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19세기 중엽 이후~예수 재림까지(마지막)
이름의 의미
라오디게아의 의미는 “백성을 심판하심”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지구 역사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라는 이름이 의미하듯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심판이 이루어지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마지막 교회일 뿐 아니라 우리가 다니고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모습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계 3:14)
마지막 교회를 보살피는 예수님의 모습은 “창조의 근본이신 이”입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창조가 크게 흔들릴 것을 아셨기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살피는 당신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묘사하셨습니다. 중세기 종교암흑시대에도 창조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시대에는 하나님의 창조가 무시되고 놀림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중세기 암흑기 이후에 사탄이 어떻게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중세기 종교암흑시대가 끝난 후, 이 세상에는 무신론 세력이 급격하게 올라왔습니다. 중세기 천년 동안 하나님과 신앙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종교에 대한 깊은 회의와 환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1798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교황 피우스 6세를 옥사시켰으며, 바티칸의 땅과 소유를 몰수해 버리면서 종교와 성경을 부인하는 사상이 크게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사상이 사라졌으며,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과 학문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벨하우센이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는 고등비평을 내놓았습니다. 또한 철학자 니이체는 “하나님은 죽었다”는 사신 신학을 주장했으며, 1855년에 챨스 다윈은 <종의 기원>을 발표해서 창조를 부인하고 진화론을 주장했습니다. 사탄은 진화론을 퍼뜨림으로써 큰 재미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실험실 안에서 증명하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험실에서 증명될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부족한 인간의 과학으로 증명하지 않으십니다. 그대신 예언을 통해서 지구 역사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주관되어 왔음을 입증해 보이십니다. 우리는 과학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말세가 되면서 무신론 세력이 아주 빠른 속도로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무신론 세력은 공산주의라는 정치 철학을 만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무신론 세력은 학문으로도 깊이 파고 들었습니다. 무신론이 인본주의(휴머니즘)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학계에 들어가 거의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인본주의란, 모든 것의 중심에 인간이 있다는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에서는 하나님보다 인간이 먼저 입니다. 인본주의 사상은 오늘날 모든 교육 이념에 깊이 뿌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그토록 비종교적이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예배에도 인본주의가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라 사람이 원하는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음악이 아니라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으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술집과 댄스 클럽에서 사용하는 세상 음악에 가사만 기독교적으로 바꿔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크리스천 록이라는 음악까지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온몸을 격렬하게 움직이고 머리를 흔들며 해드뱅잉(head banging)하면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찬양을 부르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가 시작되면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산업혁명 때문에 세계 선교에 큰 도움을 받았지만, 산업혁명으로 인한 물질의 풍요와 재물의 축적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창조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온 세상이 산업화되면서 과학과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돈이 가장 강력한 우상이 되었습니다. 사탄은 온 세상을 진화론, 인본주의, 무신론, 재물, 안일함, 이기주의 그리고 바쁜 삶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습니다. 중세기에는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고 거짓교리와 핍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했는데, 마지막 시대에 들어오면서 사탄은 교회를 세속적으로 만들고, 돈과 세상을 사랑하는 넓은 길을 걸어도 구원받을 것처럼 미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고 순종하지 않을지라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처럼 미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충성하는 신앙이 거의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짐승의 환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깊이 살펴서 마음이 크게 부흥되고 깨우침을 받지 못하면, 사탄에게 미혹을 받아서 잃어버림을 당하게 되는 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칭찬이 전혀 없는 교회
참으로 두려운 사실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단 한마디의 칭찬도 하지 않으셨을까요? 왜냐하면 마지막 교회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고 맞이해야 할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예언하고 있는 마지막 환난을 통과하고, 일곱 재앙을 통과하며, 아마겟돈 전쟁을 치루어야 할 교회가 전혀 준비 없이,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긴박한 순간에 깊은 잠에 취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예언의 성취를 앞두고 있으면서, 예언에 관심을 갖지 않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예수께서 얼마나 답답하실까요?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공부할 때, 예수께서 무엇을 책망하시고, 어떤 해결책을 내놓으시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위해서 보낸 종들은 어떤 복음을 가르치고 무엇을 강조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먼저 문제를 통렬하게 지적하면서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주십니다. 귀 있는 자들은 예수께서 주시는 해결책을 온 마음과 생애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책망 1
“내가(예수님)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계 3:15,16)
일곱 교회 가운데 어떤 교회도 이런 책망을 받았던 교회는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다니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 형편을 보시면서 너무나 역겨워서 토해 내치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차라리 차가워져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교회 밖 세상으로 나가버리면, 성령께서 그들의 양심에 괴로움과 가책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서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덥지 않고 차지도 않은 상태로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살기 때문에 성령께서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시기 매우 어렵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안타까워 하시는 이유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죄와 세속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죄와 세속에 대해서 언제나 애매한 중간 입장을 취합니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입장을 취합니다. 진리에 대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타내는 무관심과 세상으로 나가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태도는 예수님의 마음에 큰 고통을 안겨줍니다.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최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탄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탄으로부터 조롱을 받고 수치를 당하십니다.
예수께서 토해 내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교회 사이의 중간에 서 있으려는 태도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면서 순종하지 않고, 죄가 무엇인지 알면서 포기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성령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전적으로 감동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세속과 거룩함의 중간에 서서 양쪽을 모두 붙잡고 있는 태도 때문에 예수께서 주고자 하는 구원의 경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차든지 덥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생각은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습니다. 찬 생각도 없고 뜨거운 생각도 없습니다. 항상 중간에 서 있다가 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닐 뿐입니다. 자신이 고민하고 내리는 정직한 판단이 없고, 양심적 고민이 없습니다. 군중의 생각을 따라가고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중심에는 군중심리가 있습니다. 내가 왜 이 길을 가야하고, 내가 왜 이런 복음을 믿어야 하며, 내가 왜 이 교회를 다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와 판단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서면 나도 서고, 사람들이 앉으면 나도 앉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런 면에 있어서 분명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하나님의 기쁨만을 위해서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 내 자신을 바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만족시키고 하나님의 뜻도 따라가려고 어중간하게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진리만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구원도 개인적이고 심판도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목회자와 교회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갑니다. 이런 라오디게아 사람들을 보시면서, 예수께서 “오늘 그대들이 섬길 자를 택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는 기별입니다.
예수님의 책망 2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라오디게아 교회의 죄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시는데,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전혀 모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너무나 비참한 상태인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부요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잘못되어 있으면서도 가장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 자신의 생애를 그리스도의 생애와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볼 때까지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읽지만,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예언에 대해서 눈멀어 있고 영적으로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곤고하고 가련하다”라고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방언을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마음속에 비밀스런 우상을 품고 살기 때문입니다. 돈의 우상, 자녀의 우상, 명예의 우상을 품고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서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고, 성령의 음성을 들어도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암흑 가운데 있으면서도,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나는 구원받았다”는 확신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상태에 있으면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 한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번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 받은 사람은 죄와 세속에 빠져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라는 교리에 강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죄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됩니다. 자신의 부족과 필요를 느껴야 구조 요청을 할텐데, 거의 완벽한 자기 만족과 자기 기만 속에서 구원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위험이 어디 있을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거짓 구원론이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가장 인기있는 복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가난하지만 부자라고 생각하고 가장 부족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벌거벗고 있지만 흰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입니다. 놀라운 기만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라오디게아 교인들 대다수에게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벌거벗고 있고 때문에 자신이 벌고벗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눈멀어 있으면 자신이 눈멀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옷을 입고,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비정상으로 취급받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예언된 말씀의 기근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왜 이렇게 완벽한 기만 속에 있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아모스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마지막 시대에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암 8:11,12). 마지막 시대에 말씀의 기근이 오는데,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려고 해도 듣지 못하는 기근이 온다고 했습니다. 왜 말세에 말씀의 기근이 생길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곧바르게 전하는 종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기 때문입니다. 집집마다 성경이 있고, 동네마다 교회가 세워져 있지만, 진리를 분명하게 전하는 종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기 때문에 말세에 말씀의 기근이 생기는 것입니다. 매 주말마다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고 기도하며 설교를 듣지만, 죄인의 마음에 회개와 생명을 주는 여호와의 말씀은 너무나 듣기 어려운 시대가 라오디게아 시대입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는 말세에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여도 살아있는 믿음과 생명을 주는 복음을 듣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 시대에는 열심을 내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찾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경고를 무시하는 라오디게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철저하게 경고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깊은 잠에 취해 있는 사람을 깨우면 화를 내는 것처럼,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잠을 깨우면 분노합니다. “당신들은 부자가 아닙니다.”라는 말씀도 무시하고, “눈이 멀었습니다.”라는 경고도 무시하고, “흰옷을 입고 있지 않습니다”는 호소도 무시합니다. 자기 기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거절합니다. 옛날 유대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마지막 시대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성령의 음성을 못 박아 죽이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보내서 잠자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깨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어둠의 세력은 예수께서 보내신 종들을 핍박하고 말씀을 거절하지만, 귀 있는 자들은 주께서 보내시는 말씀을 붙잡을 것입니다.
라오디아 교회의 유일한 희망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예수께서 보내는 희망의 메세지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세 가지 치료제와 처방을 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위해서 보내신 종들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시대에 예수께서 보내신 종들을 구별하는 방법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신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사람들입니다. 깊은 잠에 취해 있는 라오디게아 사람들을 깨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를 지적할 뿐 아니라 예수께서 주신 치료방법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살리고 회복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생애를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라오디게아 교회 문제를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면서 성도들에게 호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책망과 치료방법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먼저 치료받고 회복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말씀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 있는 “귀 있는 자들”이 고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참담한 형편의 라오디게아 교회 속에도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한 백성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예수께서 주신 세 가지 치료방법을 살펴볼 때 성령께서 독자 여러분의 심령 속에 크게 역사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의 3가지 처방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1)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2)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3)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예수께서는 불로 연단한 금과 흰옷과 안약을 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 사는 것일까요? 예수께 가야만 이 세 가지 모두를 살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치 값진 보화를 짊어지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상인처럼, 라오디게아 교회의 각 개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의 처방을 사라고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예수께서 주시는 세 가지 처방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서 그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세 가지 처방을 받아들여야만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1)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계 3:18)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주시는 처방은 불로 연단한 금을 사는 것입니다. 금을 사야 하는데 그냥 금이 아니라 “불로 연단한 금”을 사야만 합니다. 불로 연단한 금이란, 시험과 고난을 통해서 단련을 받아 순수해진 믿음을 뜻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벧전 1:7).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뜨거운 시련의 불 속에서 인간적인 찌꺼기와 불순물들이 타야만 순수한 믿음이 남게 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두라 평지에 세워진 우상에게 경배하라는 바벨론 왕의 명령을 받았을 때, 그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왜 거절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풀무불의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풀무불 고난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거니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풀무불 시련을 통과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이것이 불로 연단한 금(믿음)을 사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좁은 길에서 고난을 만나게 되는데, 그때 고난 속에서 연단된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말씀에 충성하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불로 연단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재물이 많아지거나 지위가 높아져도 우쭐거리지 않고, 사업이 망하거나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믿음은 인간도 의지하고 하나님도 의지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순수한 믿음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이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피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를 살피면서 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예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지만, 그것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사야만 하는 이유는, 예수께서는 거저 주시지만 우리가 이 타락한 세상을 살기 때문에 고난과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좁은 길을 걸어갈 때, 믿음이 없이는 통과할 수 없는 고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고난 속에서 우리의 성품과 신앙 속에 섞여 있는 불순물이 타서 없어지는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소유 모두를 팔아서 천국을 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 13:44, 45). 어떻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 수 있을까요? 밭에서 발견한 보화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삶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주저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팔게 될 것입니다. 내가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을 팔아서 구원의 경험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험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게 될까요?
그리스도인의 영적 경험은 십자가에서 시작됩니다. 하늘의 왕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흙먼지 뒤집어 쓰고 업신여김 받으면서 살다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그분에 대한 감사와 믿음이 우리의 영혼을 채우게 됩니다.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정신과 세상에 대한 애착심이 얼마나 의미 없고 무가치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자신의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이 하찮게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향해 참된 감사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온 마음과 생애를 그리스도께 드리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처럼 큰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마음과 생애를 주께 바치기를 주저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과 희생이 어떤 것인지 알면서 어떻게 그분의 말씀과 진리를 모른 척하고 살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간절한 심령으로 주앞에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받으시고 그 안에 믿음을 채워주워 주실 것입니다.
2) “흰옷을 사라”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계 3:18)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위해서 주신 두 번째 치료제는 흰옷입니다. 예수께서 흰옷을 치료제로 주시는 이유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벌거벗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사데 교회 교인들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고 하셨는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향해서는 아예 벌거벗고 다니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말세가 되면서 흰옷에 대한 문제가 더 심각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흰옷을 입지 않으면 이런 참담한 일이 생기게 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1, 22).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굉장한 경험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평생 동안 예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심판의 선언을 하십니다. 왜 그런 일이 생기게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흰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으리니”(마 7:22, 23).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은 행하라고 주신 말씀이지 듣기만 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흰옷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는 사데 교회에서 흰옷이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는 성도들의 마음과 삶에서 열매로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깨끗하고 흰(clean and white) 세마포(옷)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the righteousness of saints)라 하더라”(계 19:8). 인간의 어떤 선행이나 희생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기 위한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말할 수 없이 귀한 은혜를 받은 성도의 마음속에는 용서와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기 때문에 “주여, 이제 저의 남은 생애는 주님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는 거룩한 헌신을 드리게 됩니다. 날마다 이런 헌신을 드리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화된 생애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에서는 “믿기만 하면 의의 옷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마음과 생애에 결정적인 변화가 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가르침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흰옷을 입지 못한 벌거벗고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르침 때문에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삭개오가 했던 참된 회개의 경험이 그토록 보기 힘들게 된 것입니다. 그런 가르침으로는 결코 라오디게아 교회가 갖고 있는 치명적인 질병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의 즉, 흰옷을 입을 수 있을까요? 십자가로 가야 합니다. 십자가 아래에 나아가 자신의 삶과 그리스도의 생애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본 그리스도인은 간절한 심령으로 자신의 온 마음과 생애를 그리스도께 드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아래에서 자신이 “허물과 죄로 죽었”고(엡 2:1),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여성한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사 1:4, 5). 그래서 온 마음과 생애를 주님께 맡겨서 고침받기를 간절하게 원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심령으로 주 앞에 나가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해주시는 거듭남의 경험을 주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4, 5).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예수의 마음을 품게 되면 가련하고 눈멀었고 벌거벗은 영적 질병이 치료되고, 그때부터 우리 안에 있는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참된 중생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고, 그의 뜻은 예수님의 뜻과 일치하게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에 순복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흰옷을 입은 그리스도인의 생애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는 이런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3) “안약을 사라”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예수께서 세 번째 주신 치료제는 안약입니다. 안약은 성령께서 우리의 양심을 예민하게 하고 영적 눈을 열어주시는 역사를 뜻합니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 영적으로 소경 된 것을 고치고 진리와 오류를 분별하며 하나님의 역사와 사탄의 기만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영적 분별력을 밝게 해 주시는 역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특별히 마지막 시대에는 사탄이 택한 자까지 미혹하기 위해서 교회 안을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눈을 뜨게 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탄의 미혹과 거짓 선지자의 영을 구별하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많은 거짓 가르침과 복음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정말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짐승의 환난 때 사탄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기적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계 13:13, 14). 짐승의 환난이 오면, 사탄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했던 이적을 흉내내면서 온 세상 사람들을 기만할 것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그 준비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지막 시대 성도들에게 말씀과 영을 분별하는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호소
“무릇 내가(예수님)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19,20)
지금, 예수께서는 회개하라고 호소하고 계십니다. 이 호소를 받아들이는 성도들이 마지막 교회에서 이기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안타까움은 당신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 안에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음 문밖에 계셔서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예수께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무리 예수께서 문을 두드리신다고 할지라도, 내가 마음 문을 열어드리지 않으면 예수께서 내 안으로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셔야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교제를 나눌 수 있는데 예수께서 문밖에 서 계시기 때문에 그 경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이런 상황이 일어났기 때문에 흰옷 입는 경험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예수님의 위치는 마음 문밖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 각 개인을 찾아오셔서 마음 문을 두드리겠다고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마음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때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문을 열어드리는 사람이 있고, 문을 열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선택은 각자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마음의 문을 어떻게 두드리실까요? 어떤 때는 새로운 진리를 보여주면서 두드리십니다. 어떤 때는 죄를 지적하면서 두드리시고 어떤 때는 양심의 가책으로 두드리십니다. 어떤 때는 고난과 아픔을 통해서 두드리십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마지막 사명>을 통해서 두드리실 것입니다. 이번 일곱 교회 예언 연구를 통해서 예수님께 마음의 문을 여실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책망과 호소를 받아들이는 분은 특별한 경험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의 발걸음과 경험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믿음을 주시고, 흰옷을 입혀주실 것이며, 안약을 발라 눈을 떠서 영적인 세계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경험을 퍼부어 주실 것입니다.
귀 있는 자, 이기는 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예수님)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3:21,22)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도 오직 이기는 자들에게만 구원의 특권이 주어집니다.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3가지 처방으로 치료를 받으면, 믿음을 통하여 깨끗하고 하얀 의의 옷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진리를 분별하는 영적 눈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죄를 싫어하고, 깨끗하고 거룩한 것을 사모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성도들에게 이기는 경험을 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