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아마겟돈 전쟁을 위한 훈련학교

이미 언급한 것처럼, 아마겟돈이라는 단어의 뜻은 갈멜산입니다. 사도 요한은 왜 마지막 시대의 선과 악의 투쟁을 설명하면서 아마겟돈(갈멜산)을 인용했을까요? 왜냐하면 아마겟돈 전쟁은 갈멜산의 투쟁처럼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들과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투쟁하는 형태로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갈멜산에서 있었던 일이 다시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갈멜산에서 승리한 엘리야의 신앙과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야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로 준비될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해야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갈멜산 투쟁을 위한 준비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준비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어느 날 갑자기 갈멜산 위에 데려다 놓고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시킨 것이 아닙니다. 갈멜산의 전쟁에 나서기까지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련의 훈련 과정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갈멜산에 보내기 전에 어떤 훈련을 시키셨을까요?

 

아마겟돈 전쟁을 위한 하나님의 훈련학교

 

1. 첫 번째 훈련: 순종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왕상 17:1)

첫 번째 훈련은 아합 왕에게 가서 “수년 동안 우로(비와 이슬)가” 없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엘리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엘리야의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가?”라고 의아해합니다. 그의 능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입니다. 충성은 아무에게나 나오는 정신이 아닙니다. 회개한 자의 심령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는 예의있고 신실해 보입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충성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무엇인가요?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회개일까요? 아닙니다. 회개는 말이 아니라 심령입니다. 기도의 심령을 받은 사람이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처럼, 회개도 죄에 지치고 시달려서 깊이 상한 심령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범한 죄가 정말 무엇인지 인식하게 되면 회개의 기도가 이런 식으로 달라지게 됩니다.

 

주님, 제가 믿지 않는 자처럼 말했습니다. 제가 마치 천사들이 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주님, 제가 원수 사탄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을 외면했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얼굴을 다시 있을까요? 양심의 가책이 심장을 짓누릅니다. 주님, 마음이 너무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주님의 인정하심을 다시 받을 있을까요? 제가 어떻게 해야 영혼의 평안을 회복할 있을까요? 주님, 도와주세요.

 

성도 여러분, 내가 정말 어떤 ‘짓’을 했는지 알면 두려움과 가책과 고민 속에서 주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죄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이렇게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죄를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받아주시옵소서. 저는 이제 죄의 고통을 이상 감당할 없습니다. 당신의 피로 영혼을 씻어주시옵소서. 당신의 보혈로 더러운 입을 닦아주시옵소서. 귀와 눈과 모든 것을 씻어주시옵소서. 영혼의 고통을 거두어주시옵소서. 저를 짓누르는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저를 건져주시옵소서.

 

온 마음을 다해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가슴속에서 평안이 퍼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친 영혼을 감싸 안아주시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생명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소원과 충성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지게 됩니다. 이것이 회개이고 그리스도의 의를 회복하는 경험입니다.

다시 엘리야의 경험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엘리야는 어떤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까? 엘리야의 머리로 이해되는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수년 동안 우로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고 땅에서도 이슬이 생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과학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당시는 비가 풍부하게 내려서 매년 풍요로운 농사와 수확을 거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때에 수년 동안 비가 오지 않고 이슬도 생기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수년 동안 비와 이슬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많은 시험을 받았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 사시사철 흐르는 강물을 보았을 것입니다. 푸른 나무로 덮인 산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가 어떤 시험을 받았을까요? 이런 시험을 받았을 것입니다. “한 번도 마른 적이 없는 저 강물이 어떻게 마를 수 있을까? 어떻게 저 푸른 산과 계곡이 가뭄으로 타들어가게 될까?”

만일 여러분이 그런 상황에 있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엘리야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의 호위 부대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때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순종을 앞에 두고 손해와 이익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능력 있는 신앙의 비결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훈련학교 입학 조건 = 순종

때때로 힘겹게 느껴지는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의 도전을 받게 될 때 어떤 유혹을 받습니까? 내 꾀와 내 인간적인 아이디어로 고난을 피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성령의 음성을 피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훈련학교에 입학할 수 없습니다. 순종하지 않기 위해서 핑계를 대고, 말씀을 피해 다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훈련시킬 수 있습니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아합 왕 앞에 보낼 수 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훈련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고향 땅을 떠나면 얼마나 많은 이익이 생기는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훈련학교에 입학해서 훈련받다가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믿음까지 배우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위로 걸어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비록 물위를 걷다가 빠지고 실패했지만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즉시로 실패한다”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는 교훈을 배울 수 없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다가 실패할지라도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것이 알곡의 경험입니다.

알곡이라고 해서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지만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알곡입니다. 알곡과 가라지 모두 쓰러지고 실패하는 경험을 합니다. 그러나 결과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알곡은 쓰러지면서 영글어가고, 가라지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속이 비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다시 묻겠습니다. 하나님의 훈련학교에 입학하는 유일한 조건은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마지막 시대 아마겟돈(갈멜산)에서 거짓 선지자들과 투쟁해서 승리하려면 엘리야의 순종을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02. 두 번째 훈련: 그릿 시냇가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왕상 17:2-4)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께 이런 명령을 받으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크게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만화영화 같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수년 동안 비와 이슬이 없어서 온 땅이 말라서 타들어갈 텐데, 지금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약속해주신 것이 뭡니까? 아주 작은 시냇물과 유대지방에서 가장 작은 새 중의 하나인 까마귀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날마다 먹을 것을 공급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안해 보이는 약속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을 두 가지로 훈련시키시는데, 그것은 말라가는 시냇물과 까마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훈련학교에서 이 두 가지를 통해서 훈련받게 될 것입니다. 그릿 시냇가는 우로가 없으면 얼마 가지 않아서 말라버릴 작은 시내였습니다. 물이 콸콸 흐르는 시내가 아니었습니다. 나일강처럼 폭이 넓고 수량이 풍부한 강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이 모든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엘리야가 갈멜산에 가기 전에 배운 경험입니다. 아주 불안해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전진하는 것, 그것이 엘리야가 배운 경험입니다.

 

시냇물이 말라갈 때 배우는 경험

하나님의 약속대로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날라왔고 시냇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시냇물이 말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시냇가에 나갔더니, 그릿 시내의 바닥의 돌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말라만 가는 시냇물을 보면서 엘리야의 믿음은 시련을 받았을까요? 그렇습니다. 내가 의지하던 시냇물이 마를 때 우리는 정말 강렬한 시험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물이 풍부한 곳을 찾아가고 싶은 유혹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의 생애 속에서 시냇물이 마르는 경험을 해보았습니까? 돈 쓸 곳은 많은데, 돈이 말라서 타들어가는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그것이 시냇물이 말라가는 경험입니다. 어떤 때는 몸이 아파서 일을 못하게 되는데, 그것이 어떤 경험입니까? 내가 의지하던 건강이라는 시냇물이 말라가는 경험입니다. 잘 나가던 자녀가 우울증이 생기고 성적이 떨어지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자녀가 직장을 잡지 못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무슨 경험입니까? 시냇물이 말라가는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의 삶 속에서 시냇물이 마르는 경험을 주실까요? 시냇물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냇물이 말라갈 때 엘리야의 믿음이 시련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명하신 그 장소에서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엘리야는 말라가는 시냇가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조용히 기다리는 믿음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시련 속에서 조용히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는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아마겟돈으로 가는 훈련입니다.

 

문을 닫고 다른 문을 여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인도하신 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일까요? 엘리야가 하나님을 좀 더 깊이 만나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여러 다른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왕에게 재난의 기별을 주는 능력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조용한 그릿 시냇가에 숨기시고 날마다 까마귀로 먹이셨습니다. 얼마나 자상한 하나님입니까? 그런데 동일한 하나님께서 이제는 시냇물을 말리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만날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시냇물이 마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또 다른 경험을 주기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만일 시냇물이 마르지 않았다면, 엘리야는 그곳에 편안하게 안주하기 원했을 것입니다. 까마귀가 주는 것에 만족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곳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어떤 때는 한 문을 닫으시고 다른 문을 여십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방향을 바꾸고 움직이면서 새로운 경험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문을 닫고 다른 문을 여시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자신이 의지하고 있던 시냇물이 마를 때마다, 울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쪽 문을 닫으시고 다른 문을 여셔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그것이 우리에게는 시련과 고통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엘리야에게 일어났던 시냇물이 마르는 절망의 경험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야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볍고 형식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폭풍과 시련이 올 때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폭풍우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시냇물이 마르는 경험은 한 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은 한 번에 배울 수 있는 경험이 아닙니다. 상황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항상 나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것을 배우는 데에는 여러 해가 걸릴 수도 있습니다.

 

3. 세 번째 훈련: 까마귀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왕상 17:4)

하나님께서 까마귀로 엘리야를 먹이시겠다고 하는데 까마귀의 입이 큽니까? 작습니까? 매우 작습니다. 입이 작은 까마귀가 얼마나 많이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물고 올 수 있었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을 한꺼번에 많이 나를 수 있는 독수리나 주둥이가 큰 펠리컨 같은 새를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왜 까마귀처럼 작은 새를 시켜서 먹을 것을 배달하게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그것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먹이고 입히시는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약속하신 것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도 작은 시냇가와 까마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시냇물과 까마귀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적은 것에 자족할 줄 아는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자족하는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신 것을 감사하고 만족하는 신앙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시대 성도의 신앙이고 행복의 비결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너무나 크고 높은 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무엇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까마귀는 날마다 날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날마다 공급되는 것입니다. “Day by day, 하루하루”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공식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3년 반치 식량을 한꺼번에 주시지 않고 하루 단위로 공급해 주셨을까요?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키워 나가기 위한 하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내일 일은 주께 맡기고 날마다 보내주시는 까마귀를 기다리면서 사는 것, 그것이 마지막 시대의 갈멜산으로 가는 길에서 배워야 할 경험입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작은 새들이 날기 어려운 날이 되면, 엘리야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엘리야는 도무지 까마귀가 올 수 없는 날씨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어떤 상황에서도 까마귀가 날아온다는 사실을 배워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작고 힘없는 까마귀를 통해서 엘리야를 먹이셨을까요? 왜냐하면 엘리야가 까마귀를 의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야가 까마귀를 의지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여러분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까마귀를 기다리십니까? 아니면 까마귀에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니까? 이것이 아마겟돈 전쟁의 때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종들이 배워야 할 경험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까마귀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 좋은 것을 주시는데 어떤 때는 그것이 까마귀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얗고 예쁜 비둘기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믿음과 신뢰가 갈 텐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가끔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에게 임할 때 검은색 까마귀처럼 보입니다. 어떤 때는 진리가 이단이라고 포장이 되어 나타나고 참 복음이 율법주의라는 소문을 달고 나타납니다. 어떤 때는 주께서 보내신 종인데 거짓 선지자라는 낙인이 찍혀서 나타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사탄이 진리 위에 검은 보자기를 씌워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진리의 가치를 분별할까요? 내 생애 속에서 시냇물이 마르는 경험을 깊이 해본 사람들입니다. 고난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보는 눈이 다르고 듣는 귀가 다릅니다. 말라가는 시냇가에서 고난을 맛본 사람은 소문과 사람의 말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판단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속에서 눈에 안약을 바르는 경험을 하는 성도들은 영을 분별하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성도 여러분,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지 않으면 마지막 시대에 갈멜산에 가지 못하게 됩니다. 길을 잃어버리고 낙오하게 됩니다. 마지막 시대는 기만의 시대입니다. 충성이 배도로 취급되고 배도가 사랑으로 비추어지는 시대입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가지 상반된 경험

진리를 따라서 좁은 길을 걷는 성도들은 두 가지 상반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시냇물이 말라가는 것을 보고, 다른 쪽에서는 까마귀가 먹을 것을 물고 날아오는 것을 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내가 의지하고 있던 것이 말라가고, 다른 쪽에서는 까마귀에 의해서 필요가 채워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고난이 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도우심이 찾아옵니다. 이것이 아마겟돈 전쟁을 위한 하나님의 훈련 코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 속에서 시냇물도 마르고 까마귀도 날아오지 않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시냇물이 말라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께서 보내신 까마귀가 어디선가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외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번제로 드릴 양을 준비하셨습니다.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시냇물이 마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 앞에서 에서가 자신과 가족을 죽이기 위해서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야곱의 시냇물이 말라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부드럽게 변화시켜서 복수의 정신을 제거하는 역사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노예 상인에게 팔려갔습니다. 주인 집에서 충성을 다했지만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갔습니다. 왜 요셉의 시냇물은 계속해서 말라만 갔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되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반드시 까마귀가 날아온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자 요셉은 애굽의 최고 자리에 올랐습니다. 요셉은 상황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예레미야나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이 곧바른 진리를 선포하고 교회의 배도와 죄를 지적했을 때, 그들의 시냇물은 즉시로 말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단한 생애 속에서도 꾸준하게 까마귀를 보내주셨습니다. 시냇물은 바싹 말라갔지만 까마귀가 여전히 날아오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믿음을 배웠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인물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까? 시냇물이 말라갈 때에는 어디선가 우리를 향하여 까마귀가 날아오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은 정말 우리에게 용기를 주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어디선가 까마귀가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줍니다.

까마귀는 언제 날아오게 될까요? 어떤 사람은 까마귀가 날아오는 시간까지 스스로 정하려고 합니다. 그런 분들은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 다음 주 월요일까지 이 문제를 해결해주셔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까마귀가 날아오는 시점과 타이밍은 하나님의 지혜에 속한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우리는 시냇물이 바닥을 드러내며 완전히 마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까마귀가 날아오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여전히 믿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로 준비될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짐승의 표 환난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짐승의 표 환난은 시냇물이 완전히 마르고 까마귀도 날아올 것 같지 않은 상황을 믿음으로 통과하는 환난입니다. 그런 환난을 통과해야만 마지막 갈멜산의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계 13:15-17)

 

알곡과 가라지

그릿 시냇물과 까마귀 이야기는 알곡과 가라지 이야기입니다. 시냇물이 소리를 내면서 흐를 때에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찬양하면서 믿음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시냇물이 말라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됩니까? 금방 조급해져서 안절부절못하며 원망과 불평을 쏟아냅니다. 왜 이런 증세가 나타날까요? 왜냐하면 아직 갈멜산에 올라갈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까마귀가 눈에 보여야만 믿음이 유지되는 사람은 아마겟돈 전쟁에서 하나님의 편에 서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은 시냇물이 마르는 시련을 통과하면서 잘 익은 알곡으로 익어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똑같은 시련을 통과하면서 불평과 원망을 토해내는 가라지로 변하게 됩니다. 똑같은 경험을 통과하면서 어떤 사람은 알곡으로 익어가고 어떤 사람은 가라지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과 고통 저편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통 저편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전진할 것을 기대하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련과 환난에 압도되어 불평과 원망을 토해내는 가라지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전진하는 거룩한 습관을 익혀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그리스도인과 가짜 그리스도인을 나누는 선이 될 것입니다.

 

4. 네 번째 훈련: 사르밧 과부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왕상 17:8-9)

그릿 시냇물이 완전히 마르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시돈은 이세벨의 고향이었고 이세벨의 일가친척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시돈에 있는 사르밧”은 이세벨을 지지하는 중심 세력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런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세벨의 고향에서 놀라운 복음을 전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전한 기별은 무엇입니까?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왕상 17:13).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네가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가? 정말 믿는다면, 네가 죽기 전에 먹으려고 남겨 놓은 마지막 한 웅큼의 밀가루와 기름을 나에게 달라.”는 기별을 전했습니다.

엘리야가 전한 복음은 메마른 가르침이나 죽은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시냇물이 바짝 마르고 타들어가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까마귀가 날아온다는 살아있는 복음이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뜻은 이루어지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기별이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순종하면 살 수 있다는 기별이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주께서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는 기별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말라가는 시냇가와 까마귀 훈련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훈련학교를 통과했기 때문에 살아있는 믿음을 전할 수 있는 기별자로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받았던 훈련을 우리도 무사히 마치고 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마겟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대표자가 되서 사탄의 “세 더러운 영”과 싸우게 될 것입니다. 거짓 이적과 귀신의 미혹을 압도하는 능력으로 싸우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계 16:13-14)

 

말라버린 시냇가와 까마귀로 훈련받은 성도의 믿음 앞에서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엄청난 이적도 하찮은 마귀의 장난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백성은 이적이나 감정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성도의 특징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신앙입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12)

 

의인과 악인의 마지막 운명

구약시대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었고, 거짓 선지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와 동일한 역사가 마지막 때에도 반복됩니다. 마지막 시대의 아마겟돈 전쟁에서도 하나님의 종들은 승리를 거둘 것이며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과 악인들은 모두 멸망당하게 됩니다.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계 19:20)

 

엘리야가 승리하고 하늘로 승천했던 것처럼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한 하나님의 백성도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 하늘로 승천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 진주문 앞에서 첫 번째 엘리야가 나와서 두 번째 엘리야와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들을 뜨겁게 맞이해줄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런 장면입니까? 우리 모두 그곳에 함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4부, 아마겟돈 전쟁과 마지막 엘리야의 투쟁

우리는 지금까지 엘리야 시대의 배도가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엘리야 시대의 배도가 크게 일어날 때마다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중세기 종교 암흑기는 엘리야 시대의 이세벨을 이용해서 교회의 배도를 예언하였고, 짐승의 표 환난에서는 엘리야 시대 갈멜산에서 있었던 투쟁의 장면을 이용해서 거짓 선지자들이 미혹을 보여주었습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계 13:13-14)

 

성도 여러분, 요한계시록이 엘리야 시대의 배도를 이용해서 기독교회의 배도를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계시록은 풀 수 없는 책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엘리야 시대의 배도와 투쟁의 장면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지구 역사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엘리야 시대의 갈멜산 투쟁이 전개됩니다.

 

아마겟돈 전쟁과 갈멜산의 투쟁

놀라운 사실은, 아마겟돈 전쟁도 엘리야 시대의 갈멜산의 투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 16장에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을 중동지방에서 일어나는 실제 전쟁으로 해석하는데, 그것은 요한계시록이 엘리야 시대의 배도를 반복해서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구약시대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거짓선지자들과 칼과 창으로 전쟁을 했습니까? 두 번째 엘리야가 그리스도의 초림을 준비하기 위해서 칼과 창을 사용했습니까? 중세기 암흑기 동안 일어난 배도가 칼과 창으로 싸우는 전쟁이었습니까? 마지막 시대 일어나는 짐승의 표 환난이 미사일과 탱크로 싸우는 투쟁입니까? 아닙니다. 엘리야의 투쟁은 항상 선과 악의 투쟁이었고, 진리와 거짓의 전쟁입니다. 엘리야 시대의 배도가 교회 안에 나타날 때마다 그것은 항상 “누가 참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에 대한 영적 투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여섯째 재앙으로 나오는 아마겟돈에 대한 말씀을 읽어보면 말씀 전체가 영적인 투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여섯째가(여섯째 재앙)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세 더러운 영)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계 16:12-14)

 

“세 더러운 영”으로 온 천하 임금들을 미혹하는 것이 사탄의 최종 목적입니다. 그런데 미혹의 수단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적”입니다. 아마겟돈 전쟁에서 사탄은 거짓 선지자들 통해서 온 천하 임금에게 가서, 다시 말해서 대통령과 국가 원수들 앞에 가서 놀라운 이적을 행할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이적을 행하기 때문에 온 세상의 정치권력이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후원하고 지지할 것입니다. 정치 권력과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로 연합하게 될 것입니다. 짐승의 표 환난에서도 사탄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큰 이적으로 온 세상을 미혹했는데, 아마겟돈 전쟁에서도 “이적”으로 세상을 미혹합니다. 아마겟돈 전쟁은 미사일과 탱크로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싸우는 영적 투쟁입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시대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이적은 거짓 선지자의 특징입니다. 기적이라고 해서 모두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이적과 은사가 크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천주교회 마리아 상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개신교회에서는 교파를 초월해서 방언이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귀신 쫓는 운동이 크게 퍼지고 있습니다. 이적과 초차연적인 현상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거짓말하고 세상을 사랑하며 죄를 품고 있는 사람도 귀신을 쫓아내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돈을 사랑하고 마음에 음욕을 품은 사람도 방언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진리를 모르는 사람에게서 이상한 능력이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초대 교회에서 오순절 성령을 받았던 성도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포기하고 온 마음을 하나님과 진리에 바쳤던 거룩한 성도들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지금 “세 더러운 영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영매를 통해서 역사하고 있는 실제 케이스를 살펴보겠습니다.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죽은 자의 혼을 만나서 상담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점성가 죠앤 퀴글리 여인은 자신의 점성술을 통하여 레이건 대통령의 부인인 낸시 여사에게 여러 가지 정책들을 결정해 주었으며 그러한 자신의 점성학적 결정이 세계 역사의 흐름에 크고 작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 심지어 그녀는 대통령의 일정표를 만들어주기까지 하였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분초까지 표시된 세밀한 일정 계획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1990년 3월 16일 자, The Morning News Tribune)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런 기사는 요한계시록의 빛을 아는 성도들만 그 의미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기사입니다.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민주당 의원이며, 미래 문제 연구 위원회의 의장인 챨리 로즈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낸시 레이건 여사에게는 영매 친구들이 많이 있다. … 워싱턴 정가는 영매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 미국 하원의원의 약 25%는 영매와 강신술에 매우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 챨리 로즈 의원이 운영하는 미래 문제 연구 위원회를 통하여 영매들이 국회에 진입하여 의원들과 접촉하고 있다. … 소식통에 따르면, 많은 국회의원들이 정기적으로 점성술사나 영매들을 만나서 상담하고 있다고 한다.”(1988년 12월 5일 자, U.S. News & World Report)

 

성도 여러분, 사탄은 이미 오래전부터 온 세상을 아마겟돈 전쟁을 위해서 준비해왔습니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계 16:16)

 

이 말씀은 세 더러운 영이 아마겟돈이라는 장소로 왕들을 모으는 장면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이 모이는 장소가 “아마겟돈”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마겟돈”이라고 불리우는 곳은 어디일까요? 이 질문 속에 아마겟돈 전쟁의 비밀을 여는 열쇠가 있습니다. 아마겟돈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찾아보면 엘리야 시대의 투쟁과 아마겟돈 전쟁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아마겟돈은 헬라어로 ‘하르 므깃도(Har-megedo)’인데, 그 뜻은 “므깃도의 산”입니다. 그러므로 아마겟돈은 “므깃도의 산”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므깃도의 산은 어떤 산일까요? 므깃도의 산은 바로 갈멜산입니다. 곧 엘리야와 이교 선지자들이 대결했던 산입니다.

 

아마겟돈 = 마지막 시대의 갈멜산

“아마겟돈”은 “갈멜산”이라는 뜻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은 거대한 배도가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의 백성과 거짓 선지자들과의 거대한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엘리야 시대의 배도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을 연구할 때 정말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 개념을 놓치면 예언 해석은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왜 사도 요한은 아마겟돈 전쟁을 말하면서 갈멜산을 언급했을까요? 갈멜산은 엘리야가 기도해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했던 산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사탄과 거짓 선지자의 연합세력과 대적해서 누가 참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밝혔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의 두 중요한 예언인 ‘짐승의 표 환난’과 ‘아마겟돈 전쟁’을 모두 갈멜산의 투쟁을 이용해서 기록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왜냐하면 갈멜산에서 이스라엘 교회의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로 연합해서 엘리야를 대적했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도 기독교회 안에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로 연합해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성도들을 대적하고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아마겟돈 전쟁이 언제 일어날까요? 아마겟돈 전쟁은 7재앙 중에서 여섯째 재앙의 때에 준비되는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아마겟돈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마지막 일곱째 재앙이 내리면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엘리야 시대의 배도와 투쟁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에 교회 속으로 거짓 선지자들이 모여드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성도 여러분, 이것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아마겟돈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사도 요한은 계시록 16장에서 “세 더러운 영”이 아마겟돈으로 모인다고 했는데, 계시록 18장 2절에서는 “각종 더러운 영”이 바벨론이 된 교회 안으로 모여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마겟돈이란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마지막 시대의 기독교회를 뜻하는 것입니다.

 

아마겟돈 = 영적 갈멜산 = 마지막 시대의 교회

마지막 시대에 기독교회가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바벨론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엘리야들을 보내셔서 거짓 선지자들과 투쟁하고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들을 일으키시는 때입니다!

교회 안에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모여들어서 거짓 복음과 거짓 은사와 거짓 계명으로 미혹하기 때문에 마지막 시대의 예언이 나올 때마다 엘리야 시대의 배도와 투쟁의 장면이 반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투쟁했던 거짓 선지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의 아마겟돈 전쟁에서도 사탄의 대리자인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은 못에 던지우고”(계 19:20)

 

이것이 끝까지 거짓 계명과 거짓 복음을 붙잡고 있는 악인들의 최후입니다. 지금은 진리가 무엇인지 살피고 그 위에 굳건하게 서야 할 때입니다. 이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마겟돈 전쟁에서 누가 승리하게 될까요?” 물론, 마지막 엘리야가 승리합니다.

 

누가 승리할 것인가?

사도 요한은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는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 16:15)

 

이 말씀은 어두운 바다에 우뚝 서 있는 등대처럼 아마겟돈 전쟁이 어떤 전쟁인가를 비춰줍니다. 아마겟돈 전쟁에서 누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까? 누구든지 자기 옷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그들이 아마겟돈 전쟁의 승리자입니다. 유대인이 아닙니다. 대포와 미사일을 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마겟돈 전쟁은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키는 자”가 승리하는 영적 전쟁입니다. 그래서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말씀 전체에서 “세 더러운 영”, “이적”,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과 같은 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아마겟돈 전쟁이 실제 전쟁이 아니라 선과 악의 영적 전쟁임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그런데 어떤 옷을 지켜야 승리한다는 말일까요? 예수께서 주신 흰옷을 지켜야 합니다.

 

흰옷이 무엇일까요? 흰옷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의의 옷입니다. 흰옷이란 온 마음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에 순종하는 의의 열매를 뜻합니다. 그런데 흰옷은 사탄에게 빼앗길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미혹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범했을 때 의의 옷이 벗겨졌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물론, 구원은 선한 행위와 계명을 지킴으로 얻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의의 옷을 사탄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아마겟돈 전쟁의 승리자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 자가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 성도들이 복 있는 자들이고, 그들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호소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성도 여러분, 이제 요한계시록 3장의 라오디게아 교회와 요한계시록 16장의 아마겟돈 전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되십니까?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입으라고 호소하신 흰옷을 입어야만, 아마겟돈 전쟁에서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흰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순결하다는 뜻입니다. 순결하다는 것은 내 생각과 내 사상과 내 철학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마음과 생애가 순결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얻어진 순결이기 때문에 그것은 내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계명에 불순종하며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는 한, 순결함이 있을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 1:22)

3부, 마지막 엘리야는 누구인가?

엘리야 시대의 배도는 중세기 천주교회를 거쳐서 마지막 시대까지 연결됩니다. 짐승의 표 환난은 엘리야 시대의 배도를 이해해야만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에 대한 예언은 엘리야 시대의 배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짐승의 표 환난 때 하나님과 사탄의 투쟁이 어떻게 전개될까요? 짐승의 표 환난이 시작되면 두 엘리야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진짜 엘리야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 엘리야입니다.

 

짐승의 환난 때 나타나는 두 엘리야

예수께서 오시기 직전에 가장 큰 기만이 일어날 것입니다. 짐승의 표 환난이 오면, 지구 전체가 거짓 엘리야에 의해서 기만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탄이 거짓 엘리야를 통해서 어떻게 지구 전체를 기만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3-15)

 

얼마나 놀라운 장면입니까? 짐승이 주도하는 환난이 시작되면,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할 것입니다. 구약시대 갈멜산에서는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오게 했는데, 짐승의 표 환난에서는 사탄이 엘리야의 기적을 흉내내는 것입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마지막 시대가 되면 거짓 엘리야가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들이 온 세상을 압도적으로 기만할 것입니다. 지구에 사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장면을 보면서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외칠 것입니다.

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적 앞에서 누가 감히 짐승의 권세를 부인할 수 있을까요?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믿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로 연합해서 짐승의 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엄청난 기적을 부인하고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의 기만을 경고하는 자들이 나타날 텐데 그들이 누구일까요? 그들이야말로 진짜 엘리야들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나 느낌보다 진리에 충성하는 신앙을 가진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함으로 옷 입은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죽음에서 빠져나온 성도들입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구약시대 갈멜산에서는 엘리야와 거짓 선지자들의 투쟁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초림 때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침례 요한과 유대교회 거짓 선지자들의 투쟁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도 동일한 패턴이 반복됩니다. 짐승의 표 환난 때에도 엘리야와 거짓 선지자들이 치열하게 투쟁하게 됩니다. 사탄의 편에는 온갖 이적을 일으키는 가짜 엘리야들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의 정체를 ‘짐승과 거짓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편에는 누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입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12)

 

계시록 12장, 13장, 14장에 나타나는 엘리야

요한계시록 12장과 13장과 14장은 순서적으로 이어지는 예언의 장면입니다. 계시록 12장 끝에는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는 하나님 백성의 정체가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용이(사탄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마지막 투쟁은 “사탄”과 “계명을 지키는 자”들의 투쟁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는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마지막 엘리야의 사명을 갖고 있는 성도들이고 그들이 ‘여자의 남은 자손’이며 엘리야의 사명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물론, 아무나 엘리야로 부르심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로 부르심 받는 사람은 죄와 세속을 미워하고 거짓 선지자들과 대적하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계시록 12장에서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나타나서 세 번째 엘리야로 준비되면, 계시록 13장에서 짐승의 표 환난이 시작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짐승의 표 환난은 어떤 환난입니까?”라고 묻는데,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짐승의 표 환난은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환난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 마지막 엘리야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이 짐승의 표 환난입니다. 그때가 되면 온 세상 사람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는 큰 이적 앞에서 굴복하고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게 될 것입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계 13:13-16)

 

이어지는 계시록 14장에서는 어떤 장면이 나타날까요? 짐승의 표 환난에서 짐승의 우상에게 굴복하지 않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나타납니다. 누가 짐승의 표 환난에서 승리하게 될까요? 144,000인입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1,4-5)

 

계시록 14장은 144,000인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데, 그들은 어떤 신앙을 갖고 있을까요? 그들은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12)

 

성도 여러분,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는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극렬하게 공격하는 것입니다. 지금 온 기독교회가 계명을 짓밟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교회에서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설교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율법주의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가 되자, 사탄이 또다시 교회를 점령한 것입니다.

사탄은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들이 나타나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 계명에 대한 깊은 오해를 교회 안에 퍼뜨려 놓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것이 어떻게 율법주의입니까?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율법주의입니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어떻게 율법주의입니까? 부모를 공경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율법주의입니까? 계명에 대한 거짓 선지자들의 기만에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성경은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사랑과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하늘 아버지의 계명을 온 마음을 다해서 순종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그날(그리스도의 재강림의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15, 20~21)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0,11,14)

 

오래전부터 사탄은 하나님의 계명을 강조하면,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이고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닙니까?”라고 공격해오고 있습니다. 기독교회 전체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진리에 굳게 서려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과 맞서겠다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대의 성도들이 가장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로 준비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마른 뼈도 엘리야가 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는 뜨뜻미지근하다고 했습니다. 교인들이 흰옷을 입고 있지 않고 벌거벗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마지막 시대에는 귀신의 영과 더러운 영들이 교회로 모여들 것이라고 했고, 교회가 바벨론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이런 형편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엘리야들을 만들어 내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37장에서 에스겔에게 마른 뼈가 가득 쌓여 있는 골짜기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하셨던 질문을 지금 우리에게 하고 계십니다. “지금 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마른 뼈들이 살겠느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도 에스겔처럼 대답하게 될 것입니다. “주여, 제 눈에는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정말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옛날에 에스겔에게 하셨던 명령을 우리에게 하고 계십니다.

 

“지금 너희 눈에는 전혀 가망이 없어 보이지만, 포기하지 말고 마른 뼈들에게 말씀을 주어라. 비록 그들이 죽은 뼈처럼 보이지만 들을 귀는 가지고 있다. 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말씀을 들을 수는 있으니 말씀을 전해다오. 기회가 되는 대로 진리를 전해다오. 그렇게 하면 그중에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생길 것이다.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주의 말씀은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 것이고, 흔들림을 통해서 알곡과 쭉정이가 분리될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은 마른 뼈에 살이 붙고 근육과 피부가 생기고 사람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비록 그들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아직 생명은 없다. 그러므로 내가 성령의 바람을 그들에게 불 것이다. 성령으로 그들 속에 들어가서 호소하고 인도할 것이다. 그들에게 생명을 줄 것이다. 그들은 온 마음과 생애를 나에게 바치게 될 것이다. 두 주인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 내 말과 계명에 충성할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그들에게 열매가 맺히게 될 것이다.”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교인들이 죽은 지 오래된 마른 뼈들입니다. 저마다 이런 교리 저런 말씀을 붙잡고 있지만 생명이 없어서 말라버렸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지 오래 된 마른 뼈도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사탄과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가 벌이는 최후의 전쟁이 끝나면 예수께서 재림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로 준비시켜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

2부, 중세기 종교 암흑기에 나타난 엘리야 시대의 배도

놀라운 사실은, 구약시대의 엘리야 이야기가 중세기의 종교 암흑기의 배도에 대한 예언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 이야기를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의 배도와 연결시켜 놓으셨을까요? 엘리야 시대에 일어난 배도가 중세기 천주교회를 통해서 반복되기 때문에 연결시킨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예언에서 중세기 암흑기에 해당하는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 예언에는 엘리야 시대의 배도의 주역인 이세벨이 나옵니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 2:20)

 

이세벨이 누구입니까? 엘리야 시대에 우상을 이스라엘로 가지고 들여온 이방인, 곧 아합 왕의 부인입니다. 사도 요한은 중세기 천주교회의 배도를 이세벨의 배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세벨이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지도자들을 꾀어 이방의 우상과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동네마마 집집마다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세기 천주교회에서 이런 배도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천주교회 지도자들이 로마황제 콘스탄틴누스가 믿던 태양신의 예배일과 태양신교의 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유럽의 곳곳에 있던 교회마다 태양신의 예배일과 교리가 세워지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배도를 막기 위해서 엘리야를 통해서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사도 요한은 그 기간을 중세기 종교 암흑기간으로 인용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중세기 기독교회의 배도를 예언할 때마다 3년 반이라는 기간이 7번이나 반복함으로써, 엘리야 시대의 배도가 중세기 천주교회 안에서 반복될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비가 오지 않았던 3년 반이라는 기간이 어떤 때는 “42달”로 나오고, 어떤 때는 “1,260일”이라는 날짜로 나오고, 어떤 때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한 해와 두 해와 반 해)로 나오는데, 이런 기간들은 동일한 중세기 천주교회 안에서 이세벨의 배도가 진행되었던 기간입니다.

 

  1. (단 7:25)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2. (단 12:7)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
  3. (계 11:2) “저희가 거룩한 성을 42달 동안 짓밟으리라”
  4. (계 11:3)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을 예언하리라”
  5. (계 12: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1,260일 동안… 있더라”
  1. (계 12:14) “그 여자가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2. (계 13:6)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42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왜 중세기 1,260년의 예언을 7번이나 말하고 있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중세기 배도와 핍박의 세력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려주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중세기 1,260년 동안 교회에서 일어난 배도와 거짓 복음이 세상 마지막까지 교회를 혼돈시키고 미혹하기 때문에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7번이나 강조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엘리야 시대에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기근이 있었던 것처럼, 중세기 천주교회에도 3년 반, 즉 1,260년 동안 말씀의 기근이 왔습니다. 왜 말씀의 기근이 왔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이 수많은 교리들을 변질시켰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안식일이 태양신의 예배일로 지켜지던 일요일로 변경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진리를 곧바르게 가르치는 수많은 종들이 순교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진리를 지키고 말씀을 붙잡고 살기 원하는 성도들은 핍박을 피하여 깊은 산과 계곡으로 피신해서 광야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중세기 유럽의 대도시 교회들에서는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진리를 수호하는 사람들이 순교 당하거나 광야 교회로 피신했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의 설교와 배도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퍼져나갔습니다. 천주교회에서 진리를 가르치는 음성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중세기 1,260년 동안 말씀의 기근이 생긴 이유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도 말씀의 기근이 온다고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이미 말씀의 기근이 시작되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암 8:11,12)

 

오래전에 이미 기독교회 안에서 복음이 변질되었고 세속이 교회를 점령했습니다. 개신교회가 하나님의 십계명 대신 천주십계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나타나서 교회의 죄와 배도를 지적하면 핍박합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거의 모든 설교자들은 곧바른 진리를 선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입지를 흔드는 진리는 외면하게 됩니다.

결국, 현대 기독교회에서 말씀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인터넷과 유튜브를 찾아다니면서 말씀을 찾지만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거기에도 있습니다. 안전한 진리의 말씀을 찾기가 정말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말씀의 기근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시 엘리야를 보내셔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시킬  때가 된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 엘리야는 어떤 말씀을 전할까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 4:5-6)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는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아오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요?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의 마음을 하늘 아버지께 돌아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붙잡혀 있는 마음을 하늘로 이끌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는 세상을 버리라고 설교할 것입니다. 마음과 생애를 하늘을 위해서 바치라고 촉구할 것입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우리 교회는 부흥하지 못할까요? 왜 교인들이 이렇게 세속적이고 회개하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무엇이 문제일까요?

진짜 하나님과 진짜 복음이 선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진리를 바르게 가르치고 설교하는 교회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지금 대부분의 기독교회는 부흥과 개혁을 기대할 수 없는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는 사람들이 죄와 세속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상한 기대감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설교를 듣기 원하고 따라가고 있는 한 참된 부흥과 개혁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죄를 끊어버리고 세속을 포기하도록 요구하는 강력한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끌어당기는 힘보다 훨씬 더 능력 있는 말씀이 나가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위해서 엘리야들을 보내고 계십니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엘리야의 기별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1부, 두 번째 엘리야, 침례 요한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직전에는 엘리야가 나타납니다. 초림 때도 나타났고 재림 때도 나타날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 오실 때마다 엘리야가 나타날까요? 왜냐하면 예수께서 오시기 직전에는 사탄의 격렬한 활동의 결과로 교회는 가장 어둡고 복음이 무너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오실 때가 되면, 사탄은 거짓 선지자들을 일으켜서 교회를 극렬하게 시험하고 그때마다 교회는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점령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초림하셨을 때 두 번째 엘리야가 왔었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세 번째 엘리야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초림하셨을 때 나타났던 두 번째 엘리야는 누구일까요? 침례 요한입니다. “저가(침례 요한)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눅 1:17). 침례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갖고 말씀을 전한 주의 종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실 때가 되자, 침례 요한은 두 번째 엘리야로서 주의 오시는 길을 예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이란 어떤 것일까요? 선지자들과 왕들(Prophets and kings)이라는 책 119쪽에는 엘리야가 어떤 심령과 능력을 갖고 있었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엘리야는 죄를 책망하고 악의 물결을 물리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Prophets and kings, 119)

 

이것이 엘리야의 사역이었습니다. 죄를 책망하고 악의 물결을 물리치는 것이 엘리야의 특성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란 무엇을 뜻합니까? 어떤 인간의 구속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엘리야로 나타난 침례 요한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표현된 것입니다.

 

“저는(침례 요한)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마 3:2,3)

“엘리야가 죄를 책망하는 사람으로서 백성들에게 나아갈 때에 그의 기별은 고침을 받고자 하는 죄로 병든 모든 영혼들에게 길르앗의 유향을 제공하였다.”(Prophets and kings, 119)

 

길르앗의 유향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기름을 뜻합니다. 엘리야는 죄를 책망하고 지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영혼들이 회개하고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치유의 기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성령으로 영혼을 회복시키는 기별을 전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지적하고 책망합니다. 문제를 정확하게 분별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치유되는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길르앗의 유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씀은 엘리야의 기별이 아닙니다. 반드시 죄로 병든 사람에게 치유가 일어나야 합니다.

엘리야가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들어가는 이스라엘 교회를 바라볼 때에 그의 마음은 고통스러웠고 의분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야의 심령 속에는 교회의 죄와 배도에 대한 고통과 의분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엘리야로 온 침례 요한의 마음속에도 바로 그런 심령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교회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라는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점령당했습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성소의 제단에 바치려고 가져온 가축과 양들을 빼돌려서 엄청난 이익을 챙겼습니다. 복음은 참 의미를 잃어버렸고 신앙은 율법주의에 깊이 빠졌습니다.

그런 유대교회를 바라보는 침례 요한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교회 속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 때문에 죽어가는 교인들을 보는 침례 요한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래서 침례 요한의 설교에는 엘리야의 심령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눅 3:7)

 

엘리야의 심령이란, 거짓 복음과 거짓 교리로 죽어가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나타나는 거룩한 분노를 뜻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심령이 없으면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가 아닙니다. 그런 심령을 가진 복음의 전파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는데 그것이 엘리야의 능력입니다.

진리를 잘 설명하고 교리를 정확하게 가르친다고 할지라도, 오늘날 교회를 점령하고 있는 거짓 선지자의 미혹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대항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엘리야의 심령을 갖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엘리야의 심령이란, 반역과 배도의 시대에 사람의 눈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를 뜻합니다. 엘리야의 심령이란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뜻합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는데 그것이 엘리야의 능력입니다. 엘리야의 능력이란 진리를 붙잡고 전진케 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은 하늘로부터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받지 않으면 마지막 시대 기독교회 전체를 휩쓸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에 기만당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엘리야, 침례 요한이 전한 기별

두 번째 엘리야가 왔을 때 유대교회는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점령당한 상태였습니다. 사탄은 유대교회를 어떻게 점령했을까요? 율법주의로 점령했습니다. 율법주의의 문제가 무엇인가요? 예수께서는 율법주의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율법주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위선과 형식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돈과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겉으로는 날마다 어린양을 잡아서 제단에 태웠지만, 속으로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가 실제적으로 체험되지 못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린양을 잡으면서도 죄 사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율법에 순종했으며 죄를 범할 때마다 양을 잡아서 피를 흘렸습니다. 용서와 구원을 위한 완전한 의식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와 죄 사함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율법주의 같은 이상한 가르침에 빠질 수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현대 기독교회는 율법주의를 부정하지만,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동일한 문제에 빠져 있습니다. 어떤 문제에 빠져 있을까요? 용서받은 열매,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문제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주님을 열렬하게 찬양하고 예배드리지만, 마음과 생애 속에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 요한이 유대교회를 향해서 “너희는 죄 사함을 받지 못했다”는 기별을 전했던 것입니다.

 

“침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막 1:4)

 

성도 여러분, ‘죄 사함을 받지 못하는 회개’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죄를 고백한다고 해서 무조건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날마다 어린양의 목을 따서 죽이고 피를 받으면서도 가슴속에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없었기 때문에 “주님, 이제 굴복하겠습니다. 온 마음과 생애를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받아주시옵소서. 주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라는 기도를 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날마다 양을 죽이면서도 새 언약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흘리신 피를 구원과 축복의 수단으로 이용했습니다. 얼마나 악한 사람들입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침례 요한을 보내서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마 3:8,10)

 

침례 요한은 회개의 열매가 없으면 도끼에 찍혀서 나가게 될 것이라고 설교했습니다. 날마다 어린양을 잡아서 죽이면서 감사와 충성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도끼에 찍혀서 지옥불에 태워질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에게 열매가 맺히게 될까요? 죄를 진심으로 슬퍼하는 회개를 하는 사람에게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회개하면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회개하면 말씀을 사모하는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회개하면 주님께 헌신하는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기도하는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선한 말을 하고 싶은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친절하고 싶은 열매가 맺히고, 내 마음에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고 싶은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회개하면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열매가 맺히고 세상에 관심이 없어지는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하늘을 그리워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는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이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전하는 것이 엘리야의 기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주일 동안 세상 살면서 지친 영혼들에게 왜 자꾸 회개하라고 말하고 죄를 지적합니까?” 성도 여러분, 열매 맺어야 한다고 호소하는 설교가 우리를 살리는 말씀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말씀은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교회를 향해서 침례 요한을 엘리야로 보내셨고, 침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별을 전하다가 목이 잘려서 죽었습니다. 두 번째 엘리야가 유대교회에게 기별을 전하고 다녀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교회는 엘리야가 왔다가 간 줄도 모르고 지내다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의 모습입니다. 엘리야의 기별이 전파되고 있는데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회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사랑만하면 구원받는다. 한 번 예수를 영접하고 믿으면 더 이상 구원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려고 하는 설교자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들은 교인들의 죄를 책망하지 않고 열매 없음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 교회가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영들로 덮혀 있는 바벨론이 되었다고 경고합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성도 여러분, 지금 기독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와 같은 깊은 늪에 빠져 있고,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가 된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엘리야가 올 때가 된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회가 칠흑처럼 깜깜하지만 세 번째 엘리야를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성도들은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

서론, 마지막 엘리야가 오고 있다!

성경은 엘리야가 세 번 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엘리야는 구약시대에 갈멜산에서 거짓 선지자들과 투쟁했던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그는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승천했습니다. 두 번째 엘리야는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가 다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정신과 심령으로 말씀을 전했던 하나님의 종입니다. 두 번째 엘리야는 2천 년 전에 이미 왔다가 갔습니다.

지금은 마지막 엘리야가 올 때입니다. 엘리야는 세 번 오는데, 세 번 모두 거짓 선지자들과 치열하게 투쟁합니다. 목숨을 걸고 투쟁합니다. 이것이 엘리야를 분별하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의 말씀을 전하는데 사랑과 용서를 잘 전하고 회개에 대해서 잘 설명하면 그 사람이 엘리야일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엘리야의 사역 속에는 반드시 거짓 선지자의 기만을 드러내고 경고하는 사역이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라기서는 마지막 때 엘리야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 4:5)

 

얼마나 분명한 말씀입니까?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언제인가? 그리스도께서 심판자로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선지 엘리야”를 보내실 것입니다. 지금은 마지막 엘리야가 나타날 때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이스라엘 교회를 위해서 보내셨던 것처럼, 마지막 때에도 동일한 목적과 사명을 위해서 특별히 엘리야를 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호에서 두 가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1) 마지막 시대에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시는가?

2) 마지막 시대에 엘리야가 어떤 일을 하게 되는가?

 

중요한 사실은,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는 구약시대 엘리야와 동일한 사역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엘리야를 살펴보면,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가 무슨 일을 하고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신 이유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타락하고 배도한 이스라엘 교회를 진리 위에 세우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 당시 이세벨과 거짓 선지자들이 섬기는 우상이 이스라엘 마을마다 집집마다 세워져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향해서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라고 외칠 정도로 이스라엘 교회는 타락해 있었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도 “혼자밖에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수많은 교인들 속에서 외로움을 느낄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 성도들은 외로움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엘리야가 전했던 그 기별을 오늘날 교회 안에서 전하면 극심한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마지막 시대 성도들은 외로움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엘리야를 통해서 하늘의 기별이 이스라엘 교회에 전달되었지만, 아무도 그 기별의 엄숙함과 중요성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엘리야는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심판의 기별을 전한다

엘리야가 기도했을 때 몇 년 동안 이스라엘에 비가 오지 않았습니까?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42달)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약 5:17)

엘리야는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심판의 기별을 전했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들은 심판의 기별을 좋아하지 않았고 거절했으며, 심지어 아합 왕과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도 그와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도 기독교회는 엘리야의 기별을 거절할 것입니다. 왜 엘리야의 기별을 거절할까요? 마지막 시대 엘리야도 심판의 기별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양심을 찌르고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2천 년 전에 그리스도는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 때는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심판의 기별을 들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나는 심판은 싫고 사랑만 좋습니다. 사랑만 설교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런 말은 정말 큰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심판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심판의 기별을 주신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시대를 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이것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 형편입니다. 대다수의 교인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거룩함을 싫어합니다. 넓은 길을 좋아하고 좁은 길을 싫어합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가 현재의 상태 그대로 가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그래서 그때가 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심판의 기별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심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평안의 기별”을 전하고 있습니다. 왜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는 말씀을 전할까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계속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평안을 말씀하지 않으신 때에 “평안하다. 평안하다.”라고 설교하는 목사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낮추지 않는 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불성실과 도덕적 용기의 부족에 대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가진 목사들은 진리를 분명하게 설교할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정확하게 전하기 위해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손해와 대가를 치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영혼들이 영적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 자신의 평판과 입장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곧바르게 말할 것이며 악을 변명하거나 핑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목사들은 엘리야의 믿음과 용기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목사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로서 엄숙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래 참음 … 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딤후 4:2)해야 합니다. 그들은 순종하는 자들을 격려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을 경고해야 합니다. 그들은 교회가 세속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라고 명하신 길에서 결코 벗어나지 말아야합니다. 그들은 “구름 같은 증인들”에게 둘리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설교자들은 세상의 왕들보다 더 높으신 분께서 그들에게 하라고 명하신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의 기별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와 나단과 침례 요한 같은 사람을 부르십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반응과 결과에 상관없이 진리를 충성스럽게 전할 사람, 비록 그것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요구할지라도 담대히 진리를 전할 사람을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의 때에 의를 위하여 굳게 서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탄과 전쟁하기 위해서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대적할 자들을 부르신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이와 같은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마 25:23).”(The Bearers of Light and Truth, 141-142)

 

엘리야는 참된 구원의 도를 전합니다

그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바알과 아스다롯의 우상에게 절하고 자녀를 희생제물로 바치고 있을 때 엘리야는 양과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며 죄를 용서받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엘리야의 생애 전체는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과의 전쟁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거짓 신을 섬기고 있을 때 엘리야는 참된 복음과 진리가 무엇인지 선포했습니다. 갈멜산에서 선포한 엘리야의 기별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18:21)

 

얼마나 분명한 설교입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그 당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의인 몇 명이 있다고 했습니까? 7천 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엘리야를 지목하여 부르셨을까요?

왜냐하면 7천 명의 의인들은 숨어서 자기 신앙만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실한 사람들이었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의 배도에 대해서 침묵했습니다. 그들은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않았으며,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서 울며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부르신 것입니다. ■

21호를 시작하며…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사명>은 왜 기독교회가 갖고 있는 잘못된 교리와 문제를 지적합니까?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만 이야기하면 더 은혜가 될텐데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에 맞추어서 나가야 합니다. 노아 때에 나갈 말씀이 있고 롯의 때에 나가야 할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할까요? 지금은 엘리야의 기별을 전할 때입니다.

이 시대에는 왜 엘리야의 기별이 나가야 할까요? 왜냐하면 교회가 타락하고 세속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오실 때가 거의 되었는데 교회는 뜨뜻미지근하고 귀신의 영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를 통해서 지금 이 시대의 교회를 본 다음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5,16)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대는 엘리야의 정신과 심령을 가진 종들이 나타나서 교회를 흔들어서 깨우고 회개의 기별을 전할 때입니다. 갈멜산에서 거짓 선지자들과 투쟁하던 엘리야의 신앙을 가져야만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붙잡고 있는 의인이 누구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엘리야가 세 번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미 엘리야가 두 번 지나갔고 지금은 마지막 세 번째 엘리야가 나타날 때입니다. 그가 누구이며 어떤 일을 했는지 이번 호에서 공부할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번 호를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로 준비되는 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는 엘리야의 신앙이 없으면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빛을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