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이 말씀은 매우 강력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살면 반드시 멸망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육체의 요구를 죽이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성령으로 육체의 요구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도 날마다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요구와 자아를 죽이면서 살았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성령이 아니면 결코 육체로부터 올라오는 악한 생각과 몸의 악한 행실을 죽일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그런 시도를 여러 번 해 봤는데 실패했습니다.” 맞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아와 육체를 부인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육체와 자아를 죽이고자 하는 노력이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 노력으로 해서 그렇습니다. 내 의지로 해서 그렇습니다. 내 노력과 내 의지로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금욕주의입니다. 그런 신앙은 바리새주의고 율법적인 신앙입니다. 내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로 육체의 요구를 쳐서 죽이려고 애쓰는 것은 한동안 잘 되는 것 같지만 어느새 실패하고 맙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로마서 7장 경험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고 깊은 좌절과 낙담에 빠지게 됩니다.

 

배 안에 들어온 물을 없애는 방법

<The Life of Jesus>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그날 밤, 제자들은 노를 저어서 게네사렛 호수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고 예수님은 배에서 잠이 들었다. 갑자기 사탄이 광풍을 일으켜서 배가 침몰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폭풍우에 때문에 밀려 들어오는 물을 정신없이 퍼냈다. 그러나 점점 차오르는 물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은 희망을 잃고 좌절했다. 자신을 구원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예수께서 선상(船上)에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사탄은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물을 배 안으로 들어가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물을 간신히 퍼낼 수 있을 만큼 배 안으로 넣어 주어야 예수님을 잊고 물을 열심히 퍼내다가 지치고 낙담하기 때문이다…우리는 얼마나 흔히 제자들과 같은 경험을 겪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의 손을 잡는다면, 주님께서는 인생의 바다를 잔잔하게 될 것이다.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마다 쉼을 얻을 수 없다.”

이 책의 저자는 사람들이 예수님 옆에서 영혼의 평안을 잃어버리도록 만드는 것이 사탄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죄의 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폭풍우 때문에 물이 배 안에 쏟아져 들어올 때, 배 안에 들어온 물을 없애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 힘으로 열심히 물을 퍼내는 방법입니다. 둘째는, 예수께서 폭풍 자체를 잠재우시는 방법입니다. 둘 중 어떤 방법이 효율적인 방법일까요? 물론 두 번째 방법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제자들처럼 자신의 힘으로 열심히 물을 퍼내면 배가 침몰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물을 퍼내다가 지쳐서 깊은 무력감과 좌절의 늪에 빠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아를 부인하고, 자신의 힘으로 육체를 죽이려고 하다가 높은 벽에 부딪쳐서 어찌할 바를 몰라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배에 물이 들어오면 처음에는 열심히 퍼내지만, 나중에는 지쳐서 물이 새어 들어와도 그대로 놔두게 됩니다. 신앙을 포기하고 세속과 죄에 젖어서 살아가게 됩니다.

물론 스스로의 힘으로 사탄의 유혹에 맞서 물을 퍼내다 보면 조금씩 요령과 기술을 터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도 꽤 신앙이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광풍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드디어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단 한 번도 온 마음을 다해서 찾지 않았던 예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교만해서 “인생”이라는 배를 뒤집어 엎을 만한 폭풍우를 만나야만, 날마다 물을 퍼내던 “애씀”을 포기하고 예수께 나갑니다. 그리고 그동안 혼자 힘으로 물을 퍼내는 노력과 시도가 얼마나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수십 년 동안 하나님을 믿었지만, 처음으로 “하늘 아버지시여, 의지할 곳 없어서 손들고 주께 갑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을 여기까지 인도해 주시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갈 수 있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성경은 “순종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강한 의지, 좀 더 굳은 결심으로 선한 행위와 순종을 만들어 내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그런데 자꾸 원치 않게 메마른 율법적 신앙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고 깊은 좌절감을 맛보게 됩니다. 나 역시 오랜 세월 동안 좌절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런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혹시 여러분 주변에 그런 분들이 있으면, 찾아가서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가서 빚진 자의 심령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육체를 죽이는 방법  

바울이 말한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는 말씀을 어떻게 우리의 삶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영감적인 답변을 줄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범하려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회개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죄에 대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려 싸우기 때문이다. 바울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다(갈 5:17). 마음속에서 성령과 육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쉼이 없는 투쟁인데,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한 곳은 바로 여기이다”(Messages to Youth, 114).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한 곳은 바로 여기이다”라고 했는데 바로 여기가 어딜까요? 우리가 시험과 유혹과 만날 때입니다. 그때 우리의 육체가 꿈틀거리면서 죄를 범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더럽고 추한 욕망이 올라옵니다. “미워하라”고 외치고, “복수하라”고 소리칩니다. “더 많이 가지라”고 유혹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저쪽 반대편에서 성령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욕심을 내려놓아라. 의의 길을 걸어야 한다. 좁은 길을 택해야 한다. 진리를 붙잡아야 한다.”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시험과 유혹 앞에서 우리는 이 두 가지 음성을 듣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 도우심을 받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는 도무지 육체로부터 올라오는 추한 욕망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내 힘으로 싸우는 전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하시도록 자리를 내드려야 합니다. 새 언약하에 사는 성도, 은혜 아래 거하는 그리스도인은 스스로의 힘으로 싸우는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싸우는 전쟁은 결국 자신을 로마서 7장의 낙담과 좌절 속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5).

편안하고 모든 일이 잘 풀릴 때는 평안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일단 시련과 유혹이 오면, 우리 마음속에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다투기 시작합니다. 그 전쟁은 둘 중 하나가 패배해야만 끝나는 전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 싸우기 때문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내 속에서 두 음성이 들려올 때, 우리는 죄의 종이 되든지 순종의 종이 되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가 우리가 예수께 나아가 도움을 청해야 할 때입니다. 바로 그때가 무릎을 꿇고 예수께 도움을 청해야 할 때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늘 성소에 계시는 예수께 나아가 성령의 음성을 따를 수 있도록 은혜와 힘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거절하고 순종의 종이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기도가 응답될 때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빚진 자의 심령으로 바뀌게 됩니다. 교만하고 이기적인 마음이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가난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그런 마음속에서 육체의 요구는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육체 속에서 올라오는 광풍이 “잠잠하라. 고요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육체의 요구를 뿌리치고 영혼의 평안을 지키는 비결입니다.

 

두 종류의 의지

그리스도인은 의지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의 의지는 너무나 연약합니다. 썩은 새끼줄같이 연약합니다. 그러나 빚진 자의 심령 속에 있는 의지는 다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늘로부터 은혜와 능력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의지는 전혀 다릅니다. 육신의 정욕과 욕심을 물리치기에 충분한 의지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감동된 의지는 악을 물리치고 선을 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깃들면 그 사람의 마음에 평안이 깃들게 됩니다.

죄와 처절한 투쟁을 했고 많이 실패하고 쓰려져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육체의 정욕이 얼마나 강한가를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시험이 올 때 예수께 더 가까이 나가게 되고, 더 간절하게 매달리게 됩니다. 큰 시험은 물론이고 작은 시험일지라도 예수께 나가게 됩니다. 사탄의 유혹과 시험 때문에 육체의 정욕과 이기심이 속에서부터 꿈틀거릴 때 자신을 의지하는 대신 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서 인기리에 퍼져 나가고 있는 복음에는 죄에 대한 투쟁이 없고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신앙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육체와 성령의 다툼과 대적이 실제로 마음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유혹을 던지면 어떻게 대처할 줄 모르고 힘없이 끌려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기만 하면 내 삶이 세속과 죄로 물들어 있을지라도 구원받는다.”고 믿기 때문에 날마다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전쟁에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싸움의 의미를 못 찾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받았는데 싸워서 뭐해?”라는 생각에 잡혀 있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께서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어떨까요?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그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죄와 싸우는 투쟁이 없는 신앙을 하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모르게 됩니다. 죄가 얼마나 악하고 강력한 것인지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께 매달리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모르게 됩니다. 물론, 투쟁이 없기 때문에 겉으로는 행복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생애는 깊이 부패해 갑니다.

참된 영혼의 평안은 빚진 자의 심령 속에만 가능합니다. 빚진 자는 겸손합니다. 하나님께 너무 죄송해서 고개를 숙입니다. 그래서 혹시 죄를 범했을지라도 금세 회개하고 통회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빚진 자는 죄를 고집하고 붙잡고 있으려는 의도가 마음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유혹과 시험이 올 때, 자신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빨리 주님께 달려가게 됩니다. 가장 연약해 보이지만 가장 강한 자가 빚진 자의 심령을 가진 그리스도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