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계명을 지키는 신앙이란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의 여자의 후손을 설명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시험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하면, 사람들이 율법주의를 연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사탄이 마지막 시대의 여자의 후손에 대한 가르침을 땅에 묻어버리기 위해서 그런 오해를 교회 안에 퍼트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것이 어떻게 율법주의입니까?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율법주의입니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어떻게 율법주의입니까? 부모를 공경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율법주의입니까? 십계명에 대한 이상한 오해로부터 벗어나셔야 합니다. 성경은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사랑과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늘 아버지의 계명을 온 마음을 다해서 순종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그날(그리스도의 재강림의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15, 20~21)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0,11,14)

오래전부터 용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율법주의로 몰아갔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강조하면,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이고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닙니까?”라고 공격합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계명을 지켰기 때문에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이 “회칠한 무덤”같았기 때문에 책망하신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무덤 속에는 시체가 썩어서 냄새가 나고 부패해 있는데 무덤 표면에 하얀 횟가루를 뿌리면 아름답게 보이는 것처럼, 바리새인들이 속으로는 세상과 돈을 사랑하면서 겉을 선한 행위와 율법으로 하얗게 치장했기 때문에 책망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죽음을 본 사람은 마음과 생애 전체를 주님께 드리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의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을 갖게 되는데, 그것이 “계명을 지키는 신앙”입니다.  

용은 왜 하나님의 계명 위에 검은 보자기를 씌워 놓았을까요? 사람들이 계명에 대한 “빛”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만일 중세기에 무너진 계명과 복음이 회복되어서 사도 시대의 순수한 복음이 세워지면 어떻게 될까요? 용이 그토록 미워하는 마지막 시대의 주인공,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게 됩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마지막 시대에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가진 여자의 후손이 생기면 용은 최고의 위기에 몰린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자의 남은 자손을 통해서 용과 싸우는 최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 12).

짐승의 표 환난에서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승리하면 예수께서 재강림하셔서 여자의 후손들을 하늘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용은 마지막 전쟁에서의 승패가 “계명을 지키는 신앙”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모든 미혹과 핍박을 동원해서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남은 무리만 구원받는다

이 세상 도처에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남은 무리”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은 사람들이 바다 모래처럼 많을지라도 남은 무리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a remnant shall be saved)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롬 9:27~28).

마지막 시대가 되자 용은 여자에게 분노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용이 여자(교회)에게 분노하지만 싸우는 상대는 여자의 남은 자손입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용이 싸우는 상대는 교회 전체가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남은 무리입니다. 왜 용은 남은 무리에게 공격의 초점을 맞출까요? 왜냐하면 용이 남은 무리만 제거하면 하나님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깊은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뱀의 후손이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남은 무리만 구원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조용히 이 시대의 남은 무리를 부르셔서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그 준비가 마치면 큰 환난과 재난이 생기면서 지구 역사의 마지막 국면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들 모두 여자의 후손이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의 남은 무리가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남은 무리를 여러 장면에서 다른 모습으로 설명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남은 무리가 마지막 시대에 용과 싸우는 성도들인데,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요한계시록 12장에서 “계명을 지키는 자들”로 나오는 남은 무리가 다른 곳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올까요?

라오디게아 교회에서의 남은 무리: 지구 역사의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으로 죽은 교회입니다. 거짓 복음과 세속때문에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교회입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시대 기독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예언해 주셨습니다.

영적 사망: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4~17).

이런 참혹한 형편에서 예수께로부터 세 가지 처방을 받고 치유받는 사람들이 생기는데, 그들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남은 무리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 입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1)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2)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3)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21).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는 시련 속에서 순결한 믿음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으며 영적분별력을 가진 성도로 나타났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용과 싸우는 여자의 남은 자손이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는 예수께 치유함을 받는 성도로 나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144,000인=계명을 지키는 자들: 요한계시록 14장에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성도들이 누구인가를 2번 보여 주는데 1~5절에서는 “144,000인”으로 나오고 12절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로 나옵니다.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인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1, 3~5)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12)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 14장 서두에 나오는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들(144,000인)과 1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동일한 성도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동일한 남은 무리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들=144,000인=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여자의 남은 무리)

아마겟돈 전쟁의 남은 무리: 요한계시록 16장에도 남은 무리가 나옵니다. 마지막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영적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는 자들이 어떤 사람들일까요?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 16:14~15).

누가 아마겟돈 전쟁의 승리자입니까?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지 않은 자들”입니다.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떤 옷을 지켜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리스도의 의의 옷, 흰옷을 지켜 입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흰옷을 입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신앙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 매우 흥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사도 요한은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천국문을 들어가 생명나무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옷을 하얗게 빠는 자들이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4부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영어성경에는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흰옷을 입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흰옷 입은 성도는 온 마음과 생애를 다해서 하나님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성도는 예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이라면 순종하지 못할 말씀이 없고, 지키지 못할 계명이 없다는 충성이 마음에 새겨지게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의의 열매가 자연스럽게 맺히게 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아도 흰옷을 입을 수 있다는 가르침에 미혹되면 벌거벗게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미혹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아담과 하와에게 의의 옷이 벗겨졌던 것처럼,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의의 옷을 사탄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벌거벗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에게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호소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요한계시록 3장의 라오디게아 교회와 요한계시록 16장의 아마겟돈 전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되십니까?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입으라고 호소하시는 흰옷을 입어야만, 아마겟돈 전쟁에서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흰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순결하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동기와 생애가 순결하다는 것입니다. 순결하다는 것은 내 생각과 내 사상과 내 철학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얻어진 순결이기 때문에 그것은 내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계명에 불순종하며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는 한, 순결함이 있을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 1:22). 성도들이 이런 경험으로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진리로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은 구원받지만, 진리의 이끌림을 거절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은 멸망당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지구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거절하지 않는 한,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충성하는 남은 무리로 준비시켜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진리와 예언의 빛을 주셔서 바벨론의 거짓 복음과 거짓 가르침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재림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말세에 수많은 거짓선지자들이 나타나서 그들 때문에 계명에 문제가 생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 24:11~12)

예수께서 말씀하신 재림의 징조가 무엇입니까? 말세에 교회 안에 많은 거짓선지자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고 불법을 조장하는 것이 마지막 시대 재림의 징조입니다. 이 시대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가볍게 여기는 설교자들입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의를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현대기독교회에 그런 가르침이 세워졌기 때문에 “불법이 성행하”게 되었고 신자들의 삶은 부도덕으로 채웠으며 진짜 사랑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한 번 구원받았으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식의 기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사랑만 하면 된다. 계명에는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폐지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폐지될 수 없는 것처럼 십계명도 폐지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

 

5부, 다시 부활하는 핍박의 세력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중세기는 모두 지나간 과거입니다. 그런데 왜 이미 지나간 중세기 핍박의 세력을 살펴보아야 합니까? 불필요하게 교황과 바티칸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가질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적그리스도는 미래에 나타나는 존재입니다.” 이런 사상은 종교개혁운동을 반대하던 천주교회에서 하던 주장이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며 미래에 초자연적인 존재가 나타나서 세상을 주관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회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루터교회)와 요한 칼빈(장로교회)과 요한 웨슬리(감리교회)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다니엘 7장 예언을 근거로 중세기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지목했습니다.

다니엘 7장: “내가 본즉 이 뿔(작은 뿔)이 성도들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핍박)…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배도)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핍박)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십계명을 변경시킴)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1,260년간 성도들을 핍박함)”(단 7:21,25)

요한 칼빈: “나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사실을 부인한다…그는 적그리스도이다- 나는 그가 교회의 머리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엡 5:23.”(John Calvin Tracts, vol. 1, 219, 220)

요한 웨슬리: “로마 교황권이 바로 죄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바이다.”(Antichrist and His Tem Kingdoms, 0. 110)

영국 장로교회: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특히 로마의 교황은 어떤 면에서든지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교황은 바로 그 불법의 사람이고 멸망의 아들로서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위에 자기 자신을 높이는 적그리스도이다.”(The Westminister Confession of Fatih, Section 6, Chapter 24)

중세기에 교황과 천주교회 지도부는 종교재판을 통해서 수백만의 성도들을 “이단자”라는 죄명으로 죽였습니다. 스페인 종교재판에서는 31,912명이 화형을 당했고, 알비젠스인들의 대학살에서는 백만 명이 죽었으며, 제수잇 제도의 창설 이후 90만 명이 살해되었고, 네덜란드에서는 3만 6천 명이 사형당했으며, 챨스 5세의 치하에서는 5만 명의 프랑드루인들과 독일사람들이 교수형과 산 채로 매장당했으며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자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이 핍박당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왜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지목했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충격적인 사실이 있는데, 요한계시록은 중세기 핍박의 세력이 “짐승”이라는 세력으로 다시 등장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땅에서 올라 온 새끼 양 같은” 미국이 말세에 “용처럼” 말하는 것처럼, 1798년에 권세를 잃어버렸던 교황의 권세가 말세에 “짐승”이라는 세력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은 말세에 부활하는 핍박의 세력을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 하는 입을 받고(중세기 교회의 배도)42달(1,260년)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중세기 종교암흑시대의 권세)…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성도들을 핍박하는 권세를 받음)…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1798년 프랑스혁명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함)…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죽었던 핍박의 세력이 말세에 다시 부활함),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엄청난 이적으로 온 세상을 미혹함),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1,260년 예언의 끝에 권세를 잃었던 핍박의 세력이 부활함)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마지막 시대의 여자의 후손을 죽이라는 세계적인 살인 명령이 내려짐)…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666이니라”(계 13:5~18)

바로 이 예언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 시대에 교황과 바티칸의 움직임을 주의 깊이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중세기 핍박의 세력이 마지막 때 다시 핍박의 세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1,260년의 예언을 7번이나 반복하면서 핍박의 세력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이적으로 온 세상을 하나로 묶음

용의 마지막 미혹: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계 13:13~14)

지구 역사 마지막에 일어나는 “큰 이적”은 미혹의 클라이맥스가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이적은 구약시대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거짓 선지자들과 대적했을 때 행했던 이적입니다. 사탄이 엘리야의 이적을 흉내낼 때 온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있다!” 하고 열광하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의 미디어들이 거짓 이적을 대서특필할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의 경고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들은 사탄의 “큰 이적”을 보기 위해서 기적의 현장으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마 24:25, 26).

사탄은 왜 이적으로 세상을 미혹할까요? 왜냐하면 이적 앞에서는 모든 교파, 모든 종교 심지어 무신론자들까지도 무릎을 꿇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과 교회를 미혹해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이적”을 강력한 무기로 사용할 것입니다. 이적에 미혹당한 교회와 세상이 하나로 연합하여 뱀의 후손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환난에서 “여자의 후손”을 죽이는 핍박의 세력이 될 것입니다.

지금 개신교회를 휘몰아쳐가는 성령운동과 방언은 교파를 초월할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까지도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천주교회에서도 오래 전부터 마리아의 석상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는 이적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교파를 초월해서 마리아를 경외하는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얼마 전에 일어난 “이적”에서도 우리는 미혹의 그림자를 볼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방문 도중 한 아기에게 입맞추는 사진이 수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뇌종양을 앓고 있는 한 살배기 아기가 프란체스코 교황의 입맞춤을 받고 난 뒤 상태가 호전됐다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해외 현지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지난 23일, 영국 데일리메일지에 따르면 2014년 9월 미국 펜실베니아 주를 방문해 야외 미사를 마치고 길을 나서던 프란체스코 교황은 아픈 아이를 축복해 달라는 부모의 말을 듣고 아이의 머리에 가볍게 입맞춤했습니다. 가족들은 이후 병원 검진 결과, 아기의 뇌종양 크기가 현저히 줄어든 것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방미 전인 8월 사진엔 뇌 안에 종양이 보이지만 11월에 찍은 사진엔 종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의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한 아기의 엄마 크리스틴 마시안토니오는 ‘교황이 아이에게 입맞춤한 뒤 아기의 건강 상태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아이의 아빠 조이 마시안토니오는 “교황님은 하나님의 메신저”라고 말했습니다.”

 

영을 분별하는 방법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이적에 열광합니다. 가난한 자들의 발에 입을 맞추고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자비에 열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변질시키고, 거짓 교리를 그대로 붙잡고 있으면서, 이적을 행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은 “미혹”입니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모든 이적이 하늘에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도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자비와 선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을 분별할 수 있을까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의 계명과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사도들의 말, 신약성경)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6)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는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 3:11,17)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16~23)

마지막 시대에도 두 무리가 있는데, 하나는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여자의 후손이고, 다른 하나는 “불법과 이적”을 따라가는 뱀의 후손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세에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는 “큰 표적과 기사”가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거짓 이적으로 온 세상을 미혹하는 사탄의 전략은 아마겟돈 전쟁까지 그대로 이어집니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계 16:13~16).

사람들이 왜 사탄의 거짓 이적에 미혹될까요?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9~10). 진리를 거절하고 참된 거듭남과 구원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혹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영접했지만, 진리에 순종하지 않고 진리에 의해서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미혹당하는 것입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마지막 시대에 사탄은 감정과 이적을 내세워 사람들을 미혹하고, 하나님께서는 진리와 계명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모으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두 무리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무리에 속해 있습니까?

용은 지금 여자의 후손을 제거하기 위한 마지막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용이 여자의 후손과 싸우는 최후의 공격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의 표 환난입니다. 그 마지막 전쟁이 끝나면 예수께서 재강림하십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를 가진 성도들이 마지막 전쟁에서도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데 교회는 깊이 잠을 자고 있습니다! 누가 일어나서 진실을 말하고 다가오는 위기를 알리기 위해서 말씀을 나팔처럼 외칠까요? ■

 

4부, 용의 마지막 공격 – 짐승의 표 환난

용의 다섯 번째 공격 (짐승의 표 환난~예수 재림)

용의 마지막 공격: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마지막 시대의 여자의 후손을 죽이라는 세계적인 살인 명령이 내려짐)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666이니라”(계 13:15~18)

용의 마지막 공격은 짐승의 표 환난입니다. 사도 요한은 용의 마지막 공격 장면을 계시로 보면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사탄과 거짓 선지자에게 미혹당해서 짐승의 표를 받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모든 자”가 짐승의 표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수없이 사탄의 미혹을 경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무방비 상태로 멸망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도 요한은 통곡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보여 주고자 하는 장면을 순서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2장에서 마지막 시대의 여자의 후손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3장에서는 용의 마지막 공격이 짐승의 표 환난이고 이 환난을 통해서 여자의 후손을 완전히 없애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14장에서는 사도 요한이 무엇을 알려 줄까요? 논리적으로 볼 때 누가 짐승의 표 환난에서 승리하게 될 것인지를 보여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4장에서 어떤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지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은 반드시 이 무리에 속해야 합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12)

여기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나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믿음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계시록 12장 마지막에 나왔던 “여자의 후손”이 짐승의 표 환난에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자의 후손이 되는 신앙을 가져야만 짐승의 표 환난 때 짐승의 표를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마지막 시대의 주인공입니다! 중세기 종교암흑기에 광야에 피신했던 여자, 16세기에 종교개혁운동을 일으켰던 여자, 종교개혁 정신과 개신교 신앙을 갖고 미국으로 피신했던 여자 그리고 그 여자의 남은 자손이 지켰던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신앙”이 짐승의 표 환난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에게 그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마지막 시대에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용은 결코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무너뜨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무너뜨리지 못할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오직 성경”의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 어떤 권위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최고의 위치에 두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기 때문에 그분의 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옥과 형벌이 두려워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최종 승리, “계명을 지키는 자들”

짐승의 표 환난 다음에는 하늘로부터 칠 재앙이 지상에 내리게 되는데 일곱째 재앙 때 예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이 땅에 재강림하십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살아 있는 의인과 무덤에서 부활한 의인들을 공중에서 영접하여 하늘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도 거룩함을 사모하던 성도들은 그때 감격적인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예수님과 함께 우주 여행을 하여 하늘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의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누가 천국문으로 들어가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될까요? 이 장면에서도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나올까요?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사도 요한은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천국문으로 들어가 생명나무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에는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Blessed are they that do his commandments”(계 22:14, 킹제임스 성경).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의의 옷과 계명을 지키는 것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루마기를 빨아서 흰옷을 입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시종일관 마지막 시대의 주인공으로 “계명을 지키는 자들”(여자의 후손)을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뱀의 후손의 종말: 마지막 시대에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어떻게 될까요?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에 뱀의 후손이 당하게 될 참혹한 형벌을 계시 속에서 보았습니다.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계 19:20).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들, 거짓 교리와 거짓 계명을 가르치던 거짓 선지자들, 바벨론의 포도주로 성도들을 취하게 하던 자들, 여자의 후손을 핍박하던 자들은 모두 유황불의 못에 던지우게 될 것입니다.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을 핍박하는 이유

마지막 환난은 잘못 믿는 사람들이 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환난입니다. 짐승의 표 환난은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을 죽이는 환난입니다. 그러므로 용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편견과 미움을 기독교회 안에 깊이 심어 놓으려고 합니다. 그래야만 “여자의 후손”에 대한 핍박도 그만큼 격렬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환난의 실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환난의 때가 오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service, 봉사)라 하리라”(요 16:1~2)

뱀의 후손은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로 생각하면서 여자의 후손을 핍박하고 죽일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교회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핍박한 이유이고, 이것이 중세기 종교암흑시대에 교황의 세력이 하나님의 성도들을 죽이기 위해서 알프스산 깊은 곳까지 십자군을 보낸 이유이며, 이것이 중세기에 5천만 명 이상의 성도들이 순교당했던 이유입니다. 마지막 짐승의 환난 때에도 동일한 이유로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을 핍박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파내어 연구해야 할 때입니다. 말씀과 예언으로 준비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시대에 펼쳐지는 용의 미혹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

 

3부, 용의 공격, 땅으로 피신하는 여자

배경: 중세기 종교암흑기가 끝나갈 무렵 용은 여자를 다시 공격하게 됩니다. 왜 공격했을까요? 중세기의 밤이 지나고 동이 틀 무렵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1517년, 마틴 루터는 천주교회에 대항해서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켰는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르침을 강조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성공으로 이끌었습니다.

  1. 교황과 바티칸 세력이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이 예언하고 있는 1260년간의 핍박의 세력이며, 사도 바울이 말한 불법의 사람이고 적그리스도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변경시켰다.
  2. “오직 성경”만을 높이 들어 올려야 하며 성서적 진리만이 성도들을 구원할 수 있다.

마틴 루터 :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에서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고 기록하였던 그 존재가 여기에 있다. 적그리스도인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있는데 그는 하나님의 법을 변경하였으며, 하나님의 계명 위에 자신이 만든 계명을 높였다. 우리는 여기서 교황권이 진짜 적그리스도의 권좌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바이다.”(The Prophetic Faith of Our Fathers, vol. 2, P. 291, 256)

위와 같은 마틴 루터의 가르침 때문에 유럽 전체가 뒤집혔습니다. 중세기 천 년 동안 유럽에는 오직 하나의 조직된 교회, 즉 천주교회만 존재했는데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되자 교회는 두 무리로 갈라졌습니다. 용의 세 번째 공격에서도 교회의 말을 따랐던 사람들은 뱀의 후손이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던 사람들은 여자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황과 지도부를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이 예언하고 있는 핍박의 세력과 적그리스도로 지목했습니다. 또한 교황이 하나님의 계명을 변경시킨 사실을 밝히자 용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엄청난 반대와 핍박이 일어났지만, 마틴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의 전파했던 “오직 성경”의 신앙을 막을 수도 무너뜨릴 수도 없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개혁과 가르침이 밀물처럼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지지자들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s)라고 불렀는데 그 의미는 “교황의 교리와 가르침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이 개신교회(Protestant church)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1517년 이후부터 종교암흑기가 끝나는 1798년까지는 교황의 권세가 여전히 막강했을 때였습니다. 그 당시 교회의 말을 거절하고 종교개혁 운동에 가담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결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신조에 동의하는 성도들은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중세기에 광야로 피신한 성도들을 “여자”라고 했고, 개신교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서 새로운 땅으로 피신하는 개신교인들도 “여자”라고 불렀습니다. 비록 다른 시대에 다른 장소에 있던 성도들이었지만, 동일한 신앙과 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용의 세 번째 공격(종교개혁 운동~1798년)

용의 공격:  “여자의 뒤에서 뱀(사탄)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계 12:15~16)

이 장면에서 “물”은 무엇이고, “땅”은 무엇일까요? 이 두 가지를 알면 “여자”가 어디로 피신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언에서 “물”은 “백성과 많은 사람들”을 뜻합니다.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계 17:15). 그러므로 용이 “물을 강같이 토해”서 “여자를 떠내려가게 하려”고 했다는 말씀은, 교황과 바티칸이 많은 사람들을 앞장 세워서 “여자”(종교개혁의 신앙을 받아들인 개신교인)를 핍박하고 죽이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을 핍박하자, “여자”는 목숨을 걸고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중세기에는 “광야”로 피신했는데, 이번에는 어디로 피신할까요?

용이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공격하는데 “땅”이 여자를 도왔다고 했습니다. “땅”은 무슨 뜻일까요? 땅은 물과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물”은 “많은 사람들”이므로 “땅”은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곳을 상징합니다. 중세기 종교암흑시대가 끝나갈 무렵, 유럽에서 교황에게 핍박받던 “여자”(개신교회)가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황량한 곳으로 피신한 “땅”은 어디일까요? 1260년의 종교암흑기가 끝나갈 무렵,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피신해 오는 성도들을 받아 준 “땅”은 어디일까요?

기독교 역사와 세계사를 살펴볼 때, 이런 “땅”은 오직 하나인데 신대륙 미국입니다. 그 당시 미국 “땅”은 적은 숫자의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살고 있던 황량한 “땅”이었습니다. 1620년,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받아들인 영국의 청교도들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위해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 미국으로 피신했으며 그 뒤를 따라서 신실한 개신교인들이 계속해서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중세기 종교암흑시대에는 “여자”를 알프스 산속과 깊은 광야로 피신시켰던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의 신앙을 받아들인 “여자”를 다시 피신시키는데 이번에는 신대륙 미국으로 보내셨습니다. 왜 미국으로 피신시켰을까요? 왜냐하면 그 당시 미국은 교황의 권세가 전혀 미칠 수 없는 새로운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땅”은 유럽으로부터 피신하는 청교도에게 종교의 자유를 제공하는 피난처가 되었고, 마틴 루터가 주창한 성서적 신앙을 보다 분명하게 실현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용처럼 말하는 미국

우리는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충격적인 말씀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미국이 결국 용처럼 말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여자를 “땅”으로 피신시켰던 미국이 13장에서는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계 13:11)

사도 요한은 미국이 처음에는 “새끼 양같이” 나타나지만 결국에는 “용처럼 말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새끼 양같이” 나타난다는 것은 미국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세워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미국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을 잃어버리면서 “용처럼 말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자신들의 조상이 왜 유럽을 떠나 신대륙으로 피신했는지 잊어버렸습니다.

미국과 미국의 개신교회는 “어린양”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죄에 깊이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는 “인자의 때는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롯의 때란 어떤 때를 말할까요?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동성애)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7). 세상이 소돔성이 되자 교회 안까지 소돔의 죄가 깊이 들어왔습니다. 미국 대법원에서는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보장했으며, 소위 정통이라고 불리우는 교단에서도 동성애자를 성직자로 안수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오래전에 청교도 정신이 무너졌으며 바벨론의 신학을 세우고 온 세상에 퍼뜨리는 원조가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와 신학교가 미국의 교회와 신학교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충성하는 신앙을 잃어버린 미국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황량한 “땅”에서 미국이 새끼 양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신생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미국은 전 세계를 호령하는 초강대국입니다. 미국은 전 세계를 향해서 용처럼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미국에 대한 예언은 마지막 시대의 비밀과 짐승의 표를 풀어내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14-3-1 

용의 네 번째 공격 (1798년~짐승의 표 환난)

용의 공격: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용의 네 번째 공격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백 년도 안되어 개신교회는 “오직 성경” 말씀만 순종하며 살겠다는 의지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형식주의와 교단 사이의 이단 논쟁에 빠지게 되면서 생명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종교개혁은 중단되었고 더 밝은 빛 가운데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으며, 개신교회에 주어진 하늘의 부르심과 기대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영적으로 죽었고 라오디게아 교회 상태가 되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4~17).

마지막 시대에 접어들면서 물질의 풍요와 재물의 축적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돈이 가장 강력한 우상이 되었습니다. 중세기에는 용이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고 거짓교리와 핍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했는데, 지금은 교회를 세속적으로 만들고 돈과 세상을 사랑하면서 넓은 길을 걸어도 구원받을 것처럼 미혹하고 있습니다. 경건의 능력은 사라져 버렸고 하나님께만 충성하는 신앙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마치 기독교회 안에서 용이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입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뱀의 후손이 되고 있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눅 17:2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도 여자의 후손을 갖고 계십니다. 온 하늘이 지금 마지막 여자의 후손을 주목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용과 마지막 결전을 벌이게 될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누가 여자의 후손일까요? 그들은 어떤 신앙을 갖고 있을까요? 마지막 시대 “여자의 후손”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1)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2)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3)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첫 번째 특징, “계명을 지키는 자들”

마지막 시대 여자의 후손은 예수를 영접하고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왜 이 시대의 여자의 후손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중세기 핍박의 세력이 천주십계라는 이름으로 변경시킨 십계명을 회복시키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여자의 남은 자손은 중세기 종교암흑시대 동안 “광야”로 피신했던 “여자”와 신대륙 미국이라는 “땅”으로 피신했던 “여자”의 신앙을 계승하는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신앙과 정신을 이어가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중단되었던 종교개혁 운동을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중세기 천주교회가 만든 거짓 계명과 거짓 복음을 성서적으로 회복시키는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들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증거를 가진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남은 자손”(remnant)의 의미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the remnant of her seed)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남은 무리를 뜻하는 remnant의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남아 있는 것”이란 뜻입니다. 옷감 파는 가게에 가면 천을 큰 두루마리로 말아 놓은 것이 있는데, 천을 다 팔고 마지막에 남은 조그만 천조각을 remnant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remnant(남은 무리)는 마지막에 남은 조그만 천조각이지만, 그것은 앞서 팔려나간 원래의 두루마리 천과 정확하게 같은 천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시대의 여자의 남은 자손(the remnant)은 사도 시대 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이 믿었던 원래의 복음, 원래의 계명, 원래의 교리를 간직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뜻합니다. 중세기에 이루어진 배도로 생긴 교리적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서 마지막 시대의 여자의 후손은 “오직 성경”의 정신으로 종교개혁 운동을 완성시킬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가리키면서 “그 여자 남은 자손”이라고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시대의 여자의 남은 자손은 중세기에 “광야”에 피신했던 “여자”와 “땅”으로 피신했던 “여자”와 동일한 족보와 가문에 속해 있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중세기에 성도들을 핍박하던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중세기에 태양신의 교리를 받아들인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은 중세기에 “광야”로 피신해서 진리를 지켰던 여자에게 전달되었고, 그 신앙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 전달되었으며, 그 신앙이 18세기에 미국으로 피신하는 여자에게 전달되었고, 그 신앙이 이 시대의 “여자의 남은 자손”에게 전달되었는데, 사도 요한은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증거를 가진 자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구원과 영생이 걸려 있습니다!

 

두 번째 특징,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

마지막 시대 여자의 후손은 “예수의 증거”를 가진 성도들입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사도 요한이 말한 “예수의 증거”란 무엇일까요?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the spirit of prophecy,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계 19:10)

사도 요한은 “예수의 증거는 예언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란, 예언을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는 영을 가진 자들입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1장에서 “예수의 증거”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요한)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계 1:2). “예수의 증거”는 사도 요한이 계시를 통해서 본 예언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란, 하나님의 예언을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는 “빛”을 가진 자들을 뜻합니다. 마지막 시대의 여자의 후손은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을 깨닫고 지키는 성도들입니다.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그런데 마지막 시대의 여자의 후손은 왜 예언에 대한 “빛”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요? 왜냐하면 마지막 시대의 여자의 남은 자손은 피신하는 것이 아니라 용과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틴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이 세워 놓은 예언 해석을 이어가는 성도들입니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모르면, 중세기에 용이 교황과 바티칸을 통해서 만들어 놓은 배도와 거짓 교리의 정체를 꿰뚫어 볼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용의 공격과 미혹에 결코 대항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시대를 위한 예언의 빛이 없으면, “새끼 양처럼” 시작된 미국이 말세에는 “용처럼” 말하는 상황도 분별할 수 없고, 마지막 시대에 누가 핍박의 세력이며 누가 적그리스도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여자의 후손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예언의 빛”이 없으면, 용의 미혹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여자의 남은 자손이 갖고 있는 첫 번째 특징인 계명을 지키는 신앙과 두 번째 특징인 예언의 빛을 가진 성도들은 마지막 시대에 용과 싸우는 상대가 되는데, 이것이 마지막 여자의 후손이 갖게 되는 세 번째 특징입니다. 이제 용과 여자의 후손이 싸우는 마지막 전쟁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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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용의 공격, 광야로 피신하는 교회

요한계시록 12장에는 교회의 족보가 예언되어 있습니다. 족보란 증조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이고, 처음 조상은 누구인지를 밝혀 주는 가문의 계보입니다. 그래서 족보를 보면 원래의 조상부터 현재의 “나”까지 어떻게 이어져 내려왔는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사도 시대부터 마지막 시대까지 하나님의 남은 교회가 어떻게 이어져 내려가는가를 정확하게 보여 주는 족보와 같은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2장 예언을 살펴보면 지금 이 시대에는 어떤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12장은 사탄이 교회를 공격할 때마다 교회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갈라진 역사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런 투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이어져 내려갔는지 보여 줍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의 예언을 통해서 우리는 어느 시대, 어떤 교회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여자의 후손 교회이고 어떤 교회는 뱀의 후손의 교회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처음 등장하는 “여자”는 어떤 교회인가?  

요한계시록 12장 서두에 나오는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요? 정결한 여인입니까? 타락한 음녀입니까?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계 12:1). 1부 기사에서 우리는 “여자”는 “교회, 하나님의 백성”을 뜻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여자”는 해와 달과 열두 별을 갖고 있는 “교회”를 뜻합니다. “해”는 그리스도를 뜻하므로 여자가 해를 입고 있다는 것은 교회가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시 84:11).

또한 이 “여자”는 발 아래에 있는 달을 밟고 있다고 했습니다. 달은 그 자체로는 빛을 내지 않으며 단지 태양을 반사합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달”을 밟고 있다는 것은 교회가 “해”인 그리스도를 반사한다는 뜻입니다. 교회 자체에는 빛과 생명이 없으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의의 빛을 반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자의 머리에 있는 면류관에 12별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이 교회는 12제자가 세운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2장 1절에 나오는 “여자”는 그리스도의 의의 흰옷을 입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품을 반사하고 열두 사도가 가르쳤던 복음을 갖고 있는 교회를 뜻합니다. 이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초대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절에 나오는 해와 달과 12별을 갖고 있는 “여자”는 예수께서 세우시고 열두 제자가 전하는 복음으로 세워진 초대 교회를 나타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의 예언은 순결한 초대 교회가 중세기를 지나면서 어떻게 타락하게 되고 마지막 시대에 어떻게 다시 회복되는가를 보여 줍니다. 이 예언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예언입니다.

세상 끝까지 여자를 공격하는 용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2장 1절에서 초대 교회의 순결한 모습을 보여 준 다음, 2절부터 용이 여자(교회)를 공격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용/뱀은 사탄을 뜻합니다.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계 12:9). 용(사탄)은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용이 여자(교회)를 공격하는 이야기입니다. 두려운 사실은, 용(사탄)의 공격이 이루어질 때마다 참혹한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과 13장에서 용은 여자를 5번 공격하는데, 이 공격이 끝나면 예수께서 재강림하십니다. 놀라운 사실은, 용의 공격이 이루어질 때마다 다음과 같은 패턴이 정확하게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패턴

1. 용은 항상 미혹과 핍박이라는 전략을 사용한다.

2. 용이 공격할 때마다 교회는 두 무리, 즉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나누어진다.

3. 용이 공격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여자의 후손이 되고, 교회의 말을 듣는 사람은 뱀의 후손이 된다.

4. 용이 공격할 때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뱀의 후손이 된다

5. 용이 공격할 때마다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을 핍박한다.

사탄이 요한계시록 12장의 예언을 가장 미워하는 이유는 교회를 공격하는 사탄의 전략과 미혹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용의 공격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번 예언 연구가 독자 여러분의 신앙과 삶을 새로운 변화로 인도할 것을 확신합니다.

용의 첫 번째 공격(예수 탄생 – 서기 31년)  

용의 공격: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계 12:2,4)

신약 시대에 들어오면서 시작된 사탄의 첫 번째 공격은 여자가 낳은 아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이었습니다. 용은 어떤 “아이”를 공격했을까요?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공격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용의 첫 번째 공격을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마 2:13). “이에 헤롯이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마 2:16).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용은 유대교회를 영적으로 잠들게 만들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날마다 어린양을 잡아서 제사드렸지만,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위해서 전혀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용의 공격이 이루어지자, 유대교회는 두 무리로 나누어졌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과 거절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졌는데, 예수의 말씀 대신 유대교회의 말을 신뢰한 사람들은 모두 뱀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용에게 미혹당한 뱀의 후손은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용의 공격이 이루어질 때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뱀의 후손이 되는 것이 기독교 역사입니다.

우리는 사탄이 공격했던 아이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5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가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계 12:5). 사탄은 온 힘을 당해서 그리스도를 공격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승리를 거두셨으며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서기 31년).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자 용은 분노해서 예수께서 세워 놓으신 교회를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용의 두 번째 공격이 시작됩니다.

용의 두 번째 공격(AD 538년~1798년)

배경: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열두 제자와 사도들은 주로 이스라엘의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럽에 있던 국가들을 중심으로 크게 형성되었습니다. 복음의 중심지가 이스라엘에서 유럽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유럽으로 옮겨간 “여자”를 쫓아가서 핍박했습니다. 왜 용은 “여자”를 쫓아다니면서 공격할까요? 왜냐하면 예수께서 가르치신 진리와 복음을 없애거나 비틀어 놓아서 “순결한 여자”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용의 공격: “그 여자(교회)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1,260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계 12:6)

용이 교회를 공격하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광야로 피신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교회는 1,260일 동안 숨어서 지내게 됩니다. 역사가들은 용의 두 번째 공격 시기를 “중세기 종교암흑시대”라고 부릅니다.

용의 두 번째 공격, 얼마나 긴 기간인가?

“1,260일”은 1,260년이라는 긴 기간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예언에서 하루는 일 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1일 = 1년).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민 14:3). “내가 네게 사십 일로 정하였나니 하루가 일 년이니라”(겔 4:6). 여자가 광야에 피신하는 장면이 14절에 다시 나오는데 여기서는 1,260일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로 표현되었습니다(1,260일 =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용의 공격: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계 12:14)

여자는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로 피신했다고 했습니다. 예언에서 “독수리”와 “날개”는 “신속함”을 뜻하므로(합 1:6~8; 렘 4:13),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광야로 신속하게 피신시키는 장면을 뜻합니다.

그런데 6절에서는 1,260일이라고 표현된 기간이 14절에서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뱀(사탄)의 얼굴을 피해”서 숨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도 1,260년 간의 종교암흑기를 뜻할까요? 성경에서 “한 때”란 1년을 상징합니다. 다니엘 11장에서 “때”(time)를 “해”(year)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북방 왕은 돌아가서 다시 대군을 전보다 더 많이 준비하였다가 몇 때 곧 몇 해 후에 대군과 많은 물건을 거느리고 오리라”(단 11:13). 그러므로 여자가 광야에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피신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교회가 “1년과 2년과 반 년”, 다시 말해서 3년 반 동안 피신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공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 1년 + 2년 + 반년 = 3년 반 = 42달 = 1,260일). 하루는 1년을 상징하므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42달, 1,260일”은 모두 1,260년이라는 동일한 기간을 뜻합니다.

1일은 항상 1년인가요?

기간을 나타내는 예언에서 하루는 일 년을 상징한다. 그러나 1일=1년이라는 등식을 성경에 나오는 모든 날짜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날짜가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을 경우에만 이러한 등식을 적용할 수 있다. 문맥을 살펴보면, 날짜가 상징적으로 사용된 표현인지 또는 실제적인 기간을 나타내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다.

중세기에 핍박의 세력이 나타나게 된 배경

사탄은 가난과 죽음으로 초대 교회 교인들을 핍박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가난과 핍박이 초대 교회의 충성과 희생을 무너뜨릴 수 없었으며, 오히려 더 뜨거운 신앙의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정반대의 전략을 사용하게 되는데 그것은 미혹입니다. 용은 기독교회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만듦으로써, 교회 속으로 엄청난 돈과 명예와 인기가 쏟아져 들어오도록 유도했습니다. 서기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갑자기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였습니다. 로마 황제의 핍박을 받던 기독교회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국면 전환이 생긴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냐하면 로마 황제가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기독교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서 정권을 안정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D 313년, 태양신을 섬겼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놀라운 사건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개종하자 그를 따라서 수많은 태양신도들이 기독교회 속으로 밀려 들어왔습니다. 용의 공격이 시작되자, 순결했던 교회 안에 뱀의 후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황제는 태양신교와 기독교회의 지도자를 불러서 태양신교와 기독교회를 적당하게 혼합시킨 새로운 종교를 만들 것을 요구했습니다.

“역사가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태양을 숭배하는 이교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을 보고 그의 영민함에 감탄하고 있다. 이교도의 상징과 날짜, 여러 종교의식들을 기독교 전통에 섞어 버렸다. 태양신교와 기독교 양쪽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혼합 종교를 만들어 냈다.”(다빈치코드 1권, 351~353)

“교회 감독인 유세비우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신학을 태양신의 이교적인 이념과 로마 황제 이념으로 짜맞추어 기독교적으로 변형시켰다.”(Hans F. von Campenhausen, 희랍교부 연구, 대한기독교 출판사, 1977, 93)

태양신을 섬기던 우상숭배자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자 초대 교회가 세워지고 수백 년 동안 없었던 우상들이 베드로상, 바울상, 마리아상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이교도의 신전처럼 우상과 그림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예배일을 받아들이면서, 교회는 십계명에서 둘째 계명을 삭제하고, 넷째 계명을 안식일 대신 태양신의 경배일인 일요일(Sunday, 태양의 날)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런 배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중세기 천주교회는 모세의 십계명 대신에 천주십계를 만들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니엘서에 중세기 종교암흑기에 일어나는 교회의 배도에 대해서 경고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본즉 이 뿔(작은 뿔)이 성도들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핍박)….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배도)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핍박)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십계명을 변경 시킴)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1,260년간 성도들을 핍박함)”(단 7:21, 25).

중세기 어둠의 역사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상당수의 개신교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중세기 배도의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인터넷과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중세기에 생긴 어둠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중세기의 어둠과 배도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까요? 양심적인 신학자와 성직자는 어둠의 역사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더 밝은 빛으로 나가고자 하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에 진실을 덮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8~19).

중세기에 일어난 배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피로써 세워 놓으신 교회가 태양신의 이교 가르침을 받아들인 이상한 종교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천주교회는 중세기에 자신들이 저지른 배도를 숨기거나 감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놀랍게도 천주교회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바꿀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교황)들은 교훈이나 금지에 관한 율법을 추가할 수 있는 권세를 가졌고, 아울러 이러한 율법들로부터 면제해 주는 권세도 있고, 필요하다면 폐지시키는 권세도 있다…이러한 사법상의 권한은 심지어 죄까지라도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포함하고 있다.”(Pope,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XII, 265, col. 2)

중세기 천주교회에 거짓 교리와 천주십계가 들어오자, 교회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거절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진리를 고수하는 사람들과 돈과 명예를 쫓아서 이방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교회의 말을 받아들이고 뱀의 후손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한 소수의 사람들은 여자의 후손이 되어 외롭게 살아갔습니다. 유럽의 대도시에 수많은 교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교회는 “광야”로 피신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교회)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1,260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계 12:6).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중세기 종교암흑기를 뜻하는 1,260년의 기간을 성경에 7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2번 나오고 요한계시록에 5번 나옵니다. 이 기간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달아야만 마지막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비밀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1,260년이 언급될 때마다 성도들이 핍박받고 하나님의 교회가 피신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1. 다니엘 7:25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2. 다니엘 12:7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

3. 요한계시록 11:2 “저희가 거룩한 성을 42달 동안 짓밟으리라”

4. 요한계시록 11:3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을 예언하리라”

5. 요한계시록 12: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1,260일 동안…있더라”

6. 요한계시록 12:14 “그 여자가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

7. 요한계시록 13:6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42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왜 중세기 1,260년의 예언을 7번이나 말하고 있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중세기 배도와 핍박의 세력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려 주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중세기 1,260년 동안 교회에서 일어난 배도와 거짓 복음이 세상 마지막까지 교회를 혼돈시키고 미혹하기 때문에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7번이나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회는 예언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16세기에 마틴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은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으로 종교개혁운동을 힘차게 이끌었지만, 그들의 후예들은 종교개혁자들이 밝혀 놓은 예언의 등불을 꺼뜨리고 말았습니다.

1,260년의 시작점, AD 538년

로마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부터 기독교회는 정치권력과 밀착하게 되었습니다. AD 538년, 교황은 로마 제국의 저스티니안 황제로부터 종교, 정치, 군사력에 관한 막강한 권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천주교회가 세운 교리를 거절하는 성도들은 핍박을 받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서기 538년부터 교회가 성도들을 칼과 창과 고문으로 핍박하기 시작했는데, 이때가 1,260년 종교암흑기의 시작점입니다.

로마 천주교회는 그들이 주장하는 교리와 명령을 거절하고,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고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잔혹하게 핍박하였습니다. 종교암흑시대 동안 “이단자”라는 죄명으로 순교당한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5천만 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이 시기 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많은 진리가 왜곡되고 변질되었습니다. 태양신교의 교리와 혼합해서 생긴 거짓 계명과 이교 사상이 천 년 동안 수많은 종교 회의를 거치면서 교리화되었습니다. 천 년 동안 거짓이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서적 진리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중세기 종교암흑기에 세워진 거짓 교리와 거짓 복음이 지금까지 교회 안에 남아서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천주교회가 강요하는 교리와 복음을 거절하던 성도들은 알프스와 피에몽의 깊은 산과 계곡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면서 진리를 붙잡고 살았는데 그들이 “광야로 피신한 여자”였습니다. 그들은 천 년 이상 동안 산과 계곡에서 하나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등불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계 12:6).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럽의 대도시에 있던 교회들이 큰 건물과 장엄하고 화려한 예식 그리고 거대한 조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교회들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교회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회와 성직자를 높인 사람들은 모두 “뱀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용의 두 번째 공격에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뱀의 후손이 되었으며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광야”에서 가난에 시달리면서 여자의 후손으로 살아갔습니다. 중세기는 교회의 족보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극명하게 갈라졌던 시기입니다.  <마지막 사명> 5호와 6호에서 다루었던 일곱교회 예언 도표에서 교회를 향한 용의 공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살펴볼 수 있습니다.

1,260년의 종점, 1798년

중세기 기독교회가 황제로부터 종교, 정치, 군사력에 관한 권세를 받아 핍박을 시작했던 AD 538년부터 1,260년이 지나면 종교암흑기가 끝나게 됩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1,260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계 12:6,14). 1,260년 예언의 종점은 어느 해입니까? 1798년입니다(서기 538년+1,260년=1798년). 1798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천 년의 종교암흑기가 끝났을까요? 하나님께서 정하신 1,260년 예언의 끝이 되자 전 유럽을 충격에 빠뜨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798년,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나폴레옹은 그의 휘하 장군인 버티어를 성 시스나스 사원에 보내서 교황 피우스 6세를 체포해서 프랑스로 데려왔는데, 결국 교황 피우스 6세는 파리의 감옥에서 3개월만에 옥사했습니다. 이로써 중세기 유럽을 호령하던 천주교회의 권세가 몰락하게 되었고 핍박의 시대가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어 나와서 “교황의 압제에서 해방되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1,260년의 예언이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여기서 끝나면 중세기의 핍박은 단지 과거에 지나간 아픈 역사일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요한계시록은 말세에 교황이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계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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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로 된 종아리와 철과 진흙이 섞인 발

<마지막 사명> 10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니엘 2장의 신상 예언에서도 중세기 핍박의 세력이 세상 끝까지 계속된다는 예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단 2:31~33). 이 예언에서 철로 된 종아리는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데, 종아리에 있는 철이 세상 끝을 상징하는 발과 발가락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니엘 2장의 신상 예언에서도 로마 제국 시대에 나타난 핍박의 세력이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사명> 10호 참조)

교황의 권세가 아직 핍박의 세력으로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온 땅이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를 따르고 있습니다. 1798년에 “죽게 되었던 상처”를 받았지만, 온 세상이 다시 교황을 “이상히 여겨 따르고” 있습니다(계 13:3). 마지막 시대의 예언이 눈앞에서 성취되고 있는데, 기독교회는 지금 눈을 감고 귀를 막은채 예배만 드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주여, 제가 어떻게 하면 여자의 후손이 될 수 있습니까?”라는 기도를 드려야 할 때입니다. ■

14호 챠트2

1부, 두 교회의 전쟁

요한계시록 12장 1절에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계 12:1). 사도 요한이 계시 중에 본 여인은 해를 옷 입고 달을 밟고 있으며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어떤 여인일까요? 요한계시록 12장은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서 교회의 미래를 펼쳐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무엇이며 누구인지를 살펴본 다음, 요한계시록 12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여자”는 교회이다!

성경에서 신랑은 그리스도이고 신부는 하나님의 백성(교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성도, 교회)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성경에서 “여자”는 교회를 상징하는데, 여자에는 두 종류의 여자(두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결한 여자(순결한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음녀(타락한 교회)입니다. 음녀란 남편 이외의 남자와 행음하는 창녀와 같은 여인을 뜻합니다.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도 내게 돌아오려느냐…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얼굴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렘 3:1, 3). 정결한 여자는 진리와 순결한 신앙을 가진 교회를 뜻하고, “음녀”는 신랑 되신 예수께서 주신 진리를 버리고 행음한 타락한 교회를 뜻합니다.

창세기 3장에는 두 교회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가장 긴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에덴동산에서 시작하여 예수 재강림 때까지 모든 교회에 적용됩니다. 이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두 교회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내가(하나님) 너로(뱀, 사탄)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창 3:15)

하나님께서는 사탄과 여자가 서로 원수가 되도록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여자”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고후 11:2; 사 52:2; 렘 6:2). 다시 말해서, “여자”란 진리에 충성하고 정결한 신앙을 가진 교회와 성도들을 뜻합니다. 성령의 음성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정결한 교회(여자)입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요 18:37).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사탄과 원수가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뱀, 사탄) 여자와 원수(enmity)가 되게 하고”(창 3:15). 성경에서 “원수”는 “enmity”(적개심)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탄(뱀)이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 말씀은, 성도들의 마음속에 사탄에 대한 적개심을 넣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이기적이고 악합니다. 그런 본성으로는 사탄의 유혹과 시험에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사탄에 대한 “적개심”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은 거듭남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거듭남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창조의 역사입니다. 만일 거듭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다면, 인간은 사탄에게 사로잡혀서 그의 명령을 복종하기 위해 언제나 대기하고 있는 상태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통해서 거듭남의 역사가 이루어지면 사탄과 죄를 미워하고 거절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사모하게 됩니다.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순결한 것을 사모하게 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하나가 되게 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우리 속에 예수의 마음을 넣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마음속에 사탄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미워하게 되고 악하고 더러운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번 거듭남을 경험했던 사람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에 대한 적개심이 사라지게 되어서 다시 육체의 본성에 지배를 받는 삶을 살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런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오늘날에도 사탄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하는 “여자”이고, 순결한 교회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에 충성하는 성도들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7).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뱀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창 3:15)

여기에 두 교회의 관계가 나옵니다. 한 교회는 뱀의 후손이고 다른 교회는 여자의 후손인데, 두 교회는 서로 원수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까지 두 교회의 투쟁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은 신앙의 질이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은 어떻게 다를까요? 눈으로 쉽게 구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뱀의 후손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교회에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봉사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뱀의 후손들과 여자의 후손들이 섞여서 예배드리고 있기 때문에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한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뱀의 후손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충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뱀의 후손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약 2:19~20).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고 떨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뱀의 후손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이 없습니다. 그들은 세상과 돈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나타나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여자의 후손 = 순결한 교회, 뱀의 후손 = 타락한 교회).

아담과 하와에게 두 아들이 있었지만 가인은 살인자가 되어 뱀의 후손이 되었고 아벨은 순교자가 되어 여자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지만, 이스마엘은 뱀의 후손이 되었고 이삭은 여자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이삭에게 두 아들이 있었지만, 에서는 뱀의 후손이 되었고 야곱은 여자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구약시대 동안 두 후손의 전쟁이 계속되었고, 신약시대에도 두 후손의 전쟁은 계속됩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이것이 세상 끝까지 흘러내려가는 두 족보이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두 족보 중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지금도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는 두 가문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그 전쟁은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까지 이어집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족보, 어떤 가문에 속해 있습니까? ■

 

서론, 마지막 시대의 비밀은 공개되어 있다!

독자 여러분은 이번 호에서 닫혀진 휘장을 열고 과거와 미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먼저 과거에 하나님의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할 것이며, 미래에는 하나님의 예언이 어떤 사건과 맞물려서 이루어지게 되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평범한 책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속에는 이 세상과 교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비밀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사람마다 놀라운 축복을 받고 그리스도의 재강림을 위해서 준비하게 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세상 끝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예언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마지막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예언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성취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오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닫혀진 책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 예언에 대한 해석이 저마다 다르고 오해하기 쉬우므로 닫아 두는 것이 좋다.” 정말 요한계시록(Revelation)은 닫아 두어야 할 책일까요? “계시록”(Revelation)이라는 단어 자체가 “펼쳐져 있다. 계시되어 있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한계시록 1장부터 이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1, 3).

만일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라면 어떻게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요한계시록은 이해할 수 있는 책입니다.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록된 특별한 책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 22:7).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

 

예언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

1) 온 마음을 다해서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 요한계시록은 아무나 알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눅 8:10). 세속에 젖어 있는 마음, 돈과 쾌락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는 요한계시록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온 마음을 다해서 진리를 찾는 성도들은 요한계시록 속에서 마지막 시대의 비밀을 보게 될 것입니다.

2)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 하나님의 예언을 아무리 읽고 들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따라가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마음과 생애를 바친 성도들은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뿐 아니라 예언의 말씀을 지키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시대를 위한 복을 받는 성도들은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 22:7).

3) 성경으로 예언을 푸는 자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다”는 예언을 해석하려면, 성경 속에서 “음녀”가 어떤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물”이 어떤 의미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음녀”와 “물”을 해석하기 위해서 성경 밖으로 나가서 인터넷 기사나 신문을 찾고 그 속에서 예언을 해석하려고 하면 길을 잃어버리고 예언 해석의 일관성이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대가 지나고 환경이 달라지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예언을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성경에 나오는 상징과 단어로 예언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이번에 살펴보게 될 요한계시록 12장 예언은 사탄이 교회를 공격할 때 성도들이 핍박당하고 피신하는 경로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의 예언에는 초대기독교회부터 마지막 시대까지 하나님의 교회가 핍박을 피해서 움직이는 경로가 나오는데, 놀랍게도 그 경로의 끝에는 미국이 등장합니다. 독자 여러분은 미국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올라오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인데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은 모두 그 교회와 운명을 함께해야 합니다. 이번 호에서 살펴보게 될 하나님의 예언이 독자 여러분의 구원과 영생에 결정적인 빛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 14:29)

 

14호를 시작하며…

예언은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래서 예언 속에는 “사탄이 언제, 어떻게 교회를 공격할 것이니 조심하라.”는 하나님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들은 사탄의 미혹과 공격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요한계시록 12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사탄은 요한계시록 12장의 예언이 사람들 앞에 공개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이 예언이 공개되면,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 말씀과 예언을 살피고 깊은 미혹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부터 재림 때까지 각 시대마다 사탄이 어떻게 교회를 공격하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보여 줍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의 예언이 중요한 이유는, 지금 이 시대에는 어떤 믿음과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하나님께 속한 빛의 교회인지 분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의 예언은 사탄이 교회를 공격하고 미혹할 때마다 성도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지나간 역사와 예언을 살펴보면, 교회는 사탄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갈라졌습니다. 사탄이 공격할 때 진리를 붙잡은 교회는 여자의 후손이 되었고, 진리를 버리는 교회는 뱀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사탄의 마지막 미혹과 공격이 그 정점을 향해 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지금은 두 무리가 어떻게 나뉘어지고 있을까요? 마지막 시대에는 무엇이 성도들을 두 무리로 갈라지게 만들까요? 두 무리는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까지 어떤 사건을 통과하고 어떤 경험을 갖게 될까요?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이번 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미혹과 어둠 속에서 등대와 같은 빛을 보기를 원하는 분들은 이번 호를 읽고 또 읽으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독자 여러분의 발걸음을 진리로, 빛으로 인도해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

<마지막 사명>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