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내 개인의 경험입니다. 모든 신학생과 목회자가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글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성령께서 날마다 찾아와서 괴롭히시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부족하지만 내 경험을 사람들 앞에 펼쳐놓을 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의 마음을 만지시고 감동시키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모태로부터 교인이 되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내 마음속에 순결한 신앙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어머니의 정성으로 나는 기독교 신앙이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100% 확신하며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충성과 순종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내 마음속에 불타고 있던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은 나로 하여금 전혀 망설이지 않고 신학교에 등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실망과 충격
나는 신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폭넓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나는 기대하는 마음을 갖고 신학과의 여러 과목을 들었는데, 학년이 올라가면서 불타는 신앙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신학교의 학사 과정을 거치면서 예리한 논리와 이론을 배웠지만, 말씀 그대로 믿고 따라가는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신학계를 범람하고 있는 자유주의와 합리주의 그리고 세속에 물들어버린 것입니다. 내 어깨에 신학사라는 학문적 명예가 둘리어졌을 때에는 신학에 대한 신뢰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경건의 능력은 잃어버린 채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신학교를 졸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내가 왜 신학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요?
나는 신학교 교수님의 학문적 위업과 논리에 압도당했습니다. 숫돌에 간 칼날처럼 예리한 설득력으로 다가오는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내 신앙이 너무나 단순한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교수님의 강의가 성경의 영감을 부인할지라도 학점에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교수님은 성경이 100% 영감의 말씀이고 진리라는 사실에 대해서 오히려 의심과 회의를 갖도록 유도하는 강의를 했습니다.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는 어떤 사건이나 문제들에 대해서 의문점을 제시하는 강의는 학생들의 마음을 깊은 회의와 의심의 미로 가운데로 이끌어가기에 충분했습니다. 나뿐 아니라 여러 학생들이 성경의 어떤 부분은 과학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졸업할 때가 되자, 많은 학생들이 스승들처럼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인정하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신앙을 갖게 되면, 전적인 믿음, 희생, 순종, 극기라는 말은 매우 어색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신학과를 다니는 동안, 나는 내가 정말 배우고 싶었던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나는 참된 거듭남의 경험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는데, 그런 강의를 듣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순종의 열매, 죄에 대한 승리의 생애가 어떻게 가능한지 알고 싶었는데 그것을 가르치는 과목이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사는 길을 배우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많은 강의에서 그런 신앙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아니라는 가르침만 받았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생애 전체를 바쳐야 한다고 믿었는데, 신학을 공부하면서 그런 신앙이 위험한 것으로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손을 붙잡고 믿음으로 사는 신앙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용서는 필요하지만 성화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문제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 내 마음을 어지럽혔습니다. 한 번 예수를 영접하면 내 마음과 삶의 거룩함과 상관없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은 그동안 내가 믿어온 것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신학교 3학년 때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어떤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교수님은 내가 만났던 교수님들과는 다른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강의를 시작하는 첫날부터 자신의 간증을 하면서 나중에 목회를 하면 반드시 교인들을 진리에 굴복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하루는 교수님이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웃옷을 벗어제치면서 “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죄를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합니까?”라고 소리치면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목사는 생명력 있는 설교를 해야 하며 목사 자신이 거듭나고 세상을 버리는 경험을 하지 않으면, 교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교수님은 자신의 신앙 때문에 신학교 교수들과 잘 섞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외면당하고 있는 신학교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있는 그 교수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강의에서 그 교수님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종이 되든지 사탄의 종이 될 것입니다.”라고 경고했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사람도 사탄의 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교수님의 강의와 진리에 대한 열정을 통해서 잃어버린 신앙을 회복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진리를 가르치는 주님의 종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하는 침례 요한의 기별을 듣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사는 경험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가르쳐줄 수 있는 책을 접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첫 번째 직면한 문제
누구도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나는 많은 교수님들이 “넓은 길을 걸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죄를 붙잡고 있으면서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강의들이 신학 과정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물론, 죄를 범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교묘한 논리로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진리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교수님들은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성경을 학문으로 가르치는 직업 학자였습니다. 신학교에 숨어 있는 위험을 간파한 후부터, 나는 교수님들이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거나 자유주의적인 가르침을 강의하면, 지혜롭게 문제점을 지적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첫 번째 시도는 교수님에 의해서 점잖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지적을 받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강의를 듣고 있던 다수의 학생들도 교수님의 그러한 태도에 동의하였는데, 그 이유는 내가 버릇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교수님은 나를 교수실로 불러서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학생, 나는 그대가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네. 그러나 그대는 일하러 나가기 전에 경험과 지식의 폭이 넓은 사람에게 배우기 위해서 대학에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돼!” 나는 교수님께 내 마음을 설명하려고 애썼지만, 교수님은 노련하지 못한 나를 여유 있게 제압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었고, 내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충성심을 넣어주셨던 어머니는 신학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하여, 교수님은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실례를 들면서 성경의 100% 영감성을 은근히 부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논리적으로 전개했습니다.
다음 강의 시간부터 나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때로 교수님의 강의가 의심스러울지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습니다. 나는 학급의 친구들에게 교수님의 강의 내용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지만 그들은 교수님의 강의를 여과하거나 판단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무사히 졸업하기를 원했습니다.
학기말 시험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시험지에 진리와 말씀이 말하는 원칙들을 기술하였지만, 교수님은 나에게 형편없는 점수를 주었습니다. 나는 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목회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내 꿈이 교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한 가지 중요한 현실을 보게 되었는데, 교수님들은 가르치고 점수를 주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졸업 후에 목사의 길을 열어주는 면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나는 강의 시간에 교수님께 어떤 도전이나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졸업을 하고 목사직을 얻게 되면, 순결하고 인간의 논리에 오염되지 않은 진리를 분명하게 설교해야지.”라는 결심을 했습니다.
두 번째 직면한 문제
나는 무난히 졸업을 하게 되었고 어떤 교회에서 전도사로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담임 목사님이 복음과 진리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세속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가끔씩 주어지는 설교 시간에 신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죄와 세속에 대해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설교를 했습니다. 누구든지 마음을 열고 십자가 앞에 나가면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은혜가 함께 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런 설교와 가르침을 들어보지 못했기에 당황해했으며, 담임 목사님에 의해서 오랫동안 길들여져 온 어리석은 양들이었음을 드러냈습니다.
담임 목사님은 내가 설교할 때마다 불안해했습니다. 하루는 담임 목사님이 나를 보자고 하더니, “전도사님은 매우 유망한 장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지혜롭고 조심스럽게 설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전도사님의 설교는 교인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몇몇 교인들이 내게 와서 전도사님의 설교가 너무 강하고 사랑이 부족하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분들은 전도사님의 설교가 교회의 평안과 안정을 깰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하나님의 진리를 높이고 영혼들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교회를 아무런 문제없이 운영해야 된다는 데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다시 “진리를 고수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지만, 장래를 기약하면서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이 다음에 내가 교회를 맡게 되면, 설교 시간에 하나님의 진리를 마음껏 외치리라!”라고. 다음 설교 시간부터 나는 어쩔 수 없이 설교 내용을 부드럽고 듣기 좋게 다듬어야만 했습니다. 나중에 내가 직접 교회를 맡게 될 때까지 곧바른 진리의 선포를 미루기로 결정했습니다.
세 번째 직면한 문제
마침내 기다리던 기회가 왔습니다. 나는 정식 목사로서 한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를 마음껏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도 하나님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악하고 거센 양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몇몇 영향력 있는 집사들과 장로들을 찾아다니면서, “교인들이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살면서 지쳐있는데, 목사의 설교가 너무 강해서 힘들다. 교인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불만과 염려를 토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진리로 거듭난 몇몇 양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양들은 무지하고 진리의 가치를 몰랐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양들은 나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힘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한 번 예수를 영접하고 회개했으면 더 이상 구원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어떤 상황에서도 구원해준다. 날마다 죄를 짓고 불안해서 회개하는 것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들의 신앙이다.”라는 식의 설교를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내가 “참된 거듭남과 승리가 있어야 한다.”고 설교하자 부담이 되었던 것입니다. 나를 지지해주던 나이 많으신 장로님들도 교회가 깨질 것을 염려하면서 걱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 중의 몇 분이 목회실로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목사님의 설교가 매우 성경적이고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분간 교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목사님께서 설교 주제를 정하시는 일에 있어서 조금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즈음 나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또 하나의 짐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지만, 남편인 나의 장래를 더욱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나를 아끼는 마음으로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안정적인 목회 생활에 방해가 되는 설교는 제발 하지 마세요. 좀 더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내용으로 설교하세요. 교인들의 죄와 세속을 지적하는 설교는 그들의 마음을 오히려 완악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나는 내 손에 쥐어져 있는 두 가지를 보면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충성과 영혼들의 구원에 대한 깊은 염려가 쥐어져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장밋빛 목회 생활과 안정된 삶에 대한 미련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좁은 길을 걸으라.”고 속삭이는 음성이 들려왔고, 다른 한쪽에서는 “너도 다른 목사들처럼 하면 돼! 왜 너만 유별나고 특별한 설교를 해서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리려고 하니? 조금만 지혜롭게 처신하면 너도 인정받는 목사가 될 수 있어!”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결국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 교회를 떠나게 되면 나에게 맡겨져 있는 이 양들은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지금처럼 설교하면 결국 목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이 불쌍한 양들은 누가 보살필 것인가? 좀 더 지혜롭게 처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거야.”
타협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나는 잠시 기다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돈 많고 영향력 있는 장로님들이 나의 설교에 동의하고, 아내가 나의 부담을 이해하며, 교인들이 나의 설교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 하나님의 진리를 곧바로 설교하는 일을 미루기로 했습니다.
그 후부터 나는 참담한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나는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이렇게 저렇게 말씀을 타협하고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타협하고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자, “하나님께서 내 설교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고 양심을 짓누르는 죄책감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타협의 과정 속에서 내 마음속에 있던 진리에 대한 사랑과 경건의 능력을 선포하는 설교자가 되겠다는 포부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목사들처럼 나 역시 성공적인 목회는 교인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는 데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나도 그들처럼 정치와 행정과 심리학으로 교회를 섬기는 목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효과적인 종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점점 더 사람들의 “인정과 평판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은근히 명예를 쫓게 되었습니다. 나는 교인들의 시선을 하나님의 시선보다 두려워하게 되었고,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을 복음 전파로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돈을 받고 교회 성장을 위하여 일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열정을 갖고 복음 전파에 뛰어들고 있지만, 두 음성을 들으면서 깊은 고민에 잠기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말씀에 대한 충성과 양들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진리를 타협하고 말씀의 표준을 낮추는 한이 있더라도 양들을 불러모아야 한다는 육체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목회자는 그 두 음성 앞에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게 됩니다.
슬픈 사실은, 많은 목회자들이 진리를 포기하고 말씀을 타협하면서까지 양들을 불러모아서 교회를 세우기로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양들의 숫자를 진리보다 중요하게 바라보면 어떤 일들이 생길까요? 설교가 달라지게 됩니다. 매 주말마다 교인들에게 진리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야 하는데 그런 설교를 하지 않게 됩니다.
나 역시 내가 맡고 있던 교회 속에 유행과 세속과 이기심과 탐욕이 넘실거리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만 설교했습니다. 죄와 세속을 지적하거나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서는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교회를 잘 지키고 있으면, 언젠가는 교인들이 회개하고 세상을 버리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내 자신을 합리화했습니다.
결국, 나는 다른 목사들이 부러워하는 대형 교회의 목사로 부름을 받게 되었고, 젊은 전도사들을 몇 명 거느리는 사장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전도사가 나의 목회 지침과 설교에 대해서 질문하거나 도전하면, 과거에 내가 들었던 노련하고 지혜 있는(?) 말로 충고해 주었습니다. 젊은 전도사들에게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해 주었고, 어떻게 하면 교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을 전수해 주었습니다. 그들 중의 어떤 전도사는 석연찮은 얼굴을 하면서 내 성공담을 들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약간 분노가 섞인 음성으로, 그러면서도 노련하게 그들의 의문을 잠재웠습니다. 그런 전도사를 볼 때마다 젊은 시절의 내가 생각났습니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슬픈 사실은, 이런 모습이 나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동료 목사들에게서 나와 같은 모습이 있었는데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의 죄와 불충성을 합리화했습니다. 나는 설교를 곧바르게 하지 않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지 않을 정도로 영적 어두움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실수로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목회를 했지만,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알면서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을 준비하기 위하여 침례 요한이 일어나서 하늘의 기별을 백성들에게 전했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도 백성들에게 예리하고 곧바른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교회 안에서 곧바른 설교에 대항하여 일어서는 장로들과 집사들의 압력이 두려워서 설교 내용을 다듬었습니다.
이제 은퇴를 했고 죽음의 그림자가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인생을 덮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양심의 가책과 고뇌로 인하여 내 영혼에는 쉼이 없습니다. 젊은 시절에 나의 목회를 통하여 떼죽음 당한 양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은 절망과 죄책감으로 고통당합니다. 젊은 시절에 있었던 나의 죄와 타협에 대한 회한이 나의 영혼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당신의 목회는 성공적입니다.”라는 말을 듣기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포기했던 나의 결정에 대한 후회가 내 얼굴에 깊은 근심의 줄을 긋고 있습니다. 처음에 나를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셨지만, 나는 사탄의 덫에 걸려서 그가 이끄는 대로 양들을 인도했습니다. 치욕적인 과거를 되돌아볼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다시 목사의 길을 걸을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지만, 시간은 이미 지나가 버렸습니다. “만일 나에게 다시 목회를 할 수 있는 젊음이 주어진다면, 하늘로부터 가브리엘 천사가 내려와서 하는 것과 같은 설교를 할 텐데….”라는 후회가 내 영혼을 채우고 있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교인들의 마음에 전율을 일으키는 진리를 전하며,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온전히 굴복시키는 기별을 전하고자 하는 소원이 내 영혼을 사로잡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성결과 거룩함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싶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후배 목사들이시여, 마지막 시대에 부르심을 받은 목사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깊고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온 생애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굴복하는 헌신이 있어야 주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설교단에서뿐 아니라 가정에서 진실하고 정직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영생의 길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목사들이시여,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거룩한 부르심에 희생과 헌신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런 응답을 하는 목회자는 “내가 다시 목사가 될 수 있다면….”이라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