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이 이런 고민을 말합니다. “시험받을 때마다 기도하는데 정욕과 욕심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시험에 굴복하게 됩니다. 성경은 시험이 올 때 기도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왜 나는 안될까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저는 그런 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께 생애 전체를 드렸습니까?” 이것은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신앙의 비결은 전체를 바치는 것입니다.
 
인생 전체를 바치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과 일부분을 바친 상태에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일부분만을 바친 상태에서 주님을 따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인의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습관적인 죄 때문에 넘어지고 좌절하게 됩니다. 늘 양심의 가책과 정죄받는 느낌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인생 전체를 바친 사람은 아벨의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죄와 세속을 버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아벨의 제사를 드려야 하나님께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히 11:4). 하나님께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아벨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사람은 십자가 앞에 나가 죄를 내려놓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의 말에는 은혜가 있고 태도에는 확신이 넘칩니다. 살아가는 모습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시험과 유혹이 올 때 분명하게 저항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십자가를 높이 들어 올리면서 충성과 순종을 강조합니다.
 
예수께서는 인생 전체를 바치는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치적 격변이 많고 전쟁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때때로 보물을 숨기기 위해서 밭을 깊게 파서 묻었습니다. 그러다가 밭의 주인이 갑자기 죽게 되면, 밭에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됩니다. 그 후에 밭의 주인이 여러번 바뀌었지만 아무도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주인의 밭을 열심히 갈다가 우연히 감추어진 보화를 찾게 됩니다. 얼마나 신이 났을까요?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 보화가 감추어진 밭을 샀다는 것이 비유의 내용입니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밭에 감추인 보화란 성경에 감추어져 있는 구원의 경험을 뜻합니다.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이 구원의 경험을 발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구원의 경험이 밭에 감춰진 보화처럼 감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구원의 경험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모두 그것을 발견하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이해할 수 없는 비밀로 남겨지게 됩니다. 왜 그들에게는 구원의 경험이 비밀로 감추어지게 될까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아를 내려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44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다 판다”고 했는데 무엇을 판다는 이야기인가요? 내 재산을 판다는 것인가요? 내 집이나 소유를 판다는 것인가요? “다 판다”는 말은 “다 드린다”는 뜻입니다. 내 생애 전체를 주님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내 생애 일부분만 팔아서 구원도 받고 세상 쾌락도 챙기는 것이 아니라, 내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린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사랑을 본 사람은 자신의 생애 전체를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온전한 사랑과 희생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과 충성을 기대하십니다. 우리도 부모로서 사랑과 희생을 퍼 부은 자녀들에게 그에 합당한 사랑과 존경과 효심을 기대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하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기뻐하여 돌아가서 다 팔았다”고 했습니다. 주님께 생애 전체를 드리는 것은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과 영생이 너무나 가치있기 때문에 인생 전체를 드리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은 구원 받기 위해서 억지로 순종하고, 억지로 세상을 싫어하는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쁜 마음으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감사한 마음으로 좁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여기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타락한 본성을 가진 우리가,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우리가 어떻게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다 팔”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의 인생 전체를 드릴 수 있을까요?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죽음의 길로 내주셨습니다. 온 하늘의 천사들이 그들의 왕인 그리스도를 고난의 길로 내주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 가슴 속 깊숙이 감사와 충성이 새겨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고간 죄를 미워하고, 사탄이 던져주는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영적 에너지가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아벨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의 영적 경험입니다.
 
45절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이 말씀에도 “다 팔아”에 대한 진리가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진주 비유에서도 마음과 생애를 주님께 온전히 바쳐야만 구원의 경험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경험을 사고 파는 문제로 설명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이런 사상은 반복됩니다.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불로 연단한 금과 안약과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어떻게 불로 연단한 금과 안약과 흰옷을 살 수 있을까요? 내 생애를 다 팔아야 살 수 있습니다. 내 생애를 팔아서 주님께 드려야만 불로 연단한 금, 즉 시련 속에서 연단받은 믿음이 생기고 영적 분별력이 생기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게 됩니다. 그런 경험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과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렸을 때 얻게 되는 경험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인생 전체를 주님께 다 드려야 할까요? 일부만 드리면 안될까요? 예수께서는 부자 법관에게 “다 팔아야” 하는 이유(다 드려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부자 법관의 문제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막 10:21)

예수께서는 부자 법관에게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다 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자 법관이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음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부자 법관은 자신이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겉모습과 행위로는 계명을 지키는 것같았지만, 늘 마음속에 이기심과 돈을 사랑하는 정신을 품고 살았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살아왔지만, 한 가지를 드리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부자 법관의 문제를 보시고,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말씀하신 “다 팔라’는 말씀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사상을 여러번 강조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 6:24). 예수께서는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고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마 6:25). 두 주인을 모두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탄 중 하나는 우리와 원수가 됩니다. 내 생애를 다 팔아 주님을 섬기지 않으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길 수 없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온전히 드리지 않으면, 결국 사탄을 섬기게 되어 예수님과 원수가 됩니다. 예수님께 생애를 드리지 않은 사람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받아들일 만한 말씀에는 순종하지만, 희생을 요구하거나 부담을 주는 말씀은 거절하고 무시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예수께서는 부자 법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1절 “그리하면(결론)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분명합니다. 마음과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만, 천국을 보상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다 팔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설교하면 많은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생애를 주님께 다 드린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습니까?” 생애를 주님께 바친 사람도 실수하고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다고 할지라도, 죄 가운데 오래 머무를 수 없습니다. 죄를 계속해서 붙잡고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죄송하고 부끄럽고 수치스럽기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 통회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의 회개는 점점 더 깊어집니다. 죄를 범하기 전보다 더 겸손하게 되고 하나님의 손을 더 굳게 잡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죄를 범할 때마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점점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동행하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옆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에는 오해하기 쉽습니다. 생애를 모두 드린 사람도 죄를 범하고, 일부만 드린 사람도 죄를 범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모두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경험은 전혀 다릅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겉모습은 비슷하게 보이지만, 그 속에서 일어나는 경험은 전혀 다릅니다. 알곡은 뜨거운 태양과 폭풍 속에서 점점 속이 영글면서 추수할 곡식으로 변화되지만, 가라지는 빈 속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가라지의 속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늘 죄와 세상을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끌려다닙니다. 예수께서는 부자 법관과의 대화 마지막에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21절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내 생애를 다 드려야만 주님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애 전체를 드리지 않으면 끝까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 드리지 않고 따라가면, 드리지 않은 부분에서 항상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드리지 않고 남겨놓은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그럴 때마다 시험에 걸려 넘어지고 미혹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종류의 시험과 죄에 반복해서 쓰러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비슷한 시험에 쓰러지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과 정죄받는 느낌이 점점 더 심각해지게 됩니다. 좌절감이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신앙이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어떤 때는 강한 신앙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 바치지 않은 부분에 시험을 당할 때는 무기력하게 무너지게 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런 모습으로 살면 어떻게 될까요? 신앙의 확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사탄은 거짓 목자와 거짓 선지자를 보내서 미혹합니다. 어떤 설교자가 나타나서 내 부족한 경험을 합리화 시켜주는 복음과 구원을 말해주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기심과 죄에 대한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거짓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인의 제사를 드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교회 안으로 밀려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죄를 태워 없애는 거룩한 경험을 하지 못한 채 거짓 복음에 휩쓸려 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의 복음과 구원을 말하고 있는데, 왜 교회 안에 여러가지 구원의 도가 나타나게 될까요?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부족한 경험에 맞춰서 구원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에 대해서 크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6~8).

 

미혹에 넘어가는 과정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상한 복음이 교회 안에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미혹을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 2).사도 바울은 말세에 사탄이 성도들을 어떻게 미혹할 것인가를 정확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이제부터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어떻게 따라가게 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살후 2:9~12) “악한 자의 임함은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라”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불의한 속임수 때문에 멸망당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왜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기 때문에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진리를 거절하고 구원을 잃어버리는 과정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나는 오랫 동안 교회를 다닌 신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읽으며 주일마다 교회 갑니다. 비록 내가 세속적이고 이기심과 탐욕에 끌려다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가 내 죄를 덮어 줄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십자가 앞에 나가 죄를 버리는 대신에 죄를 합리화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과 중생의 경험을 내 경험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한 번 믿고 구원받았으면 세속적이고 탐욕적인 삶을 살아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구원을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그분께서는 결코 나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다.”라는 이상한 생각에 빠져 들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거룩한 의의 경험을 부인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보다 자신의 경험을 높이 두는 사람들은 사탄에게 미혹당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해야하는지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1).

 12절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참 두려운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이 진리를 믿기 싫어하고, 불의한 것들을 좋아하면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을 미워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멸망당하게 됩니다.

말세에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교회 안에 허락하실 것입니다. 사탄이 교회 안에 던져 놓은 거짓 복음과 거짓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폭로될 것입니다. 거짓 목자와 거짓 선지자가 여러가지 복음과 가르침을 우리 앞에 내놓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미워하고 거룩한 것을 사모하면, 참된 복음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불의와 세속적인 것을 좋아하면 거짓 복음과 가르침을 붙잡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 마음의 상태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사랑하는 성도들은 구원받고, 불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멸망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말세에 모든 사람이 통과하게 되는 시험의 과정입니다. 사탄은 참된 중생의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미혹합니다. 거룩한 의의 경험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적과 거짓 은사를 줌으로서 그들을 깊은 늪으로 끌고 갑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이 강팍하고 완악한 사람일까요? 성령께서 죄를 지적해주시고, 어떤 경험이 잘못되었음을 가르쳐 주실 때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의 음성을 따르는 대신에 내 자신의 편견과 고집을 따라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야 합니다. 어떻게 그것을 깰 수 있을까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숴야 됩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성경은 입으로만 믿는 신앙을 가증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순종의 열매, 거룩한 의의 열매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매우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왜 그분의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을까요?” 마음이 가인의 제사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기심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어린양을 죽이면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어린양을 죽인 죄를 버리지 않는 것이 현대판 가인의 제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지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는 것, 그것이 주님께 자신을 바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