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거짓 성령에 빠지면 진리를 보지 못한다

1900년 초, 퀘이커 교도인 헤나 스미스 여사는 기독교계에 큰 관심을 끈 책을 저술했는데, 그 책은 <행복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비밀>입니다. 그 책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판매량인 2백만 권 이상 팔려 나갔습니다. 그런데 재판, 삼판을 출판하는 동안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출판사에서 그 책에서 중요한 장 하나를 통째로 빼어버렸습니다. 놀랍게도 거의 백 년이 지난 후에 사라진 책의 내용이 밝혀졌습니다. 1970년대의 유명한 저술가인 캐더린 마샬 여사는 <행복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사라진 내용을 간추려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한 번에 끝나는 전기 충격과 같은 경험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생애 전체를 통해서 계속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경험이다. 성령의 침례란 감정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침례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상 속으로 몰입하여 들어가는 과정이다. 성령 침례의 증거는 감정도 아니고 방언 은사를 받는 한 번의 경험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경험이다. 성령 충만은 생애에 나타난 성령의 거룩한 열매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이것은 헤나 스미스 여사의 책에서 핵심이 되는 중요한 내용이었는데, 왜 출판사가 삭제했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헤나 스미스 여사와 그의 남편 로버트 스미스 씨는 뉴저지 주에서 열린 성령 부흥집회에 참석했는데, 그 집회에서 신자들이 안수를 받자 충격적인 모습으로 성령이 임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바닥에 쓰러졌으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헤나 스미스 여사에게는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얼마 후에 그의 남편, 로버트 스미스 씨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로버트 스미스 씨는 아침에 숲속에 가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온몸이 떨리면서 전기 충격 같은 것이 임하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늘의 영광과 성령이 홍수처럼 임했다. 온 세상이 갑자기 달라보이기 시작했고 모든 사람이 아름답게 느껴졌다.”고 간증했습니다. 이런 현상이 몇 주일 동안 계속되면서 로버트 스미스 씨는 그 지역에서 유명한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인, 헤나 스미스 여사도 남편과 같은 경험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그녀에게는 그런 황홀한 경험이 오지 않았습니다. 스미스 여사는 처음에는 크게 실망했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는 이미 거듭남과 성령의 열매를 주셨으므로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의 섭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는 주님의 지혜와 사랑을 믿습니다.” 스미스 여사는 감정의 황홀함을 느껴 보길 원했지만, 하나님께서 스미스 여사에게는 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마음과 성령을 따라 사는 신앙을 주셨습니다.

로버트 스미스 씨에게 나타난 이상한 일

성령을 경험한 몇 해 후에 로버트 스미스 씨는 유럽에서 성령부흥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청중이 그의 간증을 듣고 집회에서 성령을 받기 위해서 참석했습니다. 그 당시 로버트 스미스 씨가 아내 헤나 스미스 여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여보, 이제 유럽은 내 발밑에 있습니다.” 로버트 스미스 씨는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인이 적혀 있는 사진을 집회에서 팔았는데 집회 첫날에 만 장 이상의 사진이 팔리면서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성령 부흥집회를 마친 얼마 후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문의 내용은 “로버트 스미스 씨가 어떤 여인과 간음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안수를 주고 방언을 하며 성령 충만에 대해서 설교하는 동안 어떤 여인과 육욕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하기로 했던 집회가 취소되었고 소문은 크게 확산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로버트 스미스 씨는 모든 집회 일정을 취소하고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헤나 스미스 여사의 마음에도 큰 상처가 있었지만 그녀는 남편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크게 좌절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급격하게 떨어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믿음을 의심하고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빈정거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믿음이 하늘을 찌를 것 같았는데 이제는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가 성령을 받았다고 고백한 증거는 어디로 갔습니까? 그의 믿음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의 정열적인 설교는 어디로 갔나요?

헤나 스미스 여사에게 맺힌 열매

남편과는 달리 아내에게는 늘 평안하고 아름다운 성령의 분위기가 지속되었습니다. 헤나 스미스 여사는 남편의 요동치는 신앙에도 불구하고, 늘 안정적이었고 하늘이 주는 평안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언제나 말씀을 살피고 붙잡고 사는 헤나 스미스 여사의 신앙은 흔들리거나 요동치지 않았습니다. 남편에게 역사한 영과 이상한 경험을 지켜보았던 헤나 스미스 여사는 자신의 저서, <행복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비밀>에서 참된 성령의 역사를 정확하게 설명했는데, 출판사에서 임의로 그 내용을 빼 버렸던 것입니다. 출판사는 왜 참된 성령의 역사를 삭제했을까요? 왜냐하면 그런 내용이 들어가면 책이 많은 사람에게 팔리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캐더린 마샬 여사는 백 년 전에 있었던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리스도인 신앙에서 감정과 이적을 추구하고 매달리는 위험에 대해서 지적했습니다. 헤나 스미스 여사의 신앙이 남편의 신앙보다 성서적이고 능력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접근법과 사탄의 접근법

성도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감정에 의지해서 신앙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감정을 자극하고 북돋기 위한 예배와 찬양과 기도를 드립니다.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예배가 아니라 “내 감정”을 만족시키고 “내 기분”을 좋게 하는 예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감정적으로 크게 끌어올렸다가 내동댕이칩니다. 그래서 더 깊은 허전함과 외로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한 번 감정의 구덩이에 내동댕이쳐진 사람은 더 큰 감정의 환희를 위해서 매달리게 되고 결국 사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사탄은 감정을 통해서 접근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성에 진리를 가르치심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 마음이 진리를 깨닫고 예언을 이해하면 놀라운 기쁨과 감격이 넘치게 됩니다. 감정을 느낀 다음에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달은 다음에 감정과 성품이 열매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그리스도의 사역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예수님의 사역 속에는 엄청난 파장과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 있는 놀라운 기적들이 있었습니다. 38년 된 앉은뱅이를 일으키셨고 죽은 자를 부활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는 쇼비지니스와 같은 과시가 없었습니다. 청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을 흩으시고 조용한 곳으로 피신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내일은 물 위를 걸을 테니까 모든 사람은 와서 내가 하는 것을 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왜 그렇게 사역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시선이 진리에 맞추어지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거 하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셨지만, 기적이 사람의 마음을 압도하지 않도록 절제하셨으며, 기적을 행하시는 그분의 최종적인 목적은 영혼들을 진리로 인도해서 죄와 세속에서 해방되어 거룩함에 이르게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령 부흥집회를 가 보면 상스러운 말이 나오고 욕설이 나오며 개그와 농담이 흘러나옵니다. 심지어 어떤 부흥 강사는 하얀 양복에 백구두를 싣고 연예인과 같은 모습을 연출합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에게 방언이 터지고 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안수를 주는 사람의 모습과 인격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요? 예수 그리스도와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일하는 현대 기독교회의 부흥 강사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교회 안에 다른 영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기적만 있으면 복음과 교리는 상관없다?

기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빠지는 가장 큰 위험은 성경 말씀보다 자신의 경험을 더 높은 곳에 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적을 따라가다가 이상한 복음과 거짓 교리를 만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방언과 초자연적인 경험만 할 수 있으면 복음과 교리는 어떠하든지 상관없다는 태도가 편만하게 퍼져 있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어느 경험이 중요한가?

성도 여러분, 전기 충격과 같은 뜨겁고 황홀한 감정보다 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경험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진리를 가르쳐 주고 인식시키는 역사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예수께서는 왜 성령을 “진리의 성령”이라고 부르셨을까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성령은 진리를 통해서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비성서적인 복음과 거짓 교리를 믿고 있으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기적과 은사가 정말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사탄의 미혹인지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성령께서 거짓 복음과 비성서적인 교리를 믿고 있으면서 의의 열매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기적과 은사를 주신다면, 사도 바울이 성령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미혹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주의하라고 경고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진리의 영과 거짓 영을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

예수께서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신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성경 말씀을 연구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진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갈급하고 목마른 심령으로 말씀을 읽을 때 성령께서 진리를 심령 속에 새겨 주십니다. 진리에 굴복하고 따라갈 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점점 더 밝은 빛으로 나가게 됩니다. 새로운 빛이 나타날 때 그것을 거절하지 않게 됩니다. 의인은 점점 더 밝은 빛을 향해 가게 됩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8~19). 성령께서는 진리를 받은 성도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새겨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마음과 생애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반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성령의 경험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참 성령의 역사

바울은 성령을 받은 사람은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여러분은 성령을 받고 방언했을 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었습니까? 성령을 받고 귀신을 쫓아냈을 때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경험을 했습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받았을 때 돈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졌습니까? 성령을 받았을 때 성령의 능력으로 교만과 이기심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습니까?

여러분 안에 정말 성령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만일 성령의 임재가 있다면 심령 속에 이런 경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7~9). 성도 여러분, 성령을 구하기 전에 성령에 대한 말씀을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사탄은 교회 안에서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흉내내는 거짓 성령을 나눠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과 사탄 중 누구의 편에 속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마음을 지배하는가? 우리의 생각이 누구에게 향해 있는가? 우리가 누구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는가? 우리가 갖고 있는 최고의 애정과 정열이 누구에게 가 있는가? 우리가 동쪽으로 가고 싶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그 말씀에 순종하겠는가?”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면 우리의 생각은 날마다 그리스도를 향해서 달려갈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우상을 던져서 깨뜨릴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소유를 그리스도께 바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품성을 반사할 것이며 그분의 뜻을 행하는 일에 지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사명> 이번 호에서 살펴본 하나님의 말씀이 독자 여러분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만족과 확신과 의의 경험을 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3부, 믿음과 감정을 구별해야만 진리가 보인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고민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배를 통해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기도하고 찬양할 때 뜨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뜨거움을 느끼는가가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기 원하는가?”입니다. “내가 정말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가기 원하는가?”입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두 무리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한 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무리는 ‘감정’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짐승의 권세가 성도를 핍박하는 환난이 오고 지상 최대의 미혹이 나타날 때 두 무리가 현저하게 나누어지게 될 것입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계 13:13~14)

사탄이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는 이적을 일으키면 어떻게 될까요? 지구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적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감정을 따라서 왔던 사람들은 모두 미혹당해서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최후에 있을 마지막 미혹을 위해서 오래전부터 교회 속에 감정을 중요시하는 신앙을 깊숙이 퍼뜨렸습니다.

 

감정을 따라가면 미혹당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감정을 따라가게 되는 이유는, 믿음과 감정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드릴 때, 기도할 때, 찬양할 때, 방언할 때 뜨거운 감정이 생기면 그것을 믿음으로 생각합니다. 정말 믿음은 그런 것일까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면 진리를 깨닫고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서 마음과 생애가 변화되고 영적인 안정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사탄의 미혹을 따라가면 외롭고 공허하며 부패한 삶을 살다가 사탄의 미혹에 빠져 멸망당하게 됩니다. 사탄은 감정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감정을 주고, 이적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적을 줍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미혹당한 사람이 겉으로 볼 때는 더 기쁘고 더 행복하고 하늘의 큰 권능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깊은 미혹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사람들도 감정과 이적을 따라간 사람들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오늘날 많은 사람이 황홀하고 뜨거운 감정을 느껴야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사탄이 일으키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이적에 미혹당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감정과 신앙을 혼돈하는 사람들에게 거짓 은사와 이적을 던져 주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감정을 뜨겁게 해 주고 그들이 마치 새로운 영적 세계를 경험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서 미혹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감정의 극치를 맛보게 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거짓 확신을 갖도록 유도합니다.

성도 여러분, 감정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변화와 거룩함이 아닙니다. 감정적 신앙으로는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며 의의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삶을 이끌어 가는 원칙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롭게 거듭난 생애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이적과 은사를 경험할 때는 뜨거움과 황홀함을 느낄지라도 실제 삶으로 돌아왔을 때는 여전히 습관적인 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여 깊은 낙담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분들은 감정이 높이 올라갔다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오르내림을 되풀이하면서, 감정의 요요 현상을 반복하게 되고 심리적 불안정과 우울증을 갖게 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탄에게 속은 것이며 또한 스스로의 감정에게 기만당한 것입니다.

이 시대는 미혹의 시대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혀 성령을 경험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성령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회개하지 않았고 말씀과 예언에 관심이 없으며 세상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도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감정을 따라가고 있는 증거

심령 부흥집회나 기도원에서 성령 안수를 받은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등이 뜨끈뜨끈했습니다! 눈앞에서 파란 불이 번쩍번쩍했어요!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나와서 온몸을 사로잡는 듯했습니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나도 모르게 방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병이 나은 것 같고 기분이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정말 황홀한 경험이었습니다!”

성령 체험은 감정의 극치가 아닙니다. 감정을 따라가는 사람의 신앙은 감정 이상으로 향상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닥치고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신앙은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변화된 마음이며, 자아와 교만이 깨어진 죽은 생애입니다. 세상을 미워하고 거룩한 것을 사모하면서 좁은 길을 걷는 삶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감정적 신앙을 가졌다는 증거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무시하고 내 뜻과 내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분명하게 밝히신 말씀을 알면서도 다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감정을 따라가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감정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나에게 방언을 주셨고 나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탄은 그런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이 원하는 능력과 감정을 주입시키면서 더 깊은 미혹으로 끌고 갑니다. 미혹에 빠진 사람들은 사탄의 농간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체험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넓은 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영적 경험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삶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믿음이 먼저이고 느낌이 나중이다

느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둘을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을 활용하는 대신에 자신에게 특별한 느낌이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믿음은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광경을 보고 흥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방언을 할 때 얻는 황홀함이 아닙니다. 믿음은 어떤 특별한 감정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먼저 오고 그것에 이어서 감정이 와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은 순종하지 않으면서 기쁘고 행복한 감정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 찬송과 기도를 통해서 뜨거운 감정을 얻으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왜냐하면 좁은 길을 걷고 싶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개인적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증거는 받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인의 감정은 믿음을 활용한 결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하고 전진하였을 때 영광스러운 감격과 감사의 정신을 축복으로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따라 좁은 길을 걷는 성도들 마음속에 기쁨과 확신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활용하지 않고 감정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려고 애쓰게 되면, 사탄이 개입할 수 있는 틈을 열어 주게 됩니다. 죄를 버리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서 기쁨과 행복을 느끼려고 애쓰면 사탄의 덫에 걸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감정과 느낌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회개와 믿음과 순종의 결과로 얻어지는 하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뜨거운 감정을 느낄 때에는 큰 믿음을 나타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믿음을 발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결핍을 느낄 때야말로 믿음을 활용해야 할 때입니다. 칠흙같이 어두운 구름이 마음을 덮을 때야말로, 우울한 느낌이 마음을 깊은 구덩이에 빠뜨릴 때야말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밝고 유쾌한 정신을 달라고 간구해야 할 때입니다.

 

성령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현대 기독교회는 성령을 뜨겁고 황홀하고 전기 충격과 같은 경험으로 소개하지만, 성경은 성령의 체험을 매우 조용한 경험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바람은 색깔이 없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분 결과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바람은 나무를 흔들리게 하고 풀잎을 움직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에 성령의 바람이 불면, 우리의 삶이 그 사실을 증명하게 됩니다. 우리 품성과 습관과 생활에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을 받기 이전과 이후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생기게 됩니다. 세상을 사랑하던 마음이 심하게 흔들려서 영생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도둑질하던 사람이 도둑질을 멈추게 되고, 더럽고 추한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 순결한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지루하게 생각하던 사람이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게 됩니다. 이런 변화가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의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을 받는 방법

허전하고 공허한 마음을 감정과 이적으로 채우려고 애쓰는 것은 위험합니다. 하나님을 느껴 보고 싶은 마음으로 은사와 기적을 구하다가 사탄의 덫에 걸려들 수 있습니다. 뜨거운 감정과 느낌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허망한 노력입니다. 마음에 욕심이 있고 교만으로 목이 곧은 상태에서는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세속과 이기심이 가득 차 있는 마음에는 성령께서 거할 수 없습니다.

먼저 주 앞에 나가 마음에 품고 있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애착심을 갖고 붙잡고 있는 것들을 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 나가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죄에 끌려다니는 처참한 삶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고,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느끼면,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랴”라는 절규가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면, 주 앞에 나가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영혼을 짓누르고 괴롭혔던 죄를 주 앞에 내려놓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성령의 은혜가 밀려오면서 육체의 정욕과 더러운 감정이 순결케 될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폭풍우가 예수님의 말씀에 잠잠해졌던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평온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속이 싫어지고 죄가 혐오스럽게 느껴지면서 그토록 버릴 수 없다고 생각되던 죄가 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바울의 설명은 매우 분명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성령)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9, 13~14)

성령의 지배를 받는 그리스도인은 성경 말씀과 계명을 무겁다고 생각하거나 불편하게 느끼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이런 말씀을 남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십자가를 바라본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과 사탄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큰 특권과 명예로 생각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요? 여기 분명한 대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 5:22). 성도 여러분, 정말 성령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왜 성령을 주시겠습니까?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종교는 초월과 기적을 통하여 자기 종교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자기가 믿는 신을 분명한 논리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의미 없는 주문이나 알 수 없는 기도문을 외우거나 주절거리는 의식을 하는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의식을 열심히 하면 신이 감동해서 복을 내리고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며 형벌을 면제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직접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 주시며, 성령을 통해서 끊임없이 인격적으로 접촉하셔서 대화하시며 설득하고 감동과 확신을 줍니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한 무리는 예수님의 능력에 관심을 갖고 추구하고 있으며, 다른 한 무리는 예수님의 품성을 닮기 원하며 갈망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나는 예수처럼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들이 예수께로부터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에 따라서 운명이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나는 예수처럼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5천 명을 먹이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갖고 계셨던 병 고치는 능력을 자신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방언의 능력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까지 갖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과 파워를 탐하는 정신이 오늘날 기독교회 속에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을 탐하면서 그분의 성품은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은 결코 그런 사람에게 능력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늘 가기를 원합니다. 불멸의 영원한 생명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가기 전에 하나님 곁에서 영원토록 살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하늘에 가서 놀라운 권세와 능력을 가지게 될지라도 결코 사탄(루스벨)처럼 교만하고 반역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어야 천국 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치며 봉사하고 방언할 때는 놀라운 하늘의 능력이 함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설교와 가르치는 일이 끝나고 봉사와 방언이 끝나면 마치 전기 스위치를 내리면 전기불이 나가는 것처럼 하늘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그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 속에 성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능력과 파워를 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없습니다. 회개하고 좁은 길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린양 예수를 끝까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고 느끼는 것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결국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

 

2부, 영적 전쟁을 알아야만 승리할 수 있다 – Part2

거듭남은 재창조의 경험이다

기독교회 안에 두 무리가 있습니다. 한 무리는 육체에 끌려다니면서 살고, 다른 무리는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삽니다. 여러분은 가정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니까? 아무도 여러분을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어떤 것을 보십니까? 만일 지옥과 형벌이 없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여전히 그리스도를 위해서 충성을 바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따라가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육체를 따라가기 원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고민에 대한 답으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어떻게 하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요? 거듭남은 창조의 경험일까요? 진화의 경험일까요?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는 경험과 조금씩 선을 계발해 가는 경험은 전혀 다른 경험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다시 태어나는 부활의 경험입니다. 내 힘과 내 의지와 내 훈련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경험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면 반드시 해야할 경험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어떻게 하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교만하고 이기적인 본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체면과 위선이 좀 더 완벽한 가면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독수리가 우리를 지배하는 한 희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독수리 같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비둘기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통해서 비둘기로 다시 태어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이 말씀처럼, 흑인이 피부를 하얗게 바꿀 수 없습니다. 표범이 그 얼룩 무늬를 변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절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악에 익숙한 독수리가 비둘기로 바뀔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재창조하시는 것입니다.

독수리를 길들여서 비둘기 흉내를 잘 낼 수 있도록 훈련하는 신앙으로는 결코 참된 구원을 경험할 수 없으며, 복음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참된 거듭남 없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완벽하게 위장된 위선 속에서 이웃과 가족을 속일 뿐 아니라, 결국에는 자신마저 기만하는 늪에 빠져서 죽어 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3~7).

 

독수리를 죽이는 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을까요? 유일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독수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왜 독수리가 죽어야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나를 주관하시려면, 독수리를 십자가형에 처해야 합니다. 이 경험이 이루어져야만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아름다운 삶이 가능해집니다. 독수리가 못 박혀야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팔 복이 내 속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을까요?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처럼, 독수리 같은 우리의 자아도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그래야만 날마다 죄에게 끌려다니는 노예의 삶을 청산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여 함이니”(롬 6:6)

우리 속에 있는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쉬운 경험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매우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내 속에서 독수리를 풀어서 기를 때에는 독수리와 내가 좋은 관계로 지내는데, 일단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하면 독수리는 처절하게 저항합니다. 그것이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성도들이 갖게 되는 경험입니다. 그러나 독수리가 원하는 대로 끌려다녀서는 결코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습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독수리를 내 힘으로 잡아서 못 박으려고 노력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적 신앙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적 신앙으로는 열심히 노력하고 처절하게 투쟁해도 남는 것이 패배와 낙망뿐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옛 사람과 자아를 죽일 수 없습니다! 우리 의지와 결심으로는 독수리를 결코 죽일 수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이기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쓴다고 할지라도 독수리는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으로 육체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어떻게 해야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을까요? 방법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독수리가 죽게 될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을 그분께서 대신 당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내가 받아야 할 저주와 정죄를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받고 돌아가셨다는 복음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심령 속에 말할 수 없는 감격과 은혜가 밀려오게 됩니다. 십자가를 알면 알수록 독수리는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사랑이 나를 압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순종의 생애로 이끌어 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5)

이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무엇을 강권할까요? 말씀에 순종하도록 강권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목적은 우리가 주의 말씀에 순종할 때 최종적으로 “온전케” 됩니다. 그것이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요일 2:5).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사랑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거룩한 사랑의 목적이 우리 속에서 순종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복음은 모두 거짓 복음이며, 완전한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막는 방해물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고 명상하면, 성령께서 내 마음을 “빚진 자”의 심령으로 바꾸어 줍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바울과 같은 간증을 하게 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롬 8:12).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사람은 육체의 정욕을 쳐서 복종시키고 그리스도께 죽도록 충성하고 싶은 거룩한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예수께서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고 싶은 소원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계 14:4).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세속적인 것들을 싫어하게 되고 말씀에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께서 누구이며 나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알면, 진실로 그것을 알면, 우리는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고 순종과 영생의 길로 들어가게 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6)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통해서 생긴 전격적인 변화는 재창조의 역사입니다. 이런 변화를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은 드디어 육체 속에서 올라오는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아무나 자아를 부인하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나가 새 마음을 받은 그리스도인만이 성결의 경험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리스도인은 온 마음을 다해서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제가 주의 뜻을 따르겠나이다.”라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성도들은 마음과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육체로부터 올라오는 독수리의 요구에 대해서 “안 돼!”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독수리가 점점 힘을 잃고 죽어 가게 됩니다. 그래서 전에는 감당할 수 없는 시험으로 느껴졌던 유혹이 이제는 별다른 유혹거리가 되지 않게 됩니다. 술과 담배에 인이 박힌 사람이 그것을 끊을 수 있게 됩니다. 습관적인 죄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이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게 됩니다.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 속에서는 독수리가 마음대로 활개를 치고 날아다니는데, 거듭난 그리스도인 속에서는 독수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독수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마음 보좌에는 예수께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위험한 오해와 분명한 진리

한 번 거듭났다고 해서 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독수리와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평생을 통하여 계속되는 전쟁입니다.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승리를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같은 위대한 그리스도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주의 말씀으로 내 영혼을 채우는 일을 게을리하면, 독수리는 다시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활개를 치게 됩니다. 거듭남의 경험을 잃어버리면 다시 독수리의 요구에 굴복하는 삶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중생을 경험했던 그리스도인도 다시 돈을 사랑하고 세상에 붙잡혀 살았던 옛 생애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거듭났다고 해서, 무조건 그 경험이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예수를 영접하고 거듭남을 경험했던 사람들 중 수많은 사람들이 세속으로 돌아가 멸망당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빌리 그레헴 목사는 그 점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 중 5%라도 천국에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래전부터 사탄은 수많은 사람들의 귀를 사로 잡는 마술 같은 복음을 퍼트리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한 번 예수를 영접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정죄하지 않으신다. 한 번 구원받으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버릴 수 있는가?”라는 식의 가르침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비록 내 마음과 삶에 탐욕과 죄가 있을지라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이 모든 죄를 덮어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물론 그리스도의 피가 회개하는 성도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상한 심령으로 죄를 회개하는 성도들, 주 앞에 나가 죄를 버리는 성도들을 덮어 주고 보호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죄를 붙잡고 있는 자들에 대한 구원의 약속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날마다 유지되고 지켜져야 합니다. 어제 구원받았다고 할지라도, 오늘 내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거절하고 돌아서면, 구원은 더 이상 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주의 깊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15, 20~22)

성경은 누가 천국에 들어갈 것인지를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계 21:17). 구원은 과거에 이루어진 한순간의 결정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 좁은 문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후에도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계속 성장해 나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를 성장시키는 과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1~14)

얼마나 분명한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한 번 거듭났다고 할지라도, 육체로부터 올라오는 독수리의 요구를 계속해서 거절하는 신앙이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는 신앙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유혹이 죄가 되는 과정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에 대한 유혹과 충동을 느낄까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거듭남을 경험한 후일지라도 독수리의 요구는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독수리가 악하고 이기적으로 살라고 충동질할지라도, 놀라거나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유혹과 충동을 느끼는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새가 머리 위에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지만, 머리 위에 앉아서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탄이 유혹과 시험을 우리에게 던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우리가 그것을 붙잡고 따라가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이 유혹을 받아서 죄를 범하고 결국에는 멸망에 이르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3단계로 설명했습니다.

“1)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2)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3)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첫 번째 단계는, 시험을 받는 단계입니다 –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마음이 시험을 받으면 “욕심에 끌리는”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유혹을 느끼고 충동을 받는 것 자체는 아직 죄가 아닙니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닙니다. 독수리가 내 속에서 악한 것을 달라고 소리를 치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혹이 와서 욕심에 끌려감을 인식할 때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 나아가 도움을 간구하지 않으면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욕심을 마음에 품기로 결정하는 단계입니다 –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유혹을 느끼고 충동을 느낄 때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독수리가 주는 충동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면 그때 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새가 머리 위에 앉아서 둥지를 트는데도 그것을 방치하거나 즐기고 있으면 “욕심을 잉태해서 죄를 낳”게 됩니다. 시험을 받고 육체로부터 꿈틀거리는 충동이 올라오는데 우리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고 정욕과 욕심을 품으면, 비록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을지라도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여자를 보는 것이 죄가 아니라 육체에서 올라오는 음욕을 마음에 품기로 결정하는 것이 죄입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져서 죄를 범한 영혼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죄를 범한 영혼은 상한 심령으로 주 앞에 나가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데,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프게 느껴져야 합니다. 죄를 버리고 애통해 하는 참된 회개의 경험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죄는 세 번째 단계로 성장하게 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죄가 성장하는 단계입니다 –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을 품고 죄를 범했는데 회개하지 않으면, 죄는 그 상태에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죄는 점점 더 그 영향력을 키워 나가게 됩니다. 머리 위에서 새가 둥지를 틀면, 그 속에 알을 낳고 새끼를 받아 키우게 됩니다. 일단 독수리의 요구에 굴복해서 따라가기 시작하면 나를 멸망의 계곡까지 끌고 갑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고 죄를 키우고 성장시켜 온 영혼에게는 전격적인 굴복과 회개가 필요합니다. “주여, 저를 용서하시고 살려 주시옵소서. 이 죄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시옵소서. 도와주시옵소서! 죄로 인해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시고 더러운 양심을 씻어 주시옵소서. 저에게 상한 심령을 주시고 정결한 마음을 회복시켜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죄를 성장시켜 온 사람은 금식과 말씀으로 영혼을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인가? 독수리인가?

그리스도인의 마음 이쪽에는 십자가가 있고, 저쪽에는 마음의 보좌가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보좌에 그리스도를 모시면 옛 사람, 즉 독수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시험과 유혹이 왔을 때 우리가 예수께 나가 “주여, 제 마음의 보좌에 앉으셔서 저를 주관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독수리에 대해서는 “안 돼.”라고 거절하면, 바로 그것이 죄에 대한 승리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이 “나는 예수님을 믿고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독수리의 요구에 대해서도 “예.”라고 대답합니다. 십자가에는 어떤 것도 못 박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고 싶어 하지도 않지만, 독수리 역시 못 박아 죽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 상태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의 모습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마음속에 독수리와 예수님을 함께 모시고 살기 원합니다. 교회 가서는 예수님을 섬기고, 세상에 나와서는 독수리가 원하는 요구를 따라 살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못 박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독수리의 요구에 굴복하면, 그리스도의 가슴에 못 박는 죄를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 보좌에 예수님을 모시고 육체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구원받은 성도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계명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매우 논리적인 독수리의 요구

십자가에 못 박힌 독수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자신을 놓아 달라고 소리치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못 박힌 독수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요구하며 자신이 원하는 곳에 가라고 부르짖고 자신이 원하는 죄를 범하라고 졸라 댑니다. 자신의 날개와 발에 박힌 못을 빼 달라고 애원하면서 이렇게 우리를 설득합니다. “나를 풀어 주세요! 잠시 풀어 놨다가 다음 주에 다시 못 박아도 되잖아요!” 못 박힌 독수리는 항상 논리적으로 우리를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독수리의 논리에 휘말리면 안 됩니다. 단호하게 “안 돼.”라고 거절해야 합니다.

단호하지 않으면, 오늘은 독수리를 못 박았다가 내일은 풀어주는 생활을 되풀이하면서, 죄의 노예로 끌려다니는 곤고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독수리의 논리에 말려들면, “내일이면 또 독수리를 풀어줄 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중단하게 됩니다. “어차피 다시 풀어줄텐데 독수리를 구태여 힘들게 못 박을 필요가 어디 있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죄의 노예로 돌아가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중단하는 순간 독수리와 죄의 종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정쩡한 모습으로 독수리에게 끌려다닙니다. “독수리야, 안 돼! 나는 그 사람에게 복수하기 싫어.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그 사람을 괴롭힐 수는 있지. 독수리야, 나는 결코 네가 원하는 대로 그 사람의 뺨을 치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약점을 건드리고 괴롭힐 수는 있어.”

 

“죽는다”는 말의 의미

죽음에 대한 바울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여기서 우리는 “여길지어다(consider)”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죽은 것으로 여길지어다”라는 말에는 “죽은 것으로 간주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아마 어떤 분은 이렇게 항의할 것입니다. “좀 전에는 죽었다고 말했는데, 이제는 죽지 않았지만 죽은 것으로 ‘여기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직 살아 있지만, 죽은 것으로 취급하라는 것이 바울의 말씀입니다.

독수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 그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는 의미에서 죽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해서 육체가 어떤 것도 요구하지 못하거나 부르짖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속에 독수리가 항상 있다는 사실을 알면 영적 교만에 빠질 수 없으며 한순간이라도 주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한 물 위를 걸을 수 있지만, 우리 시선을 세상으로 돌리는 순간 물에 빠져서 독수리에게 끌려다니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주님께 복종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날마다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고 말씀을 먹지 않으면 독수리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나를 압박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내 속에서 냄새를 피우고 소리를 지르는 악한 독수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내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독수리의 추한 모습을 보면 내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미워하며 불신하게 됩니다. 나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 알수록 그리스도께 더욱더 가까이 가게 됩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리라” 라는 약속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진짜 복음입니다.

 

어떤 새를 기르기 원하는가?

우리는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비둘기 같은 성령의 음성과 독수리의 요구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한 음성에 순종하면, 다른 하나는 거절하게 됩니다. 순종의 종이 아니면 죄의 종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성도 여러분, 우리 속에 두 마리의 새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를 상징하는 독수리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역사를 상징하는 비둘기입니다. 만약 우리가 비둘기를 사랑하고 키우기 원한다면, 우리는 비둘기에게만 먹이를 주어야 합니다. 독수리는 굶겨야 합니다. 우리는 독수리와 비둘기에게 똑같은 먹이를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둘기는 죽은 시체나 썩은 고기는 전혀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루를 사는 동안에 어떤 먹이를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세상에 있는 각종 썩은 것들을 즐긴다면, 텔레비전이나 각종 책과 잡지에 있는 더럽고 추악한 사상을 받아 먹는다면, 독수리는 이렇게 소리지를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기다리고 원하던 것이야! 좀 더 자극적이고 더러운 것들로 나를 즐겁게 해 줘!” 독수리가 원하는 먹이를 먹여 주면 어떻게 될까요? 독수리는 점점 더 강한 힘으로 우리를 죄로 끌고 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힘없이 독수리의 요구에 굴복하여 끌려다니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은 무기력과 낙담과 좌절로 물들어 가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독수리와 비둘기는 우리가 주는 먹이에 비례하여 성장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예수 믿는 자를 결코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복음을 먹으면,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 독수리가 좋아하는 먹이를 마음과 생각에 가득 채우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한 번 예수를 믿고 영접했으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복음을 받아들이면, 독수리가 마음대로 활개치도록 풀어 놓을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도 “나는 구원받았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왜 이렇게 날마다 독수리에게 굴복할까? 예수를 믿고 영접했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될까?”라는 고민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승리를 원하면 비둘기가 원하는 것들로 마음과 생애를 채워야 합니다. 승리를 원하면 승리를 주는 복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참된 회개만이 독수리를 못 박아서 가두어 놓을 수 있습니다. 온 마음과 생애를 그리스도께 바치는 자만이 독수리를 단단하게 못 박을 수 있습니다. 비록 독수리가 못 박히고 갖힌 채로 원하는 것을 달라고 부르짖을지라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독수리를 죽은 것으로 여기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힘차게 살아가십시오. 독수리의 요구를 무시하고, 비둘기 같은 성령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렇게 하면 독수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피를 흘리면서 죽어 갈 것입니다. 힘을 잃고 죽어 가는 독수리의 절규와 애원을 추호도 동정하지 마십시오. 독수리가 죽어 갈수록 성도의 신앙은 하늘 높이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죄가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고…너희 지체를…하나님께 드려라”(롬 6:12~13). 성도 여러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 속에 계신 비둘기 같은 성령을 강화시켜 나가기를 바랍니다. 독수리는 십자가 형에 처하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수 있도록 믿음으로 전진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드도립니다.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가를 모르면 결코 바벨론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현대 기독교회 안에 수많은 복음이 있지만 참된 복음만이 여러분의 삶에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참된 복음만이 죄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져다줄 수 있는데, 그것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드는 복음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 1:8).

 

십자가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십자가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그리스도께 점점 더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그리스도께 더욱더 순수한 애정과 믿음을 바치게 되고 결국 우리의 마음과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지점까지 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반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 판단, 계획, 말이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됩니다. 누가 우리에게 와서 “당신은 왜 이렇게 사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제 영혼을 위해서 보혈을 흘리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마다 거룩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

 

1부, 영적 전쟁을 이해하면 복음이 보인다 – Part1

현대 기독교회는 변화의 경험을 잃어버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고민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년 동안 기다려온 방언의 은사를 받고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변화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였고, 미워하던 사람을 여전히 미워했습니다. 분명히 성령의 큰 역사를 받았는데, 왜 내 마음과 감정과 삶은 변화되지 않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내가 정말 성령을 받은 것일까요? 정말 구원을 받은 것일까요? 왜 교회에 가면 믿음이 하늘 높이 올라가는 것 같은데, 집에 돌아 오면 냉랭한 생활이 반복되는 것일까요? 왜 아직도 경쟁과 시기에 끌려다니며, 왜 세상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나를 끌고 다니는 것일까요? 왜 세속적인 일들이 재미있는 것일까요? 왜 양심의 소리가 자꾸 나를 책망할까요?”

예수를 영접하고 방언까지 하는데 왜 세상 욕심과 정욕에 끌려다니게 될까요? 사도 요한의 말씀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4~5)

사도 요한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만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예수를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길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얼마나 확신에 찬 말씀입니까? 그런데 왜 이런 경험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까요? 왜냐하면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에 대한 말씀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사라지면서 이 세상과 죄로부터 구원받는 실제적인 경험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전쟁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처럼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마음속에 무엇이 있길래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을까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바울과 같은 간증을 하려면, 우리도 날마다 죽는 경험을 해야 하는데, 날마다 죽는 경험이란 어떤 것일까요? 다음 말씀은 우리에게 어둠 속을 비추는 등대와 같은 빛을 줍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범하려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회개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죄에 대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려 싸우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싸움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마음속에서 성령과 육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쉼이 없는 투쟁인데,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한 곳은 바로 여기이다.”(Messages to Youth, 114)

 

이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범하려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예수 믿고 거듭나면 더 이상 유혹도 받지 않고 마음속에 올라오는 충동도 없어지게 될까요?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구원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침례”를 받는 순간에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며 버림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 3:21).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영화로운 몸을 주실 때까지 성도들은 유혹에 시달리고 육체로부터 올라오는 악한 충동과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전쟁은 무엇과 무엇이 싸우는 전쟁일까요?

 

2) “회개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죄에 대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려 싸우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싸움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

영적 전쟁은 무엇과 무엇의 전쟁이라고 했습니까? 바울은 날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고 한 말씀은 날마다 육체의 소욕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기적이고 악한 육체의 욕구가 어떻게 죽게 될까요? 이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 전쟁은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 치열한 전쟁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롬 8:13). 바울은 이 전쟁에서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승리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바울은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만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승리의 비결은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여기서 “옛 사람”이란, 우리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악하고 교만한 본성을 말하는데, 우리는 이 글에서 옛 사람의 소욕을 편의상 “독수리”라고 표현하겠습니다(옛 사람=죄의 몸=육체의 소욕=”독수리”). 옛 사람, 즉 독수리는 내 속에 있는 악한 본성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옛 사람(독수리)을 결코 죽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육체로부터 악한 충동이 올라와서 나를 죄로 끌고가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3) “마음속에서 성령과 육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쉼이 없는 투쟁인데,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한 곳은 바로 여기이다.”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한 곳은 바로 여기이다.”라고 했는데 “바로 여기”가 어딜까요? 우리가 시험과 유혹을 만날 때입니다. 시험이 없고 모든 일이 잘 풀릴 때는 평안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일단 시련과 유혹이 오면, 우리 마음속에서 육체의 소욕(독수리)과 성령이 다투기 시작합니다. 그 전쟁은 둘 중 하나가 패배해야만 끝나는 전쟁입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은 서로 우리를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시험과 유혹이 오면, 독수리 같은 육체가 꿈틀거리면서 죄를 범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더럽고 추한 욕망이 올라옵니다. 내 속에 있는 독수리 같은 육체가 “원수를 미워하라.”고 외치고, “복수하라.”고 소리칩니다. “더 많이 욕심을 내라.”고 유혹합니다. 바로 그때 마음의 저쪽 반대편에서 비둘기 같은 성령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욕심을 내려놓아라. 의의 길을 걸어야 한다. 좁은 길을 택해야 한다. 진리를 붙잡아야 한다.” 시험과 유혹 앞에서 성령과 육체가 “대적”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음성을 듣게 되는데, 바로 그때가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 도우심을 구할 때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는 도무지 육체로부터 올라오는 악한 욕망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더 이상 내 힘으로 독수리 같은 본성과 싸우는 전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새 언약하에 사는 성도, 은혜 아래 거하는 그리스도인은 스스로의 힘으로 싸우는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싸우는 전쟁은 결국 나를 패배와 좌절과 낙망으로 이끌어 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5). 유혹과 시험 앞에서 두 음성이 들려올 때, 우리는 죄의 종이 되든지 순종의 종이 되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우리 속에서 전쟁이 벌어질 때 우리는 죄의 종이 되든지, 순종의 종이 되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전쟁이 벌어질 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독수리의 요구를 뿌리치고 성령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시험받을 때 무릎을 꿇고 예수께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늘 성소에 계시는 예수께 나아가 성령의 음성을 붙잡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음성에 굴복할 수 있도록, 능력을 달라고 손을 뻗어야 합니다. 문둥병자가 주님을 향해서 손을 뻗듯이 온 마음을 다해서, 절박한 심령으로 하늘의 은혜와 능력을 달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거절하고 순종의 종으로 인도해 달라고 간구하는 성도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능력을 간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나가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 시험과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은 옛 언약의 신앙이고 하늘 아버지 없이 혼자 싸우게 되어 쓰라린 패배와 낙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때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은혜로운 심령으로 바뀌게 됩니다. 교만하고 이기적인 마음이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가난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그렇게 얄밉고 미운 사람이 불쌍하게 보이게 됩니다. 그렇게 떨치지 못했던 욕심이 힘을 잃고 사라지게 됩니다. 무거운 멍에로 느껴지던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런 마음속에서는 독수리(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육체 속에서 올라오는 죄의 광풍이 “잠잠하라 고요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고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이것이 날마다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성화의 과정입니다.

 

독수리는 비둘기처럼 살 수 없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 15:18~20)

외적으로 나타나는 열매의 근원은 마음입니다. 마음을 누가 지배하는가에 따라 열매가 달라집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면 자연스럽게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나 사납고 비열하며 이기적인 육체가 마음을 지배하면, 독수리와 같은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원은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입니다. 독수리를 죽이려면 먼저 독수리를 잡아야 하는데, 독수리의 본성을 잘 이해해야만 그것을 잡을 수 있습니다. 독수리를 잡기 위해서는 먼저 독수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독수리가 죽은 시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독수리는 비둘기 같으면 전혀 관심도 갖지 않고 지나쳐 버릴 죽은 송장에게 침을 흘리며 달려듭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독수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독수리는 무엇이든지 썩은 것을 좋아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신선한 과일이나 야채나 곡식보다는 피 흘리고 냄새가 나는 죽은 시체를 좋아합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독수리를 잘 길들여서 온순한 새로 변화시키려고 훈련시켰습니다. 그는 먼저 독수리가 들어갈 만한 커다란 새장을 만들어서 그 속에 독수리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독수리의 입맛을 변화시키려고 날마다 사과, 오렌지, 바나나 등을 주었습니다. 독수리는 여러 주일 동안 주인이 주는 대로 잘 받아먹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장 문이 열려져 있는 틈을 타서 재빨리 날라가 버렸습니다. 독수리는 하늘 높은 곳에 떠 있다가, 도로에서 차에 치어 쓰러져 노루를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내려가 작고 빨간 혀를 날름거리면서 맛있게 뜯어먹었습니다. 주인은 독수리를 위하여 훨씬 더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주려고 했지만, 독수리는 자신의 옛 습관과 취향을 결코 바꾸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독수리는 태어날 때부터 더럽고 냄새나고 썩은 것을 좋아하는 새이기 때문입니다.

 

비둘기가 되어야 비둘기처럼 살 수 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속에 독수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있는 독수리 같은 육체의 본성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동안 비둘기와 함께 먹이통 곁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비둘기와 함께 모이를 먹고 비둘기의 행동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우리를 지켜보지 않거나, 누군가가 우리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면, 독수리의 근성을 나타내면서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를 들이댑니다. 육체가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도 평안할 때는 비둘기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시험과 유혹이 오면 독수리의 악함을 여지없이 드러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주셨던 경고입니다. “네가 진정으로 회개하여 거듭나지 않으면, 너는 네 속에 있는 독수리에 의해서 처절하게 쓰러지게 될 것이야. 그러므로 너는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곧 큰 시험이 온다. 너는 깨어 있어야 해!” 주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걱정하지 마옵소서. 다른 사람이 모두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오자,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주님께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베드로는 정말 주님을 끝까지 따르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 속에 숨어 있는 독수리의 참모습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영적 형편을 알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알고 있습니까? 독수리가 못 박혀야만 베드로와 같은 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고 설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육체를 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합니까? 독수리를 죽이면 인생이 너무 재미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바보 취급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옛 사람과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대신, 자기 안에 있는 선한 것을 조금씩 훈련시키고 계발시켜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합니다. “여기를 뜯어고치고 저기를 메꾸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진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자신을 위로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하고 이기적인 존재야. 비록 우리가 예수를 믿을지라도 악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한 거야. 우리는 타고난 대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어.”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는 이런 말에 여러분도 동의하십니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실제적인 방법이 2부에서 다루어집니다. ■

 

서론, 지금이 중요한 시기입니다!

마지막 시대는 미혹의 시대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말세에 거짓 복음과 거짓 가르침을 교회 안에 허락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1,12)

이 말씀은 정말 이상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신자들이 거짓 가르침을 믿도록 허락하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유혹을…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도록 허락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가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이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진리를 믿지 않고, 누가 불의를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탄이 교회 안에 던져 놓은 거짓 복음과 거짓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있는 것들이 드러나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 드러나야만 우리가 주 앞에 나가 고침받을 수 있으며, 고침을 받아야만 그리스도의 재림 때 알곡으로 추수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데, 심판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있는 것들을 드러내고 고침 받도록 도와주는 과정입니다. 세상 법원에서 무죄와 유죄를 결정하기 전에 충분한 조사와 심리가 진행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문제를 알려 주고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심판 과정을 거치십니다. 심판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열 처녀의 비유가 우리의 경험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어떤 성도들은 “슬기로운 처녀”로 준비되어 가고 어떤 사람들은 “미련한 처녀”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은 온갖 시험과 거짓 가르침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 동안 성도들은 반드시 진리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진리를 찾아야만 진리로 변화되어 알곡으로 익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험에 쓰러지고 세상을 사랑해서 거짓 가르침을 선택함으로써 가라지로 익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알곡과 가라지로 나누어지는 시기입니다. “짐승”이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시기가 오면, 알곡으로 익은 성도들은 “짐승의 표”를 거절할 것이고 마음이 가라지로 덮혀 있는 사람들은 짐승의 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환난이 오면 온 세상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받을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순교자가 생길 것이며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온 세상이 의인과 악인으로 정확하게 나누어지게 되면서 지구에 주어진 은혜의 시기가 마쳐지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먼저 은혜의 시기가 끝나고 그다음에 예수께서 오실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1~12).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허락하신 은혜의 기간이 끝나면 요한계시록 16장에 예언된 7재앙이 하늘로부터 내리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일곱째 재앙이 내릴 때 예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이 땅에 오셔서 의인과 악인에게 보상과 형벌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재강림하셔서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로 나누시고 구원받을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멸망받을 자들에게 멸망의 형벌을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심판과 예언의 시간표를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

심판의 과정은 기회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이 중요한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유혹과 거짓 가르침을 통해서 알곡과 가라지로 나누어지는 심판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과정은 우리 마음을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드러내는 과정이 지금 진행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거짓”을 가르칠 때 우리 마음이 그것을 좋아하고 원하면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미워하고 거룩한 것을 사모하면, 참되고 순결한 것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불의와 세속적인 것을 좋아하면 거짓 성령과 거짓 복음을 붙잡게 될 것입니다. 내 마음이 돈과 세상을 사랑하면, 쉽게 구원받고 마음대로 살아도 구원을 약속해 주는 “이상한 설교”를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진리를 싫어하고 불의를 좋아하면 결국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을 미워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내 마음에 있는 모든 것들이 드러나서 멸망당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심판의 과정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은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알곡과 가라지로 나누어지는 때입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의를 사모하는 성도들은 참된 복음을 받아들이고 알곡으로 익어 갈 것이고, 불의를 좋아해서 그것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가라지로 익어 가게 됩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사탄이 던지는 미혹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심판의 시기인 동시에 기회의 시간입니다.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알곡으로 익어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아야 한다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1).

천사가 보여 준 마지막 교회의 모습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도 요한이 계시를 통해서 본 마지막 시대 교회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얼마나 참담한 모습입니까? 우리 눈에는 현대 기독교회가 멋진 건물에서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천사의 눈에는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귀신의 처소이고,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이며,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사명>이 현대 기독교회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사도 요한이 기록한 마지막 시대 교회에 대한 예언을 읽었을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 상태를 묘사할 때마다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을 말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5~17)

성도 여러분,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마음과 생애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복음이 빠져 있는 교회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 마음과 생애를 바치도록 호소하는 설교가 빠져 있는 교회입니다. 겉으로는 방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충성하지 않는 교회가 지금 이 시대의 교회입니다. 사탄은 이런 교회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귀신과 더러운 영들이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이 시대는 예수께서 주신 다음과 같은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doctrine, 교리)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은 말씀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내가 믿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내 스스로의 생각으로 믿고 따라가는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만 내 경험이 그것을 따라가게 됩니다. 진리를 붙잡아야만 알곡으로 익어 갈 수 있습니다. 심령의 중심에 진리를 찾아서 순종하고자 믿음을 가지고 간절하고 열렬한 심령으로 기도하며 말씀을 상고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마지막 시대 성도들이 진리를 찾지 못하는 이유와 진리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가르침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영혼들은 이번 호를 통해서 진리로 가는 분명한 빛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빠져나가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

19호를 시작하며…

중세기에는 참 복음과 거짓 복음이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지역에 따라서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럽 대도시의 교회들에서는 신부와 사제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게 했고 거짓 복음과 거짓 계명을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태양신과 이교의 가르침이 카톨릭교회 속으로 깊이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카톨릭교회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교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깊은 산과 계곡에 숨어서 진리를 탐구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카톨릭교회의 핍박 때문에 알프스 깊은 산과 피에몽 골짜기로 피신했던 광야 교회에서는 성경의 진리를 보존하며 순수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중세기의 성도들은 카톨릭교회와 광야 교회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대도시의 편리한 삶과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면서 카톨릭교회에 소속되어 거짓 복음을 듣든지, 아니면 세상 쾌락과 사회적 지위를 포기하고 광야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희생”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중세기 종교암흑기에는 참 복음과 거짓 복음을 눈으로 구별하기가 쉬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은 전혀 다른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진리와 거짓 복음이 섞여 있는 시대입니다. 수백 개의 교파들이 저마다 다른 교리와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같은 교파일지라도 목회자가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참된 복음을 찾을 수 있을까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영적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유튜브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온라인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매주 유튜브에 올라오는 수백 개의 설교들 속에서 거짓 복음과 참된 복음이 섞여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마지막 시대는 성도 스스로 진리를 찾아내고 스스로 복음을 경험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마지막 시대는 교파나 인간을 의지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성도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고 분별해야 할까요? 어떤 경험이 참된 복음의 경험일까요? <마지막 사명>에서는 이번 호에서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했습니다. 이번 호를 읽으시는 동안 부디, 여러분의 영적 눈이 열리고 말씀을 듣고 판단할 수 있는 귀를 갖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온 마음과 생애를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성도들은 주께서 인도하는 길을 끝까지 걷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계 14:4). ■

<마지막 사명 편집장