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구원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구약 시대 성소에서 드리던 번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그 예물이 소의 번제(Burnt offering)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레 1:1~3). 번제는 자원하는 사람만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자유로운 마음으로 스스로 결정해서 번제를 드리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은 의무가 아닙니다. 강요받고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이 두려워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의무감으로 신앙을 하는 것은 아직 신앙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구원받기 때문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은 아직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번제뿐 아니라 화목제도 자원하는 사람만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레 3:1). 여기서도 “드리려거든”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만약 드릴 마음이 있으면’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심판과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희가 나에게 제물을 드릴 마음이 있느냐? 그러면 이런 제사를 드리도록 해라.”라는 것이 번제와 화목제였습니다.

그러나 속죄제는 반드시 드려야만 하는 제사였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죄를 범했다는 의식을 갖게 되면,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제물을 가지고 성소로 가서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와 반면에 번제는 죄인이 꼭 드려야 하는 제사는 아니었습니다. 번제를 드리는 사람의 심령과 태도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죄를 범했지만, 속죄제를 통해서 어린양의 피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제가 죄를 범했는데, 저를 대신해서 흠없는 어린양이 죽었습니다. 저 때문에 어린양이 피를 흘리고 죽은 것처럼, 언젠가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에 오셔서 제가 범한 죄의 대가를 지불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한 번 돌아가셨지만, 죄를 범할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에 큰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제 저는 죄를 미워하는 생애를 살겠습니다.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 앞에서 도무지 갚은 수 없는 빚을 진 자로 살아가겠습니다. 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죄를 범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의 죄 때문에 메시아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저의 남은 생애를 받아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심정으로 드리는 제사가 번제였습니다. 죄는 이미 속죄제에서 용서 받았다고 할지라도, 죄를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 마음과 생애를 헌신하는 제사가 번제였습니다. 그래서 죄를 범한 사람은 속죄제로 드리는 양 외에 또 한 마리의 양을 끌고 와서 번제를 드렸는데 그것은 자원하는 사람만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번제의 의미

번제의 목적은 헌신과 희생입니다. 그래서 번제를 드리는 사람의 심령에서는 이런 기도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이시여, 제 삶을 돌아보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보다 높고,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을 남겨 두지 않겠습니다. 이제 제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제가 의지하고 붙잡고 살아왔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런 심령을 하나님께 표현하기 위해서 번제가 드려졌기 때문에 번제를 드리는 절차와 의식은 매우 특별했습니다(레위기 1장). 먼저 양의 목을 따서 죽인 다음에 양의 가죽을 벗겨야 했습니다. 번제를 드릴 때 왜 가죽을 벗겨야 했을까요? 가죽을 벗기는 것은 내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내 인간적인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입니다. 내 평판과 자랑의 옷을 벗어 버리겠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양의 가죽을 벗기는 것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철저하게 드렸지만, 속으로는 세상을 사랑하고 자아를 사랑했으며, 마음속에 숨겨진 우상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마음이 양의 가죽을 벗기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가죽을 벗기면 속살이 드러나는 것처럼, 겉으로 꾸며진 모든 위선을 벗어 버리고 진실된 마음으로 살겠다는 헌신이 번제였습니다. 그래서 번제를 드리는 사람은 가죽을 벗기면서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 이제 나를 벗어 버리겠습니다. 위선과 인위적으로 포장된 성결을 포기하겠습니다. 부디,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을 제게 주시옵소서. 제 위에 하나님의 의를 입혀 주시옵소서.”

번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번제는 헌신하는 제사이므로 가죽뿐 아니라 오장육부 전체를 바치는 의식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양의 배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갈라서 엽니다. 그속에 있는 모든 기관 즉, 위장, 간, 창자 등을 모두 꺼내어 맑은 물에 씻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과정이 무엇을 뜻할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는 나의 사고방식, 내 인생관, 내 계획, 내 의도와 동기와 목적을 모두 꺼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씻어 내는 것을 뜻합니다. 세속과 욕심으로 더러워진 양심을 성경 말씀으로 씻어 내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6).

그래서 번제를 통해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내 마음 전체를 구석구석 살펴 주시옵소서. 아직도 남아 있는 더러운 것이 있는지 살펴 주시옵소서. 어떤 것이 부정한지 살펴서 알려 주시옵소서. 제 마음과 동기와 목적과 계획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씻어 내고 정결하게 되기를 원하오니 도와주시옵소서. 주께서 알려 주시면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이것이 번제를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심령입니다.

양의 배를 가르고 오장육부를 끄집어내서 물로 씻은 다음에는 무엇을 할까요? 내장을 잘라 내고 토막 내어서 제단에 올려놓고 불에 태웠습니다. 불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불로 오장육부를 태우는 것은 성령의 불로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태워없애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올라가는 연기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었습니다.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1:13).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고기 태우는 냄새를 좋아하신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내 모든 것을 태워서 바치는 마음과 생애가 하나님께 아름다운 향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바쳐진 마음과 생애처럼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번제, 구원의 경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속죄제는 구원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이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그런데 속죄제만 드리는 사람들은 구원받는 경험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죄를 범할 때마다 속죄제만 드리는 사람들은 결국 하늘에 갈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말씀이므로 좀 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 시대 광야에서 번제가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드려졌기 때문에 24시간 동안 항상 연기가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성막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날마다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를 보고, 내장이 타는 냄새를 맡으면서 자원하는 심령으로 마음과 생애를 바치는 경험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번제를 의무로 강요하지 않는 이유는 번제의 경험은 의무감으로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번제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계명처럼 명령하신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경험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번제의 경험은 하늘에 가서 살 성도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경험이지만, 명령이나 강요가 아니라 온전히 자원해서 드리는 헌신과 희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내려와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명령과 의무감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나가 “아버지시여, 제가 저 땅으로 내려가겠습니다. 지구에서 죽어 가는 영혼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라고 호소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원해서 번제단에 올라가 태워 없어지는 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그와 동일한 태도와 마음이 번제를 드리는 심령입니다. 자원해서 내 마음과 삶 전체를 하나님과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드리는 번제의 경험이 없이 아무도 하늘에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해야만 예수께서 마태복음 22장에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어떻게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번제의 경험을 한 사람에게는 가능하게 됩니다. 양의 가죽을 벗겨 내고, 배를 갈라서 오장육부를 끄집어내어서 맑을 물로 씻어 정결하게 되고 그것을 단에 올려 태우는 헌신의 경험을 한 사람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온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매일 속죄제만 드리면서 이렇게 저렇게 땜질하듯이 죄 사함을 받는 사람들은 결코 번제의 경험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의무감 때문에 성경을 읽고, 구원받기 위해서 죄를 고백하는 신앙으로는 구원의 경험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는 경험 없이 오늘 죄 하나 지으면 기도해서 용서 받고, 내일 죄 두 개 범하면 기도해서 용서 받는 그런 태도로는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하늘에 갈 수 있다.”라는 자기 기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한번 믿고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여러분의 구원은 확정되었습니다.”라는 식의 설교가 들려올 때 귀를 막아야 합니다. “속죄제만 드리면 구원받는다”는 식의 복음이 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내 마음과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지 않더라도 죄만 용서 받으면 구원받는다”는 사상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속죄제를 드린 사람은 자연스럽게 번제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계획은 속죄제와 번제의 경험을 통해서 하늘에 가는 것입니다. 온 마음과 생애를 바치는 번제를 드리지 않으면서, 속죄제만 드리면서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10년, 20년 믿어도 신앙이 성장하지 않게 되고 맨날 그 자리에서 빙빙 돌다 지치고 좌절하게 됩니다. 날마다 똑같은 죄를 범하고 회개하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포기하고 죄와 세속을 붙잡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죄로부터 구원받는 경험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로 연결된 속죄제와 번제의 경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죄제를 통해서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은 변화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속죄제를 드릴 때마다 어린양 예수께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 가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놀라운 희생과 죽음 앞에 서면 죄를 미워하는 새 마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십자가 앞에서 맹숭맹숭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까? 누가 감히 어린양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죄를 그대로 붙잡고 있으면서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불순종하면서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 2).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 6:15).

우리가 회개하는 심령으로 속죄제를 드리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은 곧바로 번제의 경험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마음과 심령을 바닥부터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 앞에 내 모든 것을 바치고 싶은 소원과 충동이 솟구치게 됩니다. 그런 거룩한 소원과 충동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으면,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있어서 분명한 말씀을 남겼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번제의 경험은 의무도 아니고 강요도 아니지만, 속죄제를 드린 사람은 간절한 심령으로 번제를 드리게 됩니다. 이것이 번제를 드리는 기도입니다. “주여, 양의 가죽을 벗기듯이 내 공로와 내 의를 벗겨 주시옵소서. 이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내 오장육부와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립니다. 부디 받아 주셔서 말씀으로 정결케 하시고 성령의 불로 태워 주시옵소서.”

 

번제를 드린 사람과 드리지 않은 사람의 차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번제를 드리지 않으면 두 가지 미혹에 빠지게 됩니다.

첫 번째 미혹: 사탄은 번제의 경험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도록 유도합니다. 비록 교회에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마음과 생애를 바치는 번제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결국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 세상 사람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두 번째 미혹: 사탄은 번제의 경험이 없는 사람을 율법주의적인 신앙으로 끌어갑니다. 참된 중생의 경험과 번제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려고 애쓰면 어떻게 될까요? 바리새인의 경험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세속을 피하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애쓸지라도, 율법주의자가 갖고 있는 냉랭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번제의 경험이 없는 사람도 주일을 남들보다 거룩하게 지키려고 애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만큼 주일을 철저하게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은근히 정죄하는 바리새인의 죄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참된 번제의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도 말씀에 대한 지식을 많이 쌓아서 교회와 교인들의 문제를 정확히 지적할 수 있지만, 바리새인의 시선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영혼의 평안이 없고, 공허한 마음으로 애쓰고 노력하다가 좌절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이런 문제에 봉착하게 될까요? 번제의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내 마음과 생애 전체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증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 한구석에 은근히 세상을 사랑하고 돈의 신을 섬기는 정신을 품고 있으면서 속죄제만 드리기 때문에 이상한 증세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죽을 벗기고 오장육부를 말씀으로 씻어 내는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는데, 세상에 나가면 세상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번제를 드린 사람은 이런 마음과 태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 사업에 만 원이 필요합니다.”라는 요청을 받을 경우, 번제를 드린 사람은 “제가 2만 원을 드리기 소원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누가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동행해 줄 것입니다. 누가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벗어 줄 것입니다. 이것이 번제의 경험이고 자원해서 드리는 헌신과 희생입니다. 번제를 드린 사람은 내가 얼마나 조금 희생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을 더 할 수 있습니까? 알려만 주시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속제 제물로 돌아가셨지만, 그분의 마음과 생애는 번제의 경험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해야 하는 이상으로 희생하고 헌신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 사함만 받으면 구원받을 수 있으므로 나는 용서만 받고 하늘에 가겠습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기심입니다. 그 자체가 너무나 뻔뻔스런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서 죽으셨지만, 나는 구원만 받겠습니다. 저에게 헌신과 희생과 순종을 요구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용서가 무엇이고, 구원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100여 년 전에 어떤 그리스도인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은 무신론자나 술주정뱅이나 마약 중독자가 아니다. 가장 악한 사람은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한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이다. 회개했다고 말하지만 참된 회개의 경험이 없고, 순종한다고 하지만, 반만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악하다. 그들은 반은 세상을 사랑하고 반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구원받았다고 말하지만, 마음속에 이기심과 세상을 사랑하는 정신이 새겨져 있는 사람들이다. 주님을 위해 산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평판과 자랑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영혼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길을 막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우리는 날마다 번제를 드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번제를 드려야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부터 이런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주님, 이제 전부 꺼내 놓고 태워 없애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나를 이렇게 구원하시고, 이렇게 기적적으로 인도하시고 보살피는데, 내가 주 앞에 숨기고 감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을 남겨 두겠습니까?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가르쳐 주시옵소서.” 이것이 번제의 경험으로 들어가는 기도입니다.

 

번제와 은혜 아래 거하는 삶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은혜 아래”라는 말의 뜻을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면,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키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 것보다 “은혜 아래” 거하는 것이 훨씬 능력 있는 삶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법 아래” 있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바울은 “법 아래” 있었습니다. 열성적인 바리새인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결국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 한구석에 좌절과 정죄를 느끼면서 살았습니다. 바울은 “법 아래” 있었던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14, 15, 24).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은혜 아래” 있게 되면서 어떤 삶을 살게 되었습니까? 바리새인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 냈을까요? 순종의 동기와 목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바리새인으로서 “법 아래” 있을 때에는 구원받기 위해서 순종하려고 애쓰다가 실패를 반복하면서 좌절했었는데, 주님을 영접한 후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희생을 깨닫고 사랑의 빚을 진 자의 심령으로 “은혜 아래”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온 마음과 생애를 바쳐서 말씀에 충성하는 생애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쌓으려는 공로와 의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만 높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 아래” 거하는 삶이고, 마음과 생애를 바치는 번제의 삶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은혜 아래”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바울의 간증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에 나오는 경험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은혜 아래” 거하면서 했던 경험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그토록 고생스럽고 힘든 삶을 살아 낼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번제를 드리는 경험 속으로 깊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가죽을 벗기고 오장육부를 물에 씻어서 태우는 경험을 한 바울은 사탄의 온갖 공격과 시험 속에서도 “은혜 아래” 거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경험이 우리가 사모하는 경험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말씀에 대한 오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말씀을 이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뜻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문맥 전체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14~16,22). 얼마나 분명한 말씀입니까?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죄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은혜 아래” 거하는 사람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고 거룩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죄를 붙잡고 있고,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아도 은혜로 구원받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무엇인지 알고 십자가가 어떤 것인지 알면, “은혜 아래” 거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엄청난 파워와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주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 크고 감격적이어서 마음속에 감추어 둘 수 없습니다.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래서 “주여 어떻게 하면 제 생애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제 생애를 산 제사로 바치고 싶습니다. 인도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은혜 아래” 있으면 더 순종하게 되고, 더 노력하게 되며, 더 희생하게 됩니다.

 

번제의 경험과 짐승의 표

물론, 율법을 지키고 행함으로 구원받으려고 애쓰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충성이 없으면 의의 열매가 맺히지 않을 것이며 잎사귀만 무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4장에서 짐승의 표를 이기고 승리하는 사람들의 신앙에 대해서 요한은 이런 말씀을 남긴 것입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 12).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사람들은 “은혜 아래”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은혜의 크고 깊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예수 믿음과 계명을 지키는” 거룩한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유사이래 없던 엄청난 핍박과 위협을 통과하면서도 예수 믿음과 계명을 지키는 고결한 신앙을 유지합니다. 그들이 위기의 순간에 승리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날마다 번제를 드리는 경험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 불의 위기 속에서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둘째 계명에 충성했던 것처럼, 날마다 번제를 드리는 사람들은 짐승의 표 환난에서 “예수 믿음과 계명을 지키는” 승리를 하게 될 것입니다.

 

번제의 경험과 참된 신앙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손해와 희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 번제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죄를 범할 때마다 속죄제만 드리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번제를 드리는 사람들은 순종을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헌신을 책임이 아니라 영광스런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기독교 신앙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법 아래” 머물게 됩니다. 열심히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깊은 좌절감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 거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애 전체를 주님께 번제로 바치게 됩니다. 깊은 평안과 확신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속죄제에서 그치면 안 됩니다. 형식적으로 속죄제를 드려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이기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를 바치는 번제의 경험까지 나가야 합니다. 그런 분들은 번제의 경험 속에서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꿈에도 그리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희생과 헌신을 드리기 때문에 늘 넉넉한 여유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들이 문제를 일으킵니까? 자녀들이 속을 썩이고 말썽만 부리나요? 그들에게 순종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그들 마음속에서 사랑을 이끌어 내야 합니다. 부모의 “은혜 아래” 거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사랑은 강요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번제는 사랑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헌신입니다. 하늘은 용서만 살짝 받고 올라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에 순종할 때 기쁨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커서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생애를 번제로 바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이유

유대 제사장들이 왜 예수님을 미워하고 증오했을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특별한 이유는 예수께서 속죄제를 한 번도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한 적이 없었기 한 번도 양을 끌고 성소에 가서 속죄제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대 제사장들은 속죄제를 드리지 않는 예수님을 너무나 미워했습니다. 왜 미워했을까요? 그 당시 제사장들은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양을 비싼 값에 팔아서 폭리를 취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면 범할수록 제사장들의 수입이 늘어났기 때문에 그들은 은근히 백성들이 죄를 더 많이 범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범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의 양심을 책망하시고 가책을 주시는데, 제사장들은 그런 성령의 역사를 이용해서 돈을 벌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을 죽여서 속죄제를 드리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양을 팔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교회가 구원의 도를 잃어버리고 메시아를 거절하게 된 중요한 이유입니다.

두려운 사실은,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그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 제사장들이 양을 끌고 온 사람들에게 해 주었던 그런 종류의 말씀을 전하는 교회들은 오늘날에도 큰 돈을 벌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와 세속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죄를 용서 받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라는 말씀을 듣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생애를 주님께 온전히 바치지 않더라고 죄만 용서 받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교회는 큰 돈을 벌게 됩니다. 그 결과, 마지막 시대의 교회 안에서 성결의 경험은 사라져 버렸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유대 제사장들의 성소 봉사가 비즈니스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양을 끌고 오지 않았으니 얼마나 미웠을까요? 제사장들도 날마다 똑같은 죄를 짓고 또 지으면서 양을 잡아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속죄제가 수없이 반복되면서 의미 없는 형식이 되어 버렸을 정도인데,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양을 끌고 와서 속죄제를 드리지 않으니 얼마나 교만하고 독선적으로 보였을까요?

예수께서는 속죄제를 드리는 대신에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분의 삶 자체가 사랑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번제였습니다. 영혼들을 회개케 하는 말씀을 전하셨고,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돌보셨으며,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던 세리와 창녀와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셨습니다. 사탄은 그런 예수님의 삶을 너무나 미워했습니다. 사탄의 충동을 받은 제사장와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힘을 모아서 예수님을 증오했고 결국에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처럼 번제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핍박과 미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회가 타락하고 세속화되면서 번제의 경험이 강조되는 곳마다 반대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령껏 속죄제만 드리면서 구원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번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을 분노케 합니다. “꼭 그렇게 해야만 구원을 받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번제의 경험은 율법주의이고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라는 항의를 합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면 그런 반응을 하게 됩니다. 번제의 경험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지켜본 성도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런 열매입니다. 십자가에 앞에 나가 무릎을 꿇는 영혼마다 번제의 경험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깊이 임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