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너무 많이 희생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대로 살면 인생에 재미가 없어진다고 느낍니다. 왜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알면 불평이 없어집니다.
신랑, 신부가 불평하지 않은 이유
결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엄격한 원칙이 가장 많이 포함된 관계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자신이 전에 좋아하던 것들을 포기하기로 약속해야 합니다.신랑은 이제 다른 여자들과 데이트할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해야 하며, 남은 생애를 오직 한 여성을 위해 묶어 놓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남편에게 바쳐야 하며, 이전에 사귀어 온 남성들과의 관계를 포기하기로 서약해야 합니다. 결혼 서약이야말로 가장 좁고 협착한 길을 걷기로 맹세하는 서약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전혀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규칙과 법이 엄격할수록 인생이 불행해진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 말이 사실이라면, 결혼처럼 비참하고 불행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그러나 아무도 결혼하는 신랑, 신부를 보면서 불행한 결정을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자신의 생애를 신랑에게 바치기로 서약할 때, 왜 그토록 빛나고 행복하게 보일까요? 신랑은 자신의 남은 생애 동안에 가장 까다롭고 엄격한 원칙을 따르겠다는 결정을 하면서 왜 그렇게 행복한 얼굴을 할 수 있을까요?두 사람이 서로 깊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결혼과 함께 수많은 규칙과 법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들은 결코 불평하지 않습니다.
결혼에 관한 법과 규칙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말 까다롭고 엄격합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간음을 하면 국가의 법에 의해서 체포되어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그런 법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고 걱정하지도 않습니다.엄격한 법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멍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랑과 신부 모두 그들 마음에 법을 범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간음에 대한 법이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법과 계명을 바라보는 시선이 되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형벌을 받을까 봐 두려워서 결혼 서약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을 행복하고 기쁘게 하기 위해서 결혼 서약을 지키는 것입니다.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내 인생 전체를 바치는 것, 그것이 아내의 사랑입니다. 구약 시대 하늘로 승천한 에녹이 바로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 11:5, 6).
가장 불행한 그리스도인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신랑, 신부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결혼했지만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부입니다. 그런 결혼이야말로 지옥입니다. 사랑이 깨지는 순간, 그들은 자신을 묶고 있는 규칙과 법에 대해서 불평을 시작합니다. 사랑이 식어지는 순간부터 그들은 결혼 서약을 무거운 멍에로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무거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그리스도인은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결혼했지만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그런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계명과 진리를 무거운 멍에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좁은 길과 계명을 강조하는 설교를 들으면 “설교가 너무 삭막하고 사랑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성경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자신의 신랑으로 영접한 경험이 없으면 진리와 성경이 말하는 원칙에 대해서 불평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지만, 지옥불이 무서워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상관없는 신앙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한 원칙과 교리들이 이곳저곳에 쌓여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기로 결정한 계명과 거절하기로 선택한 말씀이 마음속에 쌓여서 먼지가 덮혀 있을 때, 영혼은 힘을 잃고 죽어 가게 됩니다. 참된 신앙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어디까지 들어가야 할까요?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원칙을 온 마음을 다해서 받아들이는 지점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좁은 길을 걸을 수 있는 관계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과 이런 관계를 맺지 못할 때 그리스도인은 이상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천둥과 벼락을 맞지 않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고, 재난을 피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영접하며, 지옥 불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말과 생애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를 느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은 결혼식장의 신랑, 신부보다도 훨씬 더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들을 영원한 멸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땅과 하늘에서 누릴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행동을 낳습니다
현대인의 사랑은 너무나 왜곡되어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사랑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황홀한 느낌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께서는 구름 위에 편히 앉아서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주는 결정을 내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랑은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이 땅까지 내려오게 만들었고, 자원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결정하는 것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머릿속으로만 하려고 합니다. 사랑을 느낌과 감정으로만 하려고 합니다. 그런 사랑은 진리가 희생을 요구하고, 십자가를 메라고 요구할 때 연기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사랑은 희생하면 할수록 기쁨이 됩니다
희생을 하면 할수록 사랑은 기쁨을 샘솟게 합니다. 왜 아내는 요리책을 뒤지고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남편에게 주려고 노력할까요? 남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남편에게 혼날까 봐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부부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두려워하고 눈치를 보는 긴장 상태에서는 결혼 관계가 오래갈 수 없습니다.그리스도인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눈치를 보면서 죄를 붙잡고 있는 긴장 관계에서 신앙을 하는 사람은 인생이 정말 피곤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고 봉사와 희생을 해도 마음속에 참된 감사와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해야만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성경을 연구해야만 변화됩니다. 아내가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그분의 뜻을 이룰 수 있을까?”라는 목적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해야만 의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우리는 그리스도의 뜻을 알고, 그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을 연구해야 합니다.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 지식은 높이 쌓일 수 있지만 순종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두려운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성경을 연구하면 오히려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래서 불순종과 죄를 합리화시키는 교리를 세워 나가게 됩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열 가지 계명은 마음속에 참된 사랑이 있어야만 지킬 수 있는 계명입니다. 십계명은 두 개의 돌비로 되어 있습니다. 두 개의 돌비 중 왼쪽 돌비에는 첫째부터 넷째 계명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명입니다. 그리고 오른쪽 돌비에는 다섯째부터 열째 계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계명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은 신약 시대이기 때문에 사랑만 하면 되지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지만, 사도 바울은 정반대의 가르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예수께서도 두 돌비에 새겨진 십계명을 설명하시면서 사랑과 계명을 함께 묶어서 설명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 38)
이 말씀은 십계명의 왼쪽 돌비에 대한 말씀인데,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면 첫째부터 넷째 계명까지 지키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나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우상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을 것이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킬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사랑과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39절)
이 말씀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한 계명으로서 십계명의 오른쪽 돌비에 기록된 말씀의 요약입니다.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십계명의 다섯째 계명부터 열째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부모를 공경하게 되고, 간음하지 않을 것이며, 도둑질이나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될 것이고,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40절)
예수께서는 십계명이 하나님께 대한 계명과 사람에 대한 계명으로 나뉘어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십계명을 “두 계명”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돌비에 기록된 십계명이 구약 성경 전체를 요약한 것이라는 뜻에서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온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십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사랑을 설명하면서 원칙과 성품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아무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이 계명을 지키려고 하면 바리새인처럼 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을 가진 성도들은 계명을 지키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불평하는 진짜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와 계명에 대해서 사람들이 불평하는 진짜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구원만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성경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를 다니면, 진리와 계명에 대해서 불평하게 됩니다. “꼭 그것을 지켜야 합니까?”라고 불평합니다. “꼭 그렇게 살아야 됩니까?”라고 반발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불평하고 저항하는 신앙으로는 구원도 받을 수 없고 의의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은 “내가 지킬 수 있는 몇 가지 말씀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노력과 투쟁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의 원동력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 앞에 나가 그분의 사랑과 희생을 깊이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맏아들을 변화시킨 것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빠져 있는 깊은 수렁이 있는데, 그것은 “하라와 하지 말라의 신앙”입니다. 세 아들을 키우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날마다 세 아들에게 항상 말끔하고 청결한 모습으로 다녀야 한다고 교육시켰습니다. 그러나 세 아들은 세수하고 머리빗고 구두를 깨끗이 손질하라는 어머니의 계명을 늘 귀찮게 생각했습니다. 아침마다 어머니는 세 아들에게 깨끗한 모습으로 다니라는 계명을 주었지만, 아이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맏아들이 멋진 모습으로 방에서 나왔습니다. 머리는 잘 빗질되어 있었고, 구두는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어머니의 계명을 완전하게 지킨 모습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침마다 소리를 치면서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듣지 않던 아들이 갑자기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맏아들에게 이런 변화가 만들었을까요? 맏아들이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맏아들이 다니는 학교에 한 여학생이 새로 전학을 왔던 것입니다. 그 여학생 때문에 아들의 용모와 태도가 완전히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지 않은 나머지 두 아들은 여전히 불순종과 더러운 모습으로 살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노력하고 희생하는 것은 내 자신에게도 큰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그리스도인 생애가 고통스럽게 보이는 것은 큰 문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수도승의 극기 생활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좁은 길을 걷지만, 기쁨과 감사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노새 같은 순종은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왜 그들은 그런 불평을 할까요?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는 기독교 신앙이 온갖 금지 조항들을 모아서 강요하는 죽은 종교로 보이기 때문입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은 그리스도인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시 32:8, 9).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이나 노새처럼 억지로 끌려다니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치 않습니다. 만약 우리의 자녀들이 노새처럼 억지로 끌려서 부모의 말에 순종한다면, 부모 마음은 정말 슬프고 아플 것입니다. 부모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식을 돌보고 사랑했는데, 자녀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부모를 섬기고 순종한다면, 그것처럼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받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사람의 입에는 진리에 대한 불평이 사라지게 됩니다. 참된 신앙을 가진 성도는 “어떻게 하면 내가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라는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성경을 탐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빛이 밝아질 때마다 점점 더 밝은 빛으로 나가 광명한 빛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빛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어둠 속에 머물게 되며 사단의 미혹에 걸려서 쓰러져도 왜 넘어지는지 모르게 됩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8,19).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감사의 정신이 온 영혼을 덮고 있는 성도에게는 성경의 진리와 원칙이 결코 굴레나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