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은 우리 귀에 이런 말을 속삭입니다. “네가 똑같은 죄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한 하나님께 갈 수 없다. 어제 죄를 범하고 회개하고 용서받았는데 오늘 똑같은 죄를 다시 짓고 하나님께 가서 기도하다니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니? 너는 위선자야! 너무나 뻔뻔스러워! 너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없어. 너는 날마다 죄를 범하는데, 하나님께서 무조건 네 죄를 받아주고 용서하실까?” 이것이 사탄이 우리를 공격해서 무너뜨리는 “속삭임”입니다. 이런 속삭임에 귀기울이는 사람마다 영혼의 평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한번은 어떤 청년을 만났는데 그 청년은 귀한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자신의 연약한 부분을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죄에 잘 빠지고 걸려드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사탄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자신을 정죄하게 되었고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가고 있었습니다. 죄를 범할 때마다 심한 자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참된 신앙에서 돌아서서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을 갖고 교회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 청년과 같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죄를 범합니다. 그리고 회개한 다음에 회개한 죄에 또 걸려 넘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한동안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다시 죄를 범하는 경험을 되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괴롭히면서 하나님께 다시 나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께 나가는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받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할 때마다 주님께 나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위선입니까? 아닙니다. 죄를 범한 사람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이 위선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인간의 용서도 이러할진대 하나님의 용서는 어떨까요? 그러므로 사탄이 죄에 쓰러져 있는 우리를 찾아와서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야!”라고 말할 때, 믿음으로 사탄의 속삭임을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도록 주께 달려가야 합니다. 주님께 가면 언제든지 영혼의 쉼을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사탄의 속삭임이 들려올 때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마음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평안이 우리 영혼 속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5:37)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사 27:5)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문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용서해 주는 기계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이미 용서가 준비되어 있으니까 죄를 범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당연히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죄를 계획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의도적으로 죄를 붙잡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이렇게 오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동전을 넣으면 자동적으로 나오는 자판기 커피 같은 거야. 날마다 똑같은 죄를 반복해도 ‘용서해 달라’고 말하면 언제나 사함을 받을 수 있어.”
하나님께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의 마음은 ‘감사와 충성’으로 채워집니다. 그러므로 변화는 용서받은 자에게 맺히는 열매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이 용서받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면 심령이 가난해진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용서를 위해서 어떤 값이 치러졌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 나간 영혼은 결코 하나님의 용서를 당연하고 가벼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용서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용서를 위해서 엄청난 희생과 대가가 지불되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십자가의 피를 앞세우고 전진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죄가 반복되는 모습을 보면서 힘겨워합니다. 양심의 가책과 정죄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 무엇을 해야 이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하루에 성경을 얼마나 오랫동안 읽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루에 몇 번 기도해야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그렇게 노력해야만 “하나님께서 나를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보실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의도와 목적이 선할지라도 이런 생각은 빗나간 방법입니다. 주님께 마음과 생애를 드리기 원하는 사람은 죄를 짓는 순간 주님께 달려가서 그분께 매달리게 됩니다. 그것이 죄를 범한 죄인의 첫 번째 반응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회개해야 예수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앞에 나가야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겁에 질린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면서 용서를 구걸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주님께 나가 “주여, 저는 주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저를 용서하시고 죄에서 건져 주시옵소서.”라고 소원을 아뢰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은혜의 왕국에 사는 그리스인입니다. 이런 사람이 죄를 용서받고 건짐을 받게 되는데, 영혼의 평안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믿음으로 주님께 나가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비록 제가 죄를 범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에 대한 값이 치러졌음을 믿습니다.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의로 덮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부터 믿음으로 하늘이 주는 자유와 평안을 붙잡고 살아가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를 위해서 피 흘리고 죽으셨는데, 제가 여기서 낙심하고 좌절할 수 없습니다. 사탄이 제 귀에 정죄와 낙담의 속삭임을 줄지라도 결코 주님의 손을 놓지 않겠습니다. 제 영혼이 하나님을 자유롭게 찬양할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시옵소서. 저는 잠시 잠깐이면 끝나는 이 세상 대신에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습니다. 주님의 피를 앞세우고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겠습니다. 십자가의 피를 헛되게 하고 싶지 않겠습니다. 주여, 제 손 붙잡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에 아버지가 있는 사람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이 주 안에서 항상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회개했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마음에 참된 기쁨과 쉼이 없다면 그런 삶은 정말 불행하고 참담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을 보시면서 깊은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끼십니다.
참된 행복과 평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얻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관계를 계속해서 맺는 것이 어려운 일인가요? 부모와 자녀가 서로 끊임없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 힘든가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고 희생하는 일이 어려운 일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참된 행복과 쉼은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어떤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어린 남매를 입양했습니다. 입양된 남매는 새 부모의 말을 너무나 잘 순종했습니다. 집안 청소에서부터 공부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그 아이들은 단 한 번도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으며, 점심 도시락에 맛있는 반찬을 싸 달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 경기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습니다. 너무나 말 잘 듣는 완벽한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양부모의 마음에는 전혀 기쁨과 행복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입양된 아이들은 항상 양부모의 눈치를 살폈기 때문입니다. 혹시 잘못하면 자기들을 다시 고아원으로 보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 아이들로 하여금 완벽한 순종을 하도록 억압했던 것입니다. 양부모에게 있어서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자녀가 가정 안에서 참된 만족과 행복을 맛보지 못할 때, 부모의 마음에는 항상 그늘이 드리우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늘에 아버지가 계신데, 이 세상을 고아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외롭고 힘겨운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행복과 쉼을 맛보지 못한 채 성경이 말하는 순종과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 애쓰다가 지쳐 갑니다. 부모의 사랑을 모르는 자녀는 성격이 삐뚤어지고 차가워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메마르고 삐뚤어진 성품을 갖게 됩니다. 하늘의 생명과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과 지옥불이 두려워서 하나님이 눈치를 보면서 살게 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생애 속에는 언제나 어두운 그림자와 좌절이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이런 저런 이유를 만들어서 진리를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과 지옥이 두려워서 교회를 떠나지 못하지만 위선과 불행으로 얼룩진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님께 가장 큰 아픔이 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4~15).
주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늘이 주는 특별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즐거움인데, 이것을 맛본 사람은 사탄과 세상이 주는 쾌락에 관심을 나타내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가장 좋은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을 이긴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늘의 평안을 잃어버릴 때 나타나는 증세
1. 돈이 없으면 안절부절하고 불안해한다.
2.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사람을 의지한다.
3. 불평을 멈추지 못한다.
4. 어둡고 부정적인 것을 바라본다.
5. 의심의 구름 속에서 살아간다.
6. 마음이 허전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7. 돈과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