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1~34)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번째 비유에서도 두 무리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천천만만의 천사들과 함께 이 땅에 오실 때, 누가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양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이들이 양이고 마지막 시대의 의인들입니다. 가난한 자와 목마른 자와 나그네 된 자들을 보살피는 사람들, 병든 자와 옥에 갇힌 자를 도와준 사람들, 그들이 예수께서 오실 때 양 무리에 속해서 구원받을 자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인자의 때는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씀은 마지막 시대가 소돔성과 같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소돔성이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동성연애가 난무했던 도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소돔성을 지배하고 있던 또 하나의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겔 16:49).  

소돔은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먹을 것과 물질이 풍부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나는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겠다”는 생각이 소돔의 죄였습니다. 소돔성의 시민들은 염소였습니다. 염소는 돈의 노예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뜻합니다. 돈을 지배하지 못하면 사람의 마음에는 탐욕이 들어오고 구두쇠 정신이 들어오게 됩니다. 궁핍하고 어려운 자를 보아도 외면하게 만듭니다. 돈은 무서운 힘입니다. 돈을 지배하지 못하면 돈의 노예로 살아가게 됩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싶어도 돈이 “주지 말라”고 명하면 그 말에 복종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돈이 사람들의 마음에 신이 되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나란히 놓으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고 있는데, 한 주인은 하나님이고 다른 주인은 돈의 신이라는 것입니다. 염소는 하나님은 섬기지 않고 돈만 섬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기는 사람들이 염소입니다.

많은 사람이 양과 염소의 비유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고 선을 많이 베풀면 나도 양이 되어서 천국 가겠구나.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만, 선을 베풀고 어려운 자를 구제하는 것도 열심히 해야 천국 가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구원은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위도 쌓아야 받을 수 있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에 큰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양이 선한 행위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예수님은 양들에게 이런 칭찬을 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주님의 칭찬에 의인들이 어떻게 반응할까요?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마 25:37~39).

의인들이 이상한 대답을 합니다. “내가 언제 그런 선행을 했습니까? 내가 언제 주님을 대접했고 언제 그런 일을 했습니까? 나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왜 의인들은 그렇게 반응할까요? 의인은 선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인은 성령의 은혜로 그 마음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선한 행위는 성령의 충동대로 움직여서 맺은 열매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인은 선이 좋아서 선을 행한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억지로 선을 짜냈던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 마음속으로부터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자비가 나와서 선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남을 먹이고 도와주고 방문하고 베푸는 것이 양에게는 자연스런 생활이었습니다. 마음에 기름이 채워진 사람은 양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희가 선을 베풀었다”고 하시는데, “제가 그렇게 했었나요?”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행위는 의인에게 있어서 특별하게 기억이 날 만큼 독특한 행위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양과 염소의 비유 역시 성령의 역사에 대한 말씀입니다. 양과 염소는 선한 행위가 성령의 은혜로 이루어졌는가를 보여 주는 비유입니다.

 

염소가 선한 행위를 기억하는 이유

이제 예수께서 염소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마 25:42~43). 예수께서는 염소들에게 “너희는 선을 베풀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악인들이 어떻게 대답할까요?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마 25:44). 이것이 어떤 상황입니까? 주께서는 선을 베풀지 않았다고 하는데 염소들은, 악인들은 “내가 선을 베풀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어려운 자들에게 적선을 베풀었는데, 주님 그것을 모르십니까? 내가 교회에 얼마나 많이 헌금했고 교인들을 도와주었는데요.”라고 항의하는 것입니다.

양은 기억하지 못하는 선을 염소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악인들은 자기 속에 없는 선을 베풀었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누구를 도와주라고 하니까 주변 사람들 눈치를 보면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직책을 갖고 있으니까 선을 베푼 것입니다. 자비가 특별한 행위였기 때문에 모두 기억나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서 살다가 상황에 밀려서 선을 베풀었으니까 자신이 행했던 선이 하나하나 기억나는 것입니다. 또한 기회만 되면 자신이 행한 선을 자랑하고 나타내 보였기 때문에 더 잘 기억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너는 선을 베풀지 않았다”라고 책망할 때, “내가 많이 했습니다”라고 항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양과 염소의 차이는 선을 행한 양의 차이가 아니라 “성령으로 변화를 받았는가? 받지 못했는가?”의 차이입니다. 마음이 온갖 세속과 욕심으로 채워진 사람도 선을 베풀 수 있습니다. 마음에 기름이 전혀 없는 사람도 선을 베풉니다. 정치인도 선거 때가 되면 양로원을 찾아가고, 연예인도 인기가 필요하면 고아원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베푼 선은 성령의 인도와 감동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 모두 성령에 의한 변화 이야기입니다. 지금 성도들이 양과 염소로 나뉘어지고 있습니다. 양으로 살아간 자들은 예수께서 오실 때 양으로 구별될 것입니다. 염소로 산 자들은 그때 염소로 구별될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파헤치고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면 결국에는 기름 문제입니다. 기름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지만, 진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십니까? 그런 분들은 주 앞에 나가 “무엇이 문제인지 알려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소홀히 하거나 거절하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는 아는데 신앙이 메마르고 형식적입니까? 그릇에 기름이 떨어진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에 사는 사람들은 생명을 얻게 되고 그런 사람은 진리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으며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이번 호에 실린 기사를 읽는 독자들 중에 “아 나는 미련한 처녀구나”라고 자책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처럼 쓸모없이 보이는 돌 속에서도 아름다운 금을 만들어 내십니다. 여러 가지 환경과 상황을 통해서 우리 속에 있는 찌꺼기를 태우고 없애 주실 것입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 주시고 빛을 주실 때 따라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재림의 징조들이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그토록 그리워하던 신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이 땅에서 당한 모든 고생과 억울함과 고난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살아온 자들의 이름이 하늘로부터 불려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오른편에 세우시고 온 우주 앞에서 “이들이 의인이다. 이 사람들은 성령으로 변화함을 받아 열매를 맺은 자들이니 내가 준비한 이 우주를 영원한 기업으로 주겠노라”라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아, 그 음성이 우리의 귀에 얼마나 아름답게 들릴까요? 슬기로운 처녀들이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고 하늘 진주성문으로 들어갈 때 얼마나 영광스러울까요?

우리는 지금 마지막 혼인 잔치에 참석하라는 초청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 하늘의 잔치에 참석해야합니다. 성도 여러분, 등잔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기름은 성령이고 등은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들고 있는 등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양심 속에서 말씀하실 때 그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듣고 따라가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의 멍에를 풀어 주면 주께서 우리를 아신다고 하실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앉아서 듣지만 말고, 말씀을 우리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한 걸음씩 인도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