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이야기를 마치면서…

사형수의 목에 걸린 밧줄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예수께 달려가 그분 앞에서 죄를 포기하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간 사람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참된 회개는 우리를 중생의 경험으로 인도합니다. 중생(거듭남)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반드시 일어나는 성령의 사역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전에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 되고, 전에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길이 너무 좁고 협착하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뜨거운 신앙이란, 황홀한 느낌도 아니고 설교를 듣거나 기도 할 때 순간적으로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이란 하나님의 뜻에 인생 전체를 바치는 것이며 중생을 통해서 마음 속에 새겨진 하늘의 원칙과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버려야 합니다. 마음의 절반은 하나님께 속하고 나머지 절반은 세상에 속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전적으로 붙잡고 있을 때에만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어떤 것도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악한 습관과 죄에서 돌아서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십자가를 높이 들고 앞으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

 

3부, 날마다 밧줄이 풀려 나가야 뜨거운 신앙을 가질 수 있다!

한 번 목에 걸린 밧줄이 풀렸다고 해서 계속해서 뜨거운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뜨거운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계속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구원을 경험했다고 그것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가 밧줄이 풀려나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께 직접 사면을 받는 거룩한 경험을 하는 사람은 뜨거운 신앙을 갖게 됩니다. 조용한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말씀을 읽은 다음, 사형집행장의 의자에 밧줄을 목에 걸고 앉아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곧 바닥이 열리고 의자가 밑으로 떨어지면 영원히 죽어야 하는 위기의 상황입니다. 그때 조용히 방문이 열리면서 들어오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누구일까요?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복면을 벗기시고 목에 걸린 밧줄을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사형수의 간절한 심령으로 말씀을 읽고 기도드리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사면 명령을 가지고 우리를 방문해 주십니다. 그러면 온 몸과 마음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치고 감사가 가슴 깊이 흘러들어 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늘의 생명 에너지가 우리의 영혼을 흘러넘치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 깊은 곳에 은근히 깔려있던 교만과 자랑, 세상에 대한 욕심과 정욕이 힘을 잃고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사형을 선고 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 생애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십자가보다 귀한 것은 없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관심이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맞추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이 여기에 이르면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씀이 가슴에 와닿게 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 9).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는데 배설물처럼 내팽개치겠다는 것입니다. 버리고 싶지 않은데 할 수 없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욕심과 자랑을 더럽고 악취나는 배설물처럼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하나님의 사면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마음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전에는 눈치 보고 두려워하면서 억지 신앙을 했지만, 늘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살았지만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내 온 몸과 마음을 바쳐서 충성을 바치는 유일한 대상이 하나님 한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감추고 싶은 죄와 우상이 없기 때문에 영혼에 평안이 깃들게 됩니다. 혹시 넘어지고 쓰러지더라고 금새 일어서서 좁은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전에는 성경말씀이 어렵고 재미없고 순종하기도 어렵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의 마음, 제자들의 마음, 바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순종과 충성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됩니다. 바로 그것이 사도 요한의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삶이 어렵고 무겁게 느껴지는 분이 계십니까? 세상과 죄를 버리는 것이 너무 힘드십니까? 신앙이 부자연스럽고 어색합니까? 그런 분들은 이렇게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오늘도 제 목에 걸려있는 밧줄을 풀어주소서. 내 몸을 묶고 있는 결박을 풀어주소서. 그래야만 제가 오늘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거룩한 명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목에서 벗겨낸 밧줄을 당신의 목에 걸고 의자에 앉으시는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 죄인을 찾아오셔서 나 대신 죄를 담당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보시면서 묵묵히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새 언약과 마음의 할례

우리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의 눈이 우리 마음속에 회개를 불러일으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너무나 송구스러운 마음이 뭉클거리면서 올라오게 됩니다. 다시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마음에 새겨지게 됩니다. 성경은 이런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생각과 마음에 기록된다고 표현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은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 10:16). 하나님의 법이 마음과 생각에 새겨지는 경험, 이것이 새 언약의 경험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과 새 언약을 맺은 그리스도인은 스스로의 힘으로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강한 죄의 충동과 싸우지 않게 됩니다. 사단이 던지는 유혹을 받을 때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게 됩니다. 하늘로부터 거룩한 능력을 받게 됩니다. 성령께서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부드럽게 하시며, 강팍한 정신과 이기심과 교만을 버릴 수 있도록 감동시키십니다.

그리스도와 새 언약 관계에 들어간 그리스도인에게는 놀라운 일이 생기는데, 그것은 마음에 할례를 받는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죄와 세속을 사랑하는 육적 마음이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성경은 마음에 할례를 받는 경험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롬 2:28,29).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 2:1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행 7:51).

예수님과 새 언약을 맺고 마음에 할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유를 얻으면 말씀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 수 있게 되고, 성령을 쫓아가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을 좇지 않고 영을 좆느니라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킹제임스성경역).

혹시 여러분 중에 성경 말씀을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대로 골라서 순종하는 분이 계십니까? 어떤 말씀은 받아들이지만, 어떤 말씀은 거절하고 계시나요? 그런 분들은 우주선의 엔진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아직 목에 걸린 밧줄이 풀려지는 경험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결정적이고 순수한 충성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특별한 시간을 내셔서 이번 기사에서 나누고 있는 말씀을 씹고 또 씹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면을 받아서 목에 걸려 있던 밧줄이 풀려나가게 되면, 우리 생애의 모든 것이 변화됩니다. 가장 큰 변화는 좋아하던 것과 싫어하던 것이 뒤바뀌는 것입니다. 전에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 되고, 전에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전에는 그렇게 좋아서 애지중지 하던 쾌락과 세상 재미가 이제는 너무나 유치하고 무가치하게 보이게 됩니다. 성령께서 지적해 주시고 책망하시는 죄를 마음속에 남겨두거나 숨기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나도 좋아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나도 미워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면을 통해서 이르러 오는 중생의 경험(거듭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영적 경험은 사형수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용서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십자가를 바라본다고 말하면서, 날마다 습관적으로 죄에 끌려다니고 있다면, 아직 하나님께 사면받는 경험이 무엇인지 모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몸을 묶고 있는 밧줄도 풀린다!

사형수는 목에만 밧줄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과 몸에도 밧줄이 묶여집니다. 왜냐하면 의자가 밑으로 떨어지면 곧 큰 고통이 있게 되는데 그때 사형수가 목에 걸린 밧줄을 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결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의 목에 걸린 밧줄만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몸을 결박하고 있는 밧줄도 풀어주십니다. 사단이 묶었던 결박을 그리스도께서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온 몸을 결박당한 사형수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그 의미가 절실하게 다가오게 됩니다.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시편 116:16).

주께서 왜 내 몸의 결박을 풀어주실까요? 목에 걸린 밧줄만 풀어주면 되는데, 왜 몸의 결박까지 풀어주실까요?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손을 풀어주셔야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도와줄 수 있고, 내 발을 풀어주셔야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찾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몸을 풀어주셔야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에 걸린 밧줄이 풀리면, 내 몸을 묶고 있던 미움의 밧줄, 정욕의 밧줄, 탐욕의 밧줄도 힘없이 풀려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면을 받아 결박이 풀린 영혼은 봉사와 희생의 생애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영혼을 구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까? 첫째, 우리의 목에 걸린 밧줄을 풀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지옥불의 사형선고를 받은 우리를 사면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로는, 우리의 몸을 결박하고 있는 밧줄을 풀어주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로 회개하고 용서받은 사람에게는 온 마음을 다하여 주의 뜻을 행하는 순종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성품과 생애에 거룩한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우리 경험이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2~24). 하나님께 사면을 받아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만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고 그 결과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면을 받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씀에 깊이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구원받기 위해서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불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진짜 신앙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경험 속으로 들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갖고 있는 뜨뜻미지근하고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3부를 끝내면서 한 가지 실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프랑스 혁명 때 있었던 일입니다. 나폴레옹 장군이 가장 사랑하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병사가 전쟁에 나가 큰 부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총알이 심장 가까운 곳까지 들어가 박힌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 장군은 급히 자신의 주치의를 보내서 그 병사를 수술하도록 했습니다. 주치의가 칼로 가슴을 찢고 수술을 시작하려고 하자 병사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의사 선생님, 아주 깊이 절개해 주세요. 그러면 내 심장 깊은 곳에 <나.폴.레.옹>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그.리.스.도>라는 네 글자를 새깁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을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새기는 에너지는 창조의 에너지입니다. 바짝 마른 마음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육으로 끌려가던 마음을 영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에너지입니다. 마음속에 이런 에너지를 품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과 사단이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군사로 서게 될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참 높고 순결한데, 이 세상은 낮고 추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 세상의 빛과 희망이 되어야 하는데, 이제는 교회까지도 참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원하는 자는, 목마른 자는, 배고픈 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구원의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뜨거운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

 

2부, 하나님의 사면을 받아야 뜨거운 신앙을 가질 수 있다!

교회를 수십 년 동안 다닌 분들 중에서도 “왜 나는 뜨거운 신앙이 생기지 않을까? 왜 나의 믿음은 성장하지 않을까? 왜 나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릴 수 없을까? 왜 나는 습관적인 죄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라는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가야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주선에서 나오는 강력한 폭발력이 없으면 우주선이 하늘로 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그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강력한 에너지가 없으면, 육체의 요구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유혹을 물리치고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실망과 좌절의 그늘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복음을 설명하는 논리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기 전에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형이 내려져 있다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형수만이 복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형수다”라는 사실이 가슴깊이 저며 들어야만, 사형을 면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형수의 모습

몇 해 전에 서대문 형무소의 사형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사형수들은 자신의 사형집행일이 언제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형이 집행되기 바로 전날에 “사형집행 문서”가 전달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 아침이 되면, 간수 중에서 무술고단자 두명이 감방문 앞에 서서 “000면회”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사형수에게 사형장으로 가자고 하면 아무도 방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형수들은 아침 시간에 면회왔다는 호출을 들으면 질겁을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짜 면회일수도 있지만,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죽음의 호출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면회왔다는 말로 사형수를 불러내면, 사형수가 감방에서 나오는 순간 건장한 무도 간수 두명이 양쪽에서 팔을 꽉 낀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순간 사형수는 자신이 죽으러 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서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부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사형을 정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감옥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요? 서대문 형무소에 갖혀 있는 사람들만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형 선고를 받은 우리도 지구라는 감옥에서 사형수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시집장가가고 집을 짓고 장사하니까 행복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지구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사형수입니다.

서대문 형무소의 사형수들은 작은 감방에 갇혀서 죽음을 기다리는데, 내일 죽을지 모래 죽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이 돈내기 화투를 친다고 합니다. 기가 막힌 사실은, 내기 화투를 치는데 5백 원, 천 원 따면 그렇게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 속에서 5백 원, 천 원 따기 위해서 다투고 싸우고 멱살을 잡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좁은 감방 속에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더 깨끗한 이불을 덮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옆에 있는 죄수들을 협박하고 못살게 군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잊고 살기 때문에 그런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도 그런 모습으로 사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사형 선고를 잊어버린 채 조그만 이익 때문에 속상해 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다투고 미워하지는 않습니까? 아주 작은 일 때문에 실망하고 화를 내고 우쭐거리지는 않나요? 조용한 시간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형수에게는 아무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사형수에게 돈이 의미가 있을까요? 사형수에게 명예가 필요한가요? 좋은 집과 자동차가 의미가 있을까요? 인생이라는 시간이 마쳐치면, 사형을 당할 사람들에게 무엇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을 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버리라는 말은 가치를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의미를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결국 완전히 파멸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마음 깊히 간직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벧후 3:10~12). 사도 베드로는 이 세상이 모두 불살라 없어질 것이므로 세상을 버리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마지막 날이 되면, 모든 것이 파멸되고 하늘이 불에 타서 사라질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사형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직 하나인데 그것은 용서입니다. 사형을 면제해 주는 것 외에 무엇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용서란, 사형을 면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형수는 100년을 감옥에서 모범수로 지내도 여전히 사형수입니다. 그러므로 사형수가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대통령이 내리는 사면령입니다. 그것만이 그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면하심이 없다면, 아무런 희망 없이, 하루하루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서대문 형무소로 가보겠습니다. 사형수는 간수들에 끌려서 형장으로 가는 복도를 지나게 됩니다. 그런데 사형수는 너무나 가기 싫어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다가 주저 앉아버리고, 어떤 사람은 복도 옆에 있는 창틀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발에 힘이 풀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해서 간수들에게 부축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금 걷다가 한숨을 쉬고, 어떤 사람은 하늘을 보면서 “어머니, 어머니”를 외치면서 웁니다. 그것이 사형수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용서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저와 여러분도 이 세상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두려움과 허무함 속에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의 용서를 만나지 못한 많은 사람이 자살하거나 우울증에 빠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현실을 잊기 위해서 세상 쾌락에 깊이 빠져듭니다. 수많은 사람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외로움과 허망함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혼의 쉼과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형에 대한 말씀은 상당히 어두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형의 골짜기가 얼마나 절망적인가를 이해해야만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형장 안에서…

이제 사형장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형장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면, 방 건너편에 의자가 하나 놓여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본 사형수가 어떻게 될까요? 자지러집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눈동자가 풀린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율신경계가 조절이 되지 않아서 소변이 흘러나와서 바지를 흥건하게 적시게 됩니다. 이것이 사형수의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를 덮어주지 않는다면, 우리도 이런 모습으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사형수가 의자에 앉으면 집행관이 와서 이름과 생년월일을 묻고 그가 왜 사형을 당해야 하는지 확인시켜주기 위해서 판결문을 펴서 그 사람의 죄를 읽어줍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는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행 17:31).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누가 양(의인)이고 누가 염소(악인)인지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

서대문 형무소의 사형수들은 낮에는 재미있고 행복한 것처럼 보입니다. 낮에는 자기 세상인 것처럼 거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조용한 밤이 되면 두려움이 밀려오게 됩니다. 사형이라는 형벌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게 됩니다. 잠을 자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내일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두려움과 공허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낮에는 좋은 차와 좋은 집과 좋은 직장 때문에 행복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아무런 근심 걱정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용한 밤이 되면, 두려움과 공허함이 밀려옵니다. 왜 그럴까요? 죄인 줄 알면서도 붙잡고 있고, 버려야 되는 줄 알면서 놓지 않는 세속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낮에 마음 껏 즐겼던 위선과 쾌락이 밤에는 허무함이 되어서 나를 짓누르게 됩니다. 세미한 성령의 음성이 들려오면서 양심이 책망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이 주는 쉼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돌아서고 하나님께 용서 받는 경험 없이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 안에 들어가면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 안에 행복이 있고, 만족이 있고, 평안이 있고, 구원이 있고, 정죄와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이 있습니다.

다시 형장 안으로 가보겠습니다. 사형수가 의자에 앉으면 머리에 까만색 보자기를 뒤집어 씌우고 그 몸과 팔과 다리를 밧줄로 단단히 묶습니다. 그리고 나면 집행관은 사형수로부터 최후 진술과 유언을 할 기회를 줍니다.

이 마지막 의식이 끝나면 위로부터 밧줄이 내려오는데 그것이 교수형을 집행하는 밧줄입니다. 밧줄을 사형수의 목에 걸고 나면, 곧 마루바닥이 열리면서 앉아 있던 의자가 밑으로 떨어지면서 몸이 공중에 매달리게 됩니다. 한참을 고통 속에서 몸이 흔들리다가 움직이지 않게 됩니다. 형집행이 완료된 것입니다.

 

목에 걸려 있는 밧줄이 풀리는 경험

여기서 우리는 희망에 찬 상상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형수가 최후 진술을 마치고 목에 밧줄을 거는 장면입니다. 이제 곧 마루바닥이 열리면 의자가 밑으로 떨어지게 되는 위기의 순간입니다. 바로 그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형장의 문이 쾅하고 열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형장 안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형집행을 중지하십시오” 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대통령의 사면령이 도착한 것입니다.

사형수는 몇 달 전에 대통령에게 간절한 편지를 썼습니다. 자신은 비록 끔직한 죄를 범했지만 모든 죄를 회개했고 지금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부디 용서해 달라고 탄원했습니다. 사형수는 이런 편지를 대통령께 보냈습니다. “대통령께서 저를 사면해 주시면 남은 생애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완전히 바치겠습니다. 대통령과 국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대통령은 편지를 읽으면서 사형수의 심령 깊숙한 곳에 생긴 거룩한 변화를 알게 되었고, 마지막 순간에 특별 사면령을 내린 것입니다.

대통령의 사면령을 들고 온 사람은 사형수의 목에 걸린 밧줄을 풀어주고 온 몸을 묶고 있던 밧줄도 풀어주었습니다. 사형수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그는 두 손을 번쩍 들고 “감사합니다!”를 외쳤을 것입니다. 소변으로 흥건히 젖은 바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뛰쳐 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달려갔을까요? 자기에게 사면의 은혜를 베푼 대통령께 달려갔을 것입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대통령의 은혜를 찬양하고 전했을 것입니다. 남은 생애 동안 그의 감사와 충성이 멈추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를 용서 받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우주선이 강력한 폭발력과 함께 하늘 높이 날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삭개오와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속에 생겼던 감사와 헌신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기쁨이 없다고 말합니까? 누가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솟아나는 감격이 없다고 말합니까? 누가 그리스도인이 죄를 버릴 수 없다고 말합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지옥불의 사형을 면제하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 전체에 걸쳐서 “그럴 수 없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 2)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 6:15)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17~20)

우리 모두는 사형수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저와 여러분의 목에 밧줄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느끼든지 느끼지 못하든지 간에 우리는 지금 목에 밧줄을 걸고 의자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형수 의자에 앉아 있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예수님 자신이 그 의자에 앉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내 목에 걸려 있던 밧줄을 풀어서 당신의 목에 거신 것입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사형집행을 예수께서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교회 다닌다고 해서 용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회개했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용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의 마음 중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형수의 목에 걸려 있는 밧줄이 풀려지게 할 뿐 아니라 사형수의 마음속에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 속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 줍니다. 새로운 생명이 생겼기 때문에 전에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 되고, 전에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게 됩니다. 이런 변화 때문에 오랫동안 자신을 묶고 있던 죄가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적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죄인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되면 그의 심령 속에 이런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가슴 깊이 새겨지지 않으면, 말로는 죄를 용서 받고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그것이 정말 어떤 것인지 모르게 됩니다.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지만, 그것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면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와 죄송스러움이 뒤범벅이 되서 충성을 맹세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 2)

하나님의 사면을 받은 우리가 어떤 죄를 마음에 품고 살 수 있을까요? 어떤 욕심과 어떤 이기심이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 수 있을까요? 어떤 유혹과 시험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배반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예언을 보면, 이기는 자들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이긴다는 말인가요? 죄와 세상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나약하고 세속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바울은 어떻게 그런 간증을 기록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사면하시는 은혜를 받고, 지옥불의 사형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기워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다음과 같은 간증 속에는 용서 받은 죄인의 심령이 어떤 것인지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

 

1부, 사형수가 되어야 뜨거운 신앙을 가질 수 있다!

한번은 어떤 분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지식적으로는 아는데, 그것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용서받고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나요?” 그분의 말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모태 교인입니다.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다녔습니다. 교회의 장로입니다. 그런데 용서 받은 경험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용서 받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서 용솟음치는 감사와 감격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고민을 갖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좌절감을 갖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정말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은혜를 붙잡고 싶은데, 그래서 살아있는 신앙을 갖고 살고 싶은데 그것이 안 되니까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그런 고민을 갖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이번 기사는 그런 분들에게 복음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생기는 거의 모든 영적 문제는 자신이 사형수라는 사실을 잊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형수인데, 사형수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안다고 해도 그 사실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절실하게 와 닿지 않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멋진 옷을 입고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사형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사형은 인간이 내린 선고가 아닙니다.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내린 사형 선고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구에 사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사형 선고로부터 빠져 나갈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의 사형 선고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근수근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하나님의 정하심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1:29~31).

오래전에 사형수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는 사형수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법정에서 판사가 죄인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사형 선고가 내려질 때, 죄인이 그것을 어떤 모습으로 받아들이는지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많은 경우, 너무나 두려워서 실신하거나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서 온 몸을 부들부들 떤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형을 받은 죄인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사형수인 우리가 아주 평화롭고 행복한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둘 중 하나입니다. 자신이 사형수인지 모르거나, 아니면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입니다.

성경은 사형수의 입장에서 읽어야만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사형수만 깨닫고 느낄 수 있는 말씀들이 가득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데, 이기적이고 교만하며 탐욕적입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자신이 사형수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형수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을 읽어도 간절한 마음으로 읽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형수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인이지만 사형수는 아니다” 라고 생각하면, 결코 하나님의 용서를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절실하게 다가올 수 없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는 오직 사형수에게만 구세주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경범죄를 범한 입장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용서는 경범죄를 해결해주는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5년이나 10년 형 받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용서가 5년이나 10년 형을 해결해 주는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면 용서 받은 감사와 감격도 그 정도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뜨거운 신앙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마음속으로부터 감사와 감격이라는 폭발적인 에너지가 터져나와야만 우리의 기도와 믿음이 대기권 밖으로 날라 올라갈텐데 시동만 키다가 주저앉게 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5년이나 10년 형을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감옥소에 들어가 시간만 보내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면이 필요없는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그 마음이 맹숭맹숭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마땅히 꿈뜰거리면서 일어나야 하는 감사함과 죄송함과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용서받았고 심지어는 거듭났다고 말하면서 영적인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육적 경험에 맞춰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사면받아서 가슴 속에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가 새겨진 그리스도인은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것도 다르고 설교를 해도 다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순종과 충성을 강조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촉구하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너무나 값싸게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젖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마치 장터에서 팔리는 물건처럼 교회 안에서 함부로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초대 기독교회의 경건과 충성이 현대 기독교회 안에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왜 나에게는 뜨거운 신앙이 생기지 않을까요? 왜 나의 믿음은 성장하지 않을까요? 왜 내 마음속에는 구원받은 기쁨과 감사가 없을까요? 왜 내 영혼 속에는 용서 받은 기쁨이 이렇게 적을까요?”라는 고민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뜨거운 신앙은 사형수가 하나님의 용서를 만날 때 시작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서 독생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다셨는데, 우리가 그 용서를 누리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 세상을 외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집 떠났다 돌아온 탕자처럼, 죄를 용서받고 아버지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존재하는 진짜 경험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깊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늘 죄책감을 갖고 하나님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심판이 두려워서 교회에 나가고, 지옥이 두려워서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동기에 큰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어지는 2부 기사에서는 사형수의 경험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 스스로가 사형수가 되어서 형장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형장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가 무엇이고, 구원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

 

서론, 우주선이 하늘 높이 올라가지 못하는 이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고민을 갖고 있습니다. “왜 나에게는 뜨거운 신앙이 생기지 않을까요? 왜 나의 믿음은 성장하지 않을까요? 왜 내 마음 속에는 구원받은 기쁨과 감사가 없을까요? 왜 내 영혼 속에는 용서받은 기쁨이 이렇게 적을까요?”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에도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태어나면서부터 그리스도를 믿은 모태 교인일지라도 이런 고민과 좌절 속에서 살아가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지막 사명> 2호는 바로 그런 분들을 위해서 준비되었습니다. <편집실>

몇 해 전에 한국에서 우주선을 발사했지만 여러 번 실패했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우주선을 개발하려고 애쓰는데 수많은 실패를 반복합니다. 우주선 발사는 왜 자꾸 실패하게 될까요? 로케트가 발사될 때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엔진으로부터 강력한 폭발력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을 내뿜으면서 나오는 엄청난 힘으로 우주선이 하늘을 향하여 올라가야 하는데, 그 힘이 약할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로케트가 발사대를 치고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이겨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엔진의 추진력이 수천톤이나 되는 로케트의 자체 무게를 이겨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로케트가 하늘로 뜰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중력을 이겨내야 합니다. 지구의 중심으로부터 로케트를 끌어당기는 힘(중력)을 이겨내야 합니다. 로케트 자체의 무게를 이겨내야 하고, 지구의 중심에서 잡아당기는 중력을 이겨내야만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데, 우주선의 추진력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 로케트가 조금 들썩이다 옆으로 쓰러집니다. 아니면 공중으로 올라가다가 방향을 잃고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대기권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바다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늘 높이 올라가려면 두 가지 힘을 이겨내야 합니다. 무엇을 이겨야 할까요? 첫 번째, 우리의 육체가 끌어당기는 힘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육체 속에서 잡아당기는 정욕과 이기심을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에 그런 영적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날마다 이기심과 욕심에 끌려다니다가 좌절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그리스도인은 육체의 타락한 정욕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하늘 높이 올라가서 우리 이웃과 다른 영혼들에게 거룩한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됩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법에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그렇다면, 우리가 이겨야 할 두 번째 힘은 어떤 것일까요? 외부로부터 오는 시험과 유혹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는 유혹이 정말 많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세상과 싸워야 하고 마귀가 던져주는 시험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4, 5). 우리의 믿음은 그냥 믿음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두 가지 힘과 부딪치면서 살게 되는데, 하나는 우리 안에서부터 끌어당기는 육체의 정욕과 이기심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 밖으로부터 오는, 세상에서 오는 시험과 유혹입니다. 어떤 때는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가족이나, 친구나, 교인들로부터 옵니다. 어떤 때는 돈과 명예 때문에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험을 이기고 극복하는 영적인 에너지가 있어야만 우리의 신앙이 하늘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라는 질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안에서부터 올라오는 육체의 정욕과 밖에서부터 다가오는 시험을 이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갖추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겨라. 승리하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죄와 세상을 이기라고 말하고, 승리하라고 가르치면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지 않으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도무지 지고 갈 수 없는 멍에를 씌우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어떻게 이길 것인가?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해서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시험과 유혹이 올 때 쉽게 쓰러지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고 싶은 소원이 있지만 자꾸 끌려다니게 됩니다. 선을 행하고 싶은데 자꾸 악을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절망을 마음에 품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중에 혹시 그런 분이 계십니까? 그런 분들은 사도 바울의 이 말씀에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나님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절규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거기서 멈춰서는 안됩니다. 거기서 멈추는 신앙생활은 매우 위험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오랜 세월 동안 죄에 끌려다니고 시달리는 삶을 살면 결국에는 두 가지 위험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위험은, 육체의 본성과 마귀의 유혹을 자기 노력으로 이겨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구원의 경험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보려고 애쓰는 위험입니다. 영적인 경험을 억지로 쥐어 짜듯이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불가능한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도전을 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주의적인 경험 속으로 들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많습니다. 노력을 해도 잘 안되고 도전을 해도 실패를 하는데 그렇다고 신앙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겉으로는 신앙을 가진 것같지만, 마음 속으로는 깊은 좌절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고, 기쁨이 없고 확신이 없는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영적 무기력증에 빠지면서 늘 정죄받는 느낌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런 고뇌를 품고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번째 위험 속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위험은 영적 투쟁을 포기하고 세상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죄와 싸우지 않고 적당히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영적 투쟁을 하다가 지친 사람들은 투쟁 자체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세상 재미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두려운 사실은, 그러면서도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기만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대개 그런 시림들은 요즘 기독교회에서 인기 있는 세속적 복음인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내가 어떻게 살든지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교리를 받아 들였기 때문에 거짓 평안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육체의 요구에 날마다 굴복하고, 밖에서오는 마귀의 시험에 쓰러지고 끌려다니면서도 여전히 “나는 구원받았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살게 됩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위험에 걸려 있습니다. 그 결과 믿음과 신앙이 하늘 높이 올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주선이 발사대를 힘차게 치고 올라가듯 영적 경험이 하늘 높이 올라가야 하는데 그렇치 못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영적 경험이 우주선처럼 하늘 높이 올라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는 경험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을까요? <마지막 사명>은 이번 호에서 “뜨거운 신앙을 갖는 비결 3가지”를 독자 여러분께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어지는 기사들을 읽는 동안 성령께서 독자 여러분의 심령 속에 깊이 역사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오랫동안 갖고 있던 영적 질병의 원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치유받고 생명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2호를 시작하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절규하고 있습니다. “왜 나는 뜨거운 신앙을 가질 수 없을까? 왜 내 신앙에는 감격이 없을까? 왜 나는 변화되지 않을까? 왜 나는 육체의 정욕에 끌려다닐까?”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지만, 어떻게 회개하고 어떻게 죄를 용서받는지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긴 세월 동안 교회 다니지만, 참된 그리스도인 경험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회개란, “나는 회개했습니다.”라고 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교회에서 주는 결심서에 내 죄의 종류를 기록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구원받기 원합니다. 나는 회개했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한 번의 결심이나 뜨거운 감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복음의 중심으로 들어가야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참된 구원은 십자가 앞에서 사형수의 입장으로 서 있어야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런 고민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왜 나에게는 뜨거운 신앙이 생기지 않을까? 어렸을 때부터 교회 다녔는데, 집사와 장로가 되었는데, 교역자로 오랜 세월 동안 봉사했는데 왜 나는 변화되지 않을까? 새벽 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했고, 선교도 열심히 했는데 왜 내 신앙은 항상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까? 성령 은사를 체험했는데 왜 내 영혼이 만족하게 채워지지 않을까? 왜 마음이 이렇게 허전할까?”

이런 고민에 대한 성서적 해답을 <마지막 사명> 2호에서 발견하게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마지막 사명>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