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말세에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기 위해서 사탄의 종들이 교회 안에서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도” 미혹당하게 될까요? 왜냐하면 사탄이 행하는 “큰 표적과 기사”가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분들에게 깊은 동정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들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입니다. 매 주일 열심히 설교를 듣는 분들입니다. 헌신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영적 공허함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기도원에 가면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간절한 마음으로 그곳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진리를 모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적인 신앙을 갖게 되고 기적과 은사에 매달리게 됩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고, 말씀을 모르니까 답답해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와 치유의 은사를 받으면 믿음이 생길까 해서 성령을 찾아 헤메는 것입니다.

 

딜레마

성령 은사에 몰입해 있는 사람들은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그날 나는 교회에서 뜨겁게 성령을 체험하고 왔습니다. 가슴에서 뜨거운 불도 나오고, 이 세상을 떠난 것 같은 황홀한 느낌도 느꼈습니다. 그래서 목이 쉬도록 찬송을 불렀지요. 그런데 문제는 집에 돌아온 다음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았습니다. 변화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미워하던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분노와 증오심이 여전히 내 속에서 끓어 올랐습니다. 분명히 조금 전에 성령의 큰 역사를 받았는데, 왜 내 마음과 감정과 삶은 변화되지 않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교회에서 성령을 받을 때는 뜨겁지만, 집에 오고 얼마 지나면 다시 허전함이 몰려옵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교회에 가서 손뼉 치며 찬송 부르고 통성 기도할 때 방언이 터져나오면서 뜨겁게 성령을 체험했다고 간증합니다. 그런데 조용한 시간에 양심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이런 음성을 듣게 되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정말 성령을 받은 것일까? 정말 구원을 받은 것일까? 왜 교회에 가면 믿음이 하늘 높이 올라가는 것 같은데, 집에 돌아오면 똑같은 생활이 반복되는 것일까? 왜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는 정신이 그대로 있고, 왜 아직도 경쟁과 시기가 있으며, 왜 아직도 자랑과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있고, 세상에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리는 것일까? 왜 아직도 세속적인 일들이 재미있는 것일까? 교회에서 나를 황홀하게 했던 감정이 왜 이렇게 빨리 사라지는 것일까? 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쉽게 흔들리는 것일까? 왜 양심의 소리가 자꾸 나를 책망하는 것인가? 정말 나는 성령을 받은 것인가?”

성령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왜 이런 문제가 생길까요? 성령에 대한 진리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말씀과 예언을 모르고, 회개와 의의 열매가 맺히지 않았으며, 심지어 교회 다닌지 몇 일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적과 은사를 체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 주변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현상이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살후 2:9, 10). 마지막 시대에 사탄은 표적과 거짓 기적으로 역사합니다. 사탄의 거짓 이적은 짐승의 표 환난과 아마겟돈 전쟁에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할 것인데, 그때 온 세상 사람들이 놀라운 이적에 압도되어 사탄과 거짓 선지자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로 연합되어 사탄의 편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그 목적을 위해서 오래 전부터 기적과 거짓 은사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두 무리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온 세상은 하나님을 따르는 성도들과 사탄을 따르는 사람들로 나뉩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의 기독교인을 두 무리로 나누고 있는데, 한 무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이고, 다른 무리는 사탄의 거짓 이적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1. 계명을 지키는 자들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백성은 사탄과 대적하는 정신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또한 그들은 짐승의 환난 때에도 핍박과 순교의 위협하에서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유지합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12)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도 구원받고 하늘 도성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묘사하면서도 그들이 계명을 지켰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킹제임스영어성경> do his commandments,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그의 표를 받지 않을 성도들을 지목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구원받아서 하늘 도성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말할 때도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란 어떤 신앙을 가진 성도들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의인과 악인)으로 나누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구원받는 의인들(양들)의 신앙과 삶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35~40). 요한계시록에서는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구원받을 의인들을 말하면서 그들은 “가난한 자들, 연약한 자들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긴 성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신앙이란,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을 말하는데, 그들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심령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신앙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마지막 시대의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은 유대인들처럼 겉모습과 행위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마음으로는 세상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목 마르고 병든 자들을 돌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속 깊숙히 교만과 돈을 사랑하는 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120여 년 전에 어떤 그리스도인이 다음과 같은 영감적인 말씀을 남겨놓았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보내는 글>

그대는 그대의 재물을 안전하게 보존하기를 원하는가! 그것을 십자가의 못자국이 있는 손에 맡기라. 그대의 모든 소유를 꽉 붙잡고 있으면 그대는 그것을 영원히 잃게 될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라. 그리하면 그 순간부터 그것은 하나님의 명각(銘刻)을 지니게 된다. 그것에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인이 쳐진다. 그대는 그대의 재산을 향유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을 축복하기 위하여 사용하라. 그대의 소유를 증가시키고자 하는가?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 3:9,10).

2. 이적을 따르는 자들

마지막 시대에 사탄에게 미혹당한 사람들은 놀라운 이적을 따라가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짐승의 환난 때 온 세상이 미혹당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거짓 이적에 미혹당한 사람들은 짐승의 환난 때에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게 될 것입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3~15). 거짓 이적으로 온 세상을 미혹하는 사탄의 전략은 아마겟돈 전쟁까지 그대로 이어집니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계 16:13~16).

사람들이 왜 사탄의 거짓 이적에 미혹될까요?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10). 진리를 모르고 참된 거듭남과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혹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하기 원하지만, 진리를 순종하지 않고 진리에 의해서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미혹당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사탄은 기적과 이적을 내세워 사람들을 미혹하고, 하나님께서는 진리와 계명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모으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두 무리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무리에 속해 있습니까?

 

이상한 현상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성령 은사를 추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언과 병 고치는 은사에만 몰두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는 방언하는 사람들만 가득하고, 또 다른 어떤 교회에는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마치 유행처럼 퍼져나가고 있기 때문에 방언을 하지 못하고 안수해서 병을 고치지 못하면 영적 열등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 분위기입니다. 흥미 있는 사실은 고린도교회에도 이와 같은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을 어떻게 훈계했을까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 12:27~30).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은사를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몸에는 지체가 있어서 서로 협력하면서 몸을 유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각기 다른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에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대부분의 은사는 말씀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고전 12 : 8~10)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말하면서 말씀을 지혜롭게 나눠주는 은사를 첫 번째로 언급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진리의 말씀을 효율적으로 나눠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은사가 은사 중의 첫 번째 은사입니다.

8절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두 번째 성령의 은사도 진리에 대한 지식을 나누는 것입니다.

9절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바울은 세 번째로 믿음을 성령의 은사로 소개했습니다. 믿음은 내 노력과 내 의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진리에 대한 확신을 주셔야만 믿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성경 말씀과 조화를 이룬 삶을 살게 됩니다.

9, 10절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바울은 네 번째와 다섯 번째에 권능에 대한 은사를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은사를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능력을 행하는 은사에만 몰두하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10절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예언하는 은사는 사사로운 일을 예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예언은 점쟁이나 무당이 하는 일이고, 성경이 말하는 예언하는 은사는 교회의 미래와 사탄의 역사를 이해하고 깨닫는 은사입니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의 의미를 깨닫는 은사야말로 성령께서 주시는 분명한 은사입니다.

10절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진리의 영과 사탄의 영을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합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과 가르침이 성경과 일치하면 하늘에서 보낸 종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영입니다. 또한 그들의 삶에 맺히는 열매로 그들의 영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을 분별하는 은사도 진리의 말씀과 연결된 은사입니다. 말씀과 예언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으면 결코 영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10절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사도 바울은 방언 은사를 가장 마지막에 언급했습니다.

 

신앙에도 욕심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령의 은사는 진리의 말씀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적과 은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방언과 치유 은사에만 몰입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씀을 깊이 새겨보아야 합니다.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이 말씀은 영적인 분수를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에도 욕심이 있습니다. 좁은 길을 걷지 않고, 진리가 무엇인지 살피지 않고,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늘의 능력과 은사를 구하는 것은 이기심입니다. 우리가 은사에 대한 바울의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오늘날 기독교회에 있는 성령 은사의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이고 사탄이 성도들을 미혹하지 못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