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코끼리의 무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코끼리의 마른 뼈들이 골짜기에 가득 쌓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곳을 코끼리의 무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원주민들 사이에 코끼리는 죽을 때가 되면 그 골짜기를 향해서 간다고 믿는 전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조사해 보니 코끼리들은 죽을 때가 되어서 모여든 것이 아니라 살해된 것이었습니다. 심한 가뭄이 들면서 호수에 녹아 있던 공해물질 농도가 높아지면서 그 물을 마신 코끼리들이 떼 죽음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물이 마른 호수에 코끼리의 마른 뼈가 산처럼 쌓이게 된 이유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말세에 교회 안에 이런 참혹함이 생길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 말씀의 기근 속에서 거짓 복음과 거짓 교리의 독을 마신 성도들이 떼죽음당한 상황을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5~17).

이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영적으로 가난하고 곤고한데, “나는 부자라 부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적 눈이 멀어서 자신의 모습도 보지 못하고, 교회의 참상도 보지 못하는데 “나는 눈을 떠서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의의 옷을 입지 못해서 벌거벗었는데 “나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구원을 잃어버린 상태인데, “나는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오늘날 기독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의 깊은 영적 죽음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운 사실은, 뜨뜻미지근한 교회, 예수께서 토해 내치고 싶은 교회, 그런데 그런 교회 속에서 기적과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방언이 넘쳐 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들이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계 18:2).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방법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런 교회 속에서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성도들을 만들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죽은 교회 속에서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의인들을 준비시킬까요? 어떻게 하면 죽어 있는 교회 속에서 생명을 얻고 마지막 남은 무리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에스겔서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 3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마른 뼈가 가득 쌓여 있는 장면을 보여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겔 37:1~2)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해서 에스겔에서 뼈가 가득히 쌓여 있는 골짜기를 보여 주셨는데, 그것은 영적으로 죽은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뼈가 아주 말랐다고 했습니다.

3절.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살아날 수 있다고 말하는 대신,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에스겔의 눈에는 전혀 가망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능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죽은 지 오래되어서 뼈가 바짝 말라 있기 때문에 살릴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뼈가 너무나 마르고 깨어져서 이 뼈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뼈들입니다. 오늘날 교회 형편을 보면, 정말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이 교회가 정말 부흥해서 살아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절망을 느끼게 됩니다. “정말 이런 교회가 그리스도의 재강림을 위해서 준비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생깁니다. 에스겔이 바짝 말라 있는 뼈들의 골짜기를 보면서 느꼈던 절망을 우리도 교회를 보면서 느끼게 됩니다.

4절.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기 참 이상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뼈를 향해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뼈가 바짝 말라서 완전히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뼈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골짜기를 채우고 있는 뼈는 실제 뼈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영적으로 죽은 교인들이 가득 쌓여 있는 것 같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는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마른 뼈가 살아나는 첫 번째 단계가 있습니다. 죽은 뼈가 부활하는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죽은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자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뼈들이 가득한 죽은 교회를 살리는 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대언한다”는 것은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말고, 말씀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는 말씀 그대로를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와 사람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도 에스겔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마른 뼈들에게 대언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 줄 하나님의 기별자가 필요합니다.

잠재우는 말씀이 있고, 깨우는 말씀이 있습니다. 잠자는 사람을 깨우면 짜증을 내고 싫어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면 듣기 싫어하고 화를 냅니다. 그러나 듣기 싫어하고 양심이 불편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진짜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귀있는 자들”은 성령의 음성을 알아 듣습니다.

골짜기에 가득 쌓여 있는 뼈는 “아주 마른 뼈”라고 했습니다. 뼈가 아주 말랐다는 것은 죽은 지 오래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래전에는 살아 있었지만, 지금은 죽은지 오래 되어서 마른 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마른 뼈는 한때 영적으로 살아 있었지만 지금은 죽은 그리스도인을 뜻합니다. 한때는 주님께 마음을 바쳐서 거듭났던 적이 있지만, 오래전에 영적으로 죽어버린 사람들을 뜻합니다. 성도 여러분, 한 번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났다고 할지라도, 죽은 지 오래된 마른 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한 번 구원받았으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가르침은 거짓 복음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한때는 거듭났지만, 오랜 세월 형식적인 예배와 무의미한 신앙생활로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영적인 경험을 잃어버린 분들이 계십니까? 한때 회개하고 뜨거웠지만, 바쁘게 살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아서 뜨뜻미지근하게 된 분들이 계십니까? 오래전에는 날마다 기도하고 뜨거움이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서서히 말라 죽어 버린 분들이 계십니까? 오래전에는 말씀을 펴놓고 연구하면 성령께서 가슴 깊숙한 곳에 진리를 새겨 주셨는데, 언제부턴가 진리에 대한 충성이 사라졌고 영혼이 메말랐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분들은 지금 마른 뼈가 된 것입니다.

오래전에는 시험과 유혹이 올 때, 투쟁하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려고 애를 썼는데 언젠부터인지 투쟁을 포기하고 되는 대로 살고 계십니까? 한때는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을 가졌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험이 오면 힘없이 쓰러지는 라오디게아 교인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고 싶지만, 자꾸 넘어지고 쓰러지십니까? 그런 분들은 영적인 영양 공급이 되지 않아서 근육이 사라지고 핏줄이 말라서 앙상하게 마른 뼈만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속에 수북히 쌓여 있는 죽은 뼈들을 살리실 수 있는 창조주이십니다.

5절.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하나님께서 뼈들을 살리시는데, 어떻게 살리신다고 했습니까? “너희 속에 생기를 넣어서 살리시겠다”고 했습니다. “생기”가 무엇인가요? 성경에서 “생기”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억지로 짜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격정적으로 찬양하고 통성으로 기도하며 울부짖는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성령은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부리는 것이지 우리가 성령을 부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6절.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 말씀은 마른 뼈가 소생하는 순서와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면, 힘줄이 생기고, 살과 가죽이 생기게 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른 뼈가 살아나는 첫 번째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내 뜻을 버리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변화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말씀이 생명으로 가는 첫 번째 단계일까요?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은 말씀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씨앗을 심어야 진리의 열매가 열립니니다. 팥을 심어 놓고서 콩을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거짓 복음과 거짓 교리를 마음에 심어 놓고 구원의 열매가 맺히길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복음, 계명을 지키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복음, 알고 있는 죄를 버리지 않고 알고 있는 진리에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을 받아들이면, 거룩함의 열매가 마음과 생애 속에 맺힐 수 없습니다. 거짓 복음은 결코 변화와 열매를 생산해 낼 수 없습니다.

“이에 내가(에스겔)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shaking, 흔들림)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겔 37:7)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마른 뼈들 사이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서 흔들림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요? 성경에서 흔들림은 가짜를 진짜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서 흔드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에는 알곡을 골라내는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체질이고 다른 하나는 흔들림입니다. 알곡과 쭉정이가 섞여 있기 때문에 심하게 흔들어서 쭉정이를 알곡들로부터 분리시켜 떨어내는 것이 흔들림입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어서 꼼짝도 하지 않는 죽은 뼈들을 어떻게 흔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격을 주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마른 뼈들도 흔들리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왜 흔들림이 생기게 될까요? 마른 뼈들 사이에 흔들림이 생기는 이유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거절하는 사람들이 서로 부딪치고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주는 흔들림을 통해서 각 사람은 자신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전한 죽은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교회입니다. 비록 그들이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영적으로는 죽어 있는 마른 뼈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와 같은 충성스런 백성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죽어서 마른 뼈가 된 지 오래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향해서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심하게 소리가 나면서 흔들림이 생긴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와 말씀을 무시하거나 거절하는 사람들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가면, 흔들림이 생기면서 알곡과 가라지가 분리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면 좁은 길을 걸을 것인지 넓은 길로 가든지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흔들림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대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보지 않고 사람의 눈을 보면서 말씀을 전하면 흔들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말씀에 의한 흔들림이 없기 때문에 영혼들이 마른 뼈로 잠을 자는 참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불변의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뼈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부흥이 생기고 삶 속에 개혁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나서 어떤 일들이 생긴다고 했습니까?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말씀에 붙잡힌 뼈와 뼈들이 서로 짝을 맞추면서 세워지게 됩니다. 함께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도무지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이 말씀 안에서 하나로 연합하게 됩니다. 같은 말씀을 붙잡은 뼈는 같은 마음과 뜻을 가진 뼈를 만나서 짝을 맞추게 됩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끼리 연합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교회 안에 흔들림이 생기면, 알곡과 가라지가 분리되는데 알곡은 알곡대로 연합하고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연합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같은 속성을 가진 사람들끼리 연결되고 마음이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세속적인 사람들끼리 모이기를 좋아하고,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끼리 모이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이 흔들림의 결과로 생기는 분리와 연합입니다. 이런 현상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8절.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면서 사람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겉으로 볼 때는 그럴듯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무엇이 없다고 했습니까? 생기(성령의 임재)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죽었다는 것입니다. 눈, 코, 입이 있어서 말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립니다. 그런데 성령의 임재가 그 속에 없습니다. 골짜기에 있는 수많은 뼈들이 살아나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 안에 아직 성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의 형편입니다. 성경이 있고 말씀이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예의도 있고 상식도 있어 보입니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설교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아직 죽어 있는데,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살았다고 말합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해서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곤고하지 않고 가련하지 않습니다. 눈멀지도 않았고 벌거벗지도 않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많이 들어서 지식이 있다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를 조금 안다고 해서 살아 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심령 속에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살아 있는 것입니다.

9절.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골짜기를 채우고 있는 죽은 자들에게 성령이 바람처럼 불어와서 살아나게 하라고 명령하시는 모습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죽은 자, 즉 사망당한 자가 누구입니까? 뼈가 맞추어지고 그 위에 살과 힘줄과 가죽이 붙어 있는 사람입니다. 오장육부가 있고 모든 것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망당한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죽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직 성령의 바람이 그들에게 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기가 그들 속에 아직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지해서 간절하게 성령을 초청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이것이 무슨 말인가요? “성령이여, 부디 이 교회 속에 들어오셔서 교회를 살려 주시옵소서. 성령이여, 이 사람들이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하지만 죽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부디, 성령의 바람을 불어주시옵소서. 저들을 살려 주시옵소서.” 에스겔의 호소에 성령께서 응답하실까요?

10절.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골짜기에 산더미처럼 쌓여서 죽어 있던 뼈들은 원래 군대였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바람처럼 불자, 다시 생명을 얻고 일어났는데, 그들이 다시 큰 군대가 된 것업니다. 이어지는 11절부터 죽은 이스라엘 교회의 참담한 상태가 다시 묘사됩니다.

11절.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지금은 성령을 받고 살아났지만, 전에는 소망도 없고 멸절되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푸념처념 들립니다. 주변 교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 보셨습니까?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이쟎습니까?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대로 뜨뜻미지근한 것이 당연하죠. 그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일곱 교회 예언에 나오는 마지막 교회처럼 우린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게 살고 있습니다. 우린 다 마른 뼈입니다. 우리에겐 소망도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살면 멸망당하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린 그저 하나님의 자비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12절.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무덤을 여는 모습이 나옵니다. 왜 무덤을 열어야 할까요?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 무덤을 여시는 것입니다. 뼈에 살이 붙고 가죽으로 덮혀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 해결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나에게서 죽은 송장 냄새가 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무덤 문을 여시고 꺼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하늘에 별을 다시고 땅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정말 그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마른 뼈와 같은 우리를 살려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합니까? 왜 계속해서 죽어 있으려고 합니까? 왜 살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뭔가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 말씀이 우주의 왕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린 이렇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우린 무덤 속에서 썩은 냄새를 풍기면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을 간구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서 나를 살려 내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신앙은 매달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의지가 강해야 신앙이 좋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의지와 매달림은 다른 것입니다. 칠흙같이 캄캄한 밤에 바다에 홀로 떨어진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은 수영할 줄 모르기 때문에 허우적거리면서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무엇인가 붙잡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잡을 수 있는 것을 찾고 또 찾을 것입니다. 그것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지 의지가 강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자신의 연약함을 느끼는 사람이 하나님께 매달리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 그것이 하나님을 찾는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승리하는 생애를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붙잡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13절.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살려 달라고 외치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무덤을 열고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우리를 세속에서 건져 주시고, 잘못된 사고방식에서 구해 주시고, 돈을 사랑하는 정신과 돈에 의존하는 정신에서 구해 주실 것입니다. 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구해 주시고, 이기심에서 구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생기를 불어넣을 때 생기는 변화입니다.

남들이 인정하는 큰 교회, 정통 교회에 다닐지라도 무덤 속에서 마른 뼈로 누워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라서 죽은 뼈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알 수 있습니다. 순종과 헌신과 희생을 이야기할 때 귀를 막고 돌아서면 죽은 뼈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거절하면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에는 귀가 솔깃해지면 마른 뼈입니다. 한 번 예수를 영접하고 교회 나오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설교가 마음을 기쁘게 하면 마른 뼈입니다. 성령께서 더 밝은 빛과 진리를 주시는데, 그것을 외면하면 마른 뼈입니다. 마른 뼈들은 왜 그런 반응을 하게 될까요? 생기가 그 속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아직 그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 말씀과 계명이 무거운 멍에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성령을 받는다면,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생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진리에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유혹에 저항하고 죄를 거절하게 될 것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동정하고 그들에게 다가갈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재물을 죽은 자들을 위한 선교에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호소

구약 시대에 에스겔에게 하셨던 질문을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지금 기독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마른 뼈들이 살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에스겔처럼 대답할 것입니다. “주여, 제 눈에는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옛날에 에스겔에게 하셨던 명령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지금 너희 눈에는 전혀 가망이 없어 보이지만, 포기하지 말고 마른 뼈들에게 말씀을 주어라. 비록 그들이 죽은 뼈처럼 보이지만 들을 귀는 가지고 있단다. 그들이 아직 하나님의 군대처럼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지 못하지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은 있으니 말씀을 전해 다오. 기회가 되는 대로 진리를 전해 다오. 그렇게 하면 그중에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생길 것이다. 말씀은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 것이고, 그 흔들림을 통해서 알곡들이 가라지와 쭉정이로 분리될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면서 마른 뼈에 살이 붙고 근육과 피부가 생기고 사람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아직 생기는 없지만, 사람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그때 내가 성령의 바람을 그들에게 불어 갈 것이다. 성령으로 그들 속에 들어가서 호소하고 교육시킬 것이다. 그들에게 생명을 줄 것이다. 그들은 온 마음과 생애를 나에게 바치게 될 것이다. 두 주인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그들에게 열매가 맺히게 될 때 내가 그들을 추수하여 하늘 창고로 거두어들일 것이다. 이것이 성령으로 알곡들을 추수하는 방법이다. 이 세상의 복음 전파는 성령으로 마쳐지게 될 것이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마른 뼈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교파에 속해 있습니까? 모든 진리를 갖고 있는 교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우신 초대 교회의 말씀과 계명이 여러 교파 속으로 흩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을지라도 주께서 주고자 하시는 온전한 진리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현대 기독교인들이 처한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교리만 갖고는 안됩니다. 하늘로부터 살아 있는 생명과 온전한 복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동기가 순수해지고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과 합해져서 의를 행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더 밝은 빛을 향해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검은 말 시대부터 훼손되어 온 하나님의 계명을 회복시키고 지킬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마지막 시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군대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