자가 없는 양들이 노략질 당하는 비참한 모습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겔 34:5)
오늘날에도 목자 없는 양들이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방황하다가 “들짐승의 밥이” 되는 양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다가 이상한 복음과 이상한 성령을 만나서 받아들이면, 그것이 들짐승들에게 잡혀 먹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회 속을 누비고 다니는 들짐승들의 모습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들짐승을 분별하지 못하면 그들의 “밥”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빼앗긴 양을 다시 찾아오신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서 삯꾼과 목자가 없는 양들을 말씀하신 후 기쁜 소식을 들려주십니다.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겔 34:10)
하나님께서 거짓 복음을 전하는 목자들, 진리와 생명을 전하지 않는 목자들을 대적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내 양 떼를 빼앗아 오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빼앗긴 양 떼를 되찾아오는 역사를 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강도와 절도와 삯꾼들에게 끌려간 양 떼를 찾아오는 역사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양들을 다시 빼앗아 오실까요?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빛을 양들에게 보내심으로 양들을 다시 찾아오십니다. 기적을 통해서 양들을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와 방언으로 양을 불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양들을 불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의 양우리로 들어가기 원한다면, 진리를 찾고 붙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입니다. 왜냐하면 양같이 고집 세고 교만한 사람들을 양의 문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의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은 그분의 피 때문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그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는 양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양의 문을 향해서 걸어갈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양이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어떻게 될까요? 목자의 눈짓만 보아도 그분의 뜻을 알게 됩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분의 뜻을 알게 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목자만 있으면 안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목자만 있으면 내 모든 필요가 완전하게 채워진다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양들은 목자를 온전히 신뢰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선한 목자를 따라가면 영혼의 평안이 있고, 점점 더 풍요로운 진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 양들은 목자를 따라가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고 행복이 될 것이고, 목자를 향해서 무한히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