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어떤 옷을 입으시겠습니까?

일곱 교회 예언과 흰옷 이야기

성경은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전쟁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살펴보면 그 핵심 이슈가 흰옷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흰옷을 입히려고 하는데, 사탄은 흰옷을 벗기려고 합니다. 어떤 때는 우리에게 더러운 옷을 입히고, 어떤 때는 우리를 발가벗겨서 수치스럽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짜 흰옷을 입혀서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사탄은 가짜 흰옷을 주면서 “이것을 입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미혹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전체 줄거리이며, 일곱 교회 예언의 요점입니다.

에덴동산과 흰옷

에덴동산에서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어도 된다”고 유혹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해도 영생할 수 있다고 유혹했던 것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사탄이 무엇을 한 것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입고 있었던 의의 옷을 벗기려고 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법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가 입고 있던 의의 옷을 벗기는 데 성공했습니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창 3:6, 7). 의의 옷이 벗겨지자 더 이상 낙원에 남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에덴동산 밖으로 내보셔야만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죄는 즉시로 자연계에 무서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가시나무와 독초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동물들이 서로 물고 뜯고 죽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연계의 변화를 보면서 정말 두렵고 슬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변화가 인간에게도 생겼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세포와 유전자가 노화되기 시작했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포가 노화되면서 또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아담과 하와의 본성에도 치명적인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육체의 본성으로부터 올라오는 정욕과 이기심의 충동을 느끼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인 저와 여러분도 악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마자 곧바로 해결책을 내놓으셨는데, 어떤 해결책을 내놓으셨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다시 의의 옷을 입을 수 있는 방법을 내놓으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 방법에 의해서 구원받게 됩니다. “내(하나님)가 너로(뱀, 사탄)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창 3:15).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탄과 여자가 서로 원수가 되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자가 누구인가요? 성경에서 “여자”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탄과 여자가 원수가 되겠다고 하신 말씀은 사탄과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 원수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한글성경에는 “원수”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에는 “enmity”로 표현되어 있는데 “enmity”라는 말은 “적개심”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속에 사탄에 대한 적개심을 넣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이 흰옷을 입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사람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악해졌습니다. 그런 본성으로는 사탄의 유혹과 시험에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본성을 가진 사람의 마음속에 사탄에 대한 적개심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거듭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거듭남을 통해서 사탄에 대한 적개심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육체의 강력한 요구를 뿌리칠 수 있게 됩니다. 사탄과 죄를 거절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사탄을 향한 적개심 때문에 놀라운 변화가 생기게 된다. 전에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 되고,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을 나도 미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적하지 않고 화목하기 때문에 사탄과 원수가 됩니다. 그러나 사탄에 대한 적개심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싫어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속에 적개심을 갖는 방법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면, 예수께서 죄와 세상에 대해서 가지셨던 적개심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의의 옷을 입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흰옷을 입은 성도는 세상을 미워하게 되고 악하고 더러운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사도 베드로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그러나 한 번 거듭남을 경험했던 사람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경험한 사람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사탄에 대한 적개심은 원래부터 내 속에 있던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될 때, 예수님의 마음에 있던 사탄에 대한 적개심이 내 안에 들어와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이 사라지게 되면 사탄에 대한 적개심도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의의 흰옷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육체의 본성이 내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에 끌려 다니는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구원을 잃어버리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흰옷을 빼앗는 사탄의 전략

흰옷을 빼앗은 사탄의 전략은 두가지입니다. 첫 번째 전략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불순종하게 해서 흰옷을 못입게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 전략에 기만당했던 것입니다. 두번째 전략은 가짜 흰옷을 만들어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짜를 입고 있으면서도 진짜를 입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 두 가지 기만을 상황에 따라서 혼합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미혹을 당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사탄은 율법주의라는 가짜 흰옷을 만들어서 미혹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속 마음은 세상과 돈을 사랑하면서도 겉모습과 행위로 율법을 지키면 그것이 자신들에게 흰옷이 될 줄 알았습니다. 마음속에는”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가득한데, 성소에 가서 양을 잡아 죽이면 그것이 자신들에게 흰옷이 될 줄 알았습니다. 율법주의라는 가짜 흰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사탄에게 완전히 미혹당했던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어도 영생할 수 있다고 속였습니다. 그런데 구약 시대에는 유대인들에게 마음이 변화되지 않아도 행위만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속였습니다. 사탄은 오늘날에도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사탄의 전략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아도 흰옷을 입을 수 있다고 속삭이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일곱 교회 예언과 기독교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곱 교회를 공격하는 니골라당

일곱 교회 예언은 흰옷에 대한 전쟁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흰옷을 입히려고 하는데, 사탄은 벗기려고 하는 전쟁이 일곱 교회 예언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일곱 교회 예언 속에 새겨져 있는 흰옷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공격한 니골라당의 행위

초대교회인 에베소 교회에는 니골라당의 행위가 들어왔습니다. 사탄이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교회 안에 들여보낸 것입니다. 왜 사탄이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교회 안에 들여보냈을까요? 에베소 교인들의 흰옷을 벗기기 위해서 입니다. 니골라당 교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니골라당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육체가 이끄는대로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탄이 니골라당 교리를 통해서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인가요? 성도들의 흰옷을 벗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니골라당 행위”라는 가짜 흰옷을 만들어서 입히려고 했던 것입니다. 니골라당은 육체의 요구에 끌려다니면서 죄를 품고 살아도 흰옷을 입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예수님) 이것을 미워하노라”(계 2:6). 에베소 교회 시대에는 12제자들과 사도들이 있었고, 그들로부터 직접 복음을 받은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골라당의 교묘한 가르침이 뿌리를 내릴 수 없었습니다.

버가모 교회와 니골라당의 교리

에베소 교회가 거절했던 니골라당의 가르침이 버가모 교회에서는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버가모 교회 시대에는 니골라당의 행위가 점점 더 발전해서 니골라당의 교리로 체계가 잡혔습니다. “네(버가모 교회)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5). 니골라당의 교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과 말씀에 묶여 살지 않아도 된다.”로 진화되었습니다. 사탄이 무엇을 하는 것인가요? 다시 성도들의 흰옷을 벗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흰옷을 입히고 좁은 길로 인도해서 구원하려고 하시는데, 사탄은 니골라당의 교리를 사용해서 흰옷을 벗기고 넓은 길로 몰아가려고 합니다.

버가모 시대에는 태양신을 섬기던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가 갑자기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놀라운 사건이 생겼습니다. 수많은 태양신 교도들이 로마 황제를 따라서 기독교회로 개종했습니다. 그러자 기독교회 안으로 돈과 명예와 권력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가난과 핍박에 지쳐서 은근히 세상을 그리워했던 사람들은 버가모 교회의 지도자들이 니골라당의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자 그것을 크게 환영했습니다. 왜냐하면 니골라당 교리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불순종과 죄에 대한 좋은 핑곗거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버가모 교회에서 니골라당 교리가 세워지자, 사탄은 교회를 마음대로 끌고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태양신의 교리가 버가모 교회 안으로 깊숙히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들이 바울상, 요한상, 마리아 상이란 이름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태양신을 섬기던 예배일이 기독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십계명을 보면, 분명히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니골라당의 교리가 세워지자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계명에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니골라당의 교리가 들어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계명과 성경 말씀의 권위가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니골라당의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진리의 길을 떠나 넓은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니골라당의 교리는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일곱 교회의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 시대부터 니골라당을 미워한다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니골라당 교리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이 권위를 잃어버리자 버가모 교회 교인들은 마음대로 살아가게 되었고 돈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부터 서머나 교회까지 300년 이상 동안 가난과 핍박 속에서도 충성하던 성도들의 신앙이 버가모 교회 시대에 들어오면서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흰옷을 잃어버린 두아디라 교회

중세기 두아디라 교회도 니골라당 교리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암흑시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나 서머나 교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교리들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방 종교처럼 행함과 고행과 의식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설교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중세기에 이런 설교가 천 년 이상 계속되었는데, 그런 설교와 가르침 때문에 흰옷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유럽에 있던 거의 모든 교회들 속에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도가 사라지게 되었고 큰 영적 기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가르침은 크게 훼손되었고, 성도들은 흰옷(그리스도의 의)을 입는 방법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핍박을 피해서 깊은 산과 계곡에서 광야 교회를 세웠던 소수의 성도들을 통해서 진리가 전수되어 내려왔습니다.

사데 교회가 더러운 옷을 입게 된 이유

16세기가 되면서 사데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중세기의 어둠을 깨뜨리기 위해서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키셨는데, 그 운동을 통해서 개신교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왜 종교개혁운동을 시작하셨을까요? 중세기에 잃어버린 흰옷 입는 가르침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틴 루터를 사데 교회에 보내셔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께서 사데 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칭찬하신 말씀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종교개혁자들이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기 때문에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들이 제 각기 교파와 교단을 만들면서 교단주의로 전락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사데 교회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더 밝은 빛 가운데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사데 교회는 “죽은 자”가 되었다는 예수님의 선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데 교회 시대에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 흰옷을 입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계 3:4, 5).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사데 교인들이 입고 있는 의의 옷이 더렵혀졌다고 하셨습니다. 흰옷을 입지 않고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경고와 책망이 이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사데 교회 시대에 시작된 개신교회의 문제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강조하다가 믿음의 열매인 순종에 대한 강조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의의 흰옷을 입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삶이 위선과 세속과 돈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물들여지게 된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고 참된 경건의 능력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데교인들은 반드시 더러운 옷을 깨끗하게 희게 빠는 성서적 방법을 깨달아야 합니다. 깨끗하고 흰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베소 교회를 공격했고 버가모 교회를 쓰러뜨렸던 니골라당 교리가 사데 교회를 미혹해서 쓰러뜨렸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데 교인들이 니골라당이 주는 가짜 흰옷을 입게 된 것입니다.

벌거벗은 라오디게아 교회

사데 교회가 해결하지 못한 흰옷에 대한 교리가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는 더욱 더 심각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데 교회는 옷을 더럽혔다고 하셨는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옷을 벗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계 3:17). 사데 교인들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으면서 흰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벌거벗고 있으면서 흰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가? 사탄이 가짜 흰옷을 입혀놓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어서 자신이 벌거벗고 있는 것도 모르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흰옷을 입으라고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계 3:18). 예수께서는 일곱 교회 예언에 나오는 모든 교회들처럼,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도 흰옷을 입는 성도들이 이기는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흰옷에 대한 문제는 짐승의 환난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에게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이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계 14:11, 12).

흰옷 문제는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아마겟돈 전쟁에서도 흰옷을 입는 자들이 승리자로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계 16:15, 16). 사도 요한이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의 승리자를 말하면서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다고 말한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구원받아서 하늘 도성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묘사하면서도 그들이 계명을 지켰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Blessed are they that do his commandments,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호소

에베소 교회부터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사탄의 공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니골라당의 교리를 이용해서 성도들의 흰옷을 벗기는 것입니다. 현대판 니골라당원들은 오늘도 이렇게 흰옷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 어떻게 그것을 지키느냐?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으면 누구나 구원받게 된다. 한번 주어진 구원이 불순종 때문에 없어질 수 없다. 인간의 순종을 강조하는 것은 율법주의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따라서 심판받게 된다는 것도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 2:10~12). 대한민국 국민이 국가의 법에 따라서 재판받는 것처럼, 천국 시민이 된 성도들도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심판받게 됩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애 속에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속적이고 얄팍한 복음이 현대 기독교회들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교회의 부패와 부도덕을 보면서 손가락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흰옷을 입지 못하고 벌거벗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조롱과 놀림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물론, 성경은 죄인의 형편을 절망적으로 말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합니다. “다 치우쳐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죄인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복음의 능력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통하여 예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면,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기 원하는 거룩한 성도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성도들이 반드시 해야 할 경험입니다. 교회에서 가르친다고 해서 다 복음이 아닙니다.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복음이 진짜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회복시키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생애를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니골라당의 교리가 받아들여지는 곳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흰옷이 벗겨지게 됩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말하는 “흰옷”과 “니골라당 교리”의 차이가 무엇인지 깨닫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흰옷 입는 방법에 대한 교리는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진리입니다. 사탄은 온 힘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교리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참된 거듭남을 통해서 세상을 미워하고, 자아를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며,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고, 어린 양이 인도하는대로 따라가는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옷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경험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에베소교회부터 라오디게아교회

<마지막 사명> 편집장

7부, 일곱 번째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마지막 교회, 현대 기독교회

기간: 19세기 중엽 이후~예수 재림까지(마지막)

이름의 의미

라오디게아의 의미는 “백성을 심판하심”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지구 역사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라는 이름이 의미하듯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심판이 이루어지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마지막 교회일 뿐 아니라 우리가 다니고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모습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계 3:14)

마지막 교회를 보살피는 예수님의 모습은 “창조의 근본이신 이”입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창조가 크게 흔들릴 것을 아셨기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살피는 당신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묘사하셨습니다. 중세기 종교암흑시대에도 창조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시대에는 하나님의 창조가 무시되고 놀림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중세기 암흑기 이후에 사탄이 어떻게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중세기 종교암흑시대가 끝난 후, 이 세상에는 무신론 세력이 급격하게 올라왔습니다. 중세기 천년 동안 하나님과 신앙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종교에 대한 깊은 회의와 환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1798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교황 피우스 6세를 옥사시켰으며, 바티칸의 땅과 소유를 몰수해 버리면서 종교와 성경을 부인하는 사상이 크게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사상이 사라졌으며,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과 학문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벨하우센이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는 고등비평을 내놓았습니다. 또한 철학자 니이체는 “하나님은 죽었다”는 사신 신학을 주장했으며, 1855년에 챨스 다윈은 <종의 기원>을 발표해서 창조를 부인하고 진화론을 주장했습니다. 사탄은 진화론을 퍼뜨림으로써 큰 재미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실험실 안에서 증명하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험실에서 증명될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부족한 인간의 과학으로 증명하지 않으십니다. 그대신 예언을 통해서 지구 역사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주관되어 왔음을 입증해 보이십니다. 우리는 과학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말세가 되면서 무신론 세력이 아주 빠른 속도로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무신론 세력은 공산주의라는 정치 철학을 만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무신론 세력은 학문으로도 깊이 파고 들었습니다. 무신론이 인본주의(휴머니즘)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학계에 들어가 거의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인본주의란, 모든 것의 중심에 인간이 있다는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에서는 하나님보다 인간이 먼저 입니다. 인본주의 사상은 오늘날 모든 교육 이념에 깊이 뿌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그토록 비종교적이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예배에도 인본주의가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라 사람이 원하는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음악이 아니라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으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술집과 댄스 클럽에서 사용하는 세상 음악에 가사만 기독교적으로 바꿔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크리스천 록이라는 음악까지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온몸을 격렬하게 움직이고 머리를 흔들며 해드뱅잉(head banging)하면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찬양을 부르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가 시작되면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산업혁명 때문에 세계 선교에 큰 도움을 받았지만, 산업혁명으로 인한 물질의 풍요와 재물의 축적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창조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온 세상이 산업화되면서 과학과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돈이 가장 강력한 우상이 되었습니다. 사탄은 온 세상을 진화론, 인본주의, 무신론, 재물, 안일함, 이기주의 그리고 바쁜 삶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습니다. 중세기에는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고 거짓교리와 핍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했는데, 마지막 시대에 들어오면서 사탄은 교회를 세속적으로 만들고, 돈과 세상을 사랑하는 넓은 길을 걸어도 구원받을 것처럼 미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고 순종하지 않을지라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처럼 미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충성하는 신앙이 거의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짐승의 환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깊이 살펴서 마음이 크게 부흥되고 깨우침을 받지 못하면, 사탄에게 미혹을 받아서 잃어버림을 당하게 되는 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칭찬이 전혀 없는 교회

참으로 두려운 사실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단 한마디의 칭찬도 하지 않으셨을까요? 왜냐하면 마지막 교회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고 맞이해야 할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예언하고 있는 마지막 환난을 통과하고, 일곱 재앙을 통과하며, 아마겟돈 전쟁을 치루어야 할 교회가 전혀 준비 없이,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긴박한 순간에 깊은 잠에 취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예언의 성취를 앞두고 있으면서, 예언에 관심을 갖지 않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예수께서 얼마나 답답하실까요?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공부할 때, 예수께서 무엇을 책망하시고, 어떤 해결책을 내놓으시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위해서 보낸 종들은 어떤 복음을 가르치고 무엇을 강조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먼저 문제를 통렬하게 지적하면서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주십니다. 귀 있는 자들은 예수께서 주시는 해결책을 온 마음과 생애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책망 1

“내가(예수님)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계 3:15,16)

일곱 교회 가운데 어떤 교회도 이런 책망을 받았던 교회는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다니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 형편을 보시면서 너무나 역겨워서 토해 내치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차라리 차가워져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교회 밖 세상으로 나가버리면, 성령께서 그들의 양심에 괴로움과 가책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서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덥지 않고 차지도 않은 상태로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살기 때문에 성령께서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시기 매우 어렵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안타까워 하시는 이유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죄와 세속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죄와 세속에 대해서 언제나 애매한 중간 입장을 취합니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입장을 취합니다. 진리에 대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타내는 무관심과 세상으로 나가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태도는 예수님의 마음에 큰 고통을 안겨줍니다.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최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탄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탄으로부터 조롱을 받고 수치를 당하십니다.

예수께서 토해 내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교회 사이의 중간에 서 있으려는 태도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면서 순종하지 않고, 죄가 무엇인지 알면서 포기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성령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전적으로 감동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세속과 거룩함의 중간에 서서 양쪽을 모두 붙잡고 있는 태도 때문에 예수께서 주고자 하는 구원의 경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차든지 덥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생각은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습니다. 찬 생각도 없고 뜨거운 생각도 없습니다. 항상 중간에 서 있다가 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닐 뿐입니다. 자신이 고민하고 내리는 정직한 판단이 없고, 양심적 고민이 없습니다. 군중의 생각을 따라가고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중심에는 군중심리가 있습니다. 내가 왜 이 길을 가야하고, 내가 왜 이런 복음을 믿어야 하며, 내가 왜 이 교회를 다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와 판단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서면 나도 서고, 사람들이 앉으면 나도 앉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런 면에 있어서 분명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하나님의 기쁨만을 위해서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 내 자신을 바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만족시키고 하나님의 뜻도 따라가려고 어중간하게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진리만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구원도 개인적이고 심판도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목회자와 교회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갑니다. 이런 라오디게아 사람들을 보시면서, 예수께서 “오늘 그대들이 섬길 자를 택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는 기별입니다.

 

예수님의 책망 2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라오디게아 교회의 죄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시는데,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전혀 모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너무나 비참한 상태인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부요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잘못되어 있으면서도 가장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 자신의 생애를 그리스도의 생애와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볼 때까지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읽지만,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예언에 대해서 눈멀어 있고 영적으로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곤고하고 가련하다”라고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방언을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마음속에 비밀스런 우상을 품고 살기 때문입니다. 돈의 우상, 자녀의 우상, 명예의 우상을 품고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서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고, 성령의 음성을 들어도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암흑 가운데 있으면서도,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나는 구원받았다”는 확신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상태에 있으면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 한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번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 받은 사람은 죄와 세속에 빠져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라는 교리에 강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죄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됩니다. 자신의 부족과 필요를 느껴야 구조 요청을 할텐데, 거의 완벽한 자기 만족과 자기 기만 속에서 구원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위험이 어디 있을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거짓 구원론이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가장 인기있는 복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가난하지만 부자라고 생각하고 가장 부족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벌거벗고 있지만 흰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입니다. 놀라운 기만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라오디게아 교인들 대다수에게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벌거벗고 있고 때문에 자신이 벌고벗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눈멀어 있으면 자신이 눈멀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옷을 입고,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비정상으로 취급받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예언된 말씀의 기근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왜 이렇게 완벽한 기만 속에 있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아모스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마지막 시대에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암 8:11,12). 마지막 시대에 말씀의 기근이 오는데,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려고 해도 듣지 못하는 기근이 온다고 했습니다. 왜 말세에 말씀의 기근이 생길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곧바르게 전하는 종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기 때문입니다. 집집마다 성경이 있고, 동네마다 교회가 세워져 있지만, 진리를 분명하게 전하는 종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기 때문에 말세에 말씀의 기근이 생기는 것입니다. 매 주말마다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고 기도하며 설교를 듣지만, 죄인의 마음에 회개와 생명을 주는 여호와의 말씀은 너무나 듣기 어려운 시대가 라오디게아 시대입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는 말세에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여도 살아있는 믿음과 생명을 주는 복음을 듣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 시대에는 열심을 내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찾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경고를 무시하는 라오디게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철저하게 경고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깊은 잠에 취해 있는 사람을 깨우면 화를 내는 것처럼,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잠을 깨우면 분노합니다. “당신들은 부자가 아닙니다.”라는 말씀도 무시하고, “눈이 멀었습니다.”라는 경고도 무시하고, “흰옷을 입고 있지 않습니다”는 호소도 무시합니다. 자기 기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거절합니다. 옛날 유대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마지막 시대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성령의 음성을 못 박아 죽이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보내서 잠자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깨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어둠의 세력은 예수께서 보내신 종들을 핍박하고 말씀을 거절하지만, 귀 있는 자들은 주께서 보내시는 말씀을 붙잡을 것입니다.

 

라오디아 교회의 유일한 희망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예수께서 보내는 희망의 메세지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세 가지 치료제와 처방을 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위해서 보내신 종들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시대에 예수께서 보내신 종들을 구별하는 방법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신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사람들입니다. 깊은 잠에 취해 있는 라오디게아 사람들을 깨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를 지적할 뿐 아니라 예수께서 주신 치료방법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살리고 회복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생애를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라오디게아 교회 문제를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면서 성도들에게 호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책망과 치료방법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먼저 치료받고 회복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말씀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 있는 “귀 있는 자들”이 고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참담한 형편의 라오디게아 교회 속에도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한 백성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예수께서 주신 세 가지 치료방법을 살펴볼 때 성령께서 독자 여러분의 심령 속에 크게 역사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의 3가지 처방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1)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2)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3)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예수께서는 불로 연단한 금과 흰옷과 안약을 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 사는 것일까요? 예수께 가야만 이 세 가지 모두를 살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치 값진 보화를 짊어지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상인처럼, 라오디게아 교회의 각 개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의 처방을 사라고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예수께서 주시는 세 가지 처방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서 그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세 가지 처방을 받아들여야만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1)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계 3:18)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주시는 처방은 불로 연단한 금을 사는 것입니다. 금을 사야 하는데 그냥 금이 아니라 “불로 연단한 금”을 사야만 합니다. 불로 연단한 금이란, 시험과 고난을 통해서 단련을 받아 순수해진 믿음을 뜻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벧전 1:7).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뜨거운 시련의 불 속에서 인간적인 찌꺼기와 불순물들이 타야만 순수한 믿음이 남게 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두라 평지에 세워진 우상에게 경배하라는 바벨론 왕의 명령을 받았을 때, 그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왜 거절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풀무불의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풀무불 고난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거니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풀무불 시련을 통과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이것이 불로 연단한 금(믿음)을 사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좁은 길에서 고난을 만나게 되는데, 그때 고난 속에서 연단된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말씀에 충성하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불로 연단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재물이 많아지거나 지위가 높아져도 우쭐거리지 않고, 사업이 망하거나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믿음은 인간도 의지하고 하나님도 의지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순수한 믿음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이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피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를 살피면서 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예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지만, 그것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사야만 하는 이유는, 예수께서는 거저 주시지만 우리가 이 타락한 세상을 살기 때문에 고난과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좁은 길을 걸어갈 때, 믿음이 없이는 통과할 수 없는 고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고난 속에서 우리의 성품과 신앙 속에 섞여 있는 불순물이 타서 없어지는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소유 모두를 팔아서 천국을 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 13:44, 45). 어떻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 수 있을까요? 밭에서 발견한 보화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삶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주저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팔게 될 것입니다. 내가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을 팔아서 구원의 경험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험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게 될까요?

그리스도인의 영적 경험은 십자가에서 시작됩니다. 하늘의 왕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흙먼지 뒤집어 쓰고 업신여김 받으면서 살다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그분에 대한 감사와 믿음이 우리의 영혼을 채우게 됩니다.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정신과 세상에 대한 애착심이 얼마나 의미 없고 무가치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자신의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이 하찮게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향해 참된 감사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온 마음과 생애를 그리스도께 드리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처럼 큰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마음과 생애를 주께 바치기를 주저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과 희생이 어떤 것인지 알면서 어떻게 그분의 말씀과 진리를 모른 척하고 살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간절한 심령으로 주앞에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받으시고 그 안에 믿음을 채워주워 주실 것입니다.

2) “흰옷을 사라”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계 3:18)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위해서 주신 두 번째 치료제는 흰옷입니다. 예수께서 흰옷을 치료제로 주시는 이유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벌거벗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사데 교회 교인들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고 하셨는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향해서는 아예 벌거벗고 다니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말세가 되면서 흰옷에 대한 문제가 더 심각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흰옷을 입지 않으면 이런 참담한 일이 생기게 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1, 22).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굉장한 경험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평생 동안 예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심판의 선언을 하십니다. 왜 그런 일이 생기게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흰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으리니”(마 7:22, 23).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은 행하라고 주신 말씀이지 듣기만 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흰옷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는 사데 교회에서 흰옷이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는 성도들의 마음과 삶에서 열매로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깨끗하고 흰(clean and white) 세마포(옷)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the righteousness of saints)라 하더라”(계 19:8). 인간의 어떤 선행이나 희생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기 위한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말할 수 없이 귀한 은혜를 받은 성도의 마음속에는 용서와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기 때문에 “주여, 이제 저의 남은 생애는 주님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는 거룩한 헌신을 드리게 됩니다. 날마다 이런 헌신을 드리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화된 생애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에서는 “믿기만 하면 의의 옷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마음과 생애에 결정적인 변화가 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가르침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흰옷을 입지 못한 벌거벗고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르침 때문에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삭개오가 했던 참된 회개의 경험이 그토록 보기 힘들게 된 것입니다. 그런 가르침으로는 결코 라오디게아 교회가 갖고 있는 치명적인 질병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의 즉, 흰옷을 입을 수 있을까요? 십자가로 가야 합니다. 십자가 아래에 나아가 자신의 삶과 그리스도의 생애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본 그리스도인은 간절한 심령으로 자신의 온 마음과 생애를 그리스도께 드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아래에서 자신이 “허물과 죄로 죽었”고(엡 2:1),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여성한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사 1:4, 5). 그래서 온 마음과 생애를 주님께 맡겨서 고침받기를 간절하게 원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심령으로 주 앞에 나가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해주시는 거듭남의 경험을 주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4, 5).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예수의 마음을 품게 되면 가련하고 눈멀었고 벌거벗은 영적 질병이 치료되고, 그때부터 우리 안에 있는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참된 중생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고, 그의 뜻은 예수님의 뜻과 일치하게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에 순복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흰옷을 입은 그리스도인의 생애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는 이런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3) “안약을 사라”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예수께서 세 번째 주신 치료제는 안약입니다. 안약은 성령께서 우리의 양심을 예민하게 하고 영적 눈을 열어주시는 역사를 뜻합니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 영적으로 소경 된 것을 고치고 진리와 오류를 분별하며 하나님의 역사와 사탄의 기만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영적 분별력을 밝게 해 주시는 역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특별히 마지막 시대에는 사탄이 택한 자까지 미혹하기 위해서 교회 안을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눈을 뜨게 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탄의 미혹과 거짓 선지자의 영을 구별하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많은 거짓 가르침과 복음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정말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짐승의 환난 때 사탄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기적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계 13:13, 14). 짐승의 환난이 오면, 사탄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했던 이적을 흉내내면서 온 세상 사람들을 기만할 것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그 준비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지막 시대 성도들에게 말씀과 영을 분별하는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호소

“무릇 내가(예수님)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19,20)

지금, 예수께서는 회개하라고 호소하고 계십니다. 이 호소를 받아들이는 성도들이 마지막 교회에서 이기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안타까움은 당신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 안에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음 문밖에 계셔서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예수께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무리 예수께서 문을 두드리신다고 할지라도, 내가 마음 문을 열어드리지 않으면 예수께서 내 안으로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셔야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교제를 나눌 수 있는데 예수께서 문밖에 서 계시기 때문에 그 경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이런 상황이 일어났기 때문에 흰옷 입는 경험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예수님의 위치는 마음 문밖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 각 개인을 찾아오셔서 마음 문을 두드리겠다고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마음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때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문을 열어드리는 사람이 있고, 문을 열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선택은 각자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마음의 문을 어떻게 두드리실까요? 어떤 때는 새로운 진리를 보여주면서 두드리십니다. 어떤 때는 죄를 지적하면서 두드리시고 어떤 때는 양심의 가책으로 두드리십니다. 어떤 때는 고난과 아픔을 통해서 두드리십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마지막 사명>을 통해서 두드리실 것입니다. 이번 일곱 교회 예언 연구를 통해서 예수님께 마음의 문을 여실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책망과 호소를 받아들이는 분은 특별한 경험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의 발걸음과 경험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믿음을 주시고, 흰옷을 입혀주실 것이며, 안약을 발라 눈을 떠서 영적인 세계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경험을 퍼부어 주실 것입니다.

 

귀 있는 자, 이기는 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예수님)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3:21,22)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도 오직 이기는 자들에게만 구원의 특권이 주어집니다.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3가지 처방으로 치료를 받으면, 믿음을 통하여 깨끗하고 하얀 의의 옷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진리를 분별하는 영적 눈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죄를 싫어하고, 깨끗하고 거룩한 것을 사모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성도들에게 이기는 경험을 주실 것입니다. ■

6부, 여섯째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세계 선교 시대)

기간: 18세기 말엽~19세기 중엽(세계를 향하여 나간 선교 시대)

빌라델비아 교회는 중세기 종교암흑시대가 끝나는 해에 시작되었습니다. 1798년, 교황 피우스 6세가 나폴레옹 혁명군에 의해서 체포되어 옥중 사망함으로서 중세기 핍박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핍박의 세력이 위축되면서 종교개혁 운동의 산물인 개신교회가 세계적으로 선교하는 일들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름의 의미

빌라델비아는 “형제의 사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형제 사랑”은 세계 선교가 가장 활발하게 펼쳐진 시대에 걸맞은 이름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전혀 책망의 말씀이 없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처럼, 이 교회는 정열과 아름다움으로 채워진 교회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을 채우고 나가서 선교에 전념한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의 모습과 충고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예수님)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계 3:7)

예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에 문을 여시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문을 여시는데 그 문은 아무도 닫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문을 여신 것일까요? 세계 선교의 문입니다. 이와 관련된 말씀은 성소 문제와 함께 살펴보아야 하지만, 여기서는 세계 선교문제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왜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 즉 여섯 번째 교회 시대에 들어서 아무도 닫을 수 없는 세계복음화의 문을 열어 놓으셨을까요? 왜냐하면 빌라델비아 교회에 이어서 나타나는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에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때문에 재림의 준비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복음화의 문이 활짝 열려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 시대에 세워진 개신교회가 영적 침체에 빠져서 거의 죽게 되었던 때, 경건의 부흥과 선교적 열성에 불을 붙인 개혁자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에 의해서 개신교회는 다시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에 부흥의 중심에는 믿음과 성결한 생애를 강조했던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사데 시대부터 흰옷을 입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경건주의자들, 즉 모라비아 신자들, 요한 웨슬리 형제(감리교회), 휫필드와 같은 개혁자들이 일으킨 경건주의와 세계 선교운동은 1776년 미국의 독립과 1798년 프랑스 혁명에 크게 자극을 받아서 전 세계 교회로 삽시간에 번져 나갔습니다.

1784년까지는 전 세계에 20여 개의 개신교 선교본부밖에 없었는데, 그 절반은 모라비아신도들이 세운 것들이었습니다. 로마 천주교회는 이미 세계 선교의 보루들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 개신교회들은 선교에 별다른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종교암흑시대가 끝나고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가 시작될 무렵부터 영국국교에서 침례교회로 개종한 영국의 구두수선공 윌리암 캐리의 인도 선교를 시작으로 세계선교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개신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역경을 이겨내고 세계선교의 길을 열었던 것입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계 3:8). 사데 교회가 끝나고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로 넘어갔을 때, 개신교회의 각 교파들은 그 규모가 아주 적었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산업혁명 이후로 교통 수단과 인쇄술이 발전하면서, 성서공회를 통해서 성경이 각 대륙에 대량으로 뿌려졌는데, 이것은 빌라델비아 시대의 세계 선교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또한 공산주의가 미처 뿌리를 내리기 전인 이 시기야말로 온 세상의 문이 복음을 위해서 열려져 있던 때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기독교회의 역사상 가장 전도 설교가 왕성한 시대였습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서 교파와 국경을 초월해서 형제의 사랑을 나타낸 때가 바로 이 때였습니다. 이러한 선교분위기 때문에 1804년 대영성서공회가 발족되었고, 1816년 미국 성서공회가 설립되더니 각 대륙에서 성서공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성경이 대량으로 인쇄되어 세상에 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반 사람들 가운데 성경에 대한 관심과 성경 연구의 뜨거운 열성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런 분위기는 곧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은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깊이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1800년 죠지 리차드의 “설명되고 옹호된 예언의 거룩한 기원”에 관한 강연을 시작으로 예언들에 관한 논문들과 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고, 유대계 독일인 죠셉 볼프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 걸친 세계적인 전도 여행(1821~1845)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속한 재림을 능력있게 선포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1840년대에 들어서면서 거의 모든 교파들 속에서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빌라델비아 시대에 예언의 빛이 밝아진 이유

예언 연구에 대한 열의가 뜨거워지게 된 중요한 이유는,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인 중에서 여섯째 인을 떼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계 6:12-13). 요한계시록 6장에 나오는 여섯째 인이 떼어질 때, 재림의 징조들이 문자 일어났습니다. 일어났을 뿐 아니라 그 순서까지 정확하게 여섯째 인에 기록된 대로 일어났습니다. 먼저 대지진이 일어났고, 그것에 이어서 해와 달과 별의 징조가 순서대로 일어났습니다. 리스본 대지진과 같은 지진은 근대 역사상 최악이었고, 가장 큰 지진이었습니다. 리스본 대지진은 1755년에 발생했는데, 이 지진으로 인해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말세가 곧 시작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몇 해 후에 태양이 총담같이 검어지는 암흑일이 생겼으며, 달이 핏빛으로 변하는 붉은 달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별들이 소나기처럼 떨어지는 유성이 생겼습니다. 이런 하늘과 땅의 징조들이 일어나면서 세계는 크게 떠들썩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말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세계 선교와 예언 연구에 큰 동기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여섯째 인을 뗄 때 일어난 재림의 징조는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4장에서 말씀하신 재림의 징조와도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날 환난 후에(중세기 종교암흑시대의 환난이 끝난 후)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 24:29).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부터 예수께서는 재림의 징조를 하늘과 땅에 주시면서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세계 선교를 시작하셨고, 마지막 시대를 위한 중요한 예언이 담겨져 있는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에 사람들이 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

5부, 다섯 번째 교회, 사데 교회, 종교개혁 운동과 개신교회 시대

기간: 16세기 초~18세기 말엽. 종교개혁과 분열되는 개신교회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자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517년, 마틴 루터가 카톨릭교회를 향해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함으로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되는데, 그때가 사데 교회의 시작입니다. 1798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서 나폴레옹 혁명군에 의해서 교황 피우스 6세가 체포되어 파리의 감옥에서 옥사함으로 중세기 로마 카톨릭교회의 천 년의 권세가 무너지게 되는데, 그때가 사데 교회의 끝입니다.

사데 교회 시대동안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성서적 믿음이 회복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종교개혁자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게 되었고, 그들의 후예들은 제각기 교파를 만들어서 현실에 안주하였으며, 종교개혁 운동은 교파와 교단에 의해서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피로써 시작한 종교개혁 운동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사데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름의 의미

“사데”라는 이름은 “남아있는 것들, 새로운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 년이라는 길고 긴 배도와 핍박의 세월을 지나면서 기독교회는 성서적 신앙을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자, 중세기 종교암흑기 동안 광야에 피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았던 성도들의 정신을 계승한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고, 개신교회 시대가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책망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계 3:1,2)

사데 교회는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이 터를 닦아 놓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께서 사데 교회에게 칭찬하시는 말씀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마틴 루터나 요한 칼빈 같은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이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기 때문에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들이 제 각기 교파와 교단을 만들면서 종교개혁 운동이 교단주의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사데 교회가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지난 5호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중세기 기독교회는 태양신교 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복음과 계명을 변질시켰고, 그 결과 깊은 영적 어둠에 빠졌습니다. 몇 년이 아니라, 몇십 년이 아니라 천 년 이상 동안 어둠의 길을 걸었습니다. 복음과 구원에 대한 말씀이 거의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키셔서 제자들과 사도들이 가르쳤던 원래의 복음과 가르침을 회복해 나가길 원하셨는데, 종교개혁의 후예인 개신교회가 그 일을 중단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백 년도 안되어 개신교회는 “오직 성경” 말씀만 순종하며 살겠다는 의지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형식주의와 교단 사이의 이단 논쟁에 빠지게 되면서 생명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몇몇 가르침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졌지만, 중세기 로마 카톨릭교회가 세워 놓은 잘못된 교리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개혁은 중단되었고 더 밝은 빛 가운데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으며, 사데 교회에게 주어진 하늘의 부르심과 기대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사데 교회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지 못하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이해해야 할 것이 있는데, 마틴 루터와 같은 개혁자들은 개혁을 시작한 것이지, 중세기에 무너졌던 복음과 계명을 모두 회복시키고 완성시킨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계 3:2). 전 유럽을 통하여 마틴 루터, 요한 칼빈, 파렐, 벌퀸과 같은 개혁자들이 일어나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인간에게 구원을 가지고 오는 것은 로마 카톨릭교회가 가르치는 것처럼 고행과 의식과 행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행함과 예식과 고행을 강조하는 카톨릭교회와 신학적 투쟁을 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복음을 설명할 때, 믿음을 특별히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믿음의 중요성을 밝혀낸 것이야말로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이룩한 가장 큰 공적입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그들이 믿음과 순종의 조화를 분명하게 밝혀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기독교회에 “믿기만 하면 죄를 붙잡고 살아도 괜찮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 돈과 세상을 사랑하면서 넓을 길을 걸어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라는 식의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데 교회를 책망하신 이유는, 사데 교회(개신교회)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더 밝은 빛 가운데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의 후예들은 루터교회를 세웠고, 칼빈의 후예들은 장로교회를 세웠습니다. 저마다 교파를 만들어서 그 자리에 안주하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종교개혁의 정신은 사라졌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교단이라는 높은 장벽에 막혀서 고립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각 교파마다 진리를 조금씩 나누어 갖고 있는데, 장로교인들은 감리교회가 갖고 있는 진리를 배울 수 없게 되었고, 감리교인들은 장로교회나 다른 교파가 가지고 있는 진리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중세기 천 년 동안 훼손된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한 빛으로 회복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진리가 사람들이 만든 벽에 막혀서 나누어지지 않는 상황을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말씀에 대한 지식의 열쇠)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눅 11:52). 말씀에 대한 지식이 백성들에게 나누어지는 것을 막았던 유대교회 지도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책망하셨던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호소

“그러므로 네(사데 교회)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3)

이 말씀은 종교개혁 운동의 선구자들이 어떤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구원의 도를 회복하려고 했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에게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책망하셨던 예수께서 사데 교회에게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난 때를 기억하고 회개하라고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인 개신교회가 정신차리지 않으면 예수께서 도적같이 임해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사데 교인들이 더러운 옷을 입은 이유

“그러나 사데(개신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a few,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예수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예수께서는 사데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옷을 더럽혔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단지 “몇 명만” 더럽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책망과 함께 예수께서는 옷을 더럽히지 않은 성도들은 장차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흰옷을 입고 다닐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물론,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흰옷을 입고 다니려면, 먼저 이 땅에서 흰옷을 입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장면에서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사데 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옷을 더럽혀서 “흰옷”을 입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흰옷”에 대한 교리가 크게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경에서 흰옷을 입는 경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흰옷이란?

* 첫째는 성도의 의로움입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깨끗하고 흰 세마포(linen, 옷)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로다 하더라”(계 19:8, 킹제임스 영어성경역)

이 말씀에서 우리는 흰옷이 성도들의 의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데 교인들이 흰옷을 입지 못했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생애 속에 의의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하며 그분께 기도드리고 예배드릴지라도, 그 마음과 삶 속에 의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는데 그것은 흰옷(그리스도의 의)을 입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흰옷이 갖고 있는 두 번째 의미는 계명을 지키는 신앙입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한글 성경에는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라고 했지만, 킹제임스 성경에는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루마기 옷을 빠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것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러운 옷을 희게 만드는 방법

사데 교회 교인들이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어떻게 해야 희게 만들 수 있을까요? 성경은 어린양 예수의 피에 씻으라고 말합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이 말씀에서 어린양의 피에 씻어 그 옷을 희게 하였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이며 어떤 경험일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매우 실제적인 경험으로 설명합니다. 히브리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양심을 깨끗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3, 14).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를 용서할 뿐 아니라, 현재의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 깨끗한 삶을 살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더러운 양심을 씻어서 깨끗하게 해주기 때문에 우리의 행실도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온 마음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의 피를 바라보고 받아들이면 양심이 정결케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바라보는 자는 그리스도께 큰 빚을 진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아버지께 돌아와 큰 죄를 용서받은 탕자의 심령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더러운 옷”을 그리스도의 피에 빨아 깨끗케 하는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을 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주님의 마음을 다시는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는 거룩한 소원이 샘솟게 됩니다.

마음을 씻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말씀으로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어”(엡 5:26). 우리 마음과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씻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흰옷입은 삶이 가능하게 됩니다. 성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왜 날마다 말씀을 읽어야 합니까? 날마다 양심을 씻어내기 위해서입니다. 흰옷을 입기 위해서 말씀을 읽어야 하고, 입고 있는 흰옷이 더렵혀 지지 않기 위해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심을 씻는 사람은 자아를 부인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과 죄에 대해서 죽는 삶을 살게 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전 15:31, 34).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똑같이 성경 말씀을 읽는데, 어떤 사람의 양심은 깨끗하게 씻겨지고, 어떤 사람의 양심은 그대로 더럽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을 눈으로 읽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심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말씀이 생명수가 되어 양심에 깨달음을 주고 회개해서 씻겨지게 됩니다. 말씀을 양심으로 읽어야 성령께서 “이것은 죄니 버리라”고 가르쳐 주시고, “이것을 회개하라 저것을 고치라”라고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마음과 삶이 깨끗이 씻겨지게 됩니다.

 

흰옷과 구원의 경험

흰옷 입는 경험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너희 가운데 이 마음을 품으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바울의 말씀으로 집약됩니다. 우리의 양심이 씻겨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셔서 그분의 마음이 우리 속에 새겨지면 자연스럽게 의의 열매가 맺히는데, 그것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행위가 아니며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열매는 내 의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육체의 음성을 거절하고 성령의 음성에 순복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이런 경험이 흰옷을 입는 경험입니다.

예수께서는 흰옷 입는 경험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멸망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었으며, 축복 받기 위해서 예배드렸던 것이 유대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런 동기와 의도로 계명을 지키면 예수께서 저주하신 율법주의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따르고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의의 열매입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가르친 중요한 복음입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1~5).

 

사데 교회의 문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여기에 사데 교회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로마서 말씀에 의지해서 믿음을 강조했습니다(롬 1:17). 사데 교회는 믿음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발견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흰옷을 입지 못하는 교회가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흰옷을 입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에 순종하는 열매가 없게 되었고, 교회가 부도덕과 세속과 위선으로 병들게 된 것입니다.

왜 사데 교회는 흰옷(그리스도의 의)을 입는데 실패했을까요? 그들이 가르치던 복음이 믿음만을 강조하다가 믿음의 열매인 순종에 대한 가르침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믿는다고 말할지라도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영혼이 정결케 되는 경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 1:22).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죄인의 마음속에는 가난하고 애통하는 심령이 생깁니다. 그래서 죄를 미워하고, 죄로부터 돌아서도록 이끄는 회개가 일어납니다. 그런 회개를 하는 사람의 심령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거하시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세속적이고 죗된 습관을 버리는 거룩한 열매가 맺힙니다. 말과 행동에 변화가 생기고, 위선과 거짓을 버리고 순결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정신과 말씀이 새겨져,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자를 진심으로 동정하고 도와줍니다. 이 모든 경험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흰옷을 입은 성도의 경험입니다.

예수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7:17). 오직 진리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진리가 올바로 세워져야 흰옷을 입는 구원의 경험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는 중세기 두아디라 교회 시대가 끝나자 마자 마틴 루터를 부르셔서 중세기에 무너진 “흰옷-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가르침을 회복시키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사데 교회의 문제는 오늘날 현대기독교회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기도하고 봉사하고 예배드리는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결과, 순종이라는 열매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도 동일한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날마다 여호와께 나와 제사 드리고, 예배 드리고, 헌물을 바치지만, 순종하지는 않으면 소용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는 사무엘 선지자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회의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사데 시대에 흰옷을 입었던 성도들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사데 교회가 교파로 나뉘어지고,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을 때에도 흰옷, 즉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서 더 밝은 빛으로 나가기 위해서 전진하던 몇 개의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모라비안교도(개혁자 후쓰의 후예들)와 퀘이커교도(영국 죠지 폭스 개혁자의 후예들)와 청교도들은 순수한 개혁의 정신을 유지해갔고, 믿음과 행함을 함께 강조하는 경건한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교회들이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순종의 중요성을 놓쳐버렸을 때, 믿음과 믿음의 열매인 행함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거룩한 생애를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3:5,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귀 있는 성도들은 예수께서 사데 교회에게 주신 기별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여러분의 믿음이 흰옷을 입기에 합당한 믿음인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

서론, 귀 있는 자들에게만 들리는 말씀

지난 호에 이어서 이번 호에서도 일곱 교회 예언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종교개혁자들의 피로 시작된 개신교회가 마지막 시대에 어떤 상황으로 들어가게 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번 기사를 통해서 마지막 시대의 교회에게 눈물로 호소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편집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교회가 드러난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첫 번째 계시인 일곱 교회 예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부터 재림 때까지 각 시대마다 사탄이 어떻게 교회를 공격했으며, 어떤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편에 서있었는지 보여줍니다. 일곱 교회 예언이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유는 중세기 기독교회 역사 속에서 성경의 교리와 복음이 어떻게 변질되었고, 변질된 가르침이 어떤 모습으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 교회 예언은 지금 이 시대에 어떤 믿음과 신앙을 가져야만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길을 걸어갈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일곱 교회 예언을 살펴보면, 각 시대마다 누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설교를 하고 어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종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일곱 교회 예언은 현재와 미래를 보여줍니다. 일곱 교회 예언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재림하기 직전인 이 시대에 교회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상황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게 될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난 5호에서 살펴보았던 일곱 교회 예언의 전반부를 잠시 복습해 보겠습니다(초대 교회 시대부터 중세기 암흑시대까지).

에베소 교회: 초대 교회가 첫사랑에 불타는 에베소 교회로 시작되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의 순결한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2:4).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왜 에베소 교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했을까요? 니골라당의 가르침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니골라당 사람들이 무엇을 가르쳤길래 그 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될까요? 그들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가 우리를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얽매이지 않도록 해방시켰다.”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육체의 정욕을 부인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 쾌락을 즐기면서도 여전히 구원을 확신하는 기만에 빠지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에 일어나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요한은 깊은 탄식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베소 교회는 사도 요한 자신과 동료 사도들이 피로서 세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서머나 교회: 서머나 교회 시대로 넘어가면서 로마제국의 황제들이 가하는 핍박은 더욱 더 극심해 졌습니다. 사탄은 죽음과 가난을 통해서 성도들을 없애버림으로써 하나님의 교회가 이어져 내려가는 고리를 끊어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성도들이 로마의 원형극장에서 사자밥이 되었고, 가족을 데리고 지하동굴로 숨어들어가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런 서머나 교회의 충성을 보면서 사도 요한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 버가모 시대에는 태양신을 섬기던 로마 황제가 갑자기 기독교회로 개종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기독교회가 300년 동안 계속되어 온 핍박에 지쳐 있을 때, 이교도인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태양신을 믿다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기독교회로 개종했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로마황제를 떠받들고 있던 태양신 교도들이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역사에서 최고의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태양신 교도들의 불만을 억제하고 그들이 기독교인들과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태양신교의 지도자, 율리우스 피르마쿠스와 기독교회의 감독 유세비우스를 불러서 협상을 했는데, 그것은 태양신교와 기독교를 혼합한 종교를 만들자는 협상이었습니다(AD 321년). 이렇게 해서 기독교회 안에 깊은 영적 어둠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것이 오늘날 카톨릭교회의 주요 교리와 가르침으로 이어져 내려왔고 개신교회까지 깊숙히 들어와 있습니다. 엄청난 숫자의 태양신 교도들이 교회 안으로 밀려들어왔고, 교회 지도자들은 로마황제가 주는 돈과 권력의 맛을 보게 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나 서머나 교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온갖 오류와 거짓 가르침들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베소 교회에 나타났던 “니골라당의 행위”가 “니골라당의 교훈”(doctrine, 교리)으로 발전되고 체계화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니골라당의 교리는 태양신교의 행습이 기독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신학적 근거를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버가모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타협한 배도를 합리화 시키기 위해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에 대한 순종과 행위에 얽매지 않는다”라는 니골라당 교리를 세웠습니다. 이런 신학적 논리 때문에 버가모 교인들은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 결과 수많은 성경의 진리가 변질되었으며 태양신교의 행습이 기독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십계명도 그때 바뀌게 되었는데, 카톨릭교회는 그것을 기초로 천주십계를 만들었습니다. 니골라당 교리는 초대 교회부터 3백 년 동안 걸어온 가난과 좁은 길 신앙을 버리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어 갔습니다. 교회가 진리를 버리고 배도하고 타락하자, 교회는 두무리로 나뉘어졌습니다. 열두 제자와 사도들이 전해 준 옛 신앙을 지키려는 성도들과 니골라당의 교리를 받아들이려는 사람들로 나뉘어졌습니다. 옛 신앙을 지키기 원하는 성도들은 버가모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설 곳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 기독교회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기독교회는 정치권력과 밀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기 538년, 카톨릭교회는 로마 황제로부터 종교, 정치, 군사력에 관한 막강한 권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카톨릭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거절하는 성도들은 핍박당하는 시대가 시작되었고 5천만 명 내지 8천만 명이 순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대에 진리를 간직하고 지키던 성도들은 깊은 산과 계곡으로 들어가 광야 교회를 세웠습니다. 버가모 교회 시대에 들어온 수많은 거짓교리들과 우상숭배 행습이 두아디라 교회 시대에 들어와서 여러 차례의 종교회의를 거치면서 교리화되어 천년 동안 교회를 암흑속에 가두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그 시대를 종교암흑시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서 16세기 초에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번 호에서는 종교개혁 운동부터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의 교회를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 사명> 편집실에서 드리는 말씀

예언은 우리의 눈을 열어줍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런데 아무나 눈이 열리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귀 있는 자들만 그런 경험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일곱 교회 예언에서 모든 교회마다 반복되는 패턴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내가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3) 이기는 자에게는…” 각 시대마다 예수께서 보내신 종들이 있는데, 그들은 예수께서 그 시대를 위해서 주시는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각 시대에 이루어지는 사탄의 기만과 미혹을 경고하고 교회 안에 들어 온 죄와 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각 시대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께서 보내신 종들의 말씀을 거절하거나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을 들을 귀가 있고 예수님의 음성을 아는 성도들만 하늘의 기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4~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께서 인도하시는 양은 주인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일곱 교회 예언 속에는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를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귀 있는 자들은 온 마음과 생애를 다해서 이 시대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독자 여러분에게 크게 임하시길 기도드립니다. ■

6호를 시작하며…

<마지막 사명>은 이번 달에도 일곱 교회 예언에 대한 진리의 종을 울릴 것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충격을 주고 어떤 분들은 소홀히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깊은 감동에 젖어들 것입니다.

일곱 교회 예언에서는 각 시대마다 사단이 교회를 공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 요한은 그 모습을 보면서 크게 낙담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열두 제자와 사도들이 세운 초대 교회가 피로써 세운 진리가 짓밟히고 성도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서 큰 충격에 빠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너무나 세속적으로 변질되어 거룩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교회를 보면서 엉엉 울었을 것입니다.

지난 5호에서는 초대 기독교회부터 중세기 종교암흑시대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그 속편으로 종교개혁 운동부터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까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 호에서는 과거의 교회를 다루었고, 이번 호에서는 우리와 직집적으로 관계있는 이 시대의 교회를 다루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이번 호에서 사단이 개신교회의 신앙을 지금까지 어떻게 공격해오고 있는지 보실 것입니다. 이번 호에 실린 글을 읽으실 때, 성령께서 식어버린 우리의 믿음을 책망하시는 음성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서 진리의 길, 좁은 길을 걸어라.”는 호소의 음성을 듣게 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지금 무엇을 잘못하고 있으며, 무엇을 고쳐야 할지 가르쳐 주실 때,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마지막 사명>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