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영혼의 평안, 교회 안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날 교회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신자의 고통과 눈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말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을 드리면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고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오늘날 죄에 대하여 깊은 고통과 슬픔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진심으로 교제하고 마음을 통하는 영적 친구를 찾기 어렵습니다.
죄를 죄로 느끼지 않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나는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교회는 마치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죄에서 구원받으려고 하는 자는 교회로 오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방패 삼아서 대담하게 죄를 붙잡고 싶은 자들도 교회로 오라! 예수를 영접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더 이상의 고통과 고민은 없다.” 물론, 모든 교회가 똑같은 모습은 아닙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담대하게 범하는 무법자로 교인들을 양육시키고 있고, 어떤 교회에서는 교인들을 지옥불이 두려워 떠는 신경쇠약 환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 교회를 다니고 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방법과 영혼의 평안을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지 배울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나에게 영혼의 피난처를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죄가 부끄러워서 하나님을 피하려고 도망쳤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손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동쪽으로 가도 하나님이 계셨고, 서쪽으로 가도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찾으셨지만 나를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죄로 인한 가책 때문에 나는 삶의 즐거움을 잃었습니다. 식욕도 사라졌고 숙면을 취할 수 없었으며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힘들어서 유명한 목사님을 찾아가 내 영혼의 고통을 토로했지만, “나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는 대답을 줄 뿐이었습니다. 죄의 문제에 대한 명백한 답변을 주지 못하는 신앙이나 종교는 모두 거짓입니다.
2편| 영혼의 평안, 자선과 봉사로 얻을 수 있을까요?
나는 봉사와 자선에 몰입하면 영혼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뿐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선과 봉사를 통해서 죄로 인한 양심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심지어 교회에 바치는 헌금을 통해서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그리스도인들도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나 역시 자선과 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참된 경험을 얻고자 했습니다. 빈민들을 위한 병원에 보조 간호사로 들어가서 그들의 발을 씻기고 배설물을 닦아 주며 환자들로부터 온갖 욕설을 들으면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인내를 수련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자선과 봉사는 사랑의 결과일 뿐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자선과 봉사를 열심히 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진리가 아닙니다. 자선과 봉사가 자비로운 마음을 배우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사랑과 자비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구원과 영혼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봉사와 자선을 억지로 이끌어 낼 경우, 자선은 위선이 되고 봉사는 교만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자선과 봉사가 나를 교만하게 만든다면, 나의 선행은 원수입니다. 그런 경우, 자선과 봉사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만과 위선의 깊이는 깊어지게 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선과 봉사로 자신의 죄를 덮어 버리면, 그 사람은 거의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자기기만에 빠지게 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고아원을 세워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봉사하려고 하는 자여! 세상이 그대의 자선을 인정하고 교회가 그대의 헌신을 찬양할 때, 그대는 바로 지옥의 벼랑길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업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보다 더 높게 평가되는 오늘날, 그대의 이름이 높이 들리면 들릴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위대한 자선 사업가 하워드는 임종 시에 단 두 마디의 유언을 남겼습니다. 첫째는 정신병에 걸린 아들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자기를 위해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대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수록 안전합니다. 알고 있는 죄, 마음에 품고 있는 죄를 해결하지 않은 채 봉사와 자선을 베풀기 원하십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싶어 하는 정치가와 연예인들이 자선 사업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거듭나지 못한 그리스도인도 자선과 봉사를 인기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영성이 없는 목사도 자선과 봉사를 통해서 교회와 세상의 주목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자선과 봉사에 헌신하는 사람을 공개적으로 칭찬하지 말고 그들의 영혼을 숨겨 주어야 합니다. “너는 남을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구제를 은밀히 하라 그리하면 은밀히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니라”(마 6:4).
3편| 영혼의 평안, 목사가 되면 얻을 수 있을까요?
자선과 봉사에서 영혼의 평안을 찾지 못한 나는 마침내 극단적인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이런 결과가 생기게 될 것을 두려워했고,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이제 이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결국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불신자로 살 때부터 이 세상에 위선자와 파렴치한이 많지만 성직자보다 심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 처음 입문했을 때 “나는 결코 목사는 되지 않겠다.”라고 결심했습니다. 처음부터 나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아무리 천한 직업을 주시더라도 제발 목사는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물론, 어떤 직업을 가지더라도 복음 전파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내 스스로 목사직을 택하여 Rev.(경건한 목사)라는 명칭을 내 이름 앞에 놓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지게를 지고 수레를 끌더라도 목사는 되지 않겠다고 여러 번 다짐했지만 결국 나는 목사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밭에 곡식이 익어 추수할 때가 되었습니다. 추수할 것이 많은데 추수할 사람이 너무나 적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목사를 직업으로 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목사는 내가 생각하는 목사와 달랐습니다. 나는 바울과 같은 목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나는 루터와 같은 목사가 되기를 갈망했습니다. 나는 리빙스턴과 같은 목사가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목사가 되라고 권했으면, 나는 “거룩한 부르심”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성경을 배우지 못했고 충분한 경험이 없으며 자신의 죄와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모르고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신학대학을 졸업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목사가 되어서 설교 단상에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목사직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느꼈습니다. 중세기 로마 제국의 핍박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교회의 깃발이 순교자의 피로 물들었을 때에는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 목사가 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목사직이 안락함을 보장하는 직장으로 전락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최소한의 생존경쟁으로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목사가 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긴 씨름 끝에 나는 “결코 목사가 되지 않겠다”는 사욕을 버리기로 결심했습니다. “목사가 되지 않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목사가 받는 최대의 고난을 받는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영혼의 평안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영혼의 평안을 위해서라면, 목사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는 신학교에서 기도와 금식으로 진리와 인생 최대의 행복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학교는 중세기 수도사들의 학교와는 달랐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내가 처음 느낀 것은 너무나 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빈민 구호 병원에서 수련하던 삶과 비교하면 너무나 편한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신학교가 준 절망
신학교에서 배운 몇 과목은 나의 사상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특히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연구를 통해서 나는 모세와 바울을 직접 대면하는듯한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신학이라는 학문을 여기서 제한하였더라면 좋았을텐데, 유감스럽게도 진지한 성경 연구는 매우 적었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관련 없는 논문을 살피고 웅변학, 설교학, 목회학, 변증학 같은 것들을 공부하는 데 많은 시간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수많은 학설과 교리의 문제점을 분석하다가 100% 확실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회의론자가 되어 졸업하는 신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모세와 바울이 배웠던 신학을 배우고 싶었지만 신학교는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신학교 역시 내 영혼에 평안을 주지 못했습니다. 신학교의 아침 기도회와 강의도 내 마음속에 있는 죄의 사슬을 벗겨 주지 못했습니다. 성경 연구, 기도, 예언이 학문의 대상이 되고 의무가 되었을 때, 그러한 것들이 더 이상 거룩한 힘으로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더우기 종교 비판학 같은 강의 시간에는 두려운 마음 없이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거룩한 이름을 마치 오래된 돌멩이나 나뭇조각의 이름처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학점이 되었고 과목이 되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내가 경험했던 위험은 신성 모독의 죄였습니다.
신학교에 다니면서 내가 받은 형벌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경외심을 잃어버리면 거룩한 성경 말씀이 죄인의 심령을 치료하고 죄의 사슬을 끊어 주는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진리가 학문과 학설로 다루어졌습니다. 나는 죄의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려고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어떤 교수들은 죄를 붙잡고 있는 상태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학을 나에게 강요했습니다. 거룩함을 거절하고 무시하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나는 신학교에서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는 문을 발견하게 되었고 신학교 밖에서보다 더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신학의 중심은 심령에 있어야 합니다. 전도는 정신이지 기술이 아닙니다. 목사의 설교는 배우의 연극이 아닙니다. 신학교에서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기술을 전수받는 동안, 많은 신학생들이 목사라는 직업을 가진 연극 배우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기가 느끼지 않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말하고, 자기가 확신하지 않는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야말로 연극 배우가 배워야 할 기술이 아닙니까?
하늘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도, 특별한 하늘의 계시와 영감이 없이도, 그리스도를 향한 순결한 사랑을 맛보지 못한 사람도 신학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학생들에게도 졸업장과 학위를 주어서 하나님의 복음 사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 현대 신학교가 가지고 있는 치명적 문제입니다. 설교는 제조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바울의 글은 문법적으로 분석하고 해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되어야 비로소 바울의 사상과 경험을 알 수 있습니다. 목사의 양성은 신학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훌륭한 선교사 중에는 신학교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길리얏의 야인이었으며, 그의 사업과 정신을 물려주려고 선택한 후계자 역시 소를 모는 사밧의 아들 엘리사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사 세상을 구하려고 계획하셨을 때에도 그리스도를 히렐이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우게 하지 않으시고 나사렛 벽촌에 두셔서 천연계를 통하여 아들을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19세기 최대의 전도자인 무디 역시 세탁소의 일꾼이었습니다. 훌륭한 목사는 결코 신학교의 학사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에서 학과목과 학위로 만들어진 목사야말로 그리스도 교회의 가장 위험한 원수입니다.
그렇습니다! 신학교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학교는 마귀가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목사 제작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신학교가 사탄의 공격 목표가 되기 쉬운 이유는 그들이 말하고 설교하는 것과 그들의 사상과 삶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탄은 그리스도의 거짓 대리자들을 통해서 잘못된 사상과 교리를 하나님의 교회 속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있습니다.
신학교가 만들어 놓은 거짓 평안
죄의 죄 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의 은혜 됨을 알 수 없습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에 대한 절실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감사가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 들어온 가장 큰 위험은 죄를 어쩔 수 없는 인생의 부산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고 버리고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타조가 사냥꾼한테 쫓기다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지면, 머리를 모래 속에 박고 그것으로서 온몸을 숨겼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신학교에서 죄를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들은 죄를 도무지 버릴 수 없는 것으로 강조함로써 죄의 문제를 덮어 버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너무나 거룩해서 도저히 순종할 수 없다.”는 식의 교리가 마치 복음의 전체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범한 교인은 양심의 가책과 심판의 두려움을 호소하는데, 목사와 신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죄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십계명은 십자가에서 폐지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영접하고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 받은 구원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오늘날 신학교에서 만들어 낸 “신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범하고도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습니다. 죄인으로서 열렬히 구해야 할 십자가의 보혈과 은혜를 간절히 구하지 않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다음 두려워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고 숨었던 것처럼, 죄를 범한 죄인은 죄책감에 눌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피와 용서가 얼마나 필요하고 귀한 은혜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데, 신학교는 죄 가운데서도 구원과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신학을 만들어서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을 막아 버렸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마땅히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데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거짓 평안을 나눠 주고 있습니다. 죄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인간의 교리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지시킨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죄는 하늘에 있는 책에 기록되어 있고, 기록된 대로 심판받게 됩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4, 12). 하늘에 있는 죄의 기록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손 들고 주 앞에 나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가 죄를 버리는 것입니다. 죄를 죄 되게 하지 않으면, 은혜도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4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 경우에 있어서 처음에는 계명이 나를 억눌렀고, 그 후에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다가왔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십자가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속죄의 교리로 인간의 죄와 부도덕과 부패를 덮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아들의 피로 세워진 은혜가 눈먼 자들에 의해서 희롱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깊은 염려와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와 용서는 의를 사모하는 자들의 휴식처이지 악인의 은신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덕률인 십계명의 중요성을 가르치지 않고 은혜만 강조하는 목사는 양들을 소리 없이 죽이는 늑대입니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은 반쪽 진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모든 죄가 이미 용서받았다. 더 이상 인간의 선행과 도덕은 의미 없게 되었다. 죄는 하나님의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우리는 정죄로부터 해방되었다.” 복음의 반만 전하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의 속죄와 은혜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롬 6:1).
나는 죄로 인한 고뇌와 고통 속에서 오랜 세월 방황하다가 하늘 아버지의 자비를 바라보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로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를 감추거나 변명하지 않게 되었고 나의 의와 선한 행위를 내세우지 않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양만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드립니다. “하나님이시여, 십자가의 피를 보시고 용서할 수 없는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당신께 드릴 선행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는 행위도 없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피곤에 지친 몸과 정신 그리고 부서지고 깨어진 마음뿐입니다.” 이렇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 영혼 깊숙히 스며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의 심령이 받아들여졌다. 이제 낡은 옷을 벗고 내가 너를 위하여 준비해둔 의의 옷을 입어라.”
나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향해서 이런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나는 당신을 찾고 있었는데 당신은 어째서 나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방황하고 있는 모습이 당신께는 가련하게 보이지 않았습니까? 내가 진리를 보지 못해서 고통에 고통을 더하고 있을 때, 당신은 왜 나를 바라만 보고 계셨습니까?” 어느 날, 하늘의 음성이 내게 이렇게 말해 주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단다. 네가 괴로워할 때 나는 너보다 더 안타까워했단다. 내가 너를 죄의 고통에서 건져 내지 않았던 이유는 너를 온전히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너에게 반평생 동안의 방황과 번민을 허락했던 이유는 네 자신을 의존하는 정신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나를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너를 괴롭힌 것은 네 자신이었다. 이제부터는 나만 의지해라. 지혜와 능력은 네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그 음성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하옵나이다. 이렇게 된 것이 모두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6).
이제 내가 할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전에는 나의 노력과 희생에 대한 대가를 기대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기다립니다. 기도할 때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망설이지 않고 요청합니다. 하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나의 기도에 응답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때마다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근심은 사라져 버렸고,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는 말씀에 대한 느긋한 신뢰가 생겼습니다(롬 8:32).
선한 행위는 더 이상 나에게 의무가 아닙니다. 전도와 봉사와 자선이 내게 최고의 즐거움과 만족을 줍니다. 나의 말과 생활에는 순결한 유머와 여유가 넘치게 되었고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의미 있는 희생과 봉사를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희생, 절제, 극기와 같은 것들이 더 이상 힘겨운 의무로 여겨지지 않았고,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를 위해서 바칠 수 있는 다시 없는 기회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 “의”를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썩어 없어질 인생에서 명예와 부를 얻고자 애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제 나도 영국의 크롬웰처럼 “주여, 비록 내가 비천한 죄인이지만 은혜를 통해서 당신과 언약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간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죄를 짓는 것은 더할 수 없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게 되었고 악을 미워하기 때문에 악을 행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은 더 이상 무거운 짐이 되지 않았으며 다음과 같은 사도 요한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압도되었지만,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피와 은혜에 압도되었습니다. 하늘은 내가 얻기 원하는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영혼의 평안”을 하늘로부터 받게 되자, 이 세상 모든 것이 무가치하게 보였습니다. 나는 평안과 구원의 길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나는 하늘의 평안을 갖고 좁은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