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가지 질문

첫 번째 질문: “성령의 은사를 받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도 바울은 “같은 한 성령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고 했습니다(고전 12:11).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뜻대로 나누어집니다. 이것이 성령 은사가 나누어지는 중요한 원칙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성령의 은사를 골라서 받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당신의 뜻과 지혜에 따라서 나눠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우리가 느끼는 필요에 따라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판단하시는 필요와 목적에 따라서 나누어지는 선물이다. 우리가 성령을 부리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를 부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에 대한 이해와 신앙과 성품이 준비된 성도들을 통하여 기적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과 성령의 은사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서 나타나게 되는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야 하는 최적의 시간과 장소와 환경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과 성령의 은사를 구할 때에 예수께서 하셨던 기도를 따라야 합니다. “주님,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성령의 은사를 간구합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두 번째 질문: “기적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아닌가요? 기적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아닌가요?”

어떤 기적이나 은사도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구원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증거나 기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적을 행하고 경험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불순종과 반역적인 삶을 살다가 멸망받았던 예를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았다는 증거는 의의 열매를 맺는 믿음이지 은사나 기적이 아닙니다.

세 번째 질문: “기적이 모두 하늘에서 온 것인가요?”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사탄이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서 성령의 역사를 위조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시대에 사탄의 미혹이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고전 12:27~30). 또한 “(사탄이)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자칭하고.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했습니다(고후 11:13, 14).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교회와 모든 종교적 체험 그리고 모든 기적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받아야 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그러므로 모든 기적과 은사를 무조건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기적과 초자연적인 현상은 하나님의 역사로 일어날 수 있지만, 사탄도 그런 역사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믿을 수 있는 증거입니다.

<마지막 사명> 편집장

5부, 기적에 매달리면 신앙이 무너진다

예수께서는 말세에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기 위해서 사탄의 종들이 교회 안에서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도” 미혹당하게 될까요? 왜냐하면 사탄이 행하는 “큰 표적과 기사”가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분들에게 깊은 동정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들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입니다. 매 주일 열심히 설교를 듣는 분들입니다. 헌신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영적 공허함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기도원에 가면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간절한 마음으로 그곳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진리를 모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적인 신앙을 갖게 되고 기적과 은사에 매달리게 됩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고, 말씀을 모르니까 답답해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와 치유의 은사를 받으면 믿음이 생길까 해서 성령을 찾아 헤메는 것입니다.

 

딜레마

성령 은사에 몰입해 있는 사람들은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그날 나는 교회에서 뜨겁게 성령을 체험하고 왔습니다. 가슴에서 뜨거운 불도 나오고, 이 세상을 떠난 것 같은 황홀한 느낌도 느꼈습니다. 그래서 목이 쉬도록 찬송을 불렀지요. 그런데 문제는 집에 돌아온 다음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았습니다. 변화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미워하던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분노와 증오심이 여전히 내 속에서 끓어 올랐습니다. 분명히 조금 전에 성령의 큰 역사를 받았는데, 왜 내 마음과 감정과 삶은 변화되지 않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교회에서 성령을 받을 때는 뜨겁지만, 집에 오고 얼마 지나면 다시 허전함이 몰려옵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교회에 가서 손뼉 치며 찬송 부르고 통성 기도할 때 방언이 터져나오면서 뜨겁게 성령을 체험했다고 간증합니다. 그런데 조용한 시간에 양심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이런 음성을 듣게 되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정말 성령을 받은 것일까? 정말 구원을 받은 것일까? 왜 교회에 가면 믿음이 하늘 높이 올라가는 것 같은데, 집에 돌아오면 똑같은 생활이 반복되는 것일까? 왜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는 정신이 그대로 있고, 왜 아직도 경쟁과 시기가 있으며, 왜 아직도 자랑과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있고, 세상에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리는 것일까? 왜 아직도 세속적인 일들이 재미있는 것일까? 교회에서 나를 황홀하게 했던 감정이 왜 이렇게 빨리 사라지는 것일까? 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쉽게 흔들리는 것일까? 왜 양심의 소리가 자꾸 나를 책망하는 것인가? 정말 나는 성령을 받은 것인가?”

성령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왜 이런 문제가 생길까요? 성령에 대한 진리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말씀과 예언을 모르고, 회개와 의의 열매가 맺히지 않았으며, 심지어 교회 다닌지 몇 일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적과 은사를 체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 주변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현상이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살후 2:9, 10). 마지막 시대에 사탄은 표적과 거짓 기적으로 역사합니다. 사탄의 거짓 이적은 짐승의 표 환난과 아마겟돈 전쟁에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할 것인데, 그때 온 세상 사람들이 놀라운 이적에 압도되어 사탄과 거짓 선지자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로 연합되어 사탄의 편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그 목적을 위해서 오래 전부터 기적과 거짓 은사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두 무리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온 세상은 하나님을 따르는 성도들과 사탄을 따르는 사람들로 나뉩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의 기독교인을 두 무리로 나누고 있는데, 한 무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이고, 다른 무리는 사탄의 거짓 이적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1. 계명을 지키는 자들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백성은 사탄과 대적하는 정신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또한 그들은 짐승의 환난 때에도 핍박과 순교의 위협하에서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유지합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12)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도 구원받고 하늘 도성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묘사하면서도 그들이 계명을 지켰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킹제임스영어성경> do his commandments,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그의 표를 받지 않을 성도들을 지목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구원받아서 하늘 도성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말할 때도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란 어떤 신앙을 가진 성도들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의인과 악인)으로 나누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구원받는 의인들(양들)의 신앙과 삶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35~40). 요한계시록에서는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구원받을 의인들을 말하면서 그들은 “가난한 자들, 연약한 자들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긴 성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신앙이란,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을 말하는데, 그들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심령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신앙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마지막 시대의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은 유대인들처럼 겉모습과 행위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마음으로는 세상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목 마르고 병든 자들을 돌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속 깊숙히 교만과 돈을 사랑하는 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120여 년 전에 어떤 그리스도인이 다음과 같은 영감적인 말씀을 남겨놓았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보내는 글>

그대는 그대의 재물을 안전하게 보존하기를 원하는가! 그것을 십자가의 못자국이 있는 손에 맡기라. 그대의 모든 소유를 꽉 붙잡고 있으면 그대는 그것을 영원히 잃게 될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라. 그리하면 그 순간부터 그것은 하나님의 명각(銘刻)을 지니게 된다. 그것에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인이 쳐진다. 그대는 그대의 재산을 향유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을 축복하기 위하여 사용하라. 그대의 소유를 증가시키고자 하는가?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 3:9,10).

2. 이적을 따르는 자들

마지막 시대에 사탄에게 미혹당한 사람들은 놀라운 이적을 따라가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짐승의 환난 때 온 세상이 미혹당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거짓 이적에 미혹당한 사람들은 짐승의 환난 때에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게 될 것입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3~15). 거짓 이적으로 온 세상을 미혹하는 사탄의 전략은 아마겟돈 전쟁까지 그대로 이어집니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계 16:13~16).

사람들이 왜 사탄의 거짓 이적에 미혹될까요?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10). 진리를 모르고 참된 거듭남과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혹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하기 원하지만, 진리를 순종하지 않고 진리에 의해서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미혹당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사탄은 기적과 이적을 내세워 사람들을 미혹하고, 하나님께서는 진리와 계명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모으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두 무리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무리에 속해 있습니까?

 

이상한 현상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성령 은사를 추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언과 병 고치는 은사에만 몰두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는 방언하는 사람들만 가득하고, 또 다른 어떤 교회에는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마치 유행처럼 퍼져나가고 있기 때문에 방언을 하지 못하고 안수해서 병을 고치지 못하면 영적 열등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 분위기입니다. 흥미 있는 사실은 고린도교회에도 이와 같은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을 어떻게 훈계했을까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 12:27~30).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은사를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몸에는 지체가 있어서 서로 협력하면서 몸을 유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각기 다른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에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대부분의 은사는 말씀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고전 12 : 8~10)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말하면서 말씀을 지혜롭게 나눠주는 은사를 첫 번째로 언급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진리의 말씀을 효율적으로 나눠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은사가 은사 중의 첫 번째 은사입니다.

8절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두 번째 성령의 은사도 진리에 대한 지식을 나누는 것입니다.

9절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바울은 세 번째로 믿음을 성령의 은사로 소개했습니다. 믿음은 내 노력과 내 의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진리에 대한 확신을 주셔야만 믿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성경 말씀과 조화를 이룬 삶을 살게 됩니다.

9, 10절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바울은 네 번째와 다섯 번째에 권능에 대한 은사를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은사를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능력을 행하는 은사에만 몰두하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10절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예언하는 은사는 사사로운 일을 예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예언은 점쟁이나 무당이 하는 일이고, 성경이 말하는 예언하는 은사는 교회의 미래와 사탄의 역사를 이해하고 깨닫는 은사입니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의 의미를 깨닫는 은사야말로 성령께서 주시는 분명한 은사입니다.

10절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진리의 영과 사탄의 영을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합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과 가르침이 성경과 일치하면 하늘에서 보낸 종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영입니다. 또한 그들의 삶에 맺히는 열매로 그들의 영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을 분별하는 은사도 진리의 말씀과 연결된 은사입니다. 말씀과 예언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으면 결코 영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10절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사도 바울은 방언 은사를 가장 마지막에 언급했습니다.

 

신앙에도 욕심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령의 은사는 진리의 말씀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적과 은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방언과 치유 은사에만 몰입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씀을 깊이 새겨보아야 합니다.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이 말씀은 영적인 분수를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에도 욕심이 있습니다. 좁은 길을 걷지 않고, 진리가 무엇인지 살피지 않고,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늘의 능력과 은사를 구하는 것은 이기심입니다. 우리가 은사에 대한 바울의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오늘날 기독교회에 있는 성령 은사의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이고 사탄이 성도들을 미혹하지 못할 것입니다.

 

4부, 성령을 모르면 신앙이 무너진다

성령에 대한 이해가 흔들리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한번은 어떤 모임에 참석했었는데 몇 분들이 자신은 성령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평소에 성령을 받기 원했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서 그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성령을 받았을 때 어떤 경험을 했습니까? 그러자 성령을 받았다는 분들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는데 갑자기 등줄기가 뜨거워졌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사람은 “천장에서 불덩어리 같은 것이 내려오더니 가슴을 쳤고, 그때 내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또 어떤 분은 “우리 목사님이 내게 안수를 주었는데, 그때 어떤 이상한 힘에 의해서 바닥에 쓰려지면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또 어떤 분은 “성령 내게 임하니까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나왔는데 교회 전체가 한참 동안 웃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경험이지만 참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했지만, 그들의 삶은 성령을 받기 이전과 이후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부정직 했으며, 여전히 부부싸움을 했으며, 여전히 이웃과 경쟁하고 다투었고,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며 세속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배우자 몰래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오늘날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이런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저렇게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으니 성령은 아무에게나 내리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성령을 허락하시는 기준이 무엇인가?”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특징

성경은 성령을 받으면 마음과 생애에 풍성한 의의 열매가 맺힌다고 말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 23). 이 말씀에 이어서 바울은 성령의 열매가 맺힐 수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육체의 정욕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성령받은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뚜렷한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받는 것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지 못하면, 세속적인 삶을 살게 되고 결국 구원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마음에 없으면, 삶은 메마르고 감동이 없는 인생이 됩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심령이 공허하게 되고 양심의 가책과 좌절감에 짓눌린 고통스런 생애를 살게 됩니다.

 

마지막 시대의 사탄의 전략

사탄은 성도들을 거짓 성령으로 미혹하기 위해서 사전 작업을 합니다. 먼저, 감정적인 신앙과 구원에 대한 이상한 가르침을 교회 속에 퍼트림으로써 미혹의 첫 단계를 시작합니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거짓 교리와 거짓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두 번째 미혹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것이 거짓 성령의 기만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에 거짓 성령의 역사로 미혹당한 기독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예수께서도 마지막 시대 교회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그러므로 말세에는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는지 모르면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탄의 미혹을 따라가고 있으면서, 자신은 성령을 받았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미혹의 시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짓 교리로 미혹당하고, 감정적 신앙과 거짓 성령으로 미혹당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성경은 성령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무엇일까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소개하면서 “진리의 성령”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진리의 성령”이라고 부르셨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성령은 진리를 통해서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비성서적인 복음과 거짓 교리를 믿고 있으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기적과 은사가 정말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사탄의 미혹인지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성령께서 거짓 복음과 비성서적인 교리를 믿고 있으며 그 마음과 삶에 의의 열매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기적과 은사를 주신다면, 사도 바울이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고,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주의하라고 경고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진리의 영과 거짓 영을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

예수께서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신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성경 말씀을 연구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진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갈급하고 목마른 심령으로 말씀을 읽을 때 성령께서 깨달음을 주십니다. 또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진리를 가르치고 전하는 하나님의 종들과 만나게 되고, 진리가 담겨져 있는 책자들을 접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

성령을 받으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어떤 일을 하실까요? “내가 그(성령)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7-8). 여기서 성령께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신다 했는데,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과거에 범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것을 호소하시고, 현재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양심의 자각을 주시며, 미래에 받게 될 심판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도들이 구원의 경험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유혹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성령께서는 의의 음성을 양심 속에서 들려주십니다. “이 길이 정로니 이 길로 가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유혹을 물리치라고 호소해 주십니다.

그리스도 없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죄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성령께서 심령의 구석구석을 살펴주시기 때문에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를 깨닫게 되고 자신의 죄악과 더러움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께 나가 부복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과 사랑에 의지해서 죄를 용서받고 정결케 되어 하늘과 교통할 수 있기를 사모하게 됩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고자 하는 거룩한 충동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큰 역사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입니다.

예수께서는 2천 년 전에 제자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도우셨던 방법 그대로 성령께서 성도들을 도와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예수께서는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셨습니다. 왜 그렇게 부르셨을까요?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보혜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한 후에는 예수님을 대신할 또 하나의 보혜사를 그들에게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보혜사”란 영어로 “Comforter”입니다. “Comforter”라는 단어의 뜻은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조력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Comforter”란 “항상 우리 곁에 있어서 위로하며 길을 인도해 주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항상 제자들 곁에 계셔서 진리를 가르치고, 깨닫게 하시고 해야 할 일과 가야할 길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성령께서도 그와 동일한 역할을 해주신다는 의미에서 성령을 보혜사(Comforter)로 소개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하늘에 계시지만 성령께서 우리 곁에서 계셔서 우리를 위로하고 인도하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와 친숙해져야만 합니다. 양심을 통해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슬픈 사실은, 오랜 세월 동안 예수님을 믿었지만,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무지할 뿐 아니라 성령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수십 년 동안 교회 다녔어도 성령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성령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모르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느낌과 감정으로 성령의 임재를 느껴보려고 애쓰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에 대하여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알면 우리의 신앙에 전격적인 변화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에 대해서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좀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 16:1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진리 가운데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있다가 빛 가운데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현재 빛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더 밝은 빛으로 인도받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크고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온 마음을 다해서 그것을 받아들일 때마다 성령의 큰 역사 속에 있는 것입니다.

13절 “그(성령)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성령께서는 자기 마음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 한뜻으로 역사하시고 한마음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13절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은 우리에게 장래 일, 즉 예언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성령을 체험했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장래 일을 알려주는 예언에 무지하고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성령을 체험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의의 길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의 의미를 깨닫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예언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언은 성령을 받아야만 이해할 수 있고 올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 삶 속에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있어야만 예언을 하나님의 뜻대로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느낌으로 아는가? 열매로 아는가?

성령은 우리의 감정이나 느낌으로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체험하는 경험은 바닥을 뒹굴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성령의 체험을 매우 조용한 경험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바람은 어디서 어디로 부는지 알 수 없고 색깔도 없으며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바람이 분 결과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도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성령으로 채워져 있으면, 우리의 삶이 그 사실을 증명하게 됩니다. 우리 품성과 습관과 생활에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고 성령을 받기 이전과 이후 사이에 분명한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도둑질하던 사람이 도둑질을 멈추게 되고, 더럽고 추한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 순결한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지루하게 생각하던 사람이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게 됩니다. 이런 변화가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의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을 받는 방법

허전하고 공허한 마음을 이적과 은사로 채우려는 것은 무의미한 시도입니다. 하나님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으로 기적을 구하다가 사탄의 덫에 걸려들 수 있습니다. 뜨거운 감정과 느낌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허망한 노력입니다.

마음에 욕심이 있고 교만으로 목이 곧은 상태에서는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세속과 이기심이 가득 차 있는 마음에는 성령께서 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주 앞에 나가 마음에 품고 있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께 나가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죄에 끌려다니는 처참한 삶이 지긋지긋하고,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라는 절규가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옵니까? 그렇다면 오늘 주 앞에 나가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영혼을 짓누르고 괴롭혔던 죄를 주앞에 내려놓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용서를 만나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성령의 은혜가 밀려오면서 육체의 정욕이 잠잠케 될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폭풍우가 예수님의 말씀에 잠잠해졌던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평온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속이 싫어지고, 죄가 혐오스럽게 느껴지면서 그토록 버릴 수 없다고 생각되던 죄가 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바울의 설명은 분명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성령)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9, 13,14). 성령의 지배를 받는 그리스도인은 성경 말씀과 계명을 무겁다고 생각하거나 불편하게 느끼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십자가를 바라본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과 사탄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큰 특권과 명예로 생각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을 어떻게 받는 것입니까? 여기 분명한 대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 5:22). 정말 성령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영적 경험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탄의 덫에 걸려서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영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까?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

 

3부, 전체를 바치지 않으면 신앙이 무너진다

 
많은 분들이 이런 고민을 말합니다. “시험받을 때마다 기도하는데 정욕과 욕심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시험에 굴복하게 됩니다. 성경은 시험이 올 때 기도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왜 나는 안될까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저는 그런 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께 생애 전체를 드렸습니까?” 이것은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신앙의 비결은 전체를 바치는 것입니다.
 
인생 전체를 바치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과 일부분을 바친 상태에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일부분만을 바친 상태에서 주님을 따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인의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습관적인 죄 때문에 넘어지고 좌절하게 됩니다. 늘 양심의 가책과 정죄받는 느낌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인생 전체를 바친 사람은 아벨의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죄와 세속을 버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아벨의 제사를 드려야 하나님께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히 11:4). 하나님께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아벨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사람은 십자가 앞에 나가 죄를 내려놓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의 말에는 은혜가 있고 태도에는 확신이 넘칩니다. 살아가는 모습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시험과 유혹이 올 때 분명하게 저항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십자가를 높이 들어 올리면서 충성과 순종을 강조합니다.
 
예수께서는 인생 전체를 바치는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치적 격변이 많고 전쟁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때때로 보물을 숨기기 위해서 밭을 깊게 파서 묻었습니다. 그러다가 밭의 주인이 갑자기 죽게 되면, 밭에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됩니다. 그 후에 밭의 주인이 여러번 바뀌었지만 아무도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주인의 밭을 열심히 갈다가 우연히 감추어진 보화를 찾게 됩니다. 얼마나 신이 났을까요?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 보화가 감추어진 밭을 샀다는 것이 비유의 내용입니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밭에 감추인 보화란 성경에 감추어져 있는 구원의 경험을 뜻합니다.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이 구원의 경험을 발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구원의 경험이 밭에 감춰진 보화처럼 감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구원의 경험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모두 그것을 발견하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이해할 수 없는 비밀로 남겨지게 됩니다. 왜 그들에게는 구원의 경험이 비밀로 감추어지게 될까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아를 내려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44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다 판다”고 했는데 무엇을 판다는 이야기인가요? 내 재산을 판다는 것인가요? 내 집이나 소유를 판다는 것인가요? “다 판다”는 말은 “다 드린다”는 뜻입니다. 내 생애 전체를 주님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내 생애 일부분만 팔아서 구원도 받고 세상 쾌락도 챙기는 것이 아니라, 내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린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사랑을 본 사람은 자신의 생애 전체를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온전한 사랑과 희생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과 충성을 기대하십니다. 우리도 부모로서 사랑과 희생을 퍼 부은 자녀들에게 그에 합당한 사랑과 존경과 효심을 기대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하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기뻐하여 돌아가서 다 팔았다”고 했습니다. 주님께 생애 전체를 드리는 것은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과 영생이 너무나 가치있기 때문에 인생 전체를 드리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은 구원 받기 위해서 억지로 순종하고, 억지로 세상을 싫어하는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쁜 마음으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감사한 마음으로 좁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여기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타락한 본성을 가진 우리가,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우리가 어떻게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다 팔”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의 인생 전체를 드릴 수 있을까요?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죽음의 길로 내주셨습니다. 온 하늘의 천사들이 그들의 왕인 그리스도를 고난의 길로 내주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 가슴 속 깊숙이 감사와 충성이 새겨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고간 죄를 미워하고, 사탄이 던져주는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영적 에너지가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아벨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의 영적 경험입니다.
 
45절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이 말씀에도 “다 팔아”에 대한 진리가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진주 비유에서도 마음과 생애를 주님께 온전히 바쳐야만 구원의 경험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경험을 사고 파는 문제로 설명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이런 사상은 반복됩니다.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불로 연단한 금과 안약과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어떻게 불로 연단한 금과 안약과 흰옷을 살 수 있을까요? 내 생애를 다 팔아야 살 수 있습니다. 내 생애를 팔아서 주님께 드려야만 불로 연단한 금, 즉 시련 속에서 연단받은 믿음이 생기고 영적 분별력이 생기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게 됩니다. 그런 경험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과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렸을 때 얻게 되는 경험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인생 전체를 주님께 다 드려야 할까요? 일부만 드리면 안될까요? 예수께서는 부자 법관에게 “다 팔아야” 하는 이유(다 드려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부자 법관의 문제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막 10:21)

예수께서는 부자 법관에게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다 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자 법관이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음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부자 법관은 자신이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겉모습과 행위로는 계명을 지키는 것같았지만, 늘 마음속에 이기심과 돈을 사랑하는 정신을 품고 살았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살아왔지만, 한 가지를 드리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부자 법관의 문제를 보시고,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말씀하신 “다 팔라’는 말씀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사상을 여러번 강조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 6:24). 예수께서는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고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마 6:25). 두 주인을 모두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탄 중 하나는 우리와 원수가 됩니다. 내 생애를 다 팔아 주님을 섬기지 않으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길 수 없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온전히 드리지 않으면, 결국 사탄을 섬기게 되어 예수님과 원수가 됩니다. 예수님께 생애를 드리지 않은 사람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받아들일 만한 말씀에는 순종하지만, 희생을 요구하거나 부담을 주는 말씀은 거절하고 무시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예수께서는 부자 법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1절 “그리하면(결론)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분명합니다. 마음과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만, 천국을 보상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다 팔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설교하면 많은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생애를 주님께 다 드린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습니까?” 생애를 주님께 바친 사람도 실수하고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다고 할지라도, 죄 가운데 오래 머무를 수 없습니다. 죄를 계속해서 붙잡고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죄송하고 부끄럽고 수치스럽기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 통회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의 회개는 점점 더 깊어집니다. 죄를 범하기 전보다 더 겸손하게 되고 하나님의 손을 더 굳게 잡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죄를 범할 때마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점점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동행하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옆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에는 오해하기 쉽습니다. 생애를 모두 드린 사람도 죄를 범하고, 일부만 드린 사람도 죄를 범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모두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경험은 전혀 다릅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겉모습은 비슷하게 보이지만, 그 속에서 일어나는 경험은 전혀 다릅니다. 알곡은 뜨거운 태양과 폭풍 속에서 점점 속이 영글면서 추수할 곡식으로 변화되지만, 가라지는 빈 속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가라지의 속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늘 죄와 세상을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끌려다닙니다. 예수께서는 부자 법관과의 대화 마지막에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21절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내 생애를 다 드려야만 주님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애 전체를 드리지 않으면 끝까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 드리지 않고 따라가면, 드리지 않은 부분에서 항상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드리지 않고 남겨놓은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그럴 때마다 시험에 걸려 넘어지고 미혹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종류의 시험과 죄에 반복해서 쓰러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비슷한 시험에 쓰러지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과 정죄받는 느낌이 점점 더 심각해지게 됩니다. 좌절감이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신앙이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어떤 때는 강한 신앙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 바치지 않은 부분에 시험을 당할 때는 무기력하게 무너지게 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런 모습으로 살면 어떻게 될까요? 신앙의 확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사탄은 거짓 목자와 거짓 선지자를 보내서 미혹합니다. 어떤 설교자가 나타나서 내 부족한 경험을 합리화 시켜주는 복음과 구원을 말해주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기심과 죄에 대한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거짓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인의 제사를 드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교회 안으로 밀려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죄를 태워 없애는 거룩한 경험을 하지 못한 채 거짓 복음에 휩쓸려 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의 복음과 구원을 말하고 있는데, 왜 교회 안에 여러가지 구원의 도가 나타나게 될까요?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부족한 경험에 맞춰서 구원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에 대해서 크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6~8).

 

미혹에 넘어가는 과정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상한 복음이 교회 안에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미혹을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 2).사도 바울은 말세에 사탄이 성도들을 어떻게 미혹할 것인가를 정확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이제부터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어떻게 따라가게 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살후 2:9~12) “악한 자의 임함은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라”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불의한 속임수 때문에 멸망당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왜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기 때문에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진리를 거절하고 구원을 잃어버리는 과정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나는 오랫 동안 교회를 다닌 신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읽으며 주일마다 교회 갑니다. 비록 내가 세속적이고 이기심과 탐욕에 끌려다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가 내 죄를 덮어 줄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십자가 앞에 나가 죄를 버리는 대신에 죄를 합리화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과 중생의 경험을 내 경험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한 번 믿고 구원받았으면 세속적이고 탐욕적인 삶을 살아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구원을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그분께서는 결코 나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다.”라는 이상한 생각에 빠져 들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거룩한 의의 경험을 부인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보다 자신의 경험을 높이 두는 사람들은 사탄에게 미혹당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해야하는지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1).

 12절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참 두려운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이 진리를 믿기 싫어하고, 불의한 것들을 좋아하면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을 미워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멸망당하게 됩니다.

말세에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교회 안에 허락하실 것입니다. 사탄이 교회 안에 던져 놓은 거짓 복음과 거짓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폭로될 것입니다. 거짓 목자와 거짓 선지자가 여러가지 복음과 가르침을 우리 앞에 내놓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미워하고 거룩한 것을 사모하면, 참된 복음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불의와 세속적인 것을 좋아하면 거짓 복음과 가르침을 붙잡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 마음의 상태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사랑하는 성도들은 구원받고, 불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멸망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말세에 모든 사람이 통과하게 되는 시험의 과정입니다. 사탄은 참된 중생의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미혹합니다. 거룩한 의의 경험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적과 거짓 은사를 줌으로서 그들을 깊은 늪으로 끌고 갑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이 강팍하고 완악한 사람일까요? 성령께서 죄를 지적해주시고, 어떤 경험이 잘못되었음을 가르쳐 주실 때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의 음성을 따르는 대신에 내 자신의 편견과 고집을 따라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야 합니다. 어떻게 그것을 깰 수 있을까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숴야 됩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성경은 입으로만 믿는 신앙을 가증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순종의 열매, 거룩한 의의 열매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매우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왜 그분의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을까요?” 마음이 가인의 제사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기심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어린양을 죽이면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어린양을 죽인 죄를 버리지 않는 것이 현대판 가인의 제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지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는 것, 그것이 주님께 자신을 바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2부, 가인의 제사를 드리면 신앙이 무너진다

오늘날 교회에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말하면 큰 오해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말을 적당히 믿어도 구원받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죄를 버리지 않고 붙잡고 있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에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죄를 버리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믿음에 대해서 분명한 말씀을 남겼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칭의를 받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세속과 죄를 버리지 않는 믿음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요? 죄와 유혹이 다가올 때,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어린아이가 위험을 느낄 때 어떻게 하나요? 울면서 엄마, 아빠의 눈을 바라봅니다. 우리도 그런 심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정욕과 이기심을 떨쳐버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어떤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아담의 두 아들 중 가인은 살인자가 되었고, 아벨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 두 형제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왜 가인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동물의 제사를 드리지 않고 곡물과 과일을 제물로 드렸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이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하나님께서 동물의 가죽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입혔다는 것은 동물이 죽었음을 뜻합니다. 동물이 왜 죽었을까요? 아담과 하와의 죄를 용서하고 대속하기 위해서 동물이 죽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물을 희생시키는 제사제도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죄가 용서받기 위해서는 그들을 대신해서 누군가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장래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나셔서 대속제물이 되실 것을 말씀해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에 대한 분명한 지침을 주셨을 것입니다. “너희가 죄를 범하게 되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동물을 죽여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 그것이 유일한 속죄 방법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동물을 죽여서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사실은, 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가인은 동물 대신에 곡식과 열매로 제사를 드렸을까요?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창 4:3~5)

가인은 동물 대신에 “땅의 소산”을 제물로 바쳤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불순종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어린양과 기름을 바쳤습니다. 아벨의 제사에는 “나 대신에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는 분명한 회개가 있었습니다. 아벨의 제사에는 대속제물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진정한 감사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벨이 드린 제물에는 어린양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린양과 그 기름을 함께 드렸습니다. 제사제도에서 기름을 드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동물의 기름은 먹지 말라”고 했으며,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기름은 제단 위에서 태워 없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기름을 반드시 태워 없애야 한다고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동물의 기름은 죄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한 사람은 어린양을 죽이고, 그 어린양의 몸에 붙어 있는 기름을 잘라내고 긁어내어 제단에서 태웠는데, 그것은 “하나님, 이 동물의 기름을 태울 때, 제 마음에 품고 있던 모든 죄도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는 회개의 서약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가인도 제사를 지내야 할 필요는 느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양을 가져와서 그 피와 함께 제물을 드리는 대신에 자기의 소산, 자기 노력의 생산물을 드렸습니다. 가인은 제단을 쌓고 희생을 가져오는 점에서는 하나님께 순종했지만 그는 부분적인 순종만을 드렸습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 즉 구속주의 필요성에 대한 인정을 빼어버렸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공로를 감히 의지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가인은 불신과 반역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처럼 거의 모든 거짓 종교들이 동일한 원칙 즉 사람은 자기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인은 왜 어린양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어린양을 죽이면 반드시 어린양의 기름까지 태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이 죽는 일과 그 기름을 태우는 것은 반드시 함께 가야하는 제사의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 받는 죄인의 마음속에서 죄가 태워져서 없어지는 경험이 이루어지길 원하셨기 때문에 그런 의식을 주신 것입니다. 죄 때문에 어린양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므로, 그리스도를 죽게 만든 죄를 버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던 불순종의 정신을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죄를 그대로 붙잡고 있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양을 죽이고 기름을 태워 없애는 제사 대신에 “땅의 소산”을 바치기로 했던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제사드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제사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리지 않고 “나”를 기쁘게 하는 예배를 드리는 정신이 가인의 정신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구원의 완전한 계획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벨이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히 1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아벨처럼 더 나은 제사를 드리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린양을 죽임과 동시에 기름까지 태워 없애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 죄를 용서받는 동시에 죄를 버리고 태워 없애야 합니다.

 

현대판 가인의 제사

오늘날에도 가인의 제사처럼 불완전한 제사가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양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으려고 하지만 기름을 태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린양만 죽이면 되지 기름은 태워 없애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식의 설교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버리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이 널리 퍼져나가고 있는데 그것은 가인의 제사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죄를 버리는 참된 거듭남의 경험이 그렇게 드물게 된 것입니다. 죄를 버리고 회개하는 대신 가인처럼 “땅의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버리는 대신, 이 땅에서 거두어 들인 돈과 재물을 제단 위에 드리고 있습니다. 참된 회개 없이 교회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봉사한다면, 그런 것들은 가인이 드렸던 “땅의 소산”입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인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바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드린 것입니다. 죄는 버리지 않으면서, 양심의 위로를 받고 정죄로부터 피하고자 하는 모든 인간의 행위가 가인의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완전한 구원의 계획을 거절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구원을 얻어내려고 하는 것이 가인의 제사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는 죄 때문에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죽게 만든 죄를 미워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하여졌으므로 계명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범한 죄 때문에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가인과 아벨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아니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두 종류의 제사가 드려질 것인데, 하나는 가인의 제사이고, 다른 하나는 아벨의 제사입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가인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가인의 복음을 전하고, 아벨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아벨의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전하는 복음이 내 자신의 영적 경험을 뛰어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경험이 하나님의 복음이 요구하는 수준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끌어내리면, 신앙은 곧바로 무너지게 됩니다. 불순종과 죄가 삶 속으로 들어오게 되고, 영적인 예민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탄의 미혹을 분별하지 못하고 끌려가게 됩니다. 제3부 기사에서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부, 감정을 따라가면 신앙이 무너진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람들이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과 감정적 신앙 과 거짓 이적 사이에서 혼돈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과 감정을 구별하지 못해서 길을 잃어버리 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짜와 가짜를 분별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성경 말 씀입니다. 아무리 세상과 교회가 깊은 어둠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성경 말씀과 성령께서 주시 는 빛대로 순종하며 사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입니다. 월간이슈는 이번 호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곧바로 세우는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놀라운 진리 를 발견하고 기뻐할 것이고, 어떤 분들은 의미있는 고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독자 여 러분을 진리의 길로 인도해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편집실)

미국에 있는 어떤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의사였는데 성경을 잘 가르쳤고 교회가 필요로 할 때마다 많은 헌금을 드렸습니다. 목회자가 부재 중일 때는 주일 설교를 했는데, 그분의 설교는 단순했지만 설교 도중에 방언이 터져나왔기 때문에 청중들의 마음을 뜨겁게 했습니다. 그분의 기도는 언제나 열정적이었으며 하나님께서 꿈과 계시로 자신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 장로님이 바닷가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갑자기 사망해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부검 결과, 오랫동안 습관성 약물을 과다하게 복용한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그분의 가족 뿐 아니라 온 교인들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사실은 그분의 서재와 침실에서 수십개의 음란 비디오 영상과 잡지들이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그를 존경하고 따르던 교인들과 청년들이 큰 실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면 진리를 통해서 마음과 생애가 변화됩니다. 그러나 사탄의 미혹을 따라가면 외롭고 공허하며 부패한 삶을 살다가 사탄의 미혹에 빠져 멸망당하게 됩니다. 사탄은 감정을 얻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감정을 주고, 이적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적을 줍니다. 사탄에게 미혹당한 사람이 겉으로 볼 때는 행복하고 하늘의 큰 권능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깊은 미혹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황홀하고 뜨거운 감정을 느껴야만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탄이 조작하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이적에 미혹당하기 쉽습니다. 사탄은 감정과 신앙을 혼돈하는 사람들에게 거짓 은사와 이적을 던져줍니다. 그들의 감정을 뜨겁게 하여 황홀경으로 끌어들입니다. 감정의 극치를 맛보게 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도록 유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경험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변화와 거룩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감정적 신앙으로는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며 의의 열매가 맺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을 이끌어 가는 원칙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롭게 거듭난 생애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감정과 이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능력을 경험할 때 생기는 감정과 실제 삶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좁히지 못하여 깊은 낙담에 빠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감정이 높이 올라갔다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오르내림을 되풀이 하면서 극도의 심리적 불안정과 우울증을 갖기도 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탄에게 속은 것이며, 또한 스스로의 감정에게 속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혀 성령을 경험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성령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회개하지 않았고, 말씀과 예언에 관심이 없으며, 세속적인 사람도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령 부흥집회나 기도원에서 성령 안수를 받은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등이 뜨끈뜨끈 했습니다! 눈앞에서 파란 불이 번쩍번쩍했어요! 가슴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나와서 온몸을 사로잡는 듯했습니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나도 모르게 방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병이 나은 것 같고 기분이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정말 황홀한 경험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신도 그런 초월적이고 경이로운 경험을 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감정적 신앙의 증거

감정을 따라가는 사람의 신앙은 감정 이상으로 향상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닥치고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으면, 신앙은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변화된 마음이며, 자아와 교만이 죽은 생애입니다. 세상을 미워하고 거룩한 것을 사모하면서 좁은 길을 걷는 삶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감정적 신앙을 가졌다는 증거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무시하고 내 뜻과 내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분명하게 밝히신 말씀을 알면서도 다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야말로 감정을 따라가는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감정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면서도 “성령께서 내게 개인적으로 알려주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그대로 가겠다”고 고집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사탄은 그런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이 원하는 감정과 느낌을 줌으로써 만족시켜 줍니다. 이렇게 해서 덫에 걸린 사람들은 사탄의 농간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시는 놀라운 체험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것을 저버리고, 자신의 감정과 느낌이 요구하는 것을 따라서 넓은 길을 걷게 되는데, 그 길은 사탄이 인도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영적 경험은 언제나 거룩한 성경 말씀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믿음이 먼저, 느낌이 나중

느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둘을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을 활용하는 대신에 자신에게 어떤 특별한 느낌이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믿음은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광경을 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어떤 특별한 감정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하고 전진하였을 때, 영광스러운 감격과 감사의 정신을 축복으로 받게 됩니다. 믿음은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활용할 수 있지만, 느낌과 감정은 믿음을 활용한 결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활용하지 않고 감정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려고 애쓸 때, 사탄이 개입할 수 있는 틈을 열어주게 됩니다. 죄를 버리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서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면, 사탄의 덫에 걸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감정과 느낌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회개와 믿음과 순종의 결과로 얻어지는 하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성령께서 크게 임하실 때에는 큰 믿음을 나타낼 수 있지만,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받거나 느끼지 못할 때에는 믿음을 발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결핍을 느낄 때야말로 믿음을 활용해야 할 때입니다. 칠흙같이 어두운 구름이 마음을 덮을 때야말로, 우울한 느낌이 마음을 어지럽힐 때야말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밝고 유쾌한 정신을 달라고 간구해야 할 때입니다. 아무나 기도에 응답받고 아무나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축복에는 반드시 조건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느낌을 따라가는 교회

교회가 세속화 되면서 예배와 음악도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는 대신, 사람의 감정과 느낌을 행복하게 만드는 예배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압도하고 있는 사상이 인본주의(휴머니즘)입니다. 인본주의란 모든 생각과 사상은 인간의 행복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인간애에 기초한 고상한 사상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본주의가 기독교회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위치를 밀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본주의가 들어가는 곳마다 하나님은 두번째가 되고 인간이 첫 번째가 됩니다. 그래서 예배와 음악에서도 하나님은 두번째이고 사람의 느낌과 감정이 첫 번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찬양합니다. 사도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지만, 교회 안에 들어온 인본주의는 성도의 기쁨과 행복한 느낌을 위해서 노래하고 찬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느낌과 내 감정을 즐겁게 해주지 않는 것은 무엇이나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의 느낌과 감정에 부담과 무거움을 주는 것은 무엇이나 버려야 한다는 주장들이 교회 안에서 거세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말씀과 경건함” 보다는 “나의 즐거움과 기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중후하고 엄숙한 음악보다는 가볍고 경쾌한 음악을 사용해서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합니다. 성령의 호소와 회개와 좁은 길에 대한 찬송은 멀리하고 누구든지 쉽게 부를 수 음악이 예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과 성도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멜로디와 음악이 선호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런 분위기로 흘러가자, 예배 속에 발라드와 록음악이 들어오게 되었고, 그에 맞추어서 피아노나 올갠 대신에 드럼과 전자기타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주일학교도 연극과 드라마로 채워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변화에 맞춰서 설교 단상을 현대식 무대로 바꾸기 시작했고 조명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요즘 예배의 트랜드는 찬양을 할 때 마치 가수의 콘서트나 KBS 열린 음악회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입니다. 동네 노래방이나 카페처럼 바뀌어 가고 있는 교회의 변화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대중가요와 같은 찬양과 강한 비트가 들어간 음악에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르고 나면 속이 시원하고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같은 느낌을 성령의 감동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 언론인이 이런 글을 써서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나는 몇 해 전에 로마서 12장 1, 2절을 연구하는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집회의 주제 찬양으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라는 내용의 찬양을 모두들 열성적으로 불렀습니다. 교인들은 집회 내내 ‘이 세대를 본받지 말자’라고 소리치면서 밴드에 맞춰 머리를 흔들고 발을 구르면서 찬양을 했는데, 그 모습은 이미 세상을 그대로 본받은 모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너무 교회 안에 깊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제 무엇이 거룩함이고 무엇이 세속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에서 드럼치 고 발라드와 록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교회는 세상을 흉내내는 것이 행복해지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교회가 세속으로 물들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조롱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경 말씀과 성도들의 거룩한 삶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하는데 조롱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교회 안에 들어 온 감정적 신앙과 인본주의 때문에 시작된 재앙입니다. ■

7호를 시작하며…

“사랑하면 초콜릿을 주세요.”라는 광고가 현대인이 생각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랑을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사랑은 의로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은 인내하고 친절한 것입니다. 사랑은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을 하면 당연히 그런 열매들이 우리 마음과 생애 속에 맺히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열정을 포함해야 합니다. 열정이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심령을 원하십니까?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십니까? 우리의 마음이 침울하고 어두울 때가 있습니다. 외롭고 허전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감정들과 싸우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교회 활동에 대한 열정이 아닙니다. 설교에 대한 열정이 아닙니다. 선교나 봉사에 대한 열정이 아닙니다. 방언이나 은사에 대한 열정이 아닙니다. 찬양할 때의 열정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갖고 계십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대한 열정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에 감동되어 우리의 마음과 생애 전체를 바치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생기면 신앙이 크게 무너지게 됩니다. 이번 호에서는 우리의 신앙을 무너지게 만드는 5가지 원인을 살펴보았습니다. 부디, 진리의 영께서 독자 여러분을 진리로 인도하시길 기도드립니다.

<마지막 사명>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