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Talk – 잃어버린 구원의 도

“하나님은 3등 입니다.”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1등은 하고 싶은 일, 2등은 해야 하는 일, 3등은 하나님 만나는 일,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해야 하는 일도 다 마치고, 그 후에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3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1등으로 앞장 세우고 따라가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1등으로 삼지 않으면, 이런 경험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계명 하나를 범하면 왜 나머지 모든 계명을 “범한 자”가 될까요? 10문제 중에 하나를 틀리면 90점이지 어떻게 0점이 될까요?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은밀한 죄 하나를 품고 있으면, 우리의 심령이 나머지 모든 계명에 순종할 수 없는 상태로 망가지고 더렵혀 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은밀하게 불륜을 즐기고 있을 때, 하나님께 신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알고서 품고 있는 단 하나의 죄 때문에 기도가 막히고 영혼의 평안을 잃어버리며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참된 중생의 교리는 잊혀진 교리가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아름다운 건물과 멋진 프로그램이 있지만, 중생의 경험은 거의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망가진 복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중생에 대한 가르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중생은 “나는 회개했습니다.”라고 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천국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옥불에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결심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은 우리가 십자가를 깊이 바라볼 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임하심으로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졌던 것처럼, 우리 마음이 죄로 혼돈하고 공허하고 세속과 정욕으로 가득 차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임하심으로 중생의 경험, 거듭남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런 역사가 이루어지면, 그렇게 좋아하던 죄가 싫어지고 세상에 대한 욕심이 더러운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의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간절히 소원하는 사람마다 성령께서 그 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

<마지막 사명> 편집장

4부, 진리에 불평하면 구원을 잃어버립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가장 많이 불평하는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은 너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과 원칙을 강조하지 않는 교회일수록 사람들이 모여들고 빨리 성장하게 됩니다. 술을 먹거나 담배를 피워도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는 교파일수록 인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받되, 신앙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다.”는 태도가 교회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세속을 포기하고, 개혁해야 한다.”는 설교를 하는 목회자나 교회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어떤 원칙과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설교나 교리를 듣게 될 때 누가 그것을 만들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이 마음대로 만들어 놓은 금기 사항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세우신 법인지 분별해야 합니다.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 좁고 엄격하다고 불평하는 일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생명의 길을 좁은 길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4). 예수께서는 생명의 문으로 인도하시려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 문이 너무 좁다고 불평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불평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사도 요한은 좁은 길을 불평 없이 걸어갈 수 있는 비결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 이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면 불평하지 않고 말씀과 계명을 지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늘 아버지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순종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 됩니다.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 우리는 참된 신앙이 어떤 것인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감격하게 되면 우리가 가장 적게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게 된다. 우리는 예수께서 원하시는 그대로 하고자 애쓰게 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리기를 원하게 된다. 우리의 헌신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지라도 헌신과 순종을 끌어내지 못하는 사랑은 의미 없는 감정이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무거운 짐이 된다. 예수께 마음과 삶을 바치는 것이 너무나 큰 희생이라고 생각하는가? 예수께서 그대와 나를 위해서 무엇을 주셨는가를 생각해 보라”(The pathway to Christ, Chapter 5).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너무 많이 희생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대로 살면 인생에 재미가 없어진다고 느낍니다. 왜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알면 불평이 없어집니다.

 

신랑, 신부가 불평하지 않은 이유

결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엄격한 원칙이 가장 많이 포함된 관계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자신이 전에 좋아하던 것들을 포기하기로 약속해야 합니다.신랑은 이제 다른 여자들과 데이트할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해야 하며, 남은 생애를 오직 한 여성을 위해 묶어 놓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남편에게 바쳐야 하며, 이전에 사귀어 온 남성들과의 관계를 포기하기로 서약해야 합니다. 결혼 서약이야말로 가장 좁고 협착한 길을 걷기로 맹세하는 서약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전혀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규칙과 법이 엄격할수록 인생이 불행해진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 말이 사실이라면, 결혼처럼 비참하고 불행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그러나 아무도 결혼하는 신랑, 신부를 보면서 불행한 결정을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자신의 생애를 신랑에게 바치기로 서약할 때, 왜 그토록 빛나고 행복하게 보일까요? 신랑은 자신의 남은 생애 동안에 가장 까다롭고 엄격한 원칙을 따르겠다는 결정을 하면서 왜 그렇게 행복한 얼굴을 할 수 있을까요?두 사람이 서로 깊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결혼과 함께 수많은 규칙과 법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들은 결코 불평하지 않습니다.

결혼에 관한 법과 규칙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말 까다롭고 엄격합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간음을 하면 국가의 법에 의해서 체포되어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그런 법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고 걱정하지도 않습니다.엄격한 법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멍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랑과 신부 모두 그들 마음에 법을 범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간음에 대한 법이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법과 계명을 바라보는 시선이 되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형벌을 받을까 봐 두려워서 결혼 서약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을 행복하고 기쁘게 하기 위해서 결혼 서약을 지키는 것입니다.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내 인생 전체를 바치는 것, 그것이 아내의 사랑입니다. 구약 시대 하늘로 승천한 에녹이 바로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 11:5, 6).

 

가장 불행한 그리스도인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신랑, 신부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결혼했지만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부입니다. 그런 결혼이야말로 지옥입니다. 사랑이 깨지는 순간, 그들은 자신을 묶고 있는 규칙과 법에 대해서 불평을 시작합니다. 사랑이 식어지는 순간부터 그들은 결혼 서약을 무거운 멍에로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무거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그리스도인은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결혼했지만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그런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계명과 진리를 무거운 멍에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좁은 길과 계명을 강조하는 설교를 들으면 “설교가 너무 삭막하고 사랑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성경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자신의 신랑으로 영접한 경험이 없으면 진리와 성경이 말하는 원칙에 대해서 불평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지만, 지옥불이 무서워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상관없는 신앙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한 원칙과 교리들이 이곳저곳에 쌓여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기로 결정한 계명과 거절하기로 선택한 말씀이 마음속에 쌓여서 먼지가 덮혀 있을 때, 영혼은 힘을 잃고 죽어 가게 됩니다. 참된 신앙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어디까지 들어가야 할까요?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원칙을 온 마음을 다해서 받아들이는 지점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좁은 길을 걸을 수 있는 관계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과 이런 관계를 맺지 못할 때 그리스도인은 이상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천둥과 벼락을 맞지 않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고, 재난을 피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영접하며, 지옥 불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말과 생애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를 느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은 결혼식장의 신랑, 신부보다도 훨씬 더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들을 영원한 멸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땅과 하늘에서 누릴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행동을 낳습니다

현대인의 사랑은 너무나 왜곡되어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사랑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황홀한 느낌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께서는 구름 위에 편히 앉아서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주는 결정을 내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랑은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이 땅까지 내려오게 만들었고, 자원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결정하는 것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머릿속으로만 하려고 합니다. 사랑을 느낌과 감정으로만 하려고 합니다. 그런 사랑은 진리가 희생을 요구하고, 십자가를 메라고 요구할 때 연기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사랑은 희생하면 할수록 기쁨이 됩니다

희생을 하면 할수록 사랑은 기쁨을 샘솟게 합니다. 왜 아내는 요리책을 뒤지고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남편에게 주려고 노력할까요? 남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남편에게 혼날까 봐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부부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두려워하고 눈치를 보는 긴장 상태에서는 결혼 관계가 오래갈 수 없습니다.그리스도인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눈치를 보면서 죄를 붙잡고 있는 긴장 관계에서 신앙을 하는 사람은 인생이 정말 피곤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고 봉사와 희생을 해도 마음속에 참된 감사와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해야만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성경을 연구해야만 변화됩니다. 아내가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그분의 뜻을 이룰 수 있을까?”라는 목적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해야만 의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우리는 그리스도의 뜻을 알고, 그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을 연구해야 합니다.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 지식은 높이 쌓일 수 있지만 순종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두려운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성경을 연구하면 오히려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래서 불순종과 죄를 합리화시키는 교리를 세워 나가게 됩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열 가지 계명은 마음속에 참된 사랑이 있어야만 지킬 수 있는 계명입니다. 십계명은 두 개의 돌비로 되어 있습니다. 두 개의 돌비 중 왼쪽 돌비에는 첫째부터 넷째 계명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명입니다. 그리고 오른쪽 돌비에는 다섯째부터 열째 계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계명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은 신약 시대이기 때문에 사랑만 하면 되지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지만, 사도 바울은 정반대의 가르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예수께서도 두 돌비에 새겨진 십계명을 설명하시면서 사랑과 계명을 함께 묶어서 설명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 38)

이 말씀은 십계명의 왼쪽 돌비에 대한 말씀인데,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면 첫째부터 넷째 계명까지 지키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나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우상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을 것이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킬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사랑과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39절)

이 말씀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한 계명으로서 십계명의 오른쪽 돌비에 기록된 말씀의 요약입니다.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십계명의 다섯째 계명부터 열째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부모를 공경하게 되고, 간음하지 않을 것이며, 도둑질이나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될 것이고,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40절)

예수께서는 십계명이 하나님께 대한 계명과 사람에 대한 계명으로 나뉘어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십계명을 “두 계명”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돌비에 기록된 십계명이 구약 성경 전체를 요약한 것이라는 뜻에서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온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십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사랑을 설명하면서 원칙과 성품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아무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이 계명을 지키려고 하면 바리새인처럼 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을 가진 성도들은 계명을 지키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불평하는 진짜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와 계명에 대해서 사람들이 불평하는 진짜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구원만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성경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를 다니면, 진리와 계명에 대해서 불평하게 됩니다. “꼭 그것을 지켜야 합니까?”라고 불평합니다. “꼭 그렇게 살아야 됩니까?”라고 반발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불평하고 저항하는 신앙으로는 구원도 받을 수 없고 의의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은 “내가 지킬 수 있는 몇 가지 말씀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노력과 투쟁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의 원동력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 앞에 나가 그분의 사랑과 희생을 깊이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맏아들을 변화시킨 것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빠져 있는 깊은 수렁이 있는데, 그것은 “하라와 하지 말라의 신앙”입니다. 세 아들을 키우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날마다 세 아들에게 항상 말끔하고 청결한 모습으로 다녀야 한다고 교육시켰습니다. 그러나 세 아들은 세수하고 머리빗고 구두를 깨끗이 손질하라는 어머니의 계명을 늘 귀찮게 생각했습니다. 아침마다 어머니는 세 아들에게 깨끗한 모습으로 다니라는 계명을 주었지만, 아이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맏아들이 멋진 모습으로 방에서 나왔습니다. 머리는 잘 빗질되어 있었고, 구두는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어머니의 계명을 완전하게 지킨 모습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침마다 소리를 치면서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듣지 않던 아들이 갑자기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맏아들에게 이런 변화가 만들었을까요? 맏아들이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맏아들이 다니는 학교에 한 여학생이 새로 전학을 왔던 것입니다. 그 여학생 때문에 아들의 용모와 태도가 완전히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지 않은 나머지 두 아들은 여전히 불순종과 더러운 모습으로 살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노력하고 희생하는 것은 내 자신에게도 큰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그리스도인 생애가 고통스럽게 보이는 것은 큰 문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수도승의 극기 생활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좁은 길을 걷지만, 기쁨과 감사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노새 같은 순종은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왜 그들은 그런 불평을 할까요?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는 기독교 신앙이 온갖 금지 조항들을 모아서 강요하는 죽은 종교로 보이기 때문입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은 그리스도인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시 32:8, 9).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이나 노새처럼 억지로 끌려다니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치 않습니다. 만약 우리의 자녀들이 노새처럼 억지로 끌려서 부모의 말에 순종한다면, 부모 마음은 정말 슬프고 아플 것입니다. 부모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식을 돌보고 사랑했는데, 자녀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부모를 섬기고 순종한다면, 그것처럼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받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사람의 입에는 진리에 대한 불평이 사라지게 됩니다. 참된 신앙을 가진 성도는 “어떻게 하면 내가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라는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성경을 탐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빛이 밝아질 때마다 점점 더 밝은 빛으로 나가 광명한 빛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빛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어둠 속에 머물게 되며 사단의 미혹에 걸려서 쓰러져도 왜 넘어지는지 모르게 됩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8,19).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감사의 정신이 온 영혼을 덮고 있는 성도에게는 성경의 진리와 원칙이 결코 굴레나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

 

3부, 양심에 문제가 생기면 구원을 잃어버립니다

2001년 9월 11일, 뉴욕 쌍동이 건물이 폭파된 후 미국 CIA에서는 5천만 불의 현상금을 걸고 빈라덴을 끈질지게 추적했습니다. 빈라덴은 온갖 고생을 하면서 드라마 같은 도주자의 삶을 살았지만 결국 10년 만에 붙잡혀서 살해되었습니다. 빈라덴의 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최대 건설업체인 ‘빈라덴 그룹’의 소유주였기 때문에 줄곧 백만장자의 아들로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슬람 극단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고 평생 테러리스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왜 돈과 명예를 버리고 깊은 산과 광야를 숨어다니는 삶을 선택했을까요? 참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빈라덴은 양심의 음성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는 뉴욕의 쌍둥이 건물을 폭파시켜서 3천 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을 살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양심의 음성을 따랐다고 믿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살인 행위를 명예롭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양심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자신이 믿는 대로 음성을 냅니다. 이슬람 극단주의를 신앙으로 받아들으면, 양심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테러를 하라.”는 음성을 낼 수 있습니다. 빈라덴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에 의의 음성을 낼 수 없었습니다. 양심이 의의 음성을 내지 못하면, 죄를 범해도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빈라덴처럼 3천 명을 죽이고도 “잘못했습니다.”라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게 됩니다.

 

진리로 교육받아야 하는 양심

성경은 양심의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 양심만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멸망당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진리로 교육받지 않은 양심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들었던 양심의 음성과 이후에 들었던 양심의 음성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바울의 양심은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예수와 제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양심으로부터 무슨 음성을 듣게 되었을까요? 온 마음과 목숨을 다해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섬기라는 양심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누구의 음성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내 욕심에서 나오는 음성인지, 성령께서 주시는 음성인지 확인해야 하는데,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의와 불의를 결정하는 기준은 내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십계명입니다. 아무리 선교 사업을 하고 기도하고 방언을 한다고 할지라도, 양심이 죄와 유혹에 대해서 저항의 음성을 내지 못하면 그 사람의 양심은 믿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빈라덴처럼 양심이 내는 불의한 음성 때문에 더 깊은 자기기만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의 음성을 듣되, 진리로 교육받은 양심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양심은 선한 양심이 아닌데, 그 이유는 의의 음성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은 양심이 진리로 교육받아서 나침반처럼 정확한 음성을 낼 수 있을 때에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아무리 선해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양심이 진리로 교육받고 회개하여 거듭나지 않으면 의로운 음성을 낼 수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착하고 도덕적이라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에 의해서 거룩하게 변화된 양심을 가져야만 하늘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타락하고 죄된 양심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정직하고 순결한 양심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나야만 의의 음성을 낼 수 있습니다.

 

진리를 통해서 구원받는 과정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행 17:26, 2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시간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고’ 진리로 양심을 교육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듬어 찾’은 사람들은 진리가 양심을 교육시킬 수 있도록 성경 말씀을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거룩하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진리는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는데, 어떻게 성경 속에 있는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을까요? 먼저,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에 담겨져 있는 진리를 캐내야 합니다. 그러면 진리가 우리 마음에 새겨지면서 양심을 교육시킵니다. 진리로 교육받은 양심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 의의 음성을 낼 수 있게 됩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양심의 음성을 신뢰할 수 있는데, 성령께서 양심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의의 음성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의의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그런 경험을 하는 마지막 시대의 의인들을 요한계시록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3~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가 성경책에만 써 있으면 아무 역할도 할 수 없습니다. 진리가 양심에 새겨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고뇌하면서 찾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에서 멀어져 가게 됩니다. 사탄의 미혹을 받게 됩니다. 죄로 더렵혀진 양심에서 나오는 음성을 하늘의 음성으로 알고 따라가게 됩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하늘은 간절한 심령으로 진리를 찾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고 ‘좁은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받는 경험이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교회를 수십 년 다녀도 성령을 통해서 양심에서 들려오는 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되고, 참된 구원의 경험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위험합니다. 조심하세요!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가 갖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진리로 교육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죄인지도 모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양심을 교육시키고 씻지 않았기 때문에 양심이 의의 음성을 낼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하여졌으므로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십계명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심이 진리로 교육받지 못하면 죄를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육신의 생각대로 살다가 구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9,10). 그들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부르시는데 왜 숨었을까요? 왜냐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입니다.죄를 범한 사람은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의의 옷이 벗겨지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정상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 시대의 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은 죄와 세속에 붙잡혀서 살기 때문에 의의 옷이 벗겨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벌거벗고 있는지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이 벌거벗은지 모른 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마지막 교회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벌거벗고 있는데 왜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할까요? 양심이 “의의 옷이 벗겨져 있다.”고 말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양심은 자신이 믿는 대로 음성을 냅니다. 거짓을 믿으면 거짓을 말하고, 진리를 믿으면 진리를 말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내 마음과 삶이 어떠하든지 간에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받는다. 한 번 믿고 회개했으면 누구도 구원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식의 거짓 가르침이 양심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불순종과 죄를 붙잡고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흰옷”이 벗겨져 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계 3:18). 죄를 범한 사람은 두려움 속에서 떠는 대신에 하나님 앞에 나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함으로써 “흰옷”을 입고 영혼의 평안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무시하고 죄를 범함으로써 양심의 가책이 생기면 죄책감을 잠재우면서 성령의 역사를 거절합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께서 주시는 양심의 가책을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죄책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면서 불순종 속에서 평안을 누리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면서도 기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교리와 설교와 예배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심하셔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나가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만이 영혼의 평안과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양심의 음성을 인위적으로 잠재우면 자기기만에 빠지게 되고 결국 구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안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평안인지, 아니면 양심의 음성을 잠재움으로써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평안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정로니 이 길로 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은 양심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탄은 다음과 같은 사람의 마음에 쉽게 들어갑니다. 자기 생각이나 판단을 성경 말씀보다 위에 놓는 사람, 자기 느낌이나 감정을 성경 말씀보다 위에 놓는 사람, 자기 이론이나 사상을 성경 말씀보다 위에 놓는 사람, 기도 중에 떠오른 생각을 성경 말씀보다 위에 놓는 사람, 명상 중에 들었던 음성을 성경 말씀보다 위에 놓는 사람, 꿈에서 보았던 장면을 성경 말씀보다 위에 놓는 사람, 자신이 경험한 기적을 성경 말씀보다 위에 놓는 사람, 타락한 양심의 음성을 성경 말씀보다 위에 놓는 사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들으셨습니까? 무엇을 보셨습니까? 무엇을 경험했습니까? 여러분께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인지 성경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미혹의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지 않는 것들은 결국 모두 흔들려서 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

 

2부, 번제를 드리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구약 시대 성소에서 드리던 번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그 예물이 소의 번제(Burnt offering)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레 1:1~3). 번제는 자원하는 사람만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자유로운 마음으로 스스로 결정해서 번제를 드리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은 의무가 아닙니다. 강요받고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이 두려워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의무감으로 신앙을 하는 것은 아직 신앙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구원받기 때문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은 아직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번제뿐 아니라 화목제도 자원하는 사람만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레 3:1). 여기서도 “드리려거든”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만약 드릴 마음이 있으면’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심판과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희가 나에게 제물을 드릴 마음이 있느냐? 그러면 이런 제사를 드리도록 해라.”라는 것이 번제와 화목제였습니다.

그러나 속죄제는 반드시 드려야만 하는 제사였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죄를 범했다는 의식을 갖게 되면,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제물을 가지고 성소로 가서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와 반면에 번제는 죄인이 꼭 드려야 하는 제사는 아니었습니다. 번제를 드리는 사람의 심령과 태도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죄를 범했지만, 속죄제를 통해서 어린양의 피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제가 죄를 범했는데, 저를 대신해서 흠없는 어린양이 죽었습니다. 저 때문에 어린양이 피를 흘리고 죽은 것처럼, 언젠가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에 오셔서 제가 범한 죄의 대가를 지불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한 번 돌아가셨지만, 죄를 범할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에 큰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제 저는 죄를 미워하는 생애를 살겠습니다.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 앞에서 도무지 갚은 수 없는 빚을 진 자로 살아가겠습니다. 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죄를 범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의 죄 때문에 메시아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저의 남은 생애를 받아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심정으로 드리는 제사가 번제였습니다. 죄는 이미 속죄제에서 용서 받았다고 할지라도, 죄를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 마음과 생애를 헌신하는 제사가 번제였습니다. 그래서 죄를 범한 사람은 속죄제로 드리는 양 외에 또 한 마리의 양을 끌고 와서 번제를 드렸는데 그것은 자원하는 사람만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번제의 의미

번제의 목적은 헌신과 희생입니다. 그래서 번제를 드리는 사람의 심령에서는 이런 기도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이시여, 제 삶을 돌아보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보다 높고,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을 남겨 두지 않겠습니다. 이제 제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제가 의지하고 붙잡고 살아왔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런 심령을 하나님께 표현하기 위해서 번제가 드려졌기 때문에 번제를 드리는 절차와 의식은 매우 특별했습니다(레위기 1장). 먼저 양의 목을 따서 죽인 다음에 양의 가죽을 벗겨야 했습니다. 번제를 드릴 때 왜 가죽을 벗겨야 했을까요? 가죽을 벗기는 것은 내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내 인간적인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입니다. 내 평판과 자랑의 옷을 벗어 버리겠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양의 가죽을 벗기는 것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철저하게 드렸지만, 속으로는 세상을 사랑하고 자아를 사랑했으며, 마음속에 숨겨진 우상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마음이 양의 가죽을 벗기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가죽을 벗기면 속살이 드러나는 것처럼, 겉으로 꾸며진 모든 위선을 벗어 버리고 진실된 마음으로 살겠다는 헌신이 번제였습니다. 그래서 번제를 드리는 사람은 가죽을 벗기면서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 이제 나를 벗어 버리겠습니다. 위선과 인위적으로 포장된 성결을 포기하겠습니다. 부디,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을 제게 주시옵소서. 제 위에 하나님의 의를 입혀 주시옵소서.”

번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번제는 헌신하는 제사이므로 가죽뿐 아니라 오장육부 전체를 바치는 의식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양의 배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갈라서 엽니다. 그속에 있는 모든 기관 즉, 위장, 간, 창자 등을 모두 꺼내어 맑은 물에 씻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과정이 무엇을 뜻할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는 나의 사고방식, 내 인생관, 내 계획, 내 의도와 동기와 목적을 모두 꺼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씻어 내는 것을 뜻합니다. 세속과 욕심으로 더러워진 양심을 성경 말씀으로 씻어 내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6).

그래서 번제를 통해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내 마음 전체를 구석구석 살펴 주시옵소서. 아직도 남아 있는 더러운 것이 있는지 살펴 주시옵소서. 어떤 것이 부정한지 살펴서 알려 주시옵소서. 제 마음과 동기와 목적과 계획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씻어 내고 정결하게 되기를 원하오니 도와주시옵소서. 주께서 알려 주시면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이것이 번제를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심령입니다.

양의 배를 가르고 오장육부를 끄집어내서 물로 씻은 다음에는 무엇을 할까요? 내장을 잘라 내고 토막 내어서 제단에 올려놓고 불에 태웠습니다. 불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불로 오장육부를 태우는 것은 성령의 불로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태워없애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올라가는 연기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었습니다.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1:13).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고기 태우는 냄새를 좋아하신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내 모든 것을 태워서 바치는 마음과 생애가 하나님께 아름다운 향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바쳐진 마음과 생애처럼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번제, 구원의 경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속죄제는 구원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이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그런데 속죄제만 드리는 사람들은 구원받는 경험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죄를 범할 때마다 속죄제만 드리는 사람들은 결국 하늘에 갈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말씀이므로 좀 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 시대 광야에서 번제가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드려졌기 때문에 24시간 동안 항상 연기가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성막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날마다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를 보고, 내장이 타는 냄새를 맡으면서 자원하는 심령으로 마음과 생애를 바치는 경험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번제를 의무로 강요하지 않는 이유는 번제의 경험은 의무감으로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번제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계명처럼 명령하신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경험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번제의 경험은 하늘에 가서 살 성도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경험이지만, 명령이나 강요가 아니라 온전히 자원해서 드리는 헌신과 희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내려와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명령과 의무감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나가 “아버지시여, 제가 저 땅으로 내려가겠습니다. 지구에서 죽어 가는 영혼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라고 호소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원해서 번제단에 올라가 태워 없어지는 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그와 동일한 태도와 마음이 번제를 드리는 심령입니다. 자원해서 내 마음과 삶 전체를 하나님과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드리는 번제의 경험이 없이 아무도 하늘에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해야만 예수께서 마태복음 22장에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어떻게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번제의 경험을 한 사람에게는 가능하게 됩니다. 양의 가죽을 벗겨 내고, 배를 갈라서 오장육부를 끄집어내어서 맑을 물로 씻어 정결하게 되고 그것을 단에 올려 태우는 헌신의 경험을 한 사람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온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매일 속죄제만 드리면서 이렇게 저렇게 땜질하듯이 죄 사함을 받는 사람들은 결코 번제의 경험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의무감 때문에 성경을 읽고, 구원받기 위해서 죄를 고백하는 신앙으로는 구원의 경험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는 경험 없이 오늘 죄 하나 지으면 기도해서 용서 받고, 내일 죄 두 개 범하면 기도해서 용서 받는 그런 태도로는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하늘에 갈 수 있다.”라는 자기 기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한번 믿고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여러분의 구원은 확정되었습니다.”라는 식의 설교가 들려올 때 귀를 막아야 합니다. “속죄제만 드리면 구원받는다”는 식의 복음이 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내 마음과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지 않더라도 죄만 용서 받으면 구원받는다”는 사상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속죄제를 드린 사람은 자연스럽게 번제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계획은 속죄제와 번제의 경험을 통해서 하늘에 가는 것입니다. 온 마음과 생애를 바치는 번제를 드리지 않으면서, 속죄제만 드리면서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10년, 20년 믿어도 신앙이 성장하지 않게 되고 맨날 그 자리에서 빙빙 돌다 지치고 좌절하게 됩니다. 날마다 똑같은 죄를 범하고 회개하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포기하고 죄와 세속을 붙잡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죄로부터 구원받는 경험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로 연결된 속죄제와 번제의 경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죄제를 통해서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은 변화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속죄제를 드릴 때마다 어린양 예수께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 가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놀라운 희생과 죽음 앞에 서면 죄를 미워하는 새 마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십자가 앞에서 맹숭맹숭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까? 누가 감히 어린양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죄를 그대로 붙잡고 있으면서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불순종하면서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 2).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 6:15).

우리가 회개하는 심령으로 속죄제를 드리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은 곧바로 번제의 경험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마음과 심령을 바닥부터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 앞에 내 모든 것을 바치고 싶은 소원과 충동이 솟구치게 됩니다. 그런 거룩한 소원과 충동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으면,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있어서 분명한 말씀을 남겼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번제의 경험은 의무도 아니고 강요도 아니지만, 속죄제를 드린 사람은 간절한 심령으로 번제를 드리게 됩니다. 이것이 번제를 드리는 기도입니다. “주여, 양의 가죽을 벗기듯이 내 공로와 내 의를 벗겨 주시옵소서. 이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내 오장육부와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립니다. 부디 받아 주셔서 말씀으로 정결케 하시고 성령의 불로 태워 주시옵소서.”

 

번제를 드린 사람과 드리지 않은 사람의 차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번제를 드리지 않으면 두 가지 미혹에 빠지게 됩니다.

첫 번째 미혹: 사탄은 번제의 경험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도록 유도합니다. 비록 교회에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마음과 생애를 바치는 번제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결국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 세상 사람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두 번째 미혹: 사탄은 번제의 경험이 없는 사람을 율법주의적인 신앙으로 끌어갑니다. 참된 중생의 경험과 번제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려고 애쓰면 어떻게 될까요? 바리새인의 경험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세속을 피하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애쓸지라도, 율법주의자가 갖고 있는 냉랭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번제의 경험이 없는 사람도 주일을 남들보다 거룩하게 지키려고 애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만큼 주일을 철저하게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은근히 정죄하는 바리새인의 죄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참된 번제의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도 말씀에 대한 지식을 많이 쌓아서 교회와 교인들의 문제를 정확히 지적할 수 있지만, 바리새인의 시선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영혼의 평안이 없고, 공허한 마음으로 애쓰고 노력하다가 좌절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이런 문제에 봉착하게 될까요? 번제의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내 마음과 생애 전체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증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 한구석에 은근히 세상을 사랑하고 돈의 신을 섬기는 정신을 품고 있으면서 속죄제만 드리기 때문에 이상한 증세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죽을 벗기고 오장육부를 말씀으로 씻어 내는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는데, 세상에 나가면 세상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번제를 드린 사람은 이런 마음과 태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 사업에 만 원이 필요합니다.”라는 요청을 받을 경우, 번제를 드린 사람은 “제가 2만 원을 드리기 소원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누가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동행해 줄 것입니다. 누가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벗어 줄 것입니다. 이것이 번제의 경험이고 자원해서 드리는 헌신과 희생입니다. 번제를 드린 사람은 내가 얼마나 조금 희생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을 더 할 수 있습니까? 알려만 주시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속제 제물로 돌아가셨지만, 그분의 마음과 생애는 번제의 경험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해야 하는 이상으로 희생하고 헌신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 사함만 받으면 구원받을 수 있으므로 나는 용서만 받고 하늘에 가겠습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기심입니다. 그 자체가 너무나 뻔뻔스런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서 죽으셨지만, 나는 구원만 받겠습니다. 저에게 헌신과 희생과 순종을 요구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용서가 무엇이고, 구원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100여 년 전에 어떤 그리스도인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은 무신론자나 술주정뱅이나 마약 중독자가 아니다. 가장 악한 사람은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한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이다. 회개했다고 말하지만 참된 회개의 경험이 없고, 순종한다고 하지만, 반만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악하다. 그들은 반은 세상을 사랑하고 반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구원받았다고 말하지만, 마음속에 이기심과 세상을 사랑하는 정신이 새겨져 있는 사람들이다. 주님을 위해 산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평판과 자랑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영혼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길을 막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우리는 날마다 번제를 드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번제를 드려야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부터 이런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주님, 이제 전부 꺼내 놓고 태워 없애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나를 이렇게 구원하시고, 이렇게 기적적으로 인도하시고 보살피는데, 내가 주 앞에 숨기고 감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을 남겨 두겠습니까?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가르쳐 주시옵소서.” 이것이 번제의 경험으로 들어가는 기도입니다.

 

번제와 은혜 아래 거하는 삶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은혜 아래”라는 말의 뜻을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면,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키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 것보다 “은혜 아래” 거하는 것이 훨씬 능력 있는 삶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법 아래” 있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바울은 “법 아래” 있었습니다. 열성적인 바리새인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결국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 한구석에 좌절과 정죄를 느끼면서 살았습니다. 바울은 “법 아래” 있었던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14, 15, 24).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은혜 아래” 있게 되면서 어떤 삶을 살게 되었습니까? 바리새인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 냈을까요? 순종의 동기와 목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바리새인으로서 “법 아래” 있을 때에는 구원받기 위해서 순종하려고 애쓰다가 실패를 반복하면서 좌절했었는데, 주님을 영접한 후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희생을 깨닫고 사랑의 빚을 진 자의 심령으로 “은혜 아래”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온 마음과 생애를 바쳐서 말씀에 충성하는 생애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쌓으려는 공로와 의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만 높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 아래” 거하는 삶이고, 마음과 생애를 바치는 번제의 삶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은혜 아래”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바울의 간증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에 나오는 경험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은혜 아래” 거하면서 했던 경험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그토록 고생스럽고 힘든 삶을 살아 낼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번제를 드리는 경험 속으로 깊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가죽을 벗기고 오장육부를 물에 씻어서 태우는 경험을 한 바울은 사탄의 온갖 공격과 시험 속에서도 “은혜 아래” 거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경험이 우리가 사모하는 경험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말씀에 대한 오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말씀을 이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뜻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문맥 전체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14~16,22). 얼마나 분명한 말씀입니까?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죄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은혜 아래” 거하는 사람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고 거룩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죄를 붙잡고 있고,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아도 은혜로 구원받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무엇인지 알고 십자가가 어떤 것인지 알면, “은혜 아래” 거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엄청난 파워와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주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 크고 감격적이어서 마음속에 감추어 둘 수 없습니다.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래서 “주여 어떻게 하면 제 생애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제 생애를 산 제사로 바치고 싶습니다. 인도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은혜 아래” 있으면 더 순종하게 되고, 더 노력하게 되며, 더 희생하게 됩니다.

 

번제의 경험과 짐승의 표

물론, 율법을 지키고 행함으로 구원받으려고 애쓰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충성이 없으면 의의 열매가 맺히지 않을 것이며 잎사귀만 무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4장에서 짐승의 표를 이기고 승리하는 사람들의 신앙에 대해서 요한은 이런 말씀을 남긴 것입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 12).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사람들은 “은혜 아래”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은혜의 크고 깊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예수 믿음과 계명을 지키는” 거룩한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유사이래 없던 엄청난 핍박과 위협을 통과하면서도 예수 믿음과 계명을 지키는 고결한 신앙을 유지합니다. 그들이 위기의 순간에 승리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날마다 번제를 드리는 경험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 불의 위기 속에서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둘째 계명에 충성했던 것처럼, 날마다 번제를 드리는 사람들은 짐승의 표 환난에서 “예수 믿음과 계명을 지키는” 승리를 하게 될 것입니다.

 

번제의 경험과 참된 신앙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손해와 희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 번제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죄를 범할 때마다 속죄제만 드리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번제를 드리는 사람들은 순종을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헌신을 책임이 아니라 영광스런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기독교 신앙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법 아래” 머물게 됩니다. 열심히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깊은 좌절감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 거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애 전체를 주님께 번제로 바치게 됩니다. 깊은 평안과 확신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속죄제에서 그치면 안 됩니다. 형식적으로 속죄제를 드려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이기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를 바치는 번제의 경험까지 나가야 합니다. 그런 분들은 번제의 경험 속에서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꿈에도 그리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희생과 헌신을 드리기 때문에 늘 넉넉한 여유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들이 문제를 일으킵니까? 자녀들이 속을 썩이고 말썽만 부리나요? 그들에게 순종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그들 마음속에서 사랑을 이끌어 내야 합니다. 부모의 “은혜 아래” 거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사랑은 강요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번제는 사랑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헌신입니다. 하늘은 용서만 살짝 받고 올라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에 순종할 때 기쁨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커서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생애를 번제로 바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이유

유대 제사장들이 왜 예수님을 미워하고 증오했을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특별한 이유는 예수께서 속죄제를 한 번도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한 적이 없었기 한 번도 양을 끌고 성소에 가서 속죄제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대 제사장들은 속죄제를 드리지 않는 예수님을 너무나 미워했습니다. 왜 미워했을까요? 그 당시 제사장들은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양을 비싼 값에 팔아서 폭리를 취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면 범할수록 제사장들의 수입이 늘어났기 때문에 그들은 은근히 백성들이 죄를 더 많이 범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범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의 양심을 책망하시고 가책을 주시는데, 제사장들은 그런 성령의 역사를 이용해서 돈을 벌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을 죽여서 속죄제를 드리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양을 팔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교회가 구원의 도를 잃어버리고 메시아를 거절하게 된 중요한 이유입니다.

두려운 사실은,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그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 제사장들이 양을 끌고 온 사람들에게 해 주었던 그런 종류의 말씀을 전하는 교회들은 오늘날에도 큰 돈을 벌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와 세속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죄를 용서 받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라는 말씀을 듣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생애를 주님께 온전히 바치지 않더라고 죄만 용서 받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교회는 큰 돈을 벌게 됩니다. 그 결과, 마지막 시대의 교회 안에서 성결의 경험은 사라져 버렸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유대 제사장들의 성소 봉사가 비즈니스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양을 끌고 오지 않았으니 얼마나 미웠을까요? 제사장들도 날마다 똑같은 죄를 짓고 또 지으면서 양을 잡아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속죄제가 수없이 반복되면서 의미 없는 형식이 되어 버렸을 정도인데,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양을 끌고 와서 속죄제를 드리지 않으니 얼마나 교만하고 독선적으로 보였을까요?

예수께서는 속죄제를 드리는 대신에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분의 삶 자체가 사랑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번제였습니다. 영혼들을 회개케 하는 말씀을 전하셨고,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돌보셨으며,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던 세리와 창녀와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셨습니다. 사탄은 그런 예수님의 삶을 너무나 미워했습니다. 사탄의 충동을 받은 제사장와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힘을 모아서 예수님을 증오했고 결국에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처럼 번제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핍박과 미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회가 타락하고 세속화되면서 번제의 경험이 강조되는 곳마다 반대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령껏 속죄제만 드리면서 구원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번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을 분노케 합니다. “꼭 그렇게 해야만 구원을 받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번제의 경험은 율법주의이고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라는 항의를 합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면 그런 반응을 하게 됩니다. 번제의 경험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지켜본 성도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런 열매입니다. 십자가에 앞에 나가 무릎을 꿇는 영혼마다 번제의 경험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깊이 임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1부, 기복 신앙을 따라가면 구원을 잃어버립니다

예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고 하늘로 승천하시는 순간,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라는 진리가 증명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에 대한 모든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가운데 정확하게 이루어졌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엄청난 능력과 은사가 제자들에게 임했습니다. 하루에 수천 명씩 회개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늘의 능력이 제자들에게도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구원받은 열매가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두 제자는 여전히 가난하고 고생스런 삶을 살았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고,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하늘의 능력이 제자들에게 임했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심한 가난 속에서 고생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사실은 오늘날 기복 신앙을 받아들인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잘못된 기대가 들어와서 복음의 순수성을 흔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세상에서 번영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잘못된 기대가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성공과 번영을 기대하는 교인들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 기복 신앙을 전하는 설교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경제가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무당과 교회는 잘된다.” 경제가 어렵고 힘들어지면 세상 사람들이 무당이나 점집을 찾아가는 것처럼, 사람들이 복을 받기 위해서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전 세계 도처마다 기복 신앙이 깊이 들어가 있지만, 한국 기독교는 더욱더 극단적인 기복 신앙으로 세계를 평정했습니다. 미국의 한 언론사에서 세계적인 대형교회 50개를 선정했는데, 그 가운데 한국 교회가 20여 개나 포함되었고, 세계 랭킹 1위도 한국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신자들을 허황된 믿음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믿으면 구원받고 축복받는다.”는 번영신학이 기독교 신앙을 미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렸습니다. 미국의 존 파이퍼 목사는 마지막 퇴임 설교에서 “우리가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의 축복을 말하면서 행복한 척한다면 사람들을 끌어모아서 큰 교회를 만들 수 있지만, 그 속에 그리스도의 임재는 없을 것이며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험도 사라질 것입니다. 기복 신앙을 경계해야 합니다.”라고 호소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믿음의 대가로 복을 약속합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가짜 신들은 자신을 섬기는 믿음의 대가로 복을 약속합니다. 그래서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에 황금색을 칠해서 “나를 섬기면 돈을 준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의 신앙은 단순합니다. 섬기면 복을 받고, 섬기지 않으면 재앙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신을 섬기지 않으면 집안에 문제가 생기고 벌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상에게 재물을 드리고 복을 비는 기도를 합니다.신을 이용해서 가문의 영광과 번영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기복 신앙인데, 오래전부터 이런 신앙이 한국 기독교회 안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욥이 가진 신앙의 동기

사탄은 욥이 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10,11). 사탄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재물의 축복을 넘치도록 베푸셨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경배받기 위한 수단으로 축복을 뇌물로 사용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축복하는 의도와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동기가 모두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 사탄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그의 신앙이 순수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사랑인가? 거래인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그분께로부터 무엇을 얻어 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아니면,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이 너무나 감사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 충성하는 생애를 사십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경배를 받기 위해서 재물의 복을 미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탄의 궤변을 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업체와 가정을 축복하실 것입니다.”라는 설교가 점점 더 대담하게 교회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런 설교에 귀가 솔깃해진 어리석은 양들은 열심히 헌금을 드리고 교회를 섬기면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 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믿음과 하나님의 복을 거래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비록 주말마다 교회에 다니지만, 단 한 번도 온 마음과 생애를 하나님께 바친 경험이 없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돈과 명예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실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물질적 풍요로움을 제공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좁은 길로 인도하여 그들의 성품과 생애가 결정적으로 변화되어 영생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만일 세속적 물질이 하나님의 관심사라면,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교회 건물을 짓고 그것을 채울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이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을 구하는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성공과 번영으로 사람들을 유혹하여 끌여들여서 자신을 경배하게 만든다는 사탄의 주장이 옳다고 해야 합니다. 가난한 나라에 파송된 선교사가 빵과 밀가루를 나눠 줌으로써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듯이,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건강과 물질적 축복을 나누어 주심으로써 사람들의 경배를 유도하고 계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방법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에게 모두 비를 주시며 햇빛을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역사하십니다. 잘 믿는 자는 복을 많이 받고,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잘 믿는 자들에게 어려운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정직한 생애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재물과 건강의 복을 바라보고 당신을 따라오는 자들에게 결코 제자 직분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에 커다란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에게만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 이루어진다면, 사람들의 신앙과 마음에 어떤 결과와 영향을 미치게 될까요? 사람들은 고통과 고난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에 몰려들 것입니다. 재물과 건강의 복을 받기 위해서 교인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기적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결코 하늘 왕국에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기복 신앙으로 점령당한 교회

하나님께서는 잘 믿는 사람들만 축복하신다는 사탄의 거짓말이 교회를 파고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이 오해했던 것처럼,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지 못해서 어렵게 산다는 식의 신앙이 현대 기독교회에 깊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만이 번영한다는 증거를 거의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오직 적은 숫자만이 부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부와 재물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공평한 기회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엄격한 정직과 순결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매우 어려운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브라함이나 욥 같은 그리스도인 부자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지만,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신앙과 양심을 어느 정도 타협해야만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잘 믿어야만 물질과 건강의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식의 설교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 내기 위해서 헌금을 드리는 이상한 모습이 교회 안에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기복 신앙을 이용해서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성직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눈에 보이는 축복을 받는 장소로 여겨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리게 되었고, 그런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압도적인 숫자를 차지함으로 경건해야 할 교회에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세상은 교회를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보지 않고 이기적인 위선자 집단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법과 원칙을 통해서 오는 축복

맹목적으로 복을 구하는 신앙은 위험한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축복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순결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이 공급되고 복을 내리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모든 약속은 조건적인 약속입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못할 것이라는 원칙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신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일반적인 원칙들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에게 흘러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들만이 수확을 거둔다는 것은 믿는 자와 불신자들에게 모두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은 우리의 노력과 의무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기복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벌주시는 수단으로 고통과 시련을 사용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건강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통이나 시련이 항상 죄에 대한 형벌로 내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리거나 시련 속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렸거나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의 건강이나 사업이 매우 잘되어 간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신다고 단언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옥 속에서 외롭게 살다가 목이 잘린 침례 요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베드로, 밧모 섬에서 외롭게 죽어 간 요한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가장 가깝게 계셨습니다.

욥은 재난을 당해야 할 어떤 죄도 범한 적이 없었습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2:3). 욥은 재난을 받을 만큼 큰 죄를 범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끔찍한 재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과 재난이 항상 죄의 결과로 인하여 생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 점에 기복 신앙의 폐해가 있는 것입니다. 기복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헤어 나오기 어려운 절망의 늪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와 반대로 재물이 생기고 일들이 잘 되어 가면,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마음과 생애 속에 죄와 세속이 깊이 물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거짓 확신을 갖게 됩니다. 기복 신앙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항상 하나님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숨겨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늦은 밤,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조상신에게 복을 비는 시골 아낙네의 기도와 여러분의 기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성황당 산신령에게 치성을 드리면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기복 신앙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공급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공급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뜻이 고통이나 시련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올지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기복 신앙은 우리를 때때로 고통과 시련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길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가난하든지 부자이든지 이 땅에 살면서 진리를 발견하고 복음에 순종하고 살면, 우리가 태어난 목적은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6, 27).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가서 천국과 영원한 생명을 보상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복 신앙은 하나님의 구원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조용한 시간에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을 읽고 명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며, 무엇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

 

9호를 시작하며…

2천 년 전에 예수께서는 유대 땅의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2천 년이 지난 오늘날 예수께서 여러 교파와 교회들을 다니시면서 설교하신다면 어떤 말씀을 전하실까요? 진리에 등돌린 채 웅장한 교회 건물을 자랑하는 현대 기독교회를 바라보시면서 어떤 복음을 전하실까요? 혹시, 2천 년 전에 유대교회를 향하여 하셨던 설교를 하지는 않을까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7, 28).

유대교회를 보면서 우셨던 예수께서 현대 기독교회를 보시면서 통곡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영혼들이 교회 안에서 구원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산 영혼들이 교회 안에서 멸망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통곡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고 뜨거웠던 초대 교회가 타락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사도들의 가르침, 다시 말해서 성경의 가르침과 진리 대신에 인간의 이론과 가르침이 설교 단상을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말씀의 표준을 낮추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하나님을 찾아서 교회에 온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성령께서 독자 여러분의 눈을 열어 주셔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

  <마지막 사명>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