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기독교회는 변화의 경험을 잃어버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고민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년 동안 기다려온 방언의 은사를 받고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변화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였고, 미워하던 사람을 여전히 미워했습니다. 분명히 성령의 큰 역사를 받았는데, 왜 내 마음과 감정과 삶은 변화되지 않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내가 정말 성령을 받은 것일까요? 정말 구원을 받은 것일까요? 왜 교회에 가면 믿음이 하늘 높이 올라가는 것 같은데, 집에 돌아 오면 냉랭한 생활이 반복되는 것일까요? 왜 아직도 경쟁과 시기에 끌려다니며, 왜 세상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나를 끌고 다니는 것일까요? 왜 세속적인 일들이 재미있는 것일까요? 왜 양심의 소리가 자꾸 나를 책망할까요?”

예수를 영접하고 방언까지 하는데 왜 세상 욕심과 정욕에 끌려다니게 될까요? 사도 요한의 말씀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4~5)

사도 요한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만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예수를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길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얼마나 확신에 찬 말씀입니까? 그런데 왜 이런 경험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까요? 왜냐하면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에 대한 말씀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사라지면서 이 세상과 죄로부터 구원받는 실제적인 경험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전쟁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처럼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마음속에 무엇이 있길래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을까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바울과 같은 간증을 하려면, 우리도 날마다 죽는 경험을 해야 하는데, 날마다 죽는 경험이란 어떤 것일까요? 다음 말씀은 우리에게 어둠 속을 비추는 등대와 같은 빛을 줍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범하려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회개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죄에 대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려 싸우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싸움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마음속에서 성령과 육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쉼이 없는 투쟁인데,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한 곳은 바로 여기이다.”(Messages to Youth, 114)

 

이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범하려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예수 믿고 거듭나면 더 이상 유혹도 받지 않고 마음속에 올라오는 충동도 없어지게 될까요?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구원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침례”를 받는 순간에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며 버림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 3:21).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영화로운 몸을 주실 때까지 성도들은 유혹에 시달리고 육체로부터 올라오는 악한 충동과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전쟁은 무엇과 무엇이 싸우는 전쟁일까요?

 

2) “회개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죄에 대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려 싸우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싸움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

영적 전쟁은 무엇과 무엇의 전쟁이라고 했습니까? 바울은 날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고 한 말씀은 날마다 육체의 소욕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기적이고 악한 육체의 욕구가 어떻게 죽게 될까요? 이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 전쟁은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 치열한 전쟁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롬 8:13). 바울은 이 전쟁에서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승리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바울은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만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승리의 비결은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여기서 “옛 사람”이란, 우리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악하고 교만한 본성을 말하는데, 우리는 이 글에서 옛 사람의 소욕을 편의상 “독수리”라고 표현하겠습니다(옛 사람=죄의 몸=육체의 소욕=”독수리”). 옛 사람, 즉 독수리는 내 속에 있는 악한 본성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옛 사람(독수리)을 결코 죽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육체로부터 악한 충동이 올라와서 나를 죄로 끌고가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3) “마음속에서 성령과 육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쉼이 없는 투쟁인데,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한 곳은 바로 여기이다.”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한 곳은 바로 여기이다.”라고 했는데 “바로 여기”가 어딜까요? 우리가 시험과 유혹을 만날 때입니다. 시험이 없고 모든 일이 잘 풀릴 때는 평안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일단 시련과 유혹이 오면, 우리 마음속에서 육체의 소욕(독수리)과 성령이 다투기 시작합니다. 그 전쟁은 둘 중 하나가 패배해야만 끝나는 전쟁입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은 서로 우리를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시험과 유혹이 오면, 독수리 같은 육체가 꿈틀거리면서 죄를 범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더럽고 추한 욕망이 올라옵니다. 내 속에 있는 독수리 같은 육체가 “원수를 미워하라.”고 외치고, “복수하라.”고 소리칩니다. “더 많이 욕심을 내라.”고 유혹합니다. 바로 그때 마음의 저쪽 반대편에서 비둘기 같은 성령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욕심을 내려놓아라. 의의 길을 걸어야 한다. 좁은 길을 택해야 한다. 진리를 붙잡아야 한다.” 시험과 유혹 앞에서 성령과 육체가 “대적”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음성을 듣게 되는데, 바로 그때가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 도우심을 구할 때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는 도무지 육체로부터 올라오는 악한 욕망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더 이상 내 힘으로 독수리 같은 본성과 싸우는 전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새 언약하에 사는 성도, 은혜 아래 거하는 그리스도인은 스스로의 힘으로 싸우는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싸우는 전쟁은 결국 나를 패배와 좌절과 낙망으로 이끌어 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5). 유혹과 시험 앞에서 두 음성이 들려올 때, 우리는 죄의 종이 되든지 순종의 종이 되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우리 속에서 전쟁이 벌어질 때 우리는 죄의 종이 되든지, 순종의 종이 되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전쟁이 벌어질 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독수리의 요구를 뿌리치고 성령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시험받을 때 무릎을 꿇고 예수께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늘 성소에 계시는 예수께 나아가 성령의 음성을 붙잡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음성에 굴복할 수 있도록, 능력을 달라고 손을 뻗어야 합니다. 문둥병자가 주님을 향해서 손을 뻗듯이 온 마음을 다해서, 절박한 심령으로 하늘의 은혜와 능력을 달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거절하고 순종의 종으로 인도해 달라고 간구하는 성도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능력을 간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나가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 시험과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은 옛 언약의 신앙이고 하늘 아버지 없이 혼자 싸우게 되어 쓰라린 패배와 낙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때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은혜로운 심령으로 바뀌게 됩니다. 교만하고 이기적인 마음이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가난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그렇게 얄밉고 미운 사람이 불쌍하게 보이게 됩니다. 그렇게 떨치지 못했던 욕심이 힘을 잃고 사라지게 됩니다. 무거운 멍에로 느껴지던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런 마음속에서는 독수리(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육체 속에서 올라오는 죄의 광풍이 “잠잠하라 고요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고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이것이 날마다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성화의 과정입니다.

 

독수리는 비둘기처럼 살 수 없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 15:18~20)

외적으로 나타나는 열매의 근원은 마음입니다. 마음을 누가 지배하는가에 따라 열매가 달라집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면 자연스럽게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나 사납고 비열하며 이기적인 육체가 마음을 지배하면, 독수리와 같은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원은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입니다. 독수리를 죽이려면 먼저 독수리를 잡아야 하는데, 독수리의 본성을 잘 이해해야만 그것을 잡을 수 있습니다. 독수리를 잡기 위해서는 먼저 독수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독수리가 죽은 시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독수리는 비둘기 같으면 전혀 관심도 갖지 않고 지나쳐 버릴 죽은 송장에게 침을 흘리며 달려듭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독수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독수리는 무엇이든지 썩은 것을 좋아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신선한 과일이나 야채나 곡식보다는 피 흘리고 냄새가 나는 죽은 시체를 좋아합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독수리를 잘 길들여서 온순한 새로 변화시키려고 훈련시켰습니다. 그는 먼저 독수리가 들어갈 만한 커다란 새장을 만들어서 그 속에 독수리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독수리의 입맛을 변화시키려고 날마다 사과, 오렌지, 바나나 등을 주었습니다. 독수리는 여러 주일 동안 주인이 주는 대로 잘 받아먹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장 문이 열려져 있는 틈을 타서 재빨리 날라가 버렸습니다. 독수리는 하늘 높은 곳에 떠 있다가, 도로에서 차에 치어 쓰러져 노루를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내려가 작고 빨간 혀를 날름거리면서 맛있게 뜯어먹었습니다. 주인은 독수리를 위하여 훨씬 더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주려고 했지만, 독수리는 자신의 옛 습관과 취향을 결코 바꾸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독수리는 태어날 때부터 더럽고 냄새나고 썩은 것을 좋아하는 새이기 때문입니다.

 

비둘기가 되어야 비둘기처럼 살 수 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속에 독수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있는 독수리 같은 육체의 본성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동안 비둘기와 함께 먹이통 곁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비둘기와 함께 모이를 먹고 비둘기의 행동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우리를 지켜보지 않거나, 누군가가 우리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면, 독수리의 근성을 나타내면서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를 들이댑니다. 육체가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도 평안할 때는 비둘기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시험과 유혹이 오면 독수리의 악함을 여지없이 드러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주셨던 경고입니다. “네가 진정으로 회개하여 거듭나지 않으면, 너는 네 속에 있는 독수리에 의해서 처절하게 쓰러지게 될 것이야. 그러므로 너는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곧 큰 시험이 온다. 너는 깨어 있어야 해!” 주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걱정하지 마옵소서. 다른 사람이 모두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오자,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주님께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베드로는 정말 주님을 끝까지 따르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 속에 숨어 있는 독수리의 참모습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영적 형편을 알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알고 있습니까? 독수리가 못 박혀야만 베드로와 같은 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고 설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육체를 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합니까? 독수리를 죽이면 인생이 너무 재미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바보 취급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옛 사람과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대신, 자기 안에 있는 선한 것을 조금씩 훈련시키고 계발시켜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합니다. “여기를 뜯어고치고 저기를 메꾸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진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자신을 위로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하고 이기적인 존재야. 비록 우리가 예수를 믿을지라도 악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한 거야. 우리는 타고난 대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어.”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는 이런 말에 여러분도 동의하십니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실제적인 방법이 2부에서 다루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