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마 25:16~18)

“악하고 게으른 종”은 주인에게 달란트를 받았지만 주인에게 이익을 돌려 드리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주인이 준 달란트로 자신을 위해서 장사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달란트를 준 이유는 주인을 위해서 이익을 내라는 것인데, 악한 종은 자신을 위해서 달란트를 사용했습니다.

 

주의 종들이 듣는 두 음성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목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양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매해 신학교를 졸업한 주의 종들이 복음 사업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서 그들은 두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말씀에 대한 충성과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말씀과 의의 표준을 낮추더라도 교인들을 붙잡아야 하고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 두 음성 사이에서 어떤 음성을 따라가느냐에 따라 주의 종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마지막 시대에 주의 종들은 “진리를 지킬 것인가? 사람을 붙잡을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고민하게 됩니다.

두려운 사실은, 수많은 종이 “잠시 진리를 덮어 두고, 잠시 의의 표준을 낮추고 교인을 붙잡고 교회를 안정시키라”는 음성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종들이 그런 결정을 하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요? 주인이 준 달란트를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인이 왔을 때 이익을 남겨 드리지 못하게 됩니다. 교인 숫자에 초점을 맞춘 종들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거룩함에 대해서 정확한 말씀을 전하지 않게 됩니다. 교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설교는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말하지만, 신자들이 붙잡혀 있는 죄와 이기심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됩니다. 문제없고 평화스런 교회를 만드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됩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성령의 음성은 사라지게 되고 말씀의 기근이 생기게 됩니다. 미련한 처녀들로 교회가 채워지게 됩니다. 결국 이런 종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앞으로 가야할 영혼을 자신에게로 이끌게 됩니다. 교회는 성장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일지라도, 주인에게 돌려줄 이익(영혼)은 없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주의 종들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 2:15~16).

물론, 교회는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통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교인들이 세상을 버리고 참된 중생의 경험을 함으로 숫자가 늘어나야 합니다. 교인들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세우고 하나님께 생애를 바치도록 인도하는 것이 최고의 교회 성장법입니다. 그러나 목자가 길을 잃어버리면, 양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볼 기회도 잃어버린 채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 속에서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목자가 교회의 안정과 양들의 숫자에 초점을 맞추면, 교회 안에 세속이 넘실거리고, 장로님과 집사님이 세상에서 얻은 돈과 명예로 교회를 지배하려고 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에서 술 냄새가 스며 나와도, 하나님의 사랑만 말하게 됩니다. “한 번 구원받았으면 더 이상 구원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라는 설교는 죄를 붙잡고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신학적 핑계거리를 마련해 주고 죄 속에서 평안을 누리게 해줍니다. 교회마다 사람들이 가득차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되어 있는 영혼을 만나기는 점점 더 어려워져 갑니다. 예수께서는 인자의 때는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고, 인자의 때는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인이 돌아왔을 때 돌려받을 이익(영혼)이 너무나 적다는 뜻이 아닐까요?

 

양 떼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들”은 양 떼들을 하나님께로만 이끌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준 달란트를 사용해서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도 함께 나누어 가지고자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목회자의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설교가 나옵니다. 어리석은 양 떼들은 그런 설교를 들으면서, 목사에게 충성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 양 떼들로 채워진 교회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목회자가 길을 잃어버리면, 성경 말씀으로 자신의 신앙을 진지하게 살피는 양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하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무지한 양들로 교회가 채워지게 됩니다. 말씀을 분별할 줄 모르는 양이 교회에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는 인간 목사를 의지하는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현대 기독교회가 말씀 중심이 아니라 예배 중심, 은사 중심으로 변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목자는 다루기 쉽고 성장하기 쉬운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함을 덮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목자와 양 떼 사이에 이상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양들은 자신의 죄를 덮어 주는 설교를 기대하고, 목자는 양들이 원하는 것을 나눠 주는 공생 관계가 교회를 악마의 입으로 끌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커지고 신자들은 넘쳐 나지만, 주께서 원하시는 이익(말씀에 굴복한 영혼)은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마 25:24~25).

무지한 양 떼들은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라는 말보다 “우리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라는 말을 훨씬 많이 하도록 길들여지게 됩니다. 성경의 분명한 진리를 눈앞에 대고 읽어 주어도, “그래도 우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는데요” 라고 말하는 고집스런 양들로 변하게 됩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9).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어야 할 양 떼들이 목사와 교파로 인도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회가 말씀을 떠나게 된 중요한 이유입니다.

목자가 좀 더 큰 교회를 가져야겠다는 욕망을 품는 순간, 양 떼들에게 침례와 직분을 주는 표준은 급격히 떨어지게 됩니다. 더 많은 양 떼를 가져야겠다는 욕망이 복음 전파의 순수성과 거룩함을 삼켜 버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큰 길과 골목을 점령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점점 더 듣기 어렵게 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늘어나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참된 종들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암 8:11~12). 교회가 거룩한 목적과 사명을 저버리자, 교회는 세속과 유행의 물결에 대하여 문을 열게 되었고, 교회와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뚜렸한 경계선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신문과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목자와 양 떼들의 부패상은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지금 사탄은 양 떼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노심초사하는 교회를 보면서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거짓 양 떼들로 채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숫자에 의지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말씀 위에 정확히 서서 등불을 환하게 밝히고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준비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통해서 잃어버린 양들을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바벨론 전체에 복음을 전했던 것은 유대 교회가 아니라 다니엘과 세 친구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종들에게 드리는 호소

성직자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원하는 것은 백성들을 말씀 위에 정확히 세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역사할 수 있도록 정확한 복음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양 떼들의 요구에 끌려다니지 마십시요. 여러분의 주인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에게 달란트를 주시고 이익을 내라고 요구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신자들에게 온 마음과 생애를 주님과 진리에 바쳐야만 참된 행복과 평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주의 백성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세상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들이 어디를 찾아가야 합니까? 멸망해 가는 세상이 하나님의 진리와 말씀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교회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랑이 올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부드러운 설교를 할 때가 아닙니다. 세속이 하나님의 교회 안을 넘실거리고 있는 이때, “착하고 충성된 종들”은 분명한 말씀으로 주의 백성을 잠에서 깨울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들”은 평판와 인기와 재물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고 파수꾼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사 58:1). 파수꾼이 나팔을 크고 분명하게 불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혹시 파수꾼 자신이 세상과 하나가 되어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 세상은 교회의 원수가 아니라 친구가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속된 것이 거룩한 것을 압도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들”이 “착하고 충성스런 종들”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늘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종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패역한 이스라엘 교회와 백성들에게 인기 없는 기별을 전했던 용기와 믿음을 칭송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마지막 시대의 예레미야로 부르심을 받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눈을 두려워하는 대신 사람의 눈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의 눈을 두려워하고, 동료 목회자의 눈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에 압도되고, 영혼에 대한 사랑이 흘러넘치면 두려움을 물리치게 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회개하지 않는 양 떼들, 자아와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은 양 떼들은 언제나 부드럽고 죄를 인정해 주는 설교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참된 목자는 그들의 요구에 맞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좋게 깎아내리거나 다듬지 않습니다. 하늘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을 백성들에게 전해 주는 종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혼들에게 영생으로 가는 길을 정확하게 제시해 주는 종들을 찾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누가 하늘의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게 될까요?

 

무엇이 하나님의 교회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병의 증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유행과 세속, 사치, 쾌락, 죄에 대한 무감각, 세상적인 사고방식 등등. 이런 문제들이 하나님의 교회가 겉으로 나타내고 있는 증세입니다. 마땅히 거룩하고 경건해야 할 주의 종들과 성도들에게 왜 이러한 문제가 생기게 되었을까요? 질병의 증세만을 쫓아다니면, 병의 진정한 원인을 놓치게 됩니다. 교회가 이렇게 된 진짜 원인이 무엇일까요? 원인은 거짓 복음과 가짜 성령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말하면서 바벨론의 포도주에 취해 있다고 했습니다. 바벨론의 포도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고 순수한 생명수인데, 생명수에 다른 것을 섞으면 취하게 만드는 거짓 복음이 됩니다. 그러므로 섞인 교리, 섞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벨론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교회 안에서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교회 모습이 음행(영적 간음)하는 교회,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교회로 나오는 것입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계 14:8).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계 17:2).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계 18:3).

바벨론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면 어떤 상태가 될까요? 어려운 질문 같지만 대답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술 취한 사람과 대화한 적이 있습니까? 술에 취하면 상황 판단을 못하게 됩니다. 자꾸 헛소리를 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바벨론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마지막 시대의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이것이 취한 모습입니다.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모릅니다. 영적으로 헐벗고 가난한데 자기는 부요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어서 성령의 역사와 사탄의 미혹을 분별하지 못하는데 자신은 본다고 말합니다. 흰옷, 의의 옷을 입지 못해서 벌거벗고 있는데 자신은 입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잃어버린 상태인데 “나는 구원받았다”고 확신합니다. 이것이 바벨론의 포도주를 마시고 인사불성이 된 상태입니다. 바벨론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면 반드시 나타나는 증세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니엘과 세 친구의 신앙과 믿음 앞에서는 오늘날 기독교회에 존재하는 모든 신앙이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여러분이 믿는 교리와 복음을 어떻게 하면 검증할 수 있을까요?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히브리 세 청년처럼 풀무 불에도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기 위해서라면 다니엘처럼 사자굴에도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성경 말씀 위에 올바로 서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에 5천만 명 이상의 성도가 진리를 붙잡고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 성도들의 피와 죽음 앞에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율법주의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말세에 많은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것을 재림의 징조로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1~12).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말세에 교회 안에 많은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고 불법을 조장하는 것이 마지막 시대 재림의 징조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가볍게 여기는 설교자들입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의를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현대 기독교회에 그런 포도주를 나눠 주는 종들이 있기 때문에 “불법이 성행하”게 되었고 신자들의 삶은 부도덕으로 채웠으며 진짜 사랑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한 번 구원받았으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식의 설교를 피해야 합니다. 그런 설교에 젖어 들면 여러분은 취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사랑만 하면 된다.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율법주의다.”는 말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그런 설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바벨론의 포도주에 취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폐지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폐지될 수 없는 것처럼 십계명도 폐지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